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맞아 충주시(忠州市) 신니면(薪尼面) 원평리(院坪里) 미륵댕이 마을을 찾았다.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忠州院坪里石造如來立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과 충주 원평리 삼층석탑(忠州院坪里三層石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5호)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마을 이름이 미륵댕인 것으로 볼 때 이 마을은 예로부터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조여래입상과 삼층석탑이 있는 곳은 6세기 전반기인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 ?∼540) 때 창건되어 조선시대 제2차 조청전쟁(朝淸戰爭, 병자호란) 때 불에 타 없어진 선조사지(宣朝寺址)라고 전한다. 선조사는 신라 제 33대 성덕왕(聖德王, ? ~ 737년) 1년에 창건된 사찰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이나 유적, 유물 등은 없는 상태이다. 선조사 신라시대 창건설은 어쩌면 후대에 각색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조여래입상과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사찰이 창건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원평리 선조사지 전경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은 삼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5호)과 함께 미륵댕이 마을 철책 안에 각각 남북으로 나란히 세워져 있다. 불상과 석탑 등 석조물들로 미루어 볼 때 이곳에는 대규모의 사찰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원평리 사지에서 가까운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에도 고려시대 국찰인 숭선사(崇善寺) 대가람이 있었다.
충주 지역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 사이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신라 말기에도 충주 지역은 태봉과 후백제 등 후삼국의 각축장이었다. 후삼국을 평정하고 개창한 고려 전기에 숭선사지, 원평리 사지 등의 사찰들이 집중적으로 세워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이들 사찰들은 개국 초기 고려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비보사찰(裨補寺刹)의 의미로서 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상과 석탑의 위치와 방향을 고려할 때 어느 한쪽이 옮겨졌거나 둘 다 원래의 자리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정상적이라면 불상은 석탑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불상과 석탑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사지 발굴을 통해서 금당의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
미륵댕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보듯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은 지역민들에게 미륵불로 숭배되어 왔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 사적 제317호)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보물 제96호)도 미륵불로 신앙된 불상이다. 이 불상도 통일신라 말부터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의 유행으로 조성된 대형 미륵불상군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원평리 미륵불입상과 미륵리 미륵불입상은 충주가 미륵의 땅이었음을 시사한다.
충주 미륵리 미륵대원지 석조여래입상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은 복판복련(複瓣覆蓮)을 새긴 타원형의 자연석에 1단의 대(臺)를 올리고, 그 위에 보개(寶蓋)를 쓴 대형 석불을 동향으로 안치하였다. 불상의 높이는 약 6.1m이다. 머리 정수리 위에는 육계(肉髻)처럼 보이는 크고 둥근 굄을 마련하고, 그 위에 팔각형의 넓은 보개를 올렸다. 보개의 아랫면 가장자리에는 낙수 홈이 빙 둘려서 음각되어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이고, 이마에 백호(白毫)는 없다. 방형(方形)의 얼굴은 통통하고 하관이 넓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상호는 원만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선정에 든 듯 반개한 눈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코는 약간 낮은 편이며, 코끝이 뭉툭하다. 굳게 다문 입은 도톰하면서도 윤곽이 뚜렷하다. 턱 아래로는 이중턱이 져 있어 후덕인 인상을 준다. 귓바퀴가 뚜렷한 큰 귀는 길게 내려와 어깨에 닿았다. 목에는 삼도가 굵직하게 새겨져 있다.
불신(佛身)의 어깨는 넓고 떡 벌어져 있으며, 균형이 잘 잡힌 하체는 당당하여 전체적으로 건장하고 위엄이 있다. 법의는 양 어깨를 감싼 통견(通肩)으로 옷자락이 수직으로 묵직하게 아래까지 내려와 있다. 어깨로부터 시작된 평행 옷주름은 팔을 타고 내려와 오른쪽 손목을 감은 다음 아래로 흘러내렸다. 왼쪽 어깨에서는 옷주름이 사선을 이루면서 팔꿈치 부위에 걸쳐 있다. 가슴에서 시작된 옷주름은 파상형(波狀形) 무늬를 이루면서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선이 굵고 시원시원한 옷주름의 표현은 불상의 품격을 더욱 높이고 있다.
옷주름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간략화되고 있다. 발목 부위에는 듬성듬성 간략하게 새긴 수직선으로 군의(裙衣) 자락을 나타냈다. 법의 끝단 밖으로 나온 발은 끝 부분이 파손되었다. 법의 끝 부분과 오른쪽 발은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있다. 불상 뒷면의 조각은 생략되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까지 들어올려서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왼손은 안쪽 아래로 비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여원인(與願印)의 변형인을 취하고 있다. 손바닥은 통통하고, 손가락은 굵직하면서도 길쭉해서 투박한 느낌을 준다.
예천 동본동 석조여래입상(출처 문화재청)
천안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출처 문화재청)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은 팔각형 보개, 풍만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양감 넘치는 어깨와 하체, 통견의 묵직한 법의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계승한 위에 고려시대 전기에 유행하던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불상은 예천 동본동 석조여래입상(禮泉東本洞石造如來立像, 보물 제427호)이나 천안 용화사 석조여래입상(天安龍華寺石造如來立像,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8호)과도 그 양식이 유사하다. 따라서 이 불상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수법도 뛰어나 고려 전기의 석불입상들 중에서 수작으로 꼽힌다.
원래 이 불상은 남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었다. 1978년 불상을 바로 세우는 공사를 할 때 불상 밑에서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이 불상이 사찰의 초창 당시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중창될 때 세워진 것임을 시사한다. 불상의 양식이나 조각 수법 등으로 보아 사찰의 중창불사 시기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배례석
배례석
배례석
불상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세워져 있다. 복판복련의 하대석(下臺石) 위에 낮은 3단의 굄대를 각출(刻出)하고, 그 위에 사각기둥을 간주석(竿柱石)으로 세웠다. 복판앙련을 새긴 상대석(上臺石) 밑에는 2단의 굄대를 모각하였다. 상대석의 윗면은 향과 초, 제물 등을 올려 놓을 수 있도록 평평하게 치석했다.
충주 원평리 삼층석탑(남쪽)
충주 원평리 선조사지 삼층석탑(동쪽)
충주 원평리 선조사지 삼층석탑(북쪽)
충주 원평리 선조사지 삼층석탑(서쪽)
기단부 북쪽 면석 향로 조각
기단부 남쪽 면석 향로 조각
충주 원평리 삼층석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5호)은 고려시대 사찰이 창건 또는 중건되면서 석조여래입상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진 간략화된 일반형 석탑으로 독특한 문양과 조각 기법이 나타나 있어 주목된다. 석탑의 높이는 약 3.5m이다.
지대석은 자연석의 윗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그대로 사용하였다. 지대석의 가운데에 마련한 사각형의 홈에 단층 기단을 끼워 맞췄다. 기단은 4매의 판석형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갑석은 얇고 평평하며, 윗면에는 낮은 굄을 마련하였다.
면석부 남북쪽 2면에는 향로가 양각되어 있다. 향로는 원형 몸체에 큰 뚜껑이 덮여 있고, 세 발이 달려 있다. 손잡이에는 화염형 장식이 있다. 이러한 향로는 통일신라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이다.
1층 몸돌의 양쪽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했으며, 면석에는 조각상을 높게 돋을새김하였다. 1층에 비해 2층과 3층 몸돌은 그 크기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체감비례를 보인다. 2, 3층 몸돌 좌우 모서리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다.
1층 몸돌의 조각상은 마모가 심하여 그 형체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이 조각상을 사자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사자상은 불교 교리에도 어울리지 않고, 더구나 탑신부에 사자상을 새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수호신장상을 새기다가 미완성으로 중단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조각상은 석탑의 수호신장을 새겼을 가능성이 크다.
지붕돌의 아랫면에는 3단의 층급받침을 마련하였다.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고, 평면으로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3층 지붕돌은 사라지고 없으며, 상륜부는 탁자처럼 생긴 사각형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노반 위에 있는 것은 최근에 올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원평리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간략화되고 간결한 경향을 보이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의 석탑이다. 치석과 결구 수법에서는 지방적인 특색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기단부 면석에 조각된 향로는 다른 석탑에서는 보기 드문 고려시대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탑을 동쪽과 서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든다. 탑을 다시 쌓거나 보수할 때 결구를 잘못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불상도 석탑을 향하고 있어야 정상적이다. 불상을 다른 곳에서 옮겨 오거나 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방향이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무나무 보호수
불상 뒤에는 시무나무 보호수 한 그루가 있다. 키는 16m, 둘레는 2.5m이다. 수령은 1982년에 360살이었으니까 2016년도인 올해는 394살쯤 되었겠다. 그러니까 이 시무나무는 1622년 전후에 심어졌을 것이다. 1622년은 조선 광해군 14년으로 명청교체기에 해당한다.
시무나무 어린 가지에는 길쭉한 가시가 많이 달려 있다. 옛날 충주댐이 생기기 전 삼탄에는 물고기 뿐만 아니라 올뱅이(다슬기)도 많았다. 삼탄에서 건져온 올뱅이를 삶아서 까먹으려면 바늘이나 핀 같은 뾰족한 도구가 필요했다. 바늘이나 핀이 없을 때는 시무나무 가시로 올뱅이를 까먹곤 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삼탄에서 올뱅이를 건지던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옛날에는 시무나무가 흔했는데 요즘에는 어찌 된 일인지 보기가 힘들어졌다. 쓸모없는 나무라고 마구 베어버린 결과가 아닌가 한다.
일련비구니공덕비, 홍구범문학비
불상의 남쪽 철책 밖에는 일련(日蓮) 비구니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일련 비구니는 기미년(1919) 7월 21일 충주시 주덕읍 장록리에서 태어나 20세에 운수행각을 시작했으며, 원평리 이곳에 정착하여 중생 구제의 원을 세우고 58년 동안 미륵존불을 시봉하다가 불기 2540년(1996) 3월 21일 세수 78새로 화연(化緣)을 마쳤다고 한다.
공덕비 바로 옆에는 홍구범 문학비(洪九範文學碑)가 세워져 있다. 홍구범은 1923년 충주시 신니면 원평리에서 태어나 용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동중학교를 중퇴하였다. 1946년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청년문학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순수문학 계열의 소설들을 썼다. 홍구범은 1947년 '백민' 8호에 소설 '봄이 오면'으로 등단했다. 1949년에는 모윤숙, 김동리, 조연현 등과 '문예'를 창간하고 편집을 맡았다.
한국전쟁 때인 1950년 8월 13일 홍구범은 청년문학가협회에서 활동한다는 이유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보안서원에게 체포되어 문학가동맹 가입서에 강제로 서명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다시 보안서원에게 끌려 간 뒤 행방불명되었는데, 납북되었거나 미아리 부근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구범은 행방불명될 때까지 단편소설 14편, 장편소설 1편, 꽁트 4편, 수필 4편, 비평 1편 등을 썼다. 그의 작품들은 당대 현실의 모순을 풍자하고, 그 실상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작에는 '탄식'(1947), '봄이 오면'(1947), '해방'(1947), '귀거래'(1949), '서울길'(1949), '창고 근처 사람들'(1949), '노리개'(1949), '농민'(1949), '전설'(1949), '쌀과 달'(1949), '어떤 부자'(1950), '구일장'(1950) 등이 있다.
1995년 10월 26일 충북작가회의 주관으로 제1회 홍구범문학제가 제2회 충북 청주 민족예술제 기간 중에 청주예술의전당 소공연장에서 개최되었다. 2007년 11월 24일에는 홍구범의 고향인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 앞에서 제2회 홍구범문학제를 개최하였으며, 미발표 작품들을 엮은 단편소설집 '창고 근처 사람들' 출판기념회를 열기도 하였다.
2016.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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