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떠나 백두산을 향해 북쪽으로 치달리던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오대산 두로봉에 이르러 서쪽으로 한강기맥(漢江岐脈)을 분기한다. 한강기맥은 백두대간 두로봉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끝나는 산줄기이다. 백두대간 두로봉을 떠난 한강기맥은 오대산 상왕봉과 비로봉, 호령봉, 계방산, 보래봉, 청량봉을 지나 삼계봉에 이르러 남서쪽으로 치악지맥(雉岳枝脈, 영월지맥+백운지맥)의 가지를 친다.
치악지맥은 한강기맥 삼계봉에서 태기산, 치악산 비로봉과 향로봉, 백운산, 미륵산을 지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섬강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합수머리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치악지맥의 백운산과 미륵산 중간쯤에서 남동쪽으로 천등지맥(天登枝脈)이 갈라진다. 천등지맥은 십자봉, 뒷산, 옥녀봉, 오청산,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 부대산, 주봉산을 지나 충주호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천등지맥의 옥녀봉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지는 산줄기가 하나 갈라지는데 이름하여 묵봉분맥(墨峰分脈)이다. 묵봉분맥은 천등지맥 옥녀봉에서 남서쪽으로 갈기봉, 갈미봉, 국사봉, 묵봉산을 지나 청계산에 이른 다음 약수봉, 노루봉, 응봉산, 응봉으로 뻗어가 남한강에서 끝난다. 묵봉산에서는 남쪽으로 꾀꼬리봉, 응주산을 지나 남한강에 이르러 끝나는 분맥이 갈라진다. 청계산의 정남방에는 향로봉이 앉아 있다.
풍수설에 따라 설명하자면 청계산(淸溪山, 396m)은 안산, 묵봉산에서 응주산에 이르는 산줄기는 좌청룡, 약수봉에서 응봉에 이르는 산줄기는 우백호 형상이 되겠다. 청계산 앞에는 향로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천하의 명당이 아니겠는가!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계산 남쪽 기슭에는 창건 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청룡사지(靑龍寺趾)가 있다. 청룡사에 대해서는 고려시대의 창건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먼 옛날 한 도승(道僧)이 이 근처를 지나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급히 나무 밑으로 피했다. 이때 공중에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다가 땅에 떨어뜨렸는데, 한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다가 청계산 위로 올라갔다. 용이 사라지자 여의주도 환하게 밝은 빛을 내다가 사라졌으며, 비도 멈추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도승은 산세를 두루 살핀 다음 그곳이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길지(吉地)임을 깨달았다. 용의 힘이 꼬리에 있다고 믿은 도승은 용미지(龍尾地)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청룡사는 고려 말의 고승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脩, 1320~1392)가 은거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 보각국사는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된 뒤 불교 경전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계율을 엄격하게 지켜 당대의 고승으로 이름을 날렸다. 또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던 그는 공민왕과 우왕으로부터 높은 예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 태조 이성계로부터도 깊은 존경을 받았다. 보각국사가 청룡사에 은거하자 이성계는 이곳에 대사찰을 세우도록 했다. 1392년(조선 태조 1) 보각국사가 입적하자 이성계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왕명으로 감독관과 장인을 보내 왕릉에 준하는 승탑을 세우도록 했다. 이후 청룡사는 조선시대의 명찰로 조선 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조선조 말기는 민비를 등에 업고 민씨네가 득세하던 세상이었다. 판서 민대룡(閔大龍)은 명당으로 알려진 청룡사 윗자리에 자기 소실의 묘를 썼다. 풍수설에 따르면 명당 부근에 절이 있으면 좋지 않다는 설이 있어 민대룡은 청룡사를 없애기로 했다. 당시 오량리에는 허씨들이 살고 있었다. 허씨들은 세력이 커서 청룡사의 운영권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을 없애는 일이 쉽지 않았다. 민대룡은 몰래 청룡사의 승려에게 많은 돈을 주고 절에 불을 지르게 하였다. 그 승려는 절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청룡사가 불길에 휩싸이자 지붕에서 살던 큰 뱀이 내려와 불을 지른 사람 앞으로 떨어지자 한 사람은 놀라 자빠져 피를 토하고 급사했으며, 또 한 사람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민씨네 산소에 벌초를 하러 오는 사람은 죽거나 큰 해를 입었기 때문에 결국 묵모이로 이장을 했다고 한다.
청룡사지에서는 여러 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현재 청룡사지에는 보각국사탑(普覺國師塔, 국보 제197호)과 보각국사탑비(普覺國師塔碑, 보물 제658호),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등(普覺國師塔前獅子石燈, 보물 제656호)의 유물이 남아 있다. 그외 청룡사 위전비(靑龍寺位田碑,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42호)와 석종형 승탑(石鐘形僧塔,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4호)도 있다.
청룡사 위전비(앞면)
청룡사 위전비(옆면)
충주 청룡사 위전비(忠州靑龍寺位田碑,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42호)는 주차장에서 청룡사지 부도전으로 오르는 오솔길 초입에 있다. 숲이 우거진 응달의 습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귀부(龜趺)와 옥개(屋蓋)에는 이끼가 많이 끼어 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비석이다.
청룡사 위전비는 1692년(숙종 18)에 청룡사 중창을 위한 경비를 충당하는 데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비석이다.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수량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청룡사의 사세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비문에는 2~3차례 추가로 기록한 부분도 있다.
청룡사 위전비는 귀부와 비신(碑身), 옥개로 이루어져 있다. 귀부는 폭이 좁은 반면에 높이가 다소 높은 편이다. 거북의 목은 짧고 두꺼워서 다소 둔중한 느낌이 든다. 이목구비의 윤곽만 소략하게 조각한 얼굴은 귀갑에 바짝 붙어 치켜든 모습을 하고 있다. 발과 꼬리는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귀갑은 같은 문양을 반복해서 도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귀갑의 상부 중앙에는 장방형의 홈을 파고 주변을 돋우어 비신을 꽂을 수 있도록 했다.
옥개는 우진각 지붕 형식이다. 옥개의 오른쪽 귀퉁이는 떨어져 나갔다.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용을 새겼고, 처마 끝은 약간 반곡되어 있다. 용마루 양쪽 끝에는 두 마리의 용을 서로 마주 보게 새겼고, 각 추녀마루 끝에도 용을 새겼다. 지붕면 아래쪽에는 구름, 위쪽에는 뒤엉켜 있는 용신을 조각했다. 옥개에 용을 새긴 것은 비석에 이수(螭首)를 얹는 고식(古式)의 기법과 지붕을 얹는 조선시대의 기법이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른 비석에서 보기 어려운 독창적인 것으로 조선 후기의 양식이 반영된 것이다.
비신은 장방형의 판석으로 사면에 모두 종서로 글을 새겼다. 맨 앞에는 ‘청룡사위전비기(靑龍寺位田碑記)’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옥개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청룡사 위전비의 기록은 조선 후기 사원경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청룡사지 육각형 승탑 부재
청룡사지 석종형 승탑
청룡사지 석종형 승탑(靑龍寺址石鐘形僧塔,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54호)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각국사탑으로 진입하는 능선에 육각형 승탑 부재와 함께 세워져 있다. 이 승탑은 청룡사가 조선 후기까지 사세를 이어왔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승탑의 주인공은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 청룡사에 주석한 승려로 추정된다.
조선 개국 초기 숭유억불정책으로 위축되었던 불교는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서서히 부흥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중창되었고, 승려들의 위상도 높아져 전보다 높은 예우를 받았다. 승려들이 입적하면 기념비적인 조형물로 부도의 건립도 일반화되었는데, 특정 사찰에서 오래 주석하였거나 말년을 보내다가 입적할 경우 이를 기념하여 부도를 세워주었다.
청룡사지 석종형 승탑은 대석부와 석종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방형의 판석형 석재를 마련하고, 그 위에 대석을 놓아 석종을 받치도록 했다. 대석 상부에는 1단의 굄대를 마련하였고, 상면에는 둥글고 낮은 홈을 파서 석종이 견고하게 고정되도록 했다. 석종은 배흘림 원통형으로 상부와 하부의 지름이 거의 같다. 석종의 상부에는 연주문대를 장식하고, 그 위에 원형의 보주받침대를 마련하였다. 보주받침대 위에는 원형의 낮은 받침대를 마련하여 보주를 받치도록 했다.
석종의 표면에는 주인공의 명문이 음각된 흔적이 있지만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일설에는 ‘적설당사리탑(寂雪堂舍利塔)’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고운당사리탑(孤雲堂舍利塔)'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청룡사지 승탑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석종형 양식의 부도이다. 명문이 마모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석종형 승탑은 바로 옆에 남아 있는 육각형 승탑 부재와 함께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전경
청룡사지 석종형 부도 바로 위에는 청룡사지 보각국사탑(普覺國師塔, 국보 제197호)과 보각국사탑비(普覺國師塔碑, 보물 제658호),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등(普覺國師塔前獅子石燈, 보물 제656호) 구역이 있다. 맨앞에는 사자석등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 보각국사탑과 보각국사탑비가 차례로 세워져 있다.
부도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국사(國師)나 왕사(王師)를 역임하였거나 그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았던 고승들을 위해 세워주었던 사후 기념비적인 묘탑(墓塔) 조형물이다. 조선 전기는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계가 위축되면서 부도의 건립은 드물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청룡사지 보각국사탑과 사자석등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상당한 관심을 갖고 직접 감독관과 장인을 파견하여 1392년 12월 경에 세운 것이다.
부도를 세울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앞에 석등을 배치한 경우는 드물다. 다만 조선 초기에 세워진 일부 부도들은 왕릉 석조물 배치법의 영향을 받아 석등이 배치되기도 했다. 사자석등은 공양의 의미를 더하기 위하여 부도 앞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보각국사탑비는 부도와 석등보다 다소 늦게 세워졌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비문을 찬하고, 비석에 글씨를 새기는 과정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청룡사지 사자석등
청룡사지 사자석등
청룡사지 사자석등은 보각국사탑과 배례석(拜禮石)이 있는 석축단 바로 아래에 세워져 있다. 이 석등은 1976년 부도와 함께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상륜부는 사라지고 없지만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부도보다 한단 낮은 곳에 석등을 배치한 것은 왕릉의 석물 배치법을 따른 것이다. 왕릉에 준한 석물의 배치는 부도의 주인공인 보각국사가 바로 조선 태조 이성계로의 사부였기 때문이다.
사자석등은 기단부, 화사석(火舍石),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아래쪽에 사각형의 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웅크린 자세의 사자상을 놓은 다음 사각형의 낮은 간주석(竿柱石)을 올렸다. 석등 기단부에 사자상을 배치한 것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일부 석등에서 발견된다. 사자상 위에는 간주석을 받치기 위한 굄대를 마련하였다.
간주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겼다. 상대석은 8엽의 앙련문(仰蓮紋)을 아름답게 돋을새김하여 장식했다. 상대석 상부에는 사각형의 갑석형(甲石形) 받침을 마련하였다. 화사석은 앞뒤로 두 개의 사각형 화창(火窓)을 냈고, 모서리에는 원주((圓柱)를 모각했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낮은 받침과 추녀를 새겼으며, 처마부를 반전시켜 경쾌한 느낌을 주도록 했다. 옥개석 상면은 볼록하게 호형(弧形)으로 치석하였고, 마루부는 반원형의 돌기대(突起帶)를 조식했다. 옥개석 상부에는 상륜부를 결구한 홈이 파여 있다. 옥개석의 네 귀퉁이에는 작은 꽃을 돌출되게 조각해 놓았다.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모서리선이 두터운 것은 고려시대의 옥개석 양식이 반영된 것이다.
청룡사지 사자석등은 1392년 12월 경 보각국사탑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구체적인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는 편년 기준 석등이라는 점과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 홍융탑(檜巖寺址無學大師洪融塔, 보물 제388호)과 함께 왕릉의 석물 배치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석등의 하대석에 조선 초기에는 그 예가 드문 사자상을 배치하였다는 점에서 보각국사에 대한 이성계의 특별한 배려를 짐작할 수 있다. 석등을 승탑, 탑비와 나란히 세운 것도 조선시대의 석물 배치방식임을 알 수 있다.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사자석등과 배례석 바로 뒤에 세워져 있다. 보각국사 혼수는 고려 공민왕과 우왕으로부터 높은 예우를 받았으며, 조선 태조 이성계는 그를 사부의 예로써 대했다. 1392년 7월 이성계가 조선 태조에 즉위하자 혼수는 축하를 표한 뒤 바로 병을 핑계 삼아 충주 청룡사로 내려와 주석했다. 1392년 9월 18일 혼수가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자 그의 문도들은 연회암(宴晦庵) 북쪽 산기슭에서 다비하고 유골을 수습하였다.
이성계는 혼수의 부음을 듣고 신하를 보내 조문하고, 왕명으로 감독관과 장인을 보내 부도를 건립하게 했다. 이성계는 혼수의 시호(諡號)를 보각(普覺), 탑호(塔號)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내리고, 1392년 12월 청룡사 북서쪽 능선에 부도를 세워 유골을 안치토록 하였다.
보각국사탑은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부도는 크게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평면 팔각의 지대석과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76년 복원 당시 지대석 밑에서 석실(石室)이 발견되었다. 보각국사의 사후 그를 다비한 뒤 유골을 수습하여 지대석 밑에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대석은 하부에 갑석형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단판 16엽의 연화문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연화문 안에는 좌우 대칭의 꽃봉오리 또는 불꽃 문양을 화려하게 조식했다. 중대석은 평면 팔각의 각면에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운룡문(雲龍紋)과 사자상을 생동감 있게 돋을새김하였다. 사자상과 용문은 수호의 의미가 있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대칭을 이루도록 연화문을 조식하였고, 상부에는 갑석형 받침을 마련하여 탑신석을 받치도록 했다. 상대석 상면에는 팔각의 홈을 마련하여 팔각형의 탑신석을 끼워 고정되도록 했다. 탑신석 팔각 모서리에는 용(龍)이 기둥을 감싼 형상을 조각했다. 이런 형태의 기둥 양식은 중국 원나라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명대(明代)에 크게 유행했다. 탑신석 각 면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신장상을 새겼다. 신장상은 부도에 대한 수호의 의미가 있다.
옥개석의 아랫면에는 넓은 받침과 추녀, 사래(蛇羅)가 모각되어 있다. 처마부는 살짝 반전되어 경쾌한 느낌을 주며, 낙수면은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면서 처마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높게 돌출시킨 마루부 아래쪽에는 용두를 새겨 마치 용이 마루를 타고 하강하는 듯한 형상이다. 마루부에 용두를 새긴 예는 조선 초기 무학대사 부도 등 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승려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옥개석 상면에는 단판의 연화문을 새겨 상륜부를 받치도록 했다. 상륜부는 일부 부재를 잃어버려 원형을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보륜과 화염형 보주 등이 남아 있어, 여러 부재들로 구성된 원래의 상륜부는 상당히 높고 장엄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은 장대석으로 기초를 견고하게 한 뒤 석등과 배례석, 탑비와 함께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사자석등과 보각국사탑 사이에 1단의 석축을 둔 것은 왕릉의 석물 배치법과 유사하다. 보각국사탑은 조선 건국 직후에 건립된 부도로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있고, 회암사지 무학대사 홍융탑과 함께 조선 초기의 부도 양식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있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는 보각국사탑의 뒤편에 세워져 있다. 탑비는 방형의 대좌 위에 비신을 세운 간결한 양식이다. 길이 157㎝, 높이 23㎝의 장방형 화강암으로 만든 대좌는 아무런 문양 없이 윗면에 2단각형의 굄대를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있다. 비신은 높이 235㎝, 너비 115㎝, 두께 20㎝로 윗면 좌우 양쪽을 잘라낸 귀접이 형태이다. 전통 석비의 양식에서 벗어난 매우 간결한 수법의 비석이다.
보각국사탑비는 왕명으로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건립했다. 비문은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짓고, 글씨는 승려 천택(天澤)이 썼다. 제액은 ‘보각국사지비(普覺國師之碑)’라 횡서하여 전자로 쓰고, 비제는 ‘유명조선국보각국사비명병서(有名朝鮮國寶覺國師碑銘竝書)’라 했다.
보각국사 혼수는 그 옛날 소태면 오량리 청계산을 어찌 알고 내려온 것일까? 당시 이곳은 심심 두메산골이었을 텐데 말이다.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소위 명당을 찾아온 것일까? 쿠데타로 고려 왕실을 도륙하고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가 미워서였을까? 보각국사 혼수의 마음을 그 누가 알리요~!
201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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