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忠州市) 신니면(薪尼面) 신청리(新淸里) 수청골에 있는 사육신(死六臣) 중 한 사람인 박팽년 사우(朴彭年祠宇, 충청북도 기념물 제27호)를 찾았다. 박팽년 사우는 삼촌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의 쿠데타로 실각한 뒤 암살당한 단종(端宗)의 충신 박팽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에도 박팽년과 사육신을 모신 육신사(六臣祀)라는 사당이 있다.
박팽년 사우는 한가하면서도 평화로운 수청골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문을 열려고 하니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침 박팽년의 18대 후손 손부가 사우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담장 옆에 있는 쪽문을 통해서 들어가게 해 주었다.
박팽년 사우 전경
박팽년 사우 솟을대문
박팽년은 1417년(태종 17) 조상대대로 터를 잡고 살았던 회덕현 흥농촌 왕대벌(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평소 가야금 타기를 좋아했기에 스스로 취금헌이라고 호를 지었다.
박팽년의 증조부는 박원상(朴元象), 조부는 박안생(朴安生), 부친은 박중림(朴仲林)이다. 박중림은 집현전 학사를 지냈다, 모친은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소학(小學)으로 몸을 닦아서 품행이 단정하고 의기로왔다고 한다.
박팽년은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해서 생원이 되고,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서 을과로 급제했다.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들어간 뒤 1447년(세종 29)에 문과 중시(重試)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세종 때 박팽년은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최항(崔恒), 하위지(河緯地), 신숙주(申叔舟) 등 당대의 이름난 소장학자들과 함께 집현전의 학사가 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박팽년은 경술(經術)과 문장,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유(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는 평을 들었다. 품행에 있어서도 하루종일 단정히 앉아서 의관을 벗지 않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세종(世宗)은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도 유독 박팽년과 성삼문의 문재(文才)를 사랑하여 한글 창제에도 참여시켰다. 세종 말년에 박팽년은 신숙주, 성삼문, 윤기견(尹起畎), 윤회(尹淮),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고려사절요와 고려사의 편찬과 간행에도 참여하였다.
박팽년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 등과 함께 세종에 이어 문종(文宗)과 단종(端宗)을 보필하였다. 그는 성삼문, 김종서, 황보인, 신숙주 등과 함께 병약했던 문종으로부터 어린 단종을 부탁받았던 고명 신하들 중 한 사람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밤 병환이 깊어진 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어전으로 불러 단종을 무릎에 앉히고 ‘내가 이 아이를 경들에게 부탁한다’면서 술을 내려주었다.
문종과 함께 허심탄회하게 술을 마신 박팽년과 성삼문, 신숙주 등은 모두 대취하여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문종은 내시에게 명하여 이들을 차례로 메고 나가 입직청에 나란히 눕힌 다음 손수 담비털 갖옷을 덮어 주었다. 이튿날 아침 술이 깬 집현전 학사들은 문종이 손수 담비털 갖옷을 손수 덮어준 사실을 알고 왕의 자상하고 따뜻한 인간애에 감격했다. 박팽년과 성삼문 등은 문종의 은혜에 대해 평생의 충절과 의리로 보답하기로 맹세했다. 1452년(문종 2)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은 계유정난(癸酉靖難) 쿠데타를 일으켜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계유정난을 전후해서 박팽년은 우승지(右承旨)에 이어 부제학이 되었고, 1454년(단종 2) 좌승지(左承旨)에 이어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단종 3, 세조1) 6월 11일 수양은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라 세조가 되었다. 외직인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있던 박팽년은 세조에게 올리는 문서에 '신(臣)'이라는 글자 대신 '거(巨)'라는 글자를 쓰고, 녹봉에도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1456년(세조 2) 수양은 그를 내직인 형조참판에 임명했다.
단종이 폐위되자 박팽년은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몸을 던져 빠져 죽으려고 하였다. 이것을 본 성삼문(成三問)이 함께 훗날을 도모하자고 극구 만류해서 자살을 단념했으며, 이 때부터 죽기를 각오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박팽년은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兪應孚), 이개, 하위지, 김질(金礩)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 복위를 추진하였다.
세조는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집현전 출신의 관료들을 요직에 많이 등용했지만 신권(臣權)이 강화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대신 왕권이 강화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전제왕조정권을 확립하려고 했다.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전제왕권 강화 조치에 대해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은 즉각 반발했다. 박팽년을 비롯한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은 세조를 몰아내고 관료지배체제를 구현하기 위해 단종 복위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단종 복위 운동 주동자들은 1차 거사일을 1456년 6월 1일 세조가 상왕 단종을 모시고 창덕궁(昌德宮)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연회를 열기로 한 날로 잡았다. 왕의 호위무사인 별운검(別雲劍)에 성승(成勝), 유응부, 박쟁(朴崝) 등을 세워 기회가 왔을 때 세조와 그 추종자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로 하였다. 이를 눈치챈 세조는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별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자고 했지만, 모의자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자면서 거사일을 미루자고 주장했다.
2차 거사일은 곡식의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 의식인 관가(觀稼) 때로 다시 정해졌다. 그러나 6월 2일 불안을 느낀 김질이 세조에게 거사 모의를 밀고함으로써 단종 복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질은 아마도 세조가 심어놓은 첩자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김질은 혁명가 임꺽정을 관군에 밀고하여 팔아넘긴 서림과 동류의 인간이었던 것 같다.
박팽년은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모든 것이 드러났음을 알고 모의 사실을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의 재주를 아낀 세조가 자신에게 귀부해서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유혹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박팽년은 너털웃음으로써 이를 거절하였다.
박팽년은 세조에게 왕을 높여서 부르는 칭호인 상감(上監)이라 하지 않고, 나으리(進賜)라고 불렀다. 세조가 격노해 '그대가 나에게 이미 '(臣)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이라는 말을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박팽년이 충청감사를 지낼 때 올린 장계를 직접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단 한 자도 없었다.
노기가 끝까지 치민 세조는 박팽년에게 온갖 고문과 악형을 가하면서 공모자들을 실토하라고 다그쳤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 이개, 하위지, 성승, 박쟁, 김문기(金文起), 권자신(權自愼), 송석동(宋石同), 윤영손(尹令孫), 이휘(李徽) 등의 동지들과 자신의 아버지 박중림의 이름을 댔다.
박팽년은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456년 6월 7일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를 당했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박대년(朴大年), 박인년(朴引年), 박기년(朴耆年), 장남 박헌(朴憲)과 차남 박순(朴珣), 3남 박분(朴奮)도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혹한 화를 입었다. 박팽년의 어머니와 부인, 제수(弟嫂) 등은 대역죄인(大逆不道)의 가족이라 해서 세조의 쿠데타에 공을 세운 신하들의 노비로 끌려가거나 관비가 되었다.
차남 박순의 부인 성주이씨도 관비가 되어 친정인 달성군 하빈면 묘리 묘골로 내려왔다. 성주이씨는 그때 임신 중이었는데, 만약 아들이면 죽음을 당하고 딸이면 관비로 바치게 되어 있었다. 성주이씨가 아이를 낳고 보니 아들이었다. 마침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서 아이를 바꿔 키워 그의 아들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외조부에 의해 박순의 아들은 박비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키워졌다.
박비가 17세 되던 해 그의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처가에 들렀다가 숨어지내던 그를 발견하고 자수를 권했다. 이극균은 성종(成宗)을 찾아가 박비가 박팽년의 자손임을 이실직고하였다. 성종은 크게 기뻐하여 특사령을 내리고 박비에게 박일산(朴壹珊)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박일산이 생존함으로써 박팽년은 귀한 후손을 남기게 되었다. 사육신 중 후손을 전한 사람은 박팽년가와 하위지가 뿐이다. 박일산은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종택을 짓고 묘골에 정착하여 순천박씨 입향시조가 되었다.
박대년의 부인 윤씨(尹氏)는 해평(海平)의 거족이었다. 진무부위(進武副尉) 윤연령(尹延齡)과 고성박씨 박취신(朴就新)의 딸인 윤씨는 윤근수(尹根壽)와 윤두수(尹斗壽)의 증대고모(曾大姑母)가 된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 반정(쿠데타)의 주모자 박원종(朴元宗)의 조부 박기소는 박팽년과 8촌간이다.
단종 복위 운동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은 성장한 뒤에 대역죄로 처형된 사람들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 이개, 하위지 등 여섯 사람의 행적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했다. 이것이 '추강집(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사육신전으로 인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자리매김한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 마침내 복권되어 관작과 명예가 회복되었다. 박팽년은 1758년(영조 34)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박팽년은 삼대가 멸문(滅門)의 화를 입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은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문재가 뛰어났던 그이기에 천하의 명문장(名文章)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문집이 세상에 전하지 않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양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명분에 따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멸문의 길을 걸어간 박팽년의 충절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에게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박팽년의 저서는 '취금헌천자문(醉琴軒千字文)'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안평대군이 꿈 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도원을 방문한 것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림에는 박팽년의 발문(跋文)이 적혀 있다.
박팽년의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다. 그의 묘지석에는 '박씨지묘(朴氏之墓)'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숙종 대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은 '성삼문 등 육신이 죽은 뒤에 한 의사(義士)가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 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무덤 앞에 표지석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다만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노량진 묘역은 1978년 사육신역사공원(死六臣役史公園,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으로 성역화되었으며,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또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과천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홍성)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祭享)되었다.
대전광역시 중구 안영동에 있는 창계숭절사(滄溪崇節祠,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는 1923년에 세운 사당으로 박팽년과 사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자결한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고 있다. 박심문은 사육신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던 사람이다. 박팽년의 위패는 원래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있었던 정절서원(靖節書院)에 있었다. 1971년(고종 8)에 정절서원이 헐리면서 박팽년의 위패를 창계숭절사로 옮겨 왔다.
1688년 선비들은 박팽년선생유허비(朴彭年先生遺墟碑,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를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197번지 생가터에 세웠다. 비문은 그의 절의를 기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 글씨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유허비에서는 신비하게도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다고 한다. 세인들은 당시 풀지 못한 박팽년의 한이 검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고 믿고 있다.
단종에 대한 충절로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사람을 생육신이라고 한다.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귀머거리 또는 소경 노릇을 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방성통곡하면서 단종을 추모하였다.
세조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공포정치로 종신집권을 꿈꿨던 박정희와 12.12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 광주시민군을 무차별 학살한 전두환이다. 세조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권력욕에 사로잡혀 무고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였다.
박팽년 사우 외원
박팽년 사우 일각대문
박팽년 사우 내원
박팽년 사우는 1775년(영조 51)에 창건되고 1968년에 중수하였다. 사우 건물 정면에는 솟을대문이 있는데, 가운데 칸에 박팽년의 충신지문(忠臣之門) 편액이 걸려 있다. 충신지문 편액 좌우에는 그의 두 아들의 편액이 협시하고 있다.
원래 이 문은 현 위치에서 약 20m 정도 떨어져 있던 것을 1977년에 이전하여 복원한 것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외원(外園)이 나오고, 일각대문(一角大門)을 거쳐 사우 구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사우는 전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식의 목조 건물이다. 담장은 흙과 호박돌을 섞어 쌓은 위에 기와로 지붕을 얹었다.
박팽년 사우
박팽년은 대전 회덕에서 출생했고, 후손들의 집성촌은 대구에 형성되어 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을 듯한 박팽년의 사우가 왜 신니면 신청리 수청골에 세워졌을까? 수청골에 박팽년의 사우가 세워진 까닭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박팽년의 부인은 천안 전씨(天安全氏)로 본명은 전옥금이다. 전옥금도 연좌제로 인해 정인지(鄭麟趾) 집안의 노비로 끌려 갔다. 전옥금이 죽자 그녀의 시신은 친정인 충주시 주덕읍 창전리로 돌아와 묻혔다.
박팽년의 18대 후손 손부로부터 박팽년의 처가는 주덕읍 창전리이고, 할머니 산소는 주덕읍 덕련리 조동에 있으며, 서울 노량진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는 가묘라는 말을 들었다.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수청골은 박팽년의 직계 후손들이 터를 잡은 집성촌이라고 한다.
박팽년은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충주 감영에서 근무했다. 그는 어쩌면 충주시 주덕읍 창전리 처가를 가끔 다녀갔을지도 모른다. 또, 짧은 기간이나마 처가에서 머물렀을 가능성도 있다.
대구에 있는 박씨 집성촌의 후손들은 박팽년 부인의 묘소를 돌보기 위해 명절 때마다 충주로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현 종손의 10대조가 대구 묘골에서 올라와 충주 수청골에 정착하게 되었고, 박팽년 사우도 이들이 집성촌을 이룬 수청골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박팽년 영정(출처 윤여환 교수의 사이버 미술관)
박팽년의 영정은 충남대 미대 윤여환 교수가 2년 걸려 제작했다. 2008년 11월부터 한서대학교부설 얼굴연구소는 박팽년의 얼굴 특징을 찾아내기 위해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순천박씨 집성촌에서 직계 후손 60여 명을 촬영하여 계측 분석하였다. 순천박씨 직계 후손들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형태의 용모 유전자를 분석한 계측도를 모본으로 하여 박팽년의 고결한 학자적 품격과 충절의 기상을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박팽년의 복식은 전통복식연구소가 당시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판결사 김홍조, 변수(邊脩) 등의 출토복식(出土服飾)을 고증하여 제작하였다. 비단으로 만든 단령(團領)은 아청색(鴉靑色)이다. 깃은 완만하게 패이고, 너비는 좁은 편이다. 단령 안에는 붉은색 철릭(帖裏)과 청색 답호(褡穫)를 받쳐 입었다. 사모와 사모날개는 이색(李穡), 황희(黃喜), 하연(河演), 정몽주(鄭夢周) 등의 영정을 참고하여 그렸다.
박팽년은 최종 관직이 형조참판과 중추원부사였고, 영조 때 이조판서로 증직되었으므로 문관 2품이다. 흉배(胸背)와 대(帶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한 직급 낮추어 백한흉배(白鷳胸背)와 삽은대(鈒銀帶)를 넣었다. 흉배는 신숙주와 장말손(張末孫), 삽은대는 윤증상과 이사경(李士慶), 장유(張維)의 영정을 참조하여 제작했다.
흉배는 단종 2년(1454)에 검토관 양성자의 제의로 제정하였다. 당시에는 흉배를 가슴에 꽉 차게 넣었으며, 단령에 직접 은사로 짜 넣었다. 백한흉배는 상서로운 구름과 꽃나무를 배경으로 백한 한쌍을 그려 넣었다. 상서로움의 상징인 흰 꿩 백한은 움직임이 한가해서 '한'이라 하고, 성품이 꼿꼿하여 선비의 기개를 나타내는데 안성맞춤인 새다. 선비는 왕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지만 손아귀에 넣고 함부로 할 수는 없다. 꿩 그림에는 임금을 충심과 직언으로 보필하되 지조를 지켜 결코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정신이 담겨 있다.
족좌대(足座臺)와 백목화(白木靴)는 동시대에 제작된 신숙주, 장말손, 손소(孫昭), 오자치(吳自治) 등의 영정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을 살렸고, 의습선(衣褶線)도 선이 굵고 직선적이어서 조선왕조 개국 초기의 기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표현 기법은 조선시대 초기 영정 양식인 화폭의 뒤에 칠하는 배채법(背彩法)이 적용되어 비단의 결을 살리면서도 색이 잘 발현되도록 하였다. 얼굴은 살결이 잘 나타나도록 육리문법(肉理紋法)을 활용하고, 머릿결과 수염은 화가 자신이 개발한 적선법으로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풍채가 단정하고, 얼굴은 피부 질감이 생생하며, 표정에는 강직한 기상이 넘쳐 흐른다.
박팽년 영정의 학자적 품격과 충절의 기상이 잘 표현된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가로 110㎝, 세로 180㎝ 크기의 견본채색 작품이다. 이 영정은 2009년 12월 12일 17일 문화체육관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 최종심의에서 표준 얼굴로 통과되어 2010년 1월 11일 국가표준영정 제81호로 지정되었다. 박팽년 영정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육신사에 봉안되어 있다.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들의 일생을 한마디로 평하자면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충절과 의리일 것이다. 박팽년 같은 인물을 곁에 두었던 세종과 문종, 단종은 행복했을 것이다. 박팽년의 사우가 충주에 있다는 것은 순천박씨 직계 후손 나아가 충주시민의 영광이다.
목숨을 걸고 거사한 수양의 쿠데타군을 대의명분을 중요시한 단종의 사육신이 물리치기란 애초부터 어려웠을 거다. 단종을 지키려고 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수양을 잡아 죽였어야 한다. 한국현대사에 있어서도 1961년 5월 16일과 1979년 12월 12일 두 번에 걸쳐 일어난 군사반란 주모자들도 마찬가지다.
가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이 시조는 변절자 김질이 박팽년을 회유하려 하자 그 답으로 지은 일종의 순절시(殉節詩)이다. 대충 '까마귀(김질)가 눈비를 맞으면 하얗게(선) 보이는 듯하지만 본색은 검다(악). 야광명월(박팽년, 충절)이 밤(쿠데타로 집권한 수양)이라고 해서 어둡게 변하겠느냐(변절하겠느냐)? 님(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충절)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김질 너 이 더러운 변절자야 헛수고하지 말아라. 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이다'는 내용이다.
박팽년 사우에는 영정도 없고 위패만 봉안되어 있다. 박팽년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능지처사되고, 3대가 극형을 받는 멸문지화를 입었기 때문일까? 박팽년 사우에는 왠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비극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자처하는 나도 박팽년 사우가 충주에 있는지도 몰랐었다. 우연히 신니면을 지나가다가 안내판을 발견하고는 다른 일은 다 팽개치고 박팽년 사우부터 들렀던 것이다. 우리나라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교육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다.
박팽년의 순절시를 음미하면서 그의 사우를 떠나다.
2016.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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