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매곡마을 안성죽산리삼층석탑(安城竹山里三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과 안성죽산리석불입상(安城竹山里石佛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죽산리석탑을 돌아본 뒤 안성봉업사지(安城奉業寺址, 경기도 기념물 제189호)를 찾았다. 봉업사지는 죽산리 삼층석탑에서 남쪽으로 수백 미터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다.
봉업사지 전경
봉업사지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5번지(외 41필지) 서동대로 죽산삼거리 대로변의 들판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이다. 1966년 경지정리작업 중 출토된 향완(香垸)과 죽주봉업사정우5년명반자(竹州奉業寺貞祐五年銘飯子, 보물 제576호)에 새겨진 명문으로 인해 봉업사지의 사명(寺名)이 확인되었다. '1363년(공민왕 12) 공민왕이 죽주에 이르러 봉업사에서 태조의 진영을 알현했다'고 기록된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죽주(竹州, 죽산의 옛 이름)의 봉업사(奉業寺)가 지금의 이 절터에 실재했던 사찰이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비봉산 아래 고려 태조의 진영을 모셨던 봉업사가 있다'는 기록에 나오는 봉업사도 바로 이곳이다. 봉업사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나라 창업을 기념하여 창건된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고려 불교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찰이다. 왕건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국찰(國刹)이었기에 고려가 존속된 475년 동안 고려왕실은 한해도 거르지 않고 봉업사에서 선왕의 제사를 지내고 예불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경기도 박물관은 1997년에서 2003년까지 세 번에 걸쳐 봉업사지를 발굴했다. 3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준풍명(峻豊銘) 기와 등 명문기와와 막새, 청자, 중국 자기 등이 대량으로 출토된 바 있다. 1997년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명문기와를 통해서 봉업사 이전에 화차사(華次寺)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봉업사 대가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현재 이 일대는 농경지로 변해 있다. 봉업사지에 남아 있는 유물로는 안성봉업사지오층석탑(安城奉業寺址五層石塔, 보물 제435호)과 안성봉업사지당간지주(安城奉業寺址幢竿支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가 있다. 안성봉업사지석조여래입상(安城奉業寺址石造如來立像, 보물 제983호)은 현재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七長寺)에 있다.
북쪽에서 바라본 봉업사지 당간지주
북동쪽에서 바라본 봉업사지 당간지주
남서쪽에서 바라본 봉업사지 당간지주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
불일사지 당간지주(출처 문화재청)
서동대로에서 봉업사지로 들어서면 먼저 우뚝 선 당간지주가 눈에 들어온다. 고려시대에는 당간지주를 사찰의 경외 입구에 주로 세웠다. 당간지주가 세워져 있는 이곳이 분명 봉업사의 입구였을 것이다.
당(幢)은 불교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절에 다는 기, 간(竿)은 당을 다는 기둥으로 사찰의 입구나 금당의 앞에 세우는 깃대의 일종이다. 당간은 보통 10m 이상의 높이로 만들어진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으로 보통 돌로 만들지만 철제 또는 금동제, 목제도 있다. 사각형의 대석(臺石) 위에 두 개의 지주를 세우고, 지주 사이에 원형의 간대(竿臺)를 놓은 뒤 그 위에 당간을 세웠다.
당간지주는 사찰과 그 주변 지역이 신성불가침의 성역임을 표시하는 역할을 했다. 통일신라 초기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크게 유행했다. 대가람 봉업사 입구에 당간지주를 세운 것은 사찰의 위상을 대내외에 드높이고자 했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당간지주는 조선시대에는 많이 세워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법회의 양상이 변화되면서 주로 사찰의 금당 앞에 괘불지주를 세웠다.
봉업사지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는 봉업사지 오층석탑에서 남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두 지주석은 장방형의 돌로 쌓은 낮은 단 위에 1m의 간격을 두고 동서향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높이는 4.7m, 너비는 0.8m, 두께는 0.5m이다. 당간은 사라지고 없다. 원래 왼쪽 밭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68년 봉업사지 오층석탑 복원공사 때 복원하였는데, 서쪽 지주석 윗부분의 4분의 1정도가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오랫동안 방치된 탓인지 기반석(基盤石)과 간대석(竿臺石)은 사라지고 없다.
거칠게 치석한 지주석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꼭대기의 바깥쪽 모서리는 완만한 곡선으로 둥글렸다. 안쪽면 꼭대기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형 간구(杆溝)가 파여 있다. 간공(杆孔)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간(杆)은 당간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봉업사지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거칠고 간결한 형태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준다. 바로 뒤편의 봉업사지 오층석탑과 같은 시대인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봉업사지 당간지주는 고려 전기 광종(光宗)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崇善寺址幢竿支柱,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3호)보다 0.5m나 더 크다. 당간지주의 크기로 판단할 때 충주 숭선사보다 봉업사의 가람 규모가 더 크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 불일동 불일사지(佛日寺址) 당간지주와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에는 있는 간공이 봉업사지 당간지주에는 없다는 점이다.
남쪽에서 바라본 봉업사지 오층석탑
서쪽에서 바라본 봉업사지 오층석탑
북쪽에서 바라본 봉업사지 오층석탑
동쪽에서 바라본 봉업사지 오층석탑
남서쪽에서 바라본 봉업사지 오층석탑
북서쪽에서 바라본 봉업사지 오층석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봉업사 관련 기록에 ‘금지유석탑(今只有石塔)’이라고 한 석탑이 바로 이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제435호)이다. 봉업사지 오층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 꼭대기에 상륜부를 올린 일반형 석탑이다. 석탑의 조성 연대는 고려 전기이고, 높이는 6m이다. 1968년의 복원공사 때 4층 몸돌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지대석(地臺石)은 여러 개의 판석(板石)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위에 대판석(大板石)으로 기단 면석(面石)을 올렸다. 면석의 각 면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쪽면은 2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다. 면석의 양쪽 모서리에는 우주(隅柱)가 매우 희미하게 모각(模刻)되어 있어 언뜻 보면 평판같다. 갑석은 4매의 두꺼운 판석으로 이루어진데다가 밑에 부연(副椽)도 없어서 상당히 둔중한 느낌을 준다. 윗면에는 탑신부를 받는 2단의 굄대가 마련되어 있다. 탑신부에 비해 기단이 다소 작은 편이다.
탑신부 초층 몸돌은 4매, 2층 몸돌은 2매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3층 이상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초층 몸돌은 기단 면석보다 높은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의 높이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심한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다. 각 몸돌 양쪽 모서리에는 좁고 얕은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초층 몸돌 남쪽 면석 중앙에는 작은 감실(龕室)이 형식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지붕돌은 다소 얇은 편이며, 아랫면의 층급받침은 각각 5단으로 되어 있다. 윗면에는 위층의 몸돌을 받치기 위한 굄대가 낮게 각출(刻出)되었다.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고 있다. 낙수면이 만나는 합각선(合閣線)은 예리한 편이며, 네 귀퉁이 전각(轉角)의 치켜올림은 매우 미미하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석재 결구 방식이 우수하고,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신라 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기단부가 둔중하고, 기단과 몸돌의 우주가 형식적으로 모각되어 있으며, 탑신부 몸돌의 체감비율이 심한 점 등은 고려 전기의 석탑들에서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들이다. 석재 결구에서 균형을 잘 이룬 이 거대한 석탑은 자못 웅장한 느낌을 주며, 안성에 흩어져 있는 많은 석탑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칠장사 소재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83호)은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 대웅전 동쪽 뜰에 장원리 석조보살좌상(長院里石造菩薩坐像)과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 교정으로 옮겼다가 다시 칠장사로 옮긴 것이다. 고려 국찰이었던 봉업사 옛터에는 불상대좌나 탑 등이 산재해 있고, 금속공예품들도 다량 출토되고 있어 고려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의 전체 높이는 198㎝, 불상 높이는 157㎝이다.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정수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둥글고 살집이 통통해 보인다. 양쪽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와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눈과 코, 입은 미모가 심하여 잘 알아볼 수는 없으나 대체로 상호는 원만하다. 얼굴을 볼륨감 있게 표현하는 것은 인도 마투라(Mathura, 摩偸羅) 양식의 특징이다.
신체는 늘씬하면서도 우아하다. 법의는 얇은 통견의를 걸치고 있으며, 옷주름은 여러 겹이 원호(圓弧)를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그 아래로 군의(裙衣)가 양 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룬다. 당당한 어깨, 가는 허리, 약간 나온 배, 법의를 통해 드러난 무릎과 두 다리 등 양감이 살아있고 세련된 모습이다. 오른손은 들어올려 손바닥을 가슴에 붙였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려 옷자락을 잡고 있다.
이처럼 인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간다라(Andhra) 양식을 인도화한 굽타(Gupta) 양식의 특징이다. 가슴이 U자형으로 트인 것은 굽타 양식의 변형이다. 옷주름이 유려하게 양다리를 걸쳐 흘러 내리고 가슴의 옷깃이 반전하는 것은 우드야나(Udyāna, 優塡王像) 양식의 특징이다.
석불입상과 광배(光背)는 같은 돌로 조성되어 있다.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의 거신광(擧身光)으로 주위에는 화염무늬를 두르고 있다. 신광은 장대한 주형거신광배(舟形巨身光背)의 형태이다. 신광 안에는 바탕 무늬가 전혀 새겨져 있지 않으며, 두광 안에는 구름 위에서 여러 형태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세 화불을 단순하게 부조하였다. 두신광의 외연을 따라 좁은 공간에는 불꽃무늬를 도식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석불입상은 경주 굴불사지석조사면불상(掘佛寺址石造四面佛像) 중 북면보살입상과 상당한 친연성이 있다. 팽창된 얼굴, 양감이 살아있는 우아한 신체, 유려한 착의법 등은 8세기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주형거신광배도 8세기의 경주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석조아미타여래입상(石造阿彌陀如來立像)과 비슷하다. 따라서 이 석불입상은 8세기 신라 전성기의 양식에 고려시대의 특징이 가미되어 새로운 경향을 보이는 고려 초기 석불의 수작이며, 경기도 안성 지방 불상 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봉업사지 오층석탑과 당간지주를 바라보면서 당시 봉업사의 규모가 얼마나 컸을까 상상해본다. 봉업사지에서 죽산리 삼층석탑, 석불입상이 세워진 곳까지 봉업사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봉산과 성산을 배경으로 크고 작은 전각들이 꽉 들어차 있었을 봉업사 대가람이 눈에 선하다.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봉업사지 오층석탑과 당간지주, 석조여래입상을 가슴에 담은 채 봉업사의 옛 절터를 떠나다.
2016. 7. 23.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성 죽산향교를 찾아서 (0) | 2016.08.19 |
---|---|
안성 두현리 석조삼존불입상을 찾아서 (0) | 2016.08.17 |
안성 죽산리 석불입상과 삼층석탑을 찾아서 (0) | 2016.08.12 |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를 찾아서 (0) | 2016.08.10 |
충주 루암리 고분군을 찾아서 (0) | 2016.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