이태준기념사업회(이사장 임종헌)에서 주최한 '2016 이태준을 찾아가는 철원문학기행'을 마치고 철원(鐵原)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기로 했다. 내가 사는 충청북도 충주에서 강원도 철원까지는 거리가 좀 먼 편이어서 자주 오기가 어렵다. 그래서 철원에 온 김에 이 지역의 역사유적과 명승지를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철원은 서울에서 원산까지 이어지는 추가령지구대(楸家嶺地溝帶)의 일부로 동쪽으로 양구군, 북쪽으로 평강군과 김화군, 남쪽으로 화천군과 포천시, 서쪽으로 연천군과 접한다. 군화는 철쭉, 군목은 잣나무, 군조는 두루미이다.
철원군의 한가운데를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한탄강(漢灘江)이 흐른다. 한탄강은 금강산 아래 철령에서 발원해 평강, 철원을 거쳐 136㎞를 흘러 연천군 전곡리에서 임진강에 합류한다. 한탄강을 중심으로 북서부는 평야지역, 남동부는 산악지대로 구분된다.
해발고도 200∼500m의 평탄 지형인 북서부 평야지대는 신생대 제4기 홍적세에 열하분출(裂罅噴出, fissure eruption)한 현무암이 기존 하곡 위를 흘러내려 형성된 철원, 평강 용암대지의 일부이다. 현무암질 용암의 말단부는 임진강(臨津江)의 고랑포(高浪浦)까지 이른다. 한탄강 기슭에는 주상절리(柱狀節理)와 수직단애(垂直斷崖)가 발달되어 절경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질학적 가치도 매우 높다.
철원군의 남동부 대성산-복주산-화목봉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은 화천군과의 경계선을 이룬다. 이들 산들은 해발고도 1,000m가 넘는 고봉준령들이다. 한북정맥 서사면의 물은 남대천과 한탄강을 이루고 남서류하여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철원이 고구려 영토였을 때는 철원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 신라 경덕왕 때는 철성군(鐵城郡)이라 불렀다. 901년 궁예(弓裔)는 고구려의 옛땅에 태봉(泰封)을 건국하고 철원에 도읍했다. 918년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은 지금의 개성인 송악(松嶽)에 도읍하고, 이곳을 왕도인 송악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주(東州)라고 불렀다. 1310년고려 충선왕은 동주를 철원부(鐵原府)로 만들었고, 1434년 조선 세종은 철원을 경기도에서 떼어 강원도에 소속시켰으며, 1895년부터 철원군이 되었다.
추가령지구대 구조곡(構造谷)을 따라 1914년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京元線) 철도가 놓이면서 철원역은 경원남북로와 서울-금강산을 잇는 중요한 교차점이었다. 1936년에는 철원역에서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를 지나 원산까지 연결하는 전철이 개통되어 철원은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경원선 철도는 남북 분단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월정리역(月井里驛)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어 분단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철원은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철의 삼각지대로 유명한 곳이다. 태봉의 도읍지인 구철원(舊鐵原)은 대부분 민통선과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가 있고, 철원군청 등 대부분의 관공서들은 현재 갈말읍 신철원(新鐵原)에 있다. 민통선 이북 지역에는 주민이 살지 않고, 농사철에만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곳곳에 설치된 민통선 검문소에는 총 든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어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철원 한탄강변에는 신라 진평왕이 노닐었고, 임꺽정의 활동무대였다는 고석정(孤石亭)을 비롯해서 순담계곡(蓴潭溪谷), 직탕폭포(直湯瀑布) 등이 있고, 용봉산(龍峰山, 374m) 중턱에는 겸재 정선이 금강산 가는 길에 절경에 매료되어 진경산수화를 남겼다는 삼부연폭포(三釜淵瀑布)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국보와 보물로 각각 지정된 철불과 삼층석탑으로 유명한 화개산(花開山) 도피안사(到彼岸寺), 갈말읍 토성리에는 선사인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철원지석묘군(鐵原支石墓群)과 철원토성및석조물(鐵原土城─石造物)이 있다.
분단의 아픔이 서려 있는 근현대사 사적지에는 철원읍 관전리 노동당사(勞動黨舍), 철원읍 산명리 백마고지(白馬高地) 전적지(戰跡地), 남북 합작으로 건설한 다리인 승일교(承日橋),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월정리역(月井里驛), 김화읍 도창리 금강선 끊어진 철길 등이 있다. 동송읍 중강리 철원평화전망대, 근동면 광삼리 승리전망대, 철원읍 홍원리 월정리전망대, 원남면 주파리 칠성전망대에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녘 땅을 바라볼 수 있다. 동송읍 이길리에는 안보견학지 제2땅굴이 있다. 철원평야는 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2호)와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3호) 등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철원에는 철원팔경 또는 구철원팔경이 있다. 철원팔경은 용이 승천하며 생겼다는 삼부연폭포, 궁예가 피신한 명성산(鳴聲山, 923m), 임꺽정이 무예를 닦은 고석정, 746년(신라 경덕왕 5)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도피안사, 궁예가 궁전을 짓고 성을 쌓은 풍천원(楓川原)의 궁예도성, 김응하(金應河)가 수련한 칠만암(七萬岩), 신라 진덕여왕때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영원사(靈源寺)와 법화사(法華寺), 흥림사(興林寺), 도리사(忉利寺) 등 4대 사찰을 창건하고 1,602위의 불상을 봉안했던 보개산(寶蓋山, 877m), 마산치(馬山峙) 등이다. 마산치는 북한지역, 보개산은 포천시에 속하므로 이들 대신 순담계곡과 직탕폭포를 넣어 신철원팔경이라고 한다.
철원 여행의 첫 순서로 이씨 조선왕조를 타도하기 위해 봉기한 혁명가 임꺽정(林巨正)의 활동무대였던 동송읍 장흥리 한탄강변의 고석정을 찾았다. 고석정 국민관광단지에는 철의삼각전적관이 세워져 있었다.
철의삼각전적관
철의삼각전적관은 1985년 철원군과 국군이 협력하여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건립한 안보교육장이다. 전적관 광장에는 한국전쟁 당시 사용했던 155mm 평사포를 비롯해서 탱크, 전투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전쟁 당시 철의 삼각지대에서는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철의 삼각지대란 철원과 김화를 저변으로, 평강을 정점으로 한 삼각지대의 군사적인 호칭이다. 이 지대는 신고산-평강으로 이어진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는 경원선과 5번국도가 철원-연천-의정부-서울, 김화-포천-의정부-서울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조선인민군(인민군)과 중국인민해방군(중국군)은 나진과 성진, 원산항에 내린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지대에 집결시킨 뒤 전선에 투입했다. 당시 이 지대는 북한과 중국 연합군 최대의 중간 보급기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대를 '철의 삼각(Iron Triangle)'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철의 삼각지대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작전들이 여기서 펼쳐졌다. 그 중에서도 쌍방간의 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중요 전투에는 파일드라이버(Pile Driver)작전, 백마고지전투, 저격능선전투 등이 있다.
파일드라이버작전은 1951년 5월 27일부터 6월 20일까지 전개되었다. 1951년 4월 5일 중국군의 2차에 걸친 춘계 공세를 격퇴한 남한과 유엔(UN) 연합군은 철원-김화-양구-간성을 연결하는 선으로 진격했다. 진격작전에서 국군 제3사단과 제9사단은 6월 11일과 12일에 철원, 미 제25사단은 김화를 점령하고, 13일에는 미 제3사단이 평강에 진격했다가 철수했다. 파일드라이버작전 이후 어느 쪽 철의 삼각지대 전체를 장악할 수 없게 되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한국전쟁 기간 중 가장 치열한 전초 거점 쟁탈전이었다. 1952년 10월 백마고지에 방어선을 친 국군 제9사단은 중국군 제38군을 맞아 9일 동안의 혈전 끝에 철의 삼각지대 일부를 끝까지 확보했다. 국군 제9사단은 중국군 3개 사단의 파상적인 공격에 맞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1만여 명의 중국군을 격퇴하고 백마고지를 사수했다.
저격능선전투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벌어졌다. 1952년 가을철로 접어들면서 북한과 중국 연합군이 대대적인 전초 거점을 확보한 것에 대응하여 김화 부근을 방어하던 국군 제3사단이 저격능선을 공격한 작전이었다. 국군 제3사단은 오성산 남단의 저격능선 일대에 배치된 중국군 제15군의 방어진지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이후 42일 동안 재탈환을 위해 공격해오는 중국군을 격퇴하면서 저격능선을 사수하였다. 이 전투는 목표를 탈취하기 위한 치열한 소모전이었던 까닭에 국군은 1개 연대, 중국군은 2개 연대 병력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고석정국민관광단지 임꺽정 동상
고석정국민관광단지 광장에는 조선왕조를 타도하고 백성이 주인되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 했던 혁명가 임꺽정(林巨正)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임꺽정, 홍길동, 장길산은 지배자들의 착취와 압제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이끌고 모순의 근원인 조선왕조를 타도하고 신분해방과 평등세상을 위해 봉기했던 조선의 3대 혁명가였다.
정자
고석정
고석정
고석정
한탄강 상류
한탄강 하류
한탄강의 북안에는 10여미터 높이로 치솟은 기암이 있는데, 이름하여 고석(孤石)이다. 용암이 흘러내린 하곡 양안의 기암절벽 사이로는 한탄강이 구비구비 흘러간다. 유람선을 타면 고석정 위아래의 절경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상류 2km 지점에는 직탕폭포, 하류 2km 지점에는 순담계곡이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한탄강 북안 중턱에 누각을 짓고 고석정이라 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충숙왕(忠肅王)이 찾아와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 정자와 고석 주변의 계곡을 통틀어 고석정이라 한다. 고석정은 현재 지방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평왕 때 세웠다는 고석정 누각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다. 1971년에 다시 세운 2층 누각도 1996년 수해로 유실되었다. 지금의 2층 누각은 1997년에 재건축한 것이다. 광장의 끝에 세워진 팔각정자는 편액도 없고, 안내판도 없어서 언제 세워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단청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최근에 세워진 듯하다.
고석정이 유명해진 것은 조선 명종대 혁명가 임꺽정의 활동무대로 알려지면서부터이다. 경기도 양주(楊州)의 백정(白丁) 출신인 임꺽정은 고석정 건너편 한탄강 남안 절벽에 산성을 쌓고 본거지로 삼았다. 임꺽정 혁명군은 조정에 상납하는 함경도 지역의 조공물이 이곳을 통과할 때 탈취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등 부패한 지배계급에 저항하였다.
임꺽정 혁명군은 1559년(명종 14) 개성(開城)까지 진격했고, 이듬해 이듬해 8월에는 한양까지 진출했다가 지금의 종로 2가인 장통방(長通坊)에서 임꺽정의 아내와 부하들이 체포되었다. 1560년 12월 서울 전옥서에 갇힌 임꺽정의 아내와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작전계획을 세우던 중 숭례문 밖에서 참모 서림(徐林)이 체포되고, 황해도에서 임꺽정의 형 가도치(加都致)가 순경사 이사증(李思曾)에게 체포되면서 혁명군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1561년 임꺽정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경기도와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의 군졸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조선왕조 진압군이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사람이면 모두 잡아 가두어 고문과 학살을 자행하자 민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높아졌다. 1562년 정월 구월산으로 퇴각한 임꺽정은 서림의 배신으로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에 체포되었다.한양으로 압송된 임꺽정은 신분해방과 평등세상 실현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처형되었다.
고석 중턱에는 임꺽정이 은신했다고 전해지는 석실이 있고, 건너편 절벽 위에는 임꺽정 혁명군이 주둔했던 석성이 남아 있다.
2016.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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