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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루암리 고분군을 찾아서

林 山 2016. 8. 8. 19:24

'등잔 밑이 어둡다(燈下不明)'는 말이 있다. 사람이나 물건이 가까이 있는데도 찾지 못하는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유적지도 마찬가지다. 다른 고장의 유적지들은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정작 자기 고장의 유적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충주시(忠州市) 중앙탑면(中央塔面) 루암리 고분군(樓岩里古墳群, 사적 제463호)도 등잔 밑에 있던 사적(史蹟) 가운데 하나이다. 


내 고장 중앙탑면 루암리 무지고개에 있는 고분군을 찾았다. 중앙탑면의 옛 이름은 가금면(可金面)이다. 가금면은 1757~1765년에 나온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충원현(忠原縣)의 가흥면(可興面) 2개 리와 금천면(金遷面) 2개 리로 표기되어 있다. 1895년에는 충원현이 충주군(忠州郡)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흥면과 금천면이 통합되어 충주군 가금면으로 개편되었다. 가흥면과 금천면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가금면이라고 한 것이다. 1956년 충주읍의 시 승격에 따라 중원군 가금면이 되었고, 1995에는 충주시와 중원군의 통합에 따라 충주시 가금면으로 되었다. 2014년에는 가금면에서 중앙탑면으로 개칭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중원문화의 중심지에 세워진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일명 중앙탑을 면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루암리 유래는 다음과 같다. 충주군 금천면 남한강 가에 다락바위가 있어서 다락바위, 루바위 또는 루암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두련리, 칠곡리, 행정리, 광대리, 도리, 미로리와 창동, 탑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루암리라고 하였다.     


남서쪽에서 바라본 루암리 고분군


남동쪽에서 바라본 루암리 고분군


동쪽에서 바라본 루암리 고분군


고분군은 루암리 소일마을 무지고개 바로 서쪽 해발 100m~130m의 구릉지대에 있다. 옛날부터 이곳은 고려장터로 전한다. '무지'는 '묻이' 또는 '무덤'을 뜻하고 있어 옛날부터 이 지역이 공동묘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루암리 고분군에서 북쪽의 을궁산(乙宮山)과 장미산(薔薇山)에 이르는 용전리, 하구암리 일대에도 고분군이 다수 분포한다.  


1980년 중원문화권 설정을 위한 지표 조사에서 루암리 고분군이 확인되어 1983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1989년에는 석실 1호분과 2호분이 발굴 조사되었다. 1990~1991년에는 28기의 신라~통일신라시대의 돌방무덤(石室墳), 고려시대의 돌곽무덤(石槨墓)과 나무덧널무덤(土壙木棺墓) 등이 발굴 조사되었다. 루암리 산41번지 중심부의 봉토를 확인할 수 있는 무덤만 76기나 되고, 반경 1.5㎞ 이내에서 약 23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28기의 고분 가운데 대부분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고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墳)은 2기,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은 3기이다. 나머지는 모두 외방무덤(單室墳)임이 확인되었다. 


1호분은 돌방무덤으로 호석(護石)를 두른 지름 16m의 봉분 안 남쪽 벽 중앙에는 널길(羨道)이 있다. 돌방은 북벽 2.25m, 남벽 2.35m, 동벽 2.75m, 서벽 2.6m이다. 높이 1.1m까지는 다듬은 할석으로 쌓았고, 그 위로는 중심을 향해 아치형으로 쌓은 뒤 마지막에 큰 돌을 얹어 무덤방 천정까지의 높이는 2m에 이른다. 북쪽 벽에 잇대어 동서 방향으로 길게 만든 너비 1.1m, 높이 0.45m의 시상(屍床)은 백회로 메움질을 하고 두텁게 회를 발랐다. 북벽에서 2.2m 떨어진 곳에는 더 낮은 시상을 마련한 흔적이 있다. 북쪽의 시상 끝에서 너비 20㎝, 깊이 10㎝로 바닥을 파고 냇자갈로 채운 배수로가 널길에서 동벽을 따라 호석까지 이른다.


5호분과 6호분 등 횡구식 돌방무덤은 동쪽 경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9호분은 널길을 서쪽으로 냈다. 16호분과 17호분은 석실을 등고선 방향으로 배치하였고, 17호분의 봉분에서는 제사를 지낸 흔적이 발견되었다. 21호분은 얇은 판석으로 천정을 덮고 널길을 중앙에 길게 냈다. 경사를 오르며 규모가 작아진 다른 석실분들은 시상이 여럿 중복되기도 하였다.


루암리 고분군에서는 1호분에서는 순금 태환(太鐶) 귀걸이 1쌍과 금동 가는 고리 3점, 원판 수식이 붙은 귀걸이 1쌍, 청동제띠끝장식(靑銅制帶端金具丘) 등 장신구류가 발굴되었다. 또, 쇠손칼(鐵刀子) 2점과 네모꼴 작은 철정(鐵鋌) 12점 등 철기류, 짧은굽다리접시(短脚高杯)와 바리, 합, 항아리 등 신라 후기 토기류 여러 점도 출토되었다. 가락바퀴(紡錘車) 등의 토제품도 나왔다. 


루암리 산33번지와 산36번지 일대에는 고려시대의 돌곽무덤과 널무덤(土壙墓)이 분포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돌곽무덤의 바닥에는 철을 만들 때 나온 철재(鐵滓)를 깔아 놓은 것도 있어서, 이 지역이 풍부한 철의 생산지였음이 입증되고 있다.


루암리 고분군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557년(진흥왕 18)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했다는 기록과 558년(진흥왕 19) 왕경 6부의 귀족과 호민들을 이주시켜 한강유역을 경영코자 했던 6세기 중엽 이후의 역사적 사실을 실증하는 고고학 자료이다. 맨 아래 가장 큰 무덤의 주인공은 고분의 규모나 출토유물로 보아 진골성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최고 귀족층의 무덤은 횡구식 돌방 등으로 변화되었으며, 고려 초기에는 돌곽무덤 또는 움무덤으로 나타났다. 


탄금대 토성과 장미산성 등은 백제시대 유적이고,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이다. 이들 사적과 함께 루암리 고분군은 신라~고려시대의 유적으로 삼국의 문화가 교차되고 경쟁하면서 통일 지향의 중원문화권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실증하는 고고학적 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루암리 고분군은 2005년 3월 25일 사적 제46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된 면적은 전체 고분군의 중심지 일부인 56,739㎡에 불과하다. 현재 대부분의 고분들이 도굴로 말미암아 파괴된 상태에 있어 안타까운 실정이다. 


2016.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