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충주박물관 석조문화재를 찾아서

林 山 2016. 11. 9. 17:29



충주빅물관은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중앙탑공원에 있다.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과 실내전시관에는 불상, 석탑, 부도, 석인상, 석비, 망주석, 석누조 등 중원문화를 꽃피웠던 많은 석조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원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충주박물관의 석조문화재들을 살펴봐야만 한다.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


불정면 성불사 석불좌상


성불사 석불좌상(成佛寺石佛坐像)은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성불사에 있던 것을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온 것이다. 불정면은 행정구역상 괴산군에 속하지만 옛날에는 충주에 속했던 지역이다.


성불사 석불좌상의 높이는 98㎝이다. 이 불상은 전면에 덧칠을 하고, 손목 아랫 부분을 시멘트로 보수하였기 때문에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원래의 모습은 짐작할 수 있다. 머리에는 원통형 보관을 쓰고,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표현되어 있다. 눈귀코입은 마멸이 심하여 윤곽만 남아 있다. 코는 작고, 입술은 굳게 다물고 있다. 어깨는 당당하고, 목에는 장신구를 조식하였다.


불의(佛衣)는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도식화된 평행사선의 옷주름이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내렸다. 등 뒤의 옷주름도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내렸다. 결가부좌한 다리의 옷주름은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보인다.


성불사 석불좌상은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관을 쓴 항마촉지인 석불좌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매우 드물다. 아마도 밀교(密敎) 계통에서 나온 불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 석조여래좌상


고려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은 충주박물관 실내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肉髻)가 솟아 있고, 이마에는 백호공이 뚫려 있다. 눈은 선정에 든 듯 감겨 있고, 코는 뭉툭하다.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귀는 상당히 큰 편이다. 불의는 편단우견이고, 옷주름은 다소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를 틀고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인상의 불상이다. 


고려 하구암리 석불입상


하구암리 석불입상(
下九岩里石佛立像)도 충주박물관 실내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 이 불상은 충주시 중앙탑면 하구암리 62번지 묘곡마을에 삼층석탑과 함께 있던 것을 충주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 불상과 삼층석탑이 있던 곳은 고려시대 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구암리 석불입상은 전체가 하나의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는데, 목과 허리 부분이 훼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조각 수법은 매우 소략하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나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가 힘들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불의는 통견(通肩)으로 군의(裙衣) 옷주름이 여러 겹으로 흘러내려 발까지 덮고 있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뜨려 옷자락을 잡고 있는 듯하고, 왼손은 파손되어 잘 알 수 없으나 아랫배 앞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무엇인가를 올려놓은 것처럼 표현하였다.


하구암리 석불입상은 불신에 굴곡이 없고, 옷주름이 도식적으로 표현된 지방 양식의 불상이다. 고려시대 지역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불상이다. 


조선 석조나한상


조선 석조나한상(石造羅漢像)은 충주박물관 실내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머리는 삭발이고 귀는 상당히 돌출되어 있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윤곽조차 알아보기 어렵다. 다만 눈썹이 매우 길게 표현되어 있다. 이 나한상은 결가부좌를 튼 자세로 특이하게도 호랑이를 안고 있다. 산신상으로 조성된 작품일 가능성도 있다.  


율릉리 석불입상


율능리 석불입상(栗陵里石佛立像)은 1982년 당시 중원군 엄정면 율능리 노곡마을 안준영의 집 뒤편 산기슭에서 무릎 이하가 매몰되고 왼쪽으로 약 10도 가량 기울어진 채 발견된 대형 석불인데, 지금은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와 전시되고 있다.


율능리 석불입상은 머리 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양감이 풍부하고, 조각수법이 우수한 불상이다. 머리는 소발에 작은 육계가 있고, 눈코입귀는 심하게 마멸되어 윤곽만을 파악할 수 있다. 목 부분도 훼손되었으나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맞춰 놓았다. 목에는 삼도가 있다.


어깨와 가슴은 풍만하고 당당하다. 불의는 통견으로 U자형 옷주름이 가슴에서 무릎 아래까지 좌우 대칭으로 겹겹이 흘러내려 양감을 느끼게 한다. 양팔과 몸체의 사이는 안쪽으로 들어가게 표현하여 몸체를 두드러지게 하였다. 허리는 잘록하고, 하체는 긴 편이며, 양다리의 윤곽이 드러나 보인다. 불신 전체가 약간 두텁게 느껴지는 옷주름에 감싸여 있으나 잘록한 허리, 양다리의 윤곽이 드러나 보이는 등 인체를 충실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높게 들어 손바닥을 앞으로 향한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무릎까지 내려서 손등을 밖으로 향한 여원인(與願印)의 변형인을 취하고 있다. 발은 표현되지 않았으며, 대좌도 파손되어 확인이 어렵다. 뒷면에는 광배를 장치했던 흔적이나 옷주름이 없다.


율능리 석불입상은 둥근 얼굴과 몸의 굴곡을 드러내는 조각수법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양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 불상이 조성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전기로 추정된다.


신만리 석불입상


신만리 석불입상(新萬里石佛立像)은 원래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 탄방마을에 있던 것을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온 것이다. 탄방마을에 사는 윤영길의 제보로 불상의 존재가 확인되었지만 사찰의 존재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신만리 석불입상의 머리는 잘려 나가고 없다. 불상의 남은 몸체의 높이는 2.55m이다. 어깨가 당당하고, 허리는 잘록하며, 중심축이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굴신상(屈身像)이다. 불의는 통견으로 옷주름이 복부까지 U자형으로 흘러내린 다음 다리의 윤곽을 드러내기 위해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면서 흘러내렸다. 오른손은 불의를 잡고 있고, 왼손은 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소매는 종아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신만리 석불입상은 단양 보국사지 석불입상(輔國寺址石佛立像)과 친연성을 보인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 유학사지 석불좌상


전 유학사지 석불좌상(傳遊鶴寺址石佛坐像)은 충주시 대소원면 장성리 부연마을의 유학사지(遊鶴寺址)로 전해지는 절터에 불두(佛頭)가 절단된 채 있던 것을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온 것이다. 유학사지 한가운데에는 이 석불좌상과 함께 석탑 한 기가 붕괴된 채로 남아 있었고, 다량의 자기편과 기와편들도 출토되었다. 유물들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들이었다. 이들 유적과 유물로 보아 유학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교로 채택한 결과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면서 많은 불상이 조성되었다. 불상은 사찰의 창건과 동시에 조성되어 신앙과 예배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유학사지 석불좌상의 높이는 87cm이다. 불두는 잘려 나갔으나 나머지 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불의는 통견이며 어깨는 약간 움츠러든 모습이다. 군의 옷주름은 왼쪽 가슴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평행곡선을 이루면서 흘러내려 결가부좌한 다리 가운데서 V자형을 이루고 있다. 양쪽 다리의 옷주름은 좌우대칭으로 간략하게 도식적으로 표현하였다. 뒷면에는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등에 파여 있는 직경 약 5cm의 홈은 광배꽂이로 추정된다. 유학사지 석불좌상은 움츠러진 어깨, 도식화된 옷주름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된 작품으로 보인다.    



고려 석조불두


고려 석조불두(石造佛頭)는 충주박물관 실내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머리는 나발에 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통통하게 살이 찐 모습이며, 이마에는 백호공이 있다. 눈은 선정에 든 듯 실눈을 떴으며, 입은 꼭 다문 모습이다. 코는 심하게 파손되어 원형을 잃어버렸다. 양식과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두로 보인다.


석조행렬도


석조행렬도(石造行列圖)는 충주박물관 실내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충주박물관에서는 고려 인물상군(高麗人物像群)으로 소개하고 있다. 계명산 절터에서 나온 이 행렬도는 조선시대 의궤(儀軌)로서 왕의 행차 때 호위 대열 일부를 부조한 문화재로 추정된다. 화강암 재질에 테두리를 두른 행렬도에는 도끼(斧), 일산(日傘), 부채(扇) 모양의 물건을 든 사람 네 명,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사람 두 명 등 모두 여섯 명의 인물상이 일렬로 부조되어 있다. 오른쪽 두 명은 두 다리가 다 드러나 있고, 나머지 네 명은 다리가 드러나 있지 않다. 석조행렬도는 조선시대 왕이 행차할 때 시위대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전 유학사지 삼층석탑


전 유학사지 삼층석탑(傳遊鶴寺址三層石塔)은 충주시 대소원면 장성리 부연마을의 유학사지로 전해지는 절터 한가운데에 붕괴된 채 남아 있던 것을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온 것이다. 유학사지에는 석탑과 함께 불두가 잘려나간 석불좌상 한 구도 발견되었다. 절터에서는 다량의 고려시대 자기편과 기와편들도 출토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교로 채택한 결과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면서 많은 석탑이 조성되었다. 석탑은 사찰의 창건과 동시에 주로 주불전의 앞 중정에 세워져 신앙과 예배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유학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基壇部)가 심하게 훼손되고, 많은 부재들이 결실되었지만 원래의 모습을 파악할 수는 있다. 기단부는 2층이다. 기단부는 하층기단(下層基壇)의 면석부(面石部)와 하대갑석(下臺甲石), 상대갑석(上臺甲石) 등이 남아 있다. 하층기단 면석부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모각하였으며, 상대갑석은 윗면에 2단의 상층기단(上層基壇) 굄대가 마련되어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상대갑석은 평박하게 치석하여 윗면에 2단의 탑신석 굄대를 마련하였다. 하대갑석과 상대갑석에 마련된 굄대는 같은 높이로 치석되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3층이다. 탑신부는 각층 모두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을 다른 돌로 결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석탑의 규모가 소형화되면서 탑신석과 옥개석을 한 돌로 치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석탑은 다른 돌로 치석하여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탑신석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 아랫면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으며, 처마부는 수평으로 치석하였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부(閤閣部)는 살짝 반전되게 치석하여 경쾌한 느낌을 주도록 하였다. 상륜부(上輪部)는 받침대 외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탑신석과 옥개석의 간략화 경향, 특히 옥개석의 처마부와 낙수면의 간략화 경향은 이 석탑이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되었음을 시사한다. 현재 남아 있는 부재들로 보아 처음 세워졌을 당시에는 규모는 작지만 상당히 수려한 모습의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탑신석과 옥개석의 치석 수법을 볼 때 유학사지 삼층석탑은 매우 우수한 장인의 손으로 조성되었으며, 고려시대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점점 소형화되는 석탑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용관동 삼층석탑


용관동 삼층석탑(龍觀洞三層石塔)은  원래 충주시 용관동 주민이 민가를 신축할 때 출토된 석탑재들을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온 것이다. 석탑은 심하게 훼손되어 기단부와 탑신부 일부 부재만 남아 있다. 파손된 부재들은 석탑 주변에 놓여 있다.


석탑이 원래 있었던 자리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석탑은 신앙과 예배의 중요한 대상으로 사찰의 가장 중심에 배치되는 조형물이다. 따라서 용관동 삼층석탑이 있던 자리에도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관동 삼층석탑은 훼손 상태가 심하기는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부재들로 볼 때 처음 건립되었을 당시에는 외관이 상당히 수려한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는 2층으로 구성되었고, 기단부의 각 층은 기단과 갑석을 갗췄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손된 부재들은 부연(副椽)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갑석 부재들임을 알 수 있다. 상층기단은 4매의 석재를 결구하였다. 상당히 넓게 모각된 우주는 높게 돌출되어 볼륨감이 풍부하다. 이러한 우주의 모각 기법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탑신부는 3개의 옥개석만 남아 있다. 옥개석 아랫면의 층급받침은 모두 4단으로 치석되었는데, 상단으로 올라갈수록 넓고 높아지도록 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독특한 기법은 이 석탑을 만든 장인이 우수한 치석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옥개석 낙수면의 경사는 비교적 급하며, 처마부에는 별도의 단처럼 갑석형(甲石形)으로 치석하였다. 처마부의 갑석형 치석 수법도 다른 석탑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맨위의 옥개석 윗면에는 원공(圓孔)이 뚫려 있어 찰주(擦柱)가 끼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용관동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충주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된다. 유학사지 석탑처럼 용관동 삼층석탑도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시대에 건립된 석탑이다.  


봉황리 사지 석탑재


봉황리 사지 석탑재(鳳凰里寺址石塔材)는 충주시 중앙탑면 봉황리 절터에서 수습된 석탑 부재로 중앙탑면 주민자치센터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최근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왔다. 현재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2개씩 남아 있는데, 석재의 재질을 볼 때 아래층과 위층은 각각 다른 석탑의 부재가 아닌가 생각된다.


탑신석 2기의 각면 모서리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그 사이에 총 8구의 불상을 부조하였다. 불상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결가부좌에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위층 탑신석 윗면에는 사리를 봉안했던 공간으로 보이는 사각의 홈이 파여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이다. 옥개석의 너비에 비해 탑신석의 너비가 빈약하여 안정감은 다소 떨어진다. 처마 아래는 평박하지만, 합각부 전각을 살짝 반전시켜 경쾌한 느낌을 준다. 


봉황리 사지 석탑재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의 일부가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봉황리 마애불상군(鳳凰里磨崖佛像群) 아래쪽에 고려시대의 절터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석탑 부재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안내판도 붙어 있지 않은 석탑 부재들이 있다. 규모가 매우 작고 소박한 석탑 부재들이다. 하나는 기단 위에 탑신석을 올리고, 그 위에 옥개석과 탑신석을 차례로 올린 형태의 석탑이다. 1층 탑신석에 우주가 모각된 것으로 보아 석탑 부재임은 확실하다. 하나는 탑신석을 2층으로 쌓은 다음 옥개석을 올린 형태이다. 1층 탑신석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어 석탑임을 알 수 있다. 아주 앙중맞고 귀여운 석탑이다.  


고려 탑상문전


고려 탑상문전(塔像紋塼)은 충주박물관 실내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탑상문전의 한가운데에는 단층기단의 삼층석탑을 배치하고, 좌우에는 결가부좌 자세로 합장하고 있는 불상을 베치하였다. 


전(塼)은 점토를 성형하여 가마 속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 만든 건축 용재이다. 전돌, 전벽돌, 벽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무덤이나 지상 건조물의 축조에 많이 사용되었다. 전은 지금도 기와와 함께 주요한 건축부재이다.


탑상문전은 목탑의 하단이나 전탑을 건립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주로 경주, 울산, 안동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탑상문전의 존재는 충주 지역에 고려시대 때 건립된 목탑이나 전탑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신만리 부도재


신만리 부도재(新萬里浮屠材)는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 족동마을 뒤쪽 산기슭에 옥개석이 반쯤 매몰된 채 발견되었다. 하대석은 파손되어 있었고, 탑신석은 마을 앞 하천 바닥에 묻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만리 부도재는 오래전에 도굴된 뒤 반출하려다가 버린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석관(石棺)과 함께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왔다. 신만리 부도재의 규모로 보아 국사나 왕사급 승려의 부도로 추정된다.


족동마을은 억정사지(億政寺址)가 있는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비석마을에서 가까운 원곡천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억정사는 고려시대 우왕, 공양왕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대지국사(大智國師) 찬영(粲英, 1328~1390)이 하산한 사찰이다. 대지국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도 매우 존경한 고승으로 알려져 있다. 대지국사가 조선의 창업 직전에 입적하자 이성계는 건국 직후 대지국사의 덕행을 추모하여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비문을 찬술하게 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억정사는 적어도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까지는 대가람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왕사나 국사를 역임했던 고승들은 말년이 되면 지방에 있는 사찰로 하산소를 정하여 내려갔다. 고승들이 하산소에서 입적하게 되면 그곳에 석조부도와 탑비를 세워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억정사로 하산한 대지국사의 탑비는 현재 신만리 비석마을에 세워져 있다. 대지국사의 탑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그의 부도도 분명 건립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부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신만리 부도재의 주인공은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문의 기록과 고려시대 석조부도 양식으로 보아 대지국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지국사탑비에는 대지국사 찬영의 구체적인 행적, 입적 직후 장례 절차와 석조부도의 건립, 시호와 탑호, 탑비의 건립과 관련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주인공이 대지국사가 맞다면 신만리 부도재는 그의 입적 직후 그를 추모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한 묘탑형(墓塔形) 기념물로 건립되었을 것이다.


신만리 부도재는 현재 석관과 하대석, 상대석, 탑신석, 옥개석만 남아 있다. 하대석은 사각형으로 면석부에 별다른 문양이 조식되어 있지 않으며, 윗면에 원형의 호형(弧形) 1단 굄대를 마련하였다. 호형 굄대 위에는 다시 직경이 더 작은 원형 굄대를 마련하였다. 원형 굄대 위에는 원구형(圓球型)의 중대석이 결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대석은 파손이 심하지만 팔각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대석 윗면에는 팔각의 탑신굄대가 마련되었다. 탑신석은 팔각형으로 아무런 문양도 조식되어 있지 않다. 신만리 부도재의 대석은 고려 말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驪州神勒寺普濟尊者石鍾)이나 양평 사나사 원증국사 석종(舍那寺圓證國石鐘) 등 석종형 부도의 대석과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은 하부에 각형 2단의 받침을 두고, 처마선을 따라 1조의 음각선(陰刻線)을 팔각으로 돌려 낙수홈을 마련하였다. 처마부는 살짝 들어 올려 경쾌한 느낌을 준다. 낙수면은 유려한 곡선형을 이루고 있다. 합각부는 높은 돋을새김으로 사각형의 내림마루를 표현하였다. 마루 끝부분에는 별도의 장식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치석 수법은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 홍융탑(檜巖寺址無學大師洪融塔)이나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 정혜원융탑(忠州靑龍寺址普覺國師塔)의 마루부 장식과 유사하다. 


신만리 부도재는 탑신부가 팔각인 것으로 보아 전체적으로 팔각당형 부도로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옥개석 마루 끝부분의 치석과 장식 수법은 고려 말기에서 조선초기에 건립된 석조물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탑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대지국사의 부도는 1390년 후반경에 건립되었고, 탑비는 조선 창업 직후인 1393년 10월에 건립되었다. 신만리 부도재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과도기적 양식이 나타나 있다.


문화리 석조부도


문화리 석조부도(文化里石造浮屠)는 원래 충주시 살미면 문화리 뒷산 계곡의 절터에 있던 것을 살미면 내사리로 옮겼다가 다시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온 것이다. 문화리 사지에 있던 사찰은 고려 후기나 조선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사세가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문화리 사지에는 2단의 석축과 기와편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석축의 규모가 작고 기와편들이 좁은 범위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작은 규모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종형 부도는 승려의 입적 후 세워지는 묘탑형 기념물이다. 문화리 사지 석종의 주인공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주석하다가 입적한 승려로 보인다. 입적 직후 불도들이 부도의 주인공을 추모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문화리 석조부도는 현재 대석(臺石)과 석종부(石鐘部)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도의 원래의 대석은 결실되었다. 지금의 대석은 부도를 옮기는 과정에서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 보강한 석재이다. 석종 하부에는 지대석이나 연화대석을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부도도 원래는 대석이 있었을 것이다. 석종 아랫면 가운데에 시공되어 있는 원공(圓孔)은 부도의 주인공을 화장한 후 수습한 유골(遺骨)이나 사리(舍利)를 안치하기 위한 시설로 보인다.


범종(梵鐘)을 모방하여 건립된 석종부는 위아래의 지름이 거의 같고, 반듯하게 치석되었다. 석종 상부에는 반원형으로 볼록하게 보주를 올려 마무리하였다. 석종형 부도는 고려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문화리 사지 석조부도도 그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인


석인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석인(石人)을 상당히 많이 수집해 놓았다. 석인은 능묘 앞에 세우는 사람 형상의 석조능묘조각상으로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의미가 있다. 석인은 방향과 시간을 맡아서 능묘를 수호하는 수면인신상(獸面人身像)인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조각이다. 석인의 배치는 묘 입구 전면에 석사자(石獅子) 좌우 1쌍, 문인석 좌우 1쌍, 무인석 좌우 1쌍, 팔각석주(八角石柱)를 세운다.


석인은 외형에 따라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으로 나뉜다. 문인석은 머리에 복두(幞頭)를 쓰고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의 문관 형상, 무인석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 무기로 무장한 무관의 형상이다. 무인석은 칼을 칼집에 넣은 채 허리에 차고 있거나, 칼을 뽑아 두 손으로 지팡이처럼 잡고 있는 점이 문인석과 다르다.


석인의 능묘 배치는 중국의 전한대(前漢代)부터 시작되었는데, 묘 앞에 석사(石祠)나 석궐(石闕)을 세우고 신도(神道)의 양쪽에 석인과 석수를 세웠다. 이러한 풍습은 후한대(後漢代)의 후장(厚葬) 풍습에 따라 일반화되어 명청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에서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능묘제도가 정비된 통일신라 초기부터 석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작품은 8세기 중엽의 전(傳) 성덕왕릉(聖德王陵)의 문무인석, 괘릉(掛陵)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의 문무인석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무인석이 사라지고 문인석만 배치되다가 14세기 중엽 충목왕릉(明陵)에 이르러 다시 문무인석이 함께 배치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공민왕릉(恭愍王陵)의 석인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문무인석은 능묘에 배치되었지만 고려시대에 비하여 조각 수법이 퇴화되고 형식화되어 상징적인 의물(儀物)로만 남게 되었다.


석인상은 능묘를 수호하는 조각작품으로 당시의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석인상을 통해서 그 당시 능묘 제도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어 한국조각사상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비


석비(石碑) 또는 비석(碑石)은 사적(事蹟)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글을 새겨 넣은 돌이다. 비(碑) 또는 빗돌이라고도 한다. 석비에 새겨 넣은 글인 금석문(金石文)은 역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사료(史料)가 된다. 우리나라의 비는 거의 대부분 석비 형태로 남아 있다. 


비석은 옛날 중국에서 묘문(廟門) 안에 세워 제례(祭禮) 때 희생으로 바칠 동물을 매어 두던 돌말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치석한 비면(碑面)에 사적을 새겨 넣어 묘소에 세우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로 당시에는 비석이라 하지 않고 각석(刻石)이라고 하였다. 비석이란 명칭이 등장한 시대는 전한(前漢) 말기나 후한 초다.


진대(秦代) 이전의 각석으로는 하(夏) 우왕(禹王)이 치수공사(治水工事) 때 세웠다는 구루비(岣嶁碑, 河南省 衡山), 주(周) 목왕(穆王)이 '길일계사(吉日癸巳)'의 4자를 새긴 단산각석(壇山刻石) 등이 있으나 진위(眞僞) 여부는 확실치 않다. 진나라 때는 시황(始皇)이 세운 추역산(鄒忌山), 태산(泰山)의 각석 등이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석비는 서기 85년에 세워진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이고, 그 다음이 414년 압록강변에 세워진 고구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광개토왕비)이다. 신라 때 세워진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창녕(昌寧) 척경비(拓境碑)도 오래된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많은 비석이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비석이 유행하였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묘소나 공공장소에 많이 세워지고 있다. 

비석에는 묘비(墓碑)를 비롯하여 능비(陵碑), 신도비(神道碑), 기적비(紀蹟碑), 정려비(旌閭碑), 송덕비(頌德碑), 애민비(愛民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기념비, 순수비 등이 있다. 그 밖에 성곽(城廓)이나 묘정(廟庭), 서원(書院), 유허(遺墟), 대단(臺壇), 빙고(氷庫), 교량, 제지(堤池) 등에 세우는 기적비도 있다.

 

왕공이나 부귀한 사람들의 비석은 대개 비신(碑身)과 이수(螭首), 귀부(龜趺)로 구성되어 위엄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서민층 묘소에는 이수와 귀부 없이 비신만을 세우는 경우도 많다. 서민층의 비석처럼 자연석의 한 면을 갈아서 글을 새기고 위를 둥글게 한 것을 묘갈(墓碣) 또는 갈(碣)이라고 한다.


망주석


망주석(望柱石)은 
무덤 앞에 놓은 혼유석(魂遊石)의 좌우에 하나씩 세우는 돌기둥인데, 8각 기둥의 윗부분을 보주형두(寶珠形頭)로 만들어 기단 위에 올린다. 무덤을 수호하는 의미와 함께 기념적인 기능도 갖고 있는 석조물이다.  망주석을 망두석(望頭石), 망주석표(望柱石表), 석망주(石望柱), 석주(石柱), 망주라고도 한다. 또 화표주(華表柱)라고도 부른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때까지는 전죽석(錢竹石)이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는 환표 또는 교오주(交午柱)라고 했다.  


망주석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멀리서 바라보아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표지였을 것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망주석은 통일신라에 전래되어 유행하기 시작했다. 8세기경에는 왕릉의 석물 배치가 정비됨에 따라 묘제석물(墓制石物)로 자리를 잡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왕릉과 상류층의 묘에서 망주석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망주석은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추정되는 괘릉(掛陵)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의 능원(陵園)에도 망주석이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벼슬아치의 무덤에서도 거의 예외없이 망주석이 발견되고 있다.


망주석 등  본래 무덤을 장식하는 석물들은 신분에 따른 규제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광기(廣記)' 분영조(墳瑩條)에 나오는 규정을 적용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이후에는 이 규정과 관계없이 단순 장식물로서 석물들이 설치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민간인의 무덤에도 망주석을 세우기도 한다.


신매리 후처 선돌


신매리 남편 선돌


신매리 선돌(新梅里立石)은 충주시 살미면 신매리에 있던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온 것이다. 살미면 신매리에는 모두 3기의 선돌이 있었다. 1기는 충주와 단양, 청풍을 잇는 국도변 선돌백이마을 이재황(李在璜)의 집 대문 옆 담의 일부로 쓰이고 있었고, 다른 1기는 선돌백이마을에서 서쪽으로 1.5㎞ 떨어진 매남마을 이관선(李寬善)의 밭둑에 있었다. 또 다른 1기는 매남마을에서 1㎞ 정도 더 떨어진 대문산 언덕에 있었다. 3기의 선돌 가운데 선돌배기마을과 매남마을의 선돌은 충주댐 수몰선 위인 살미면 내사동과 신매리의 경계 지점인 국도변으로 옮겨져 복원되었다가 1994년 다시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왔다. 


매남마을 선돌은 높이 140㎝, 폭 53㎝, 두께 약 50㎝이다. 남자 성기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 남편 선돌로 불린다. 선돌백이마을 선돌은 후처 선돌이라고도 한다. 노출된 크기는 높이 214㎝, 최대 폭 110㎝, 두께 62㎝이다. 전체 높이는 지표 위에서 확인된 214㎝에 발굴에서 확인된 길이를 더한다면 최소한 4m는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처 선돌의 횡단면은 약간 일그러진 평행사변형이다. 대문산 본처 선돌은 조사 당시 약 40° 정도 언덕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바위 바닥 위에 지름 20㎝ 정도의 돌 3~4개를 받치고 선돌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본처 선돌의 전체 높이는 175㎝, 아랫부분의 폭은 35㎝이다.


선돌(立石, Menhir)은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시대에 발달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상징물이다. 선돌은 고인돌과 더불어 무덤의 표지, 마을 어귀에 세워져 마을의 수호신, 이정표 등의 역할을 하였으며,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선돌은 흔히 남녀 쌍을 이루어 조성된다. 남성 선돌은 할아버지 선돌, 남편 선돌, 오라비 선돌로 불린다. 여성 선돌은 할머니 선돌, 본처 선돌, 누이 선돌, 시앗 선돌 등으로 불린다. 남성 선돌은 끝이 비교적 뾰족하며, 여성 선돌은 끝이 뭉툭한 것이 많다. 


충주읍성 석누조


충주읍성 석누조(忠州邑城石淚槽)는 충주박물관 실내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석누조는 배수구의 물이 밖으로 잘 흘러 빠지도록 성벽, 다리, 기단 끝 등에 설치한다. 석누조를 우리말로 물홈돌이라고 한다. 석누조는 성문의 홍예(虹霓) 위쪽 좌우의 벽면에 약간 튀어나오도록 설치하여 낙수가 벽을 타고 흐르는 것을 방지해준다. 중국에서는 석누조를 용두(龍頭)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충주읍성 석누조는 충주시 성내동 가구점골목 초입 보문당 뒤편에서 발견되었다. 석누조가 발견된 곳은 충주읍성의 북문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충주 인근의 성(城)에 석누조가 남아있는 곳은 덕주산성의 남문과 북문, 조령의 제1관문과 제2관문 그리고 제3관문 등이다. 충주읍성 석누조는 덕주산성이나 조령관문의 석누조보다 훨씬 커서 충주읍성의 북문이 다른 성문보다 규모가 월등하게 컸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예성신방석


예성신방석(藝城信防石)은 충주박물관 실내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예성신방석은 1978년 예성문화연구회에서 발견하여 충주박물관에 기증한 고려시대의 유물이다. 예성신방석 앞면에는 태극(太極) 문양(紋樣)중심으로 직경15cm의 8엽 연화(蓮花紋)문을 새기고, 그 좌우에는 화려한 당초문(唐草紋)을 배치하였다. 예성신방석은 고려시대 충주의 별호인 예성(藝城)을 증명하는 자료이며, 또한 태극 문양이 석조미술에 응용된 예로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삭조문화재는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석조문화재는 그 지역의 역사와 전설, 설화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석조문화재를 다른 장소로 옮기는 순간 그 지역의 역사와 전설, 설화도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 


석조문화재들을 원래 있던 장소에서 옮겨 야외전시장에 모아 놓은 충주박물관의 문화재 정책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석조문화재들을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모아 놓고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충주박물관은 석조문화재들은 원래 있던 장소에 되돌려 놓는 것이 옳다고 본다. 


마을 주민들도 자기 고장의 역사와 전설, 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는 석조문화재들에 대한 반환운동을 벌여야 한다. 석조문화재들과 함께 자신들이 나고 자란 고장의 역사와 전설, 설화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2016. 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