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을 때 안성시 삼죽면 기솔리 석조여래입상(基率里石佛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호)을 찾았다. 기솔리 석조여래입상을 쌍미륵 또는 두미륵이라고도 한다.
쌍미륵은 안성시 보개면과 삼죽면의 경계에 솟은 국사봉(國師峰, 439m) 기슭에 있다. 백두대간 속리산 천왕봉을 떠난 한남금북정맥은 칠장산에 이른 다음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라진다. 칠장산을 떠난 한남정맥은 도덕산-뒷산-턱골고개를 지나 국사봉에 이른다. 백두대간-한남금북정맥-한남정맥의 맥이 흐르는 국사봉의 남쪽 기슭에 쌍미륵이 있다. 국사봉은 국사신앙(國師信仰)의 터이기도 하고, 선녀가 하강하여 춤을 추었다는 무선(舞仙)바위 전설도 전해진다.
안골고개에서 바라본 국사봉
안골고개에서 바라본 국사봉
38호선 서동대로를 따라가다가 죽산면 장능리 황새들에서 국사봉로로 접어든 다음 큰고개(안골고개)를 넘으면 기솔리 텃골이다. 기솔리 텃골 사람들은 큰고개, 내강리 안골 사람들은 안골고개라고 부른다. 큰고개에서는 국사봉과 텃골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성은 원래 백제의 옛땅이었다. 그러다가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 영토였던 당성군(唐城郡, 화성시 남양동), 부산현(釜山縣, 金山縣, 평택시 진위면), 사벌홀(沙伐忽, 안성시 양성면) 등의 지역이 고구려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상실하면서 이들 지역은 다시 백제 땅이 되었지만 곧 다시 신라 땅이 되었다. 이처럼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삼국의 접경지대에 자리잡은 곳이 바로 안성이었다.
안성에는 옛날부터 팔만구 곳의 사암(寺庵)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 사찰이 많았다. 특히 안성에는 미륵불상이 많이 세워져 있어 '미륵의 고장'으로도 알려졌다. 안성에는 현재 20여 구의 크고 작은 미륵불상이 남아 있다. 20구 중 5구의 미륵불상이 있는 기솔리는 가히 '미륵신앙의 메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안성에는 왜 이렇게 많은 미륵불상들이 세워진 것일까? 미륵정토 용화세상은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새로운 세상을 상징한다. 안성의 백성들은 삼국 간의 접경지대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전쟁의 후유증과 점령국 지배계급의 가혹한 수탈 속에서 자신들의 안위와 구원을 미륵불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백성들은 전지전능한 미륵불 또는 미륵불 같은 존재가 나타나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지배계급을 모조리 쳐 없애고 차별이 사라진 세상을 열어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죽산의 옛지명 죽주(竹州)는 신라 말 891년(진성여왕 5)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기훤(箕萱)의 본거지였다. 죽주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기훤은 죽주장군이라 자칭하면서 신라를 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개창하려고 했다. 궁예(弓裔)도 한때 기훤에게 몸을 의탁할 만큼 그의 세력은 당시 농민혁명군 가운데 으뜸이었다.
기훤의 세력이 약해지자 궁예는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에게 몸을 의탁했다. 기훤과 양길의 세력을 흡수하여 독립한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농민혁명군을 이끌고 후고구려의 개창을 선언했다. 궁예는 삼국 간의 전쟁, 지배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신음하던 백성들의 염원이 무엇인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함으로써 썩은 세상을 뒤엎어 버리고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영웅으로 받아들여졌다.
안성의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 매산리 죽주산성, 삼죽면 기솔리 국사봉 등은 궁예가 한때 활동했던 무대이기도 하다. 기솔리 국사봉 기슭에는 쌍미륵과 궁예미륵이 있는데, 궁예미륵이 좀더 깊숙한 골짜기에 있다. 텃골 마을에서 가까운 쌍미륵부터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안성 기솔리 석조여래입상
기솔리 텃골로 들어서면 '도솔봉(兜率峰) 쌍미륵사(雙彌勒寺)'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도솔봉은 미륵보살이 하생을 기다리는 도솔천(兜率天)을 상징한다. 도솔천은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네 번째 하늘이다. 지도에는 도솔봉이라는 지명이 없다. 도솔봉은 쌍미륵사 측에서 임의로 지은 지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솔리 텃골은 국사봉과 턱골고개 사이에 형성된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텃골 주민들에 따르면 국사봉 골짜기의 평평한 곳은 다 절터라고 보아도 될 만큼 절이 많았다고 한다. 주민들이 알고 있는 절터만 해도 오백나한골, 도둑놈골, 오용골, 부도골 등 네 곳이나 된다.
텃골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쌍미륵과 궁예미륵이다. 마을 사람들은 원래 쌍미륵을 두미륵, 궁예미륵을 세미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무당들이 살고 있었는데, 1980년대 무당들이 나가고 쌍미륵사와 국사암 등의 사찰이 들어서면서 불상의 이름도 바꼈다는 것이다.
국사봉 기슭 오백나한골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륵불상이 한 구 더 있다. 옆으로 눕혀져 있는 미완성의 미륵불상이다. 완성되었다면 쌍미륵보다 조금 더 크거나 비슷한 크기였을 것이다. 원래는 쌍미륵이 아니라 세미륵을 만들려다가 어떤 이유로 중단된 것이 아닌가 한다.
쌍미륵이 세워져 있는 곳에는 현재 대한불교 법상종(法相宗) 총본산인 쌍미륵사가 자리잡고 있다. 쌍미륵사 측에 의하면 법상종은 신라시대부터 있어 온 종파이며, 현대의 대한불교 법상종은 1969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에 포교원을 세우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쌍미륵사는 현재 쌍미륵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호에서 국가 지정 보물로의 승격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안성 기솔리 석조여래입상
안성 기솔리 석조여래입상
남미륵
남미륵
남미륵
여미륵
여미륵
여미륵
안성 기솔리 석조여래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6호)은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절터에 기솔리 텃골을 굽어보며 나란히 우두커니 서 있다. 텃골 주민들은 북쪽의 체구가 다소 큰 불상을 남미륵(男彌勒), 남쪽의 날씬하고 크기가 다소 작은 불상을 여미륵(女彌勒)이라고 부른다.
남미륵의 높이는 5.4m, 여미륵은 5.0m로 두 불상 모두 거불(巨佛)에 속한다. 두 불상은 양식적 특징이 서로 일치하여 같은 작가에 의해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두 구 모두 머리 위의 보개(寶蓋)만 제외하고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얇은 판석을 다듬어 둥글게 만든 보개를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육계(肉髻)에 끼워 맞췄다.
얼굴은 네모반듯하고, 이목구비가 큼직하고 뚜렷하며, 선이 굵다. 눈은 선정에 든 듯 가늘게 반쯤 감고 있다. 코는 크고 뭉툭하며, 두터운 입술은 굳게 다물고 있다. 귀는 크고 길어서 목 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남미륵은 표정이 엄숙하고, 여미륵은 온화한 인상이다.
두상에 비해 불신(佛身)은 왜소한 원통형으로 신체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어깨는 각이 지고 좁은 편이며, 체구에는 양감이 거의 없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으로 물결 모양의 주름이 목 아래에서부터 발끝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두 불상의 손은 몸에 달라붙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시무외인(施無畏印)의 변형인, 왼손은 배까지 들어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다음 손가락을 구부린 여원인(與願印)의 변형인을 취하고 있다. 불신에는 거무스름하고 파르스름한 이끼들이 끼어 있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불상의 크기로 볼 때 당시 흔히 조성되던 장육불상(丈六佛像)일 수도 있다. 고려 전기에는 안성을 중심으로 대형 미륵불들이 많이 조성되었다. 쌍미륵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성된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을 만들 때 사람의 키 크기 8척의 배수인 16척으로 만드는 것을 장육불상이라고 한다. 16척은 1장 6척이므로 장육불상 줄여서 장육상이라고도 부른다. 16척은 4.8m 정도이다.
이천 어석리 석불입상(출처 다음백과)
두 불상은 장승처럼 신체의 곡선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원통형 불신이고, 신체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 단순화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 보개를 쓰고 있고, 얼굴이 토속적이고 투박하다는 점 등에서 고려시대 지방화된 석불 양식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불상들은 이천 어석리 석불입상(利川於石里石佛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7호)과 같은 불상 형태가 더 단순화되고 토착화되면서 나타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기솔리 석조여래입상은 두 불상 사이에 한 구의 불상을 더 세워 세미륵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어떤 이유로 중단했을 가능성이 많다. 국사봉 기슭 오백나한골로 들어가는 길목에 옆으로 누워 있는 미완성의 미륵불상이 쌍미륵의 가운데에 세우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국사봉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궁예미륵이 세미륵이라는 점도 이런 심증을 더욱 굳게 한다.
세미륵으로 만들려고 했다면 그 주인공은 아마도 기훤과 그의 부하 원회(元會), 신훤(申煊)이 아니었을까? 신라 말 죽산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기훤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할 미륵불로 자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월은 많이 흘렀고, 불상은 말이 없다.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미륵신앙은 희망과 구원의 신앙이었다. 왕이 되려는 자들에게 미륵불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미륵불은 그 성격상 혹세무민하려는 자들이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인 부처이다. 궁예 이후에도 미륵불을 자처한 자들이 계속해서 나타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미륵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사람들 가슴마다 시퍼렇게 살아있는 부처이다. 새로운 세상은 다른 사람, 다른 신적인 존재가 열어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미륵불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때야말로 후천개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016.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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