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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마국산 용광사를 찾아서

林 山 2016. 8. 4. 19:38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우중충한 날 마국산(馬國山, 441.3m) 용광사(龍光寺)를 찾았다. 마국산은 이천시 모가면과 설성면, 안성시 일죽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마국산의 북쪽으로 423.4m봉-262.9m봉-251.7m봉-242m봉-264.8m봉 등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이어진 능선의 끝에 마오산(270.6m)이 솟아 있다. 두 산은 이름이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다.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 서울우유동남부낙농지원센터 앞에서 바라본 마국산


마국산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 '오음산(五音山)은 부 남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국산은 '마한의 산'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지리지나 지도에 등장하는 오음산의 다른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 조에는 '안양사(安養寺)가 오음산에 있다.'고 했지만, 폐사된 지 오래되어 지금은 그 위치조차 알 수 없다. '해동지도(海東地圖)'와 '1872년 지방지도'에는 오음산 동쪽 가까운 곳에 마옥사(磨玉寺)라는 사찰이 표기되어 있다. 오음산의 다른 이름인 마옥산(磨玉山), 마곡산(磨谷山)은 마옥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산명은 마옥산-마곡산-마국산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시대까지 마국산 산마루에 흑마상(黑馬像)이 세워져 있었는데, 백성들이 그 앞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해방 뒤 마국산 산마루에 헬기장을 닦을 때 토마용(土馬俑)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마국산 남동쪽에는 큰바래기산(414.1m)이 솟아 있다.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큰바래기산 남동쪽 기슭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묘가 있다. 선조의 유일한 적자였던 영창대군은 광해군(光海君)의 이복동생이다. 선조는 8명의 부인에게서 아들 14명과 딸 11명을 두었다. 광해군보다 31살이나 어렸던 영창대군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광해군도 결국 인조를 앞세운 서인들의 쿠데타로 쫓겨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서 죽었다. 영창대군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분명한 것은 광해군의 지지세력이었던 대북(大北)은 소수파였고, 인조를 앞세운 서인(西人)은 다수파였다는 것이다.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에 따른 친명배금(親明排金) 사대주의 사상이 뼛속까지 박힌 서인들은 실리주의 외교노선에 따라 친청정책을 취한 광해군이 왕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 광해군의 개혁정치는 서인들의 기득권과 기반을 흔들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서인들은 광해군을 친금배명()의 배은망덕과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폭군으로 몰아 실각시켰던 것이다.  


지배층의 사대주의는 대상국만 바뀐 채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에 대한 사대주의가 지금은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바뀌었을 뿐이다. 사대주의는 한국인들의 종특이 아닌가 한다.   


용광사는 마국산에서 254.9m봉과 236.6m봉으로 이어지는 북동쪽 능선의 마지막 봉우리 중턱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이천시 모가면 서경리이다.


마국산 용광사 전경


용광사 대웅전


용광사 경내로 들어가 주지 진경 스님에게 예를 표했다. 포대화상(布袋和尙)의 기풍이 풍기는 진경 스님은 두 노인과 함께 절마당 평상에서 라면을 먹고 있었다. 절 구경 좀 하러 왔노라고 하니 평상으로 올라와 라면도 먹고 곡차도 한 잔 하라고 권했다. 주님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중생을 어찌 알고서 곡차 한 잔을 권하심인가! 나는 순간 속세에서 중생들과 함께 뒹굴면서도 걸림이 없었던 원효대사(元曉大師)를 만난 듯했다. 하지만 마국산을 오르다가 잠깐 들렀노라고 극구 사양하고 대웅전(大雄殿)으로 올라갔다. 인연이 이어진다면 다음에 소주와 라면을 한아름 안고 다시 찾아오리라.


진경 스님은 1960년 고창의 선운사에서 출가하여 2년 뒤 당대의 고승 만암 종헌(曼庵宗憲) 대종사(大宗師)의 상좌(上佐) 마일화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1973년에는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白羊寺) 방장(方丈) 수산 지종(壽山知宗) 대종사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이후 조용히 불도에 정진하고자 마국산에 들어와 용광사에 주석(住席)한 지 어언 40여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대동지리지'의 작가 박성현은 진경 스님에 대해 '승속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자유분방하게 살고 계신다.'면서 '이웃집 아저씨처럼 진묵대사(震默大師)를 놓고 비교할 만한 고승임은 틀림없건만 의식과 절차 그리고 제도권의 틀 속에서만 살아오신 분들은 스님의 깊은 법력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평하고 있다. 


진묵대사는 조선시대 허 휴정(淸虛休靜)대사의 전법 제자이며, 술 잘 마시고 무애행(無碍行) 잘 하기로 유명한 승려이다. 당시의 세인들은 그를 석가모니불의 소화신(小化身)으로 존경했다. 진묵대사는 유가의 선비들과도 잘 어울렸다고 한다. 선비들과의 시회(詩會)에서 진묵대사가 지었다고 하는 칠언절구 한시가 전해 온다. 


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으며 산을 베개 삼아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 달빛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요 바닷물은 술통이라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크게 취해 일어나 한바탕 신바람나게 춤을 추고 나니

却嫌長袖掛崑崙(각혐장수괘곤륜)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 기슭에 걸릴까 그게 걱정일세


진묵대사의 호탕한 기풍이 잘 나타나 있는 한시다. 술을 곡차라고 하는 말도 진묵대사로부터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少太山) 대종사도 진묵대사를 불보살의 경지에 오른 당대의 고승대덕이라고 평가했다.


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

月燭雲屛湖作樽(월촉운병호작준)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劫嫌長袖掛磨鈺(겁혐장유괘마옥)


이 칠언절구는 진경 스님이 진묵대사의 한시를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진묵대사의 한시 중 두 번째 구의 '海'를 '湖', 마지막 구의 '崑崙'을 '磨鈺'으로 세 글자만 바꿨다. '磨鈺'은 용광사가 있는 마옥산(마국산)이다. 진경 스님의 호방하고 걸림이 없는 기풍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진경 스님의 궁극적인 지향점도 짐작할 수 있다. 


'海->湖', '崑崙(7,160m)->磨鈺(441.3m)'으로 의미를 보다 축소한 것은 진묵대사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가 아닌가 생각되며. 동시에 겸허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원래 '湖'는 '湖水'였으나 글자 수와 운이 맞지 않아 필자가 임의로 뺐다.  


용광사 대웅전


용광사 당우는 대웅전과 요사채만 있는 아주 작은 절이다. 동향으로 세워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식의 아담한 건물이다. 대웅전 전면 네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주련의 글귀들에는 불교 철학의 정수가 들어 있다. 


佛身普邊十方中(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의 몸은 시방세계에 가득하시니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래일체동) 과거 현세 미래 삼세여래 일체가 같네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광대한 서원은 구름처럼 다함이 없고

汪洋覺海渺難窮(왕양각해묘난궁) 드넓은 깨달음 바다 끝없이 아득하네 


대웅전 법당


대웅전 법당에는 정면 중앙 불단의 석가모니삼존불좌상(釋迦牟尼三尊佛坐像)을 중심으로 그 오른쪽에 독성단(獨聖壇)과 산신단(山神壇), 왼쪽에 칠성단(七星壇)을 설치하였다. 남쪽 벽에는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이 봉안되어 있고, 북쪽 벽에는 신중단(神衆壇)이 마련되어 있다. 지장보살좌상 옆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탑다라니(塔陀羅尼)가 걸려 있다. 


석가모니삼존불님 전에 합장반배로 예를 올리고, 불전함에 시줏돈도 조금 넣었다.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절에서는 웬지 시주를 하기 싫은데, 용광사처럼 소박한 절에서는 시주를 하고 싶어진다. 나는 불자는 아니지만 불상 앞에서 종종 예불을 올린다. 불상 앞에서 나는 언제나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세계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빕니다. 저와 인연을 맺은 모든 중생들의 무병장수와 행복을 빕니다. 저와 인연을 맺은 모든 중생들이 해탈하기를 빕니다. 중생들의 삶을 도탄에 빠트리는 세상의 모든 악인들이 사라지기를 빕니다.' 기원한다.    


대웅전 석가모니삼존불좌상


석가모니삼존불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아 있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맺고 있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할 때, 마왕 파순의 항복을 받기 위해 지신(地神)에게 부처의 수행을 증명해 보라고 말하면서 지은 수인이다. 항마인(降魔印), 촉지인(觸地印), 지지인(指地印)이라고도 한다. 선정인(禪定印)에서 왼손은 그대로 두고, 오른손을 풀어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악마를 항복하게 하는 인상(印相)이다. 


좌보처은 보관에 화불(化佛)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다. 좌보처가 관음보살이면 우보처는 대개 지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모신다. 두 보살은 활짝 핀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불교에서 연꽃은 청정한 꽃으로 극락세계를 상징한다. 불상 대좌를 연꽃으로 장식하는 것도 그런 상징성 때문이다. 


우보처에 대세지보살 대신 중생구제 지장보살을 봉안하기도 한다. 좌보처가 미래세 미륵보살(彌勒菩薩)이면 우보처는 과거세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 좌보처가 지혜 문수보살(文殊菩薩)이면 우보처는 행원(行願)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모신다.  


지장보살좌상


남쪽 벽의 지장보살좌상은 삭발을 한 승려의 모습으로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에는 두건 같기도 하고 관 같기도 한 것을 쓰고 있다. 지장보살 뒤에는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가 그려져 있다. 승려, 선비, 부녀자, 농민 등 중생들이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의 인도하에 반야용선을 타고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가는 모습을 도상화했다. 망자의 넋을 맞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은 번(幡)을 들고 용머리 선수(船首)에 서 있고, 선미(船尾)의 중생은 극락왕생을 빌면서 염불(念佛)을 하고 있다.   


반야용선도는 반야의 지혜로 사바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세계로 간다는 의미가 있다. 선수에는 인로왕보살, 선미에는 고리가 여섯 달린 지팡이인 육환장을 들고 서 있는 지장보살, 가운데에는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을 도상화하기도 한다. 지장보살에 의해 구원을 받은 받은 중생들이 인로왕보살의 인도로 아미타불의 세계인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하늘 세상 등 육도(六道) 중생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은 도리천(忉利天)에서 석가모니불의 부촉을 받고 매일 아침 선정(禪定)에 들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하며, 석가모니가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보살(大慈大悲菩薩)이다. 지장보살은 지옥도에 떨어진 모든 중생을 구제한 뒤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정말 위대하고 감동적인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약사여래와 더불어 필자의 롤 모델이기도 하다. 


지장신앙은 말법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에서 지장신앙은 6세기 수나라 때 신행(信行)이 삼계교(三階敎)를 세우면서부터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다. 신행은 말법시대가 도래한 지금부터 보법(普法)을 닦고 보행(普行)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교법으로서 화엄경의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도작(道綽)과 선도(善導)는 말법시대의 수행법으로 참회와 염불(念佛)을 강조하면서 정토신앙으로 발전했다. 정토신앙이 추구하는 극락왕생은 지장신앙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한국의 지장신앙은 신라 진평왕 대에 수나라에 유학한 원광법사(圓光法師)이 가서사(嘉栖寺)에 설치한 점찰보(占察寶)로부터 시작되었다. 원광법사가 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불법을 설한 뒤 계를 주면서 참회하게 했다. 왕을 참회케 하여 병을 낫게 한 것은 지장신앙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지장신앙은 경덕왕 대의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신라 불교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서 2년 동안 간절한 참회 끝에 762년(경덕왕 21) 4월 27일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계본(戒本)과 ‘제8간자(簡子)', ‘제9간자’라고 쓰여 있는 두 개의 목간(木簡)을 받았다. 미륵불의 계시에 따라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의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 속리산(俗離山)·법주사(法住寺)의 미륵불상, 금강산(金剛山) 발연사(鉢淵寺)의 미륵불상을 세운 진표율사는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종조가 되었다. 신라의 멸망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일까! 


칠성탱화


칠성단에는 칠성탱화를 걸어 놓았다. 칠성탱화는 북극성을 신격화한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聖君)을 도상화했다. 치성광여래의 신체와 머리 뒤에는 신광과 두광이 표현되어 있다.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연꽃을 들고 있고, 칠원성군은 관복과 관모 차림에 홀을 들고 있다. 존상들은 상서로운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하다. 칠여래(七如來)와 삼태육성(三台六星)은 생략되어 있다.


산신탱화와 독성탱화


독성단과 산신단에도 독성탱화와 산신탱화를 걸어 놓았다. 두 탱화의 배경은 모두 폭포수가 흐르는 심산유곡에 낙락장송이 있는 기압절벽이다. 산신과 독성의 머리 뒤에는 두광(頭光)이 표현되어 있다. 두광은 부처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상징한다. 배경의 산수는 지극히 관념적이고 도식적이다.  


독성의 머리에는 부처의 지혜의 상징인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배는 포대화상처럼 불룩하게 나오고, 눈썹은 희고 길며, 왼손에는 석장(錫杖)을 잡고 있다. 선풍도골(仙風道骨) 노인의 풍모다. 독성신앙은 민족신앙의 불교적 수용으로 이루어진 신앙이기에 독성탱화에는 불교의 선(禪)사상과 도교의 신선사상이 융화되어 있다. 독성은 단군 또는 환웅이라는 설도 있고, 나반존자라는 설도 있다. 나반존자는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고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산신은 관복 차림에 길고 흰 눈썹과 백발 수염을 휘날리는 모습이다. 오른손으로는 수염과 호랑이의 꼬리를 동시에 잡고 있다. 오른쪽 뒤에는 선과를 든 동녀가 그려져 있다. 백발 수염의 신선은 바로 산중지왕 호랑이의 변화신(變化身)이다. 사찰에서 산신신앙은 한민족 고유의 산악신앙이 불교적으로 수용되어 나타난 것이다. 산신도는 불화 중에서 가장 토속적인 색채가 강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중탱화


북쪽 벽에는 신중탱화(神衆幀畵)가 걸려 있다. 용광사 신중탱화는 좀 특이하다. 중앙의 존상은 붉은색 도포에 어깨에 갑옷을 두르고, 머리 뒤에는 두광이 표현되어 있다. 옆머리에만 나 있는 머리털은 검고, 정수리에는 작은 왕관을 쓰고 있다. 눈썹과 수염은 백발이고, 손에는 홀을 들고 있다. 중하단 좌우에는 신장, 상단 좌우에는 동남동녀가 배치되어 있다. 진경 스님은 신중탱화의 본존상이 산신(山神)이라고 했다. 산신을 본존으로 한 신중탱화는 용광사에 와서 처음으로 본 것 같다. 이 신중탱화는 금강산에서 왔다고 한다.   


신중탱화는 불교의 호법신들을 묘사한 불화로 보통 법당의 중심부에서 좌우측 벽에 봉안된다. 처음에 신중은 인도 재래의 신들이었는데,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칠성이나 산신, 독성, 조왕(竈王) 등 중국과 우리나라의 토속신앙까지도 수용하여 지금은 많은 수의 신중들로 구성되어 있다. 신중탱화의 원형은 39위인데 지금은 104위까지 늘어났다. 한민족 고유의 토속신들을 호법신중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104위 화엄신중탱화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불화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 탑다라니


지장보살좌상의 오른쪽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 탑다라니가 걸려 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대승불교의 근본 경전으로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한다. 대반야경(大般若經) 600권 중 제9회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을 번역한 것으로 석가모니와 제자 수보리(須菩提)의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다. 6종의 한역본이 있으나 구마라습(鳩滅什) 번역본이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다.


선종(禪宗)에서는 6조(六祖) 혜능(慧能)이 금강경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가장 중요시한다. 금강경의 핵심은 공사상(空思想)에 입각한 집착없는 보살행의 실천이다. 공사상은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 교리이다. 이를 육조는 무상(無相)을 머리(宗), 무주(無住)를 몸(體), 묘유(妙有)를 팔다리(用)로 삼는다고 간단히 정리하고 있다. 6조가 구도의 길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선종을 크게 중흥시키게 되는 과정의 일화는 어쩌면 금강경의 내용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5조(五祖) 홍인(弘忍)은 자신의 법통을 물려주기 위해 제자들에게 게송 한 수씩 지어 오라고 말한다. 5조의 법통을 이어받으리라고 자타가 공인한 수제자 신수(神秀)는 고심 끝에  게송을 지어 이름을 숨긴 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붙여 놓았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곧 깨달음의 나무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 같아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언제나 털고 또 닦아서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 먼지 묻지 않도록 하리


육조가 일자무식이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대중들이 신수의 게송을 읊고 다니는 것을 6조도 들었다. 6조는 한 사미승에게 게송이 붙어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 뒤 누가 좀 읽어 주기를 부탁했다. 신수의 게송을 들은 6조는 한 승려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부르는 게송을 땅바닥에 받아적게 했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밝은 거울도 틀이 없는 것이라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이거늘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먼지가 일어나리오


6조의 게송을 본 5조는 발로 얼른 지워버렸다. 5조는 다른 제자들 몰래 한밤중에 6조를 불러 금강경을 설하고는 석가모니로부터 내려온 가사와 발우를 전수하고는 남방으로 도망치도록 등을 떠밀었다. 전법의 증거인 석가모니의 의발을 탐하는 다른 제자들에게 죽임을 당할까 염려해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조계산에 보림사를 연 6조는 중국 대륙에 선풍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금강경에는 반야부 경전 내용의 핵심을 4구 18자로 응축한 구절이 있는데, 이름하여 '반야제일게(般若第一偈)'이다. 곧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모양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니, 이 모든 현상이 모양이 없는 것임을 직관할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6조의 공사상이 이 한 구절에 다 표현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탑다라니는 불경을 다층탑 형태의 도형(圖形) 내부에 절묘하게 배치한 것이다. 이같은 탑다라니는 북방불교의 한자문화권에서 주로 유행하였다. 탑다라니의 불경은 금강경이나 아미타경이 주로 쓰여졌다. 


바위그림 미륵불두상


대웅전과 요사채 사이의 암벽에는 불상이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불단이 설치되어 있다. 진경 스님은 바위그림의 존상이 미륵불이라고 했다. 바위그림 형태의 마애불도 용광사에 와서 처음 보는 것이다.


용광사 사적비


용광사 사적비 뒷면


용광사 사적비에는 1953년 전하연 스님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60년 김법계 스님은 용광사를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로 등록했고, 1975년에는 주지로 취임한 이진경 스님이 대웅전을 건립했으며, 1995년에는 요사채를 세웠다.


용광사 주지 진경 스님


용광사를 떠나려는데 진경스님이 또 라면도 좀 먹고 곡차도 한잔 하고 가라고 권했다. 마국산을 올라야 했기에 극구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용광사를 떠나면서 원효대사, 포대화상, 진묵대사를 친견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 나중에 다시 찾아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훗날을 기역하면서 용광사를 떠났다.     


2016.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