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안성시(安城市) 죽산면(竹山面) 두현리 석조삼존불입상(斗峴里石造三尊佛立像, 안성시 향토유적 제40호)에 이어 죽산향교(竹山鄕校,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6호)를 찾았다. 죽산향교는 죽산리 향교골 비봉산(飛鳳山, 372m) 남동쪽 산발치 죽산고등학교 바로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각 지방의 인재 양성과 공자(孔子)를 비롯한 여러 성현(聖賢)들에 대한 제향(祭享)을 위해 설립된 관학 교육기관이다. 우리나라 교육기관은 삼국시대부터 설립되었지만,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민들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고려 성종은 12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를 파견하면서 향교 설립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향교’라는 명칭은 1142년(인종 20)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향교는 무인 집권기 이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가 고려 말 공민왕 대부터 재건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건국 후 한양에는 왕립유학대학(王立儒學大學)인 성균관(成均館), 지방에는 1읍(邑) 1교(校)의 원칙에 따라 전국 각지에 향교가 설립되었다. 향교의 정원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부(府)와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은 90명, 도호부(都護府)는 70명, 군(郡)은 50명, 현(懸)은 30명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향교의 교수관(敎授官)은 종6품의 교수(敎授)와 종9품의 훈도(訓導)가 담당했다. 주부(州府)에는 조정에서 문과 출신자를 파견했고, 군현(郡縣)에는 각도의 관찰사가 학장을 임명했다. 조정은 교수관 외에도 토지와 전적(典籍), 노비 등을 지급했다. 향교 교육생이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 입학 자격을 부여받았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書院)의 등장은 향교의 강학(講學) 기능을 상실케 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조정에서 파견하던 교수관은 각 지방의 수령이 임명했고, 유생들도 서원을 선호하면서 향교는 교육적 기능을 점차 상실하고, 문묘에 대한 제향 기능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에 따라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신학제가 실시되면서 향교는 강학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종교적 제향 기능만 남게 되었다. 향교 건축물들은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 정유재란, 1592~1598)과 조청전쟁(朝淸戰爭, 정묘호란, 병자호란, 1627~1637) 당시 상당수가 소실되었다. 현존 향교 건축물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들이다.
향교의 영역은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으로 구분된다. 강학 공간은 강의실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인 동재(東齋), 서재(西齋)로 구성된다. 제향 공간은 문묘(文廟)인 대성전(大成殿)과 행랑(行廊)인 동무(東廡), 서무(西廡)로 구성된다. 동서무에는 5성(五聖), 공문10철(孔門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중국 역대 제현(歷代諸賢) 94위 및 동국18현(東國十八賢, 한국) 등 합계 133위 중 대성전에 봉안되지 않은 나머지 위패를 봉안한다.
죽산향교는 1533년(중종 28) 죽산현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어 교수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다. 조선 말기 갑오개혁 이후 죽산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그밖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972년에는 담장을 새로 세웠고, 외삼문을 복원하였다.
죽산향교는 현재 춘추석전(春秋釋奠)의 봉행(奉行)과 삭망분향(朔望焚香)만 올리고 있다.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와 장의(掌議)들이 맡고 있다. 현존 건물로는 외삼문(外三門), 명륜당, 내삼문(內三門), 대성전, 동무, 서무 등이 있다. 건물 배치는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앞에 있고, 제향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죽산향교 외삼문
죽산향교 외삼문
죽산향교 외삼문은 건물의 바깥담에 솟을삼문으로 세웠다. 솟을삼문은 중문이 좌우에 연결된 곁문보다 높이 솟아 있다. 중문 한가운데에는 태극(太極) 문양이 그려져 있다. 꼬리를 매우 길게 그린 태극 문양이 신비스런 느낌마저 든다. 중문은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기 때문에 사람이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 문이다. 태극 문양이 일종의 경고판 역할도 하고 있는 듯하다.
동양철학에서 태극은 우주 만물의 가장 근원이 되는 본체로 천지가 개벽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빅뱅(Big bang) 이전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태초에 우주가 생성되기 전에 먼저 태극이 생기고, 태극은 음(陰)과 양(陽)으로 분화된다. 음양의 조화와 대립을 통해서 우주 만물은 생성과 변화, 소멸의 과정을 무한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동양에서 태극 문양은 우주의 생성과 변화, 소멸의 과정을 상징하는 신성하고 신비한 부호로 사용되어 왔다. 요즘은 태극 무늬가 길상(吉祥)과 축복의 뜻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죽산향교 전경
죽산향교 명륜당
외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교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인 명륜당 구역이 나타난다. 죽산향교의 외삼문과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 건물은 남북종심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명륜당은 앞면 3칸,·옆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렸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기둥 위로 새 부리 모양의 2익공(翼工)을 둔 익공식(翼工式)이다. 교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없다.
죽산향교 내삼문
명륜당 뒤에는 대성전 구역으로 통하는 내삼문이 있다. 내삼문도 외삼문과 같은 양식으로 세워져 있다. 내삼문의 중문 한가운데에도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동쪽 곁문을 통해서 대성전 구역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서쪽 곁문을 이용하면 되겠다.
죽산향교 대성전 구역
죽산향교 대성전
죽산향교 동무
죽산향교 서무
내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자리잡고 있다. 공자 등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익공식 건물이다. 대성전의 계단과 문은 각각 세 곳에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계단과 문은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쪽 옆의 계단과 문을 이용하면 되겠다. 동무와 서무는 각각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대성전에는 유교의 5성, 공문10철, 송조6현, 동국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대성전 문이 잠겨 있어 봉안된 위패를 일일이 확인하지는 못했다.
5성은 유교의 개조(開祖)인 공자를 비롯해서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명재상 안자(顔子), 대학(大學)을 쓴 증자(曾子), 공자의 손자로 중용(中庸)을 쓴 자사자(子思子), 공자의 아성(亞聖)으로 불리는 맹자(孟子)를 이른다. 공문십철은 공자의 문하에서 나온 학덕(學德)이 뛰어난 열 명의 제자를 말한다. 비공 민손(費公閔損) 자건(子蹇), 운공 염경(鄆公冉耕) 백우(伯牛), 설공 염옹(薛公冉雍) 중궁(仲弓), 제공 재여(齊公宰予) 자아(子我), 여공 단목사(黎公端木賜) 자공(子貢), 서공 염구(徐公冉求) 자유(子有), 위공 중유(衛公仲由) 자로(子路) 또는 계로(季路), 오공 언언(吳公言偃) 자유(子游), 위공 복상(魏公卜商) 자하(子夏), 진공 전손사(陳公顓孫師) 자장(子張) 등 열 명이다.
송조6현은 송나라 때 명리학(命理學)을 창시한 여섯 명을 이른다. 송조6현은 명리학의 개산조사(開山祖師)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정주학파(程朱學派)의 창시자인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형제, 유불도(儒佛道)를 융합한 상수학파(象數學派)의 창시자인 강절(康節) 소옹(邵雍), 유물주의 원기본체론(元氣本體論)을 개창한 횡거(橫渠) 장재(張載), 주자학(朱子學)의 창시자 주자(朱子) 주희(朱熹) 등이다.
동국18현은 한국의 유학자 18명을 가리킨다. 동국18현은 홍유후(弘儒侯) 우당(雨堂) 설총(薛聰),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이상 신라),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유(安裕),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이상 고려),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憲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우계(牛溪) 성혼(成渾),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열공(文烈公) 중봉(重峰) 조헌(趙憲),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문정공(文正公)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문정공(文正公)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문순공(文純公)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이상 조선) 등이다.
중앙의 왕립유학대학인 성균관에서는 5성, 공문10철, 송조6현 등 중국 역대 제현 94위 및 동국18현 도합 133위를 봉향(奉享)한다. 지방의 향교 중에서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가 수령인 주(州), 부(府), 군(郡)에서는 중설위(中設位)라 하여 5성, 공문10철, 송조6현, 동국18현 등 39위를 배향한다. 현령(縣令)이나 현감(縣監)이 수령인 현(縣)에서는 소설위(小設位)라 하여 5성, 송조4현(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동국18현 등 27위만 봉향한다.
죽산은 백제 때 개차산(皆次山)이라 하다가 고구려 장수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개차산군(皆次山郡)을 두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개산군(介山郡), 고려 초에는 죽주(竹州)가 되었다. 조선시대로 들어와 1413년(태종 13)에는 죽산현이 되었다가 1543년(중종 38)에는 죽산도호부로 승격되어 이후 35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1896년(고종 33)에는 죽산군이 되었다. 1914년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죽산군은 해체되어 용인시와 안성시로 편입되고 죽산면이라는 이름만 남았다.
죽산은 조선 초에 현이었다가 1543년 도호부로 승격되어 이후 35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조선 말에는 군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죽산향교는 부(府), 군(郡)에 설치된 향교의 예에 따라 중설위 39위를 배향했던 것이다.
죽산향교를 돌아보면서 무언가 알맹이는 모두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텅 비어 있는 죽산향교의 쓸쓸한 모습이 동양 유학의 운명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2016.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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