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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죽산리 석불입상과 삼층석탑을 찾아서

林 山 2016. 8. 12. 16:51

주말을 맞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매곡마을을 찾았다. 안성죽산리석불입상(安城竹山里石佛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호)과 안성죽산리삼층석탑(安城竹山里三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은 매곡마을 초입에 있었다.   


남쪽에서 바라본 죽산리 삼층석탑


서쪽에서 바라본 죽산리 삼층석탑


남서쪽에서 바라본 죽산리 삼층석탑


죽산리 삼층석탑은 죽주산성(竹州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69호)이 있는 성산(城山, 227.8m) 남쪽 산발치 밭가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석탑은 사찰의 금당(金堂) 앞마당인 중정(中庭)의 한가운데에 건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사찰의 금당은 이 석탑과 북쪽의 성산 사이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금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석탑만이 남아 동네 사람들의 소원을 비는 기도처가 되고 있다.


죽산리 삼층석탑에서 남쪽으로 몇 백 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는 고려시대 사찰인 봉업사지(奉業寺址)가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는 그 자리에 화차사(華次寺)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고려 광종(光宗)은 죽주산성과 망이산성(望夷山城, 경기도 기념물 제138호)을 중수하고, 죽주(죽산의 옛 이름)에 부왕 태조(太祖)의 진영을 모신 진전사원(眞殿寺院)인 봉업사를 창건하였다.     

    

고려의 국찰(國刹)이었던 봉업사와 죽산리 삼층석탑은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문헌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죽산리 삼층석탑을 세운 것으로 전한다. 신라 말기에는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773~850)라는 승려가 있었고, 고려 전기에는 혜소국사(慧炤國師) 정현(鼎賢, 972~1054)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죽산리 삼층석탑은 높이 3.2m로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지대석(地臺石)은 땅속에 묻혀 있고, 상륜부(相輪部)도 망실되어 탑의 완전한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4매의 판석(板石)으로 결구한 기단 면석(面石)의 각 면 모서리에는 우주(隅柱)를 모각했다. 탑신부를 받치는 갑석(甲石)은 경사가 급하며, 상면에는 복련문(蓮紋)을 새겨 장식했다. 갑석 아랫면에는 부연(副椽, 쇠시리)이 있다. 


탑신부의 각 몸돌에도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2, 3층에 비해 초층 몸돌의 높이가 매우 높아서 심한 체감비례를 보인다. 지붕돌은 두툼하고, 층급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지붕돌 낙수면이 만나는 마루 끝의 합각부(合閣部)는 약간의 반전이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기단과 탑신부 몸돌 모서리의 우주 모각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하지만 매우 높은 탑신부의 1층 몸돌, 갑석의 연화문 장식과 두툼한 지붕돌, 4단의 층급받침 등으로 보아 죽산리 삼층석탑은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기에 세워진 석탑이라면 혜소국사 정현이 세웠다고 보아야 한다. 


죽산리 석불입상과 석탑


죽산리 석불입상


죽산리 석불입상


죽산리 석불입상


죽산리 석불입상


죽산리 석불입상은 죽산리 삼층석탑에서 북쪽으로 200~300m 떨어진 봉업사(奉業寺) 경내에 죽산리 석탑과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 원래 머리와 신체가 절단된 채 죽주산성 아래 쓰려져 있던 불상을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봉업사는 예전에 용화사(龍華寺)였다는데 언제 사명을 바꿨는지 모르겠다.


죽산리 석불입상은 2매로 된 지대석에 놓인 원형의 연화문(蓮花紋) 대좌(臺座) 위에 상체를 약간 뒤로 젖힌 자세로 서 있다. 불상의 높이는 3.36m이다. 대좌에는 복련(覆蓮)이 빙 둘려 새겨져 있고, 연꽃잎마다 그 안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정수리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육계(肉髻)가 있다. 다소 빈약한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다. 


얼굴은 통통한 편으로 부피감이 느껴진다. 눈은 지긋이 감고 있으며, 코 부위는 마모가 심하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닿는다. 입매는 작은 편이고, 입술의 양 끝이 약간 아래로 쳐져 있다. 지긋이 감은 눈과 작은 입매가 단정하면서도 온화한 인상을 준다. 


삼도(三道)가 희미한 목에는 절단되었던 것을 다시 이어붙인 흔적이 남아 있다. 어깨는 얼굴에 비해 다소 좁은 편이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 通兩肩法)으로 양 어깨를 둘렀으며, U자형 옷주름은 어깨에서부터 배 부위까지 평행파상문(平行波狀紋)을 그리며 촘촘하게 새겨져 있다. 그 아래로는 군의(裙衣)가 양 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룬다. 양쪽 다리 위에는 동심타원형(同心楕圓形)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옷주름의 표현은 다소 도식적이다. 이러한 법의 옷주름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하던 양식이다. 


오른손은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與願印, 施願印, 滿願印)을 취하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안쪽으로 향하여 옷자락을 살짝 잡고 있는 듯하다. 두 팔은 좁은 어깨에 붙어 있어 경직된 듯하고, 손도 신체에 비해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앞을 향해 가지런히 놓여 있는 두 발은 보수한 것이다. 


죽산리 석불입상은 머리 뒷부분이 깨어져 나갔고, 목이나 손, 발 등 몇 군데 보수한 흔적이 있지만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수작(秀作)이다. 큼직한 육계, 등간격의 U자형 옷주름, 대좌의 연꽃잎 안의 꽃무늬 등으로 보아 이 불상은 나말여초(羅末麗初)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신체 비례나 옷주름 등 신체 각 부분에서 나타나는 도식화 경향, 얼굴의 양감 등은 이 불상이 고려 전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죽산리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안성 지방의 불상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성은 예로부터 미륵불상이 많이 조성되었다. 그래서 안성을 미륵의 땅이라고도 부른다. 죽산리 석불입상도 미륵불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륵불은 썩은 세상을 뒤집어엎어서 위 아래를 뒤바꾸는 혁명의 부처이다. 미륵하생을 고대한다.  


대좌


죽산리 석불입상의 바로 앞에는 같은 크기의 원형의 연화문 대좌가 놓여 있다. 석불입상의 대좌와는 달리 복련을 길쭉한 연꽃잎으로 표현했다. 이 대좌 위에서 선정(禪定)에 드셨던 불상은 어디로 가신 것일까? 혹시 칠장사로 가신 것은 아닐까?


칠장사 소재 봉업사지 석불입상


죽산리 석불입상과 비어 있는 연화문 대좌를 바라보면서 필자는 문득 칠장사(七長寺) 대웅전 동쪽 뜰로 옮겨진 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奉業寺址石造如來立像, 보물 제983호)이 떠올랐다. 봉업사지여래입상의 전체 높이는 1.98m, 불상 높이는 1.57m이다. 죽산리 석불입상처럼 머리는 소발이고, 정수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얼굴은 둥글고 살집이 통통하다. 양쪽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와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눈과 코, 입은 미모가 심하여 잘 알아볼 수는 없으나 대체로 상호는 원만하다. 


법의도 죽산리 석불입상처럼 통견이며, 옷주름은 U자형 평행파상문을 이루면서 흘러내렸다. 그 아래로 군의가 양 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무늬를 이루고 있다. 양쪽 다리 위에는 동심타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들어올려 손바닥을 가슴에 붙였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려 옷자락을 잡고 있다. 


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은 오른손만 제외하면 죽산리 석불입상과 표현 양식이 아주 흡사하다. 마치 한 사람이 만든 듯한 느낌이다. 더구나 조성 연대도 죽산리 석불입상과 비슷한 고려 전기이다. 어쩌면 저 연화문 대좌의 주인은 칠장사 소재 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죽산리 매곡마을에는 고려시대의 국찰인 봉업사 대가람이 있었다. 따라서 이 죽산리 석불입상도 봉업사와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죽산리 석불입상이 미륵불이라면 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도 미륵불일 가능성이 많다. 


쪽에서 바라본 죽산리 석탑


북쪽에서 바라본 죽산리 석탑


서쪽에서 바라본 죽산리 석탑


죽산리 석불입상 서쪽에는 석탑 한 기가 자리잡고 있다. 여러 조각으로 절단된 지대석 위에는 단층기단을 올렸다. 기단 면석의 모서리에는 우주, 중앙에는 탱주(撐柱)가 모각되어 있다. 갑석 아랫면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다. 윗면에는 탑신부를 받치는 얕은 2단 굄을 마련하였다. 초층 몸돌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고, 탱주는 생략되었다. 몸돌에 비해 두툼한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낙수면이 만나는 마루 끝의 합각부는 반전을 이루도록 맵시있게 처리했다. 지붕돌 아랫면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죽산리 석탑은 2층 이상의 몸돌과 3층 이상의 지붕돌, 상륜부가 결실되어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기단석과 초층 몸돌로 볼 때 삼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죽산리 석탑은 초층 몸돌의 높이가 낮기는 하지만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4단이고, 기단석과 몸돌에 우주가 모각되어 있는 점 등 죽산리 삼층석탑과 그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이 왜 여기에 있는지, 봉업사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내는 것도 앞으로의 연구 과제가 아닌가 한다.


미륵신앙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죽산리 석불입상을 떠나다. 한여름의 저녁 노을이 죽산평야를 붉게 물들이다.        


2016.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