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충주 숭선사지 당간지주를 찾아서

林 山 2016. 8. 10. 18:47

고려 광종(光宗)의 어머니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聖王太后) 유씨(劉氏)의 원당(願堂)으로 알려진 숭선사(崇善寺) 절터를 찾아 나섰다. 숭선사지(崇善寺址, 사적 제445호)는 충주시(忠州市) 신니면(薪尼面) 문숭리(文崇里) 숭선(崇善)마을에 있다. 


문숭리는 부용지맥(芙蓉枝脈) 수레의산(678.7m)에서 신니면 문락리(文樂里)를 북쪽으로 휘돌아 남동쪽 화계산(380.4m)으로 뻗어내린 능선과 수레의산-웃고개-무명봉-능안고개-무명봉(419m)으로 이어지는 부용지맥, 무명봉(419m)에서 남쪽으로 394.6m봉과 화계산(241.2m)에 이르는 능선 사이에 있는 산골짜기 지역이다. 달리 설명하자면 신니면 광월리(廣越里) 부용산(芙蓉山, 645.2m)에서 발원하는 대화천(大花川)을 막아서 만든 신덕저수지(薪德貯水池) 북쪽 상류의 능안골이 곧 문숭리이고, 숭선은 문숭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숭선마을에 들어서면 마을회관 앞에 우뚝 서 있는 숭선사지 당간지주(崇善寺址幢竿支柱,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3호)가 눈에 들어온다. 당간지주가 세워진 곳은 숭선사지 입구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는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사찰의 경외 입구에 주로 세웠고, 조선시대에는 괘불지주(掛佛支柱)를 사찰의 경내 금당(金堂) 바로 앞에 세웠다. 당간지주만 보고도 숭선사가 고려시대의 사찰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숭선사지 당간지주


숭선사지 당간지주


숭선사지 당간지주


숭선사지 당간지주 간대


당(幢)은 법회가 있을 때 절에 다는 기, 간(竿)은 당을 다는 기둥으로 사찰의 입구나 금당의 앞에 세우는 깃대의 일종이다. 당간은 보통 10m 이상의 높이로 만들어진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으로 보통 돌로 만들지만 철제 또는 금동제, 목제도 있다. 사각형의 대석(臺石) 위에 두 개의 지주를 세우고, 지주 사이에 원형의 간대(竿臺)를 놓은 뒤 그 위에 당간을 세웠다.


당간지주는 그 주변지역이 신성불가침의 성역임을 표시하는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 숭선사를 창건할 당시 입구에 당간지주를 세운 것은 사찰의 위상을 대내외에 드날리고자 했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통일신라 초기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크게 유행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많이 세워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법회의 양상이 변화되면서 괘불지주가 주로 사찰의 금당 앞에 세워졌다. 


숭선사는 충주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충주 유씨(忠州劉氏)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과 고려의 건국에 있어서 충주 유씨의 역할은 매우 컸다. 충주 유씨의 시조는 태사내사령(太師內史令) 유긍달(劉兢達)이고, 태조 왕건(王建)의 제3비 신명순성왕태후 유씨는 바로 유긍달의 딸이다. 신명순성왕태후는 왕건의 왕비들 가운데 가장 많은 자식을 낳았다. 태조의 3남 정종(定宗)은 신명순성왕태후의 차남, 태조의 4남 광종(光宗)은 그녀의 3남이다. 충주 유씨의 세도가 대단했음은 왕건의 장남 2대 혜종(惠宗)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소생이 3대와 4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광종은 951년(광종 2) 개경에 태조를 위한 원당인 대봉은사(大奉恩寺)와 모후 유씨를 위한 원당인 불일사(佛日寺)를 세운 바 있다. 광종은 외가인 충주 유씨의 세도를 의식해서 충주에도 모후의 원당인 숭선사를 또 세운 것이라고 하겠다. 고려의 왕인 외손자 광종이 모후의 원당인 숭선사를 창건하는데 친정인 충주 유씨 가문에서도 당연히 지대한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숭선사지 당간지주의 기단부와 동편 지주는 사라지고, 서편 지주와 간대석(竿臺石)만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 말에 의하면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가 신덕저수지를 만들 때 일본인들이 동편 지주를 뽑아다가 다리를 놓는 데 썼다고 한다. 신덕저수지가 완공된 뒤에는 수몰되었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수몰된 당간지주를 찾아서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남아 있는 지주석(支柱石)은 별다른 조식은 없지만 규모가 커서 웅장하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높이는 4.2m이다. 10m 이상 크기였을 당간까지 세우면 그 위세가 자못 대단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주의 바깥 측면의 모서리는 각진 부분을 둥글게 깎아내는 수법인 모죽임 처리가 되어 있고, 정상부는 부드럽고 완만한 호선을 이루고 있다. 지주의 안쪽에는 간구(杆溝)와 간공(杆孔)이 마련되어 있다. 간(杆)은 당간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간공은 가로 8㎝, 세로 12㎝, 깊이 16㎝이다. 간구는 가로 31㎝, 세로 19㎝, 깊이 14㎝로 지주 안쪽 꼭대기에 ⊔형으로 마련했다. 


간대석 가로 90㎝, 세로 65㎝의 사각형으로 윗면에 당간받침공 두 개가 있다. 한 변의 길이 17㎝, 깊이 5㎝인 정사각형 당간받침공은 남북으로 33㎝ 간격을 두고 파여 있다. 당간받침공은 당간 하단부를 이중으로 세워 당간을 견고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간대석의 당간받침공으로 볼 때 숭선사에는 목당간(木幢竿)이나 석당간(石幢竿)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불일사지 당간지주(출처 문화재청)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 불일동 불일사지(佛日寺址) 당간지주와 동일한 간대석 수법이라고 한다. 따라서 두 곳의 당간지주는 비슷한 시기에 고려 조정에서 파견한 석공들이 치석하여 세웠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고려 전기에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 수법을 일부 계승하여 세워진 것이다. 숭선사 창건 기록과 절터에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954년 숭선사가 고려 왕실과 충주 유씨의 후원을 받아 대가람으로 창건될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숭선사지 당간지주가 대형으로 조성된 것은 바로 고려 왕실과 충주 유씨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당시 숭선사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숭선사지 당간지주는 고려 초기 이후에 세워진 당간지주 양식의 표준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남동쪽에서 바라본 숭선사지 전경


남동쪽에서 바라본 숭선사지 전경


동쪽에서 바라본 숭선사지 전경


남쪽에서 바라본 숭선사지 전경


남쪽에서 바라본 숭선사지 금당 추정지


남동쪽에서 바라본 숭선사지 금당 추정지


남서쪽에서 바라본 숭선사지 금당 추정지


숭선사지 강당 추정지


북쪽 영당지에서 바라본 숭선사지 전경


숭선사지 출토 석재


숭선사지 출토 석재


숭선마을 마을회관 앞 당간지주에서 북서쪽 산기슭으로 500m 정도 올라가면 숭선사지가 나온다. 숭선마을 북서쪽 골짜기는 오래전부터 많은 양의 기와편과 자기편들이 출토되어 이곳에 대규모의 건물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숭선사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954년(광종 5)에 광종이 모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숭선사를 창건했다'는 짧은 기사만이 전하고 있다. 


1995년 3월부터 4월까지 예성동호회는 지표 조사를 통해 사역(寺域)의 추정 중심지에서 금당지(金堂址)와 강당지(講堂址), 영당지(影堂址), 축대 등을 찾아내고 숭선사가 대가람이었음을 확인했다. 2000년~2001년 충청대학 박물관의 사역 중심지 발굴 조사 결과 추정 금당지와 강당지, 영당지, 탑지, 주변 건물지들이 확인되었다. 숭선사의 중심사역은 삼국시대 이래 전형적인 가람 배치를 따르고 있음이 드러났다. 회랑지와 탑지, 금당지, 강당지, 영당지 등의 규모와 축조 방식도 밝혀졌다. 


이때 금동보살두(金銅菩薩頭)와 금동보살상(金銅菩薩像) 동체부, 동탁(銅鐸), 분청사기장군, 금동연봉형와정장식(金銅蓮棒形瓦釘粧飾), 분청철화병, 청자완, 백자완, 귀면와, 치미, 용두, 다양한 기와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숭선사의 역사적 가치가 입증되었다. 금동연봉형와정장식은 특이하게도 금당지 서쪽에서 지붕의 처마선을 따라 출토되었다.   


역사 기록을 입증한 출토 유물은 기와류였다. 절터에서 '崇善寺(숭선사)', ‘大定二十二年壬寅四月日(대정이십이년임인사월일) 監役副都監大師(감역부도감대사)’, ‘成化十五(성화십오)’, ‘嘉靖二十九申亥(가정이십구신해)’, ‘嘉靖四十年辛酉(가정사십년신유)’, ‘萬曆己卯(만력기묘)’ 등의 문자가 새겨진 명문와가 수습됨으로써 숭선사가 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과 일치하는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명문 기와편에 의해 숭선사는 창건 이후 1182년(고려 명종 12)에 1차 대규모 중창, 1479년(조선 성종 10)에 2차 중창, 1550년(명종 5)에 3차 중창, 1579년(선조 12)에 4차 중창이 이루어졌고, 18세기까지는 사찰이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2002년~2003년에는 금당지 서쪽의 대형 건물지와 금당지 주변의 회랑지, 동문지에 대한 정밀 발굴 조사로 창건 당시의 숭선사 규모와 중수 연대, 유구(遺構)의 규모 및 성격 등을 파악하였다. 숭선사의 중심사역은 남북을 잇는 축선상에 중문, 탑, 금당, 영당이 차례로 건립되는 삼국시대 이래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 중기에 가람의 축선이 남북 방향에서 동서 방향으로 바뀌었음이 밝혀졌다. 


2004년의 발굴 조사에서 숭선사의 동쪽 지역 건물지와 배수로 등은 창건 당시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중심사역에서처럼 세 차례에 걸쳐 변화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회랑지는 동서남북의 사방에 있으며, 중심사역의 규모는 동서 40m, 남북 67m로 추정된다. 금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영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숭선사는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려시대 창건 사찰로 고려 전기의 정치적인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숭선사는 축조연대가 확실하고, 건물 기단부의 화강암 석축기단과 주초석, 적심석, 석축배수로, 전돌포장, 답도, 탑의 적심, 우물, 온돌 등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어 고려 전기의 건축 나아가 한국건축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은 고려 전기의 미술사료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16.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