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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찾아서

林 山 2016. 10. 26. 16:44

통일신라시대 중원경(中原京)의 치지(治地)였던 충주는 한반도의 중심지로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로 인해 충주는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의 쟁탈지가 되어 왔다. 충주를 점령하는 나라가 곧 한반도의 패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한반도의 중심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남한강변의 중앙탑공원에는 대형 석탑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塔坪里七層石塔, 국보 제6호)이 세워져 있다. 이 석탑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린다.


중앙탑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설화가 있다. 통일신라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은 국토의 중심지를 알아보기 위해 국토의 남쪽과 북쪽 끝에서 한 날, 한 시에 같은 보폭을 가진 잘 걷는 사람을 정하여 출발시켰다. 여러 차례 반목했음에도 두 사람은 항상 이곳에서 만났다. 그래서 이곳에 석탑을 세우고 국토의 중앙임을 표시했다고 한다. 


중앙탑면에는 ‘안반내’라는 지명이 있다. '반내(半川)'는 남쪽과 북쪽 끝에서 반이 되는 내라는 뜻이다. 본래 '안반내'는 ‘한반내’였으며, 이는 한반도의 반 곧 한반도의 중앙을 뜻하는 것이다. 그럴 듯한 이야기다.


탑평리 칠층석탑(남쪽)


탑평리 칠층석탑은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에 높이 쌓은 방형의 토단(土壇) 위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토단을 높게 조성한 것은 홍수 때 남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석탑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토단과 기단부(基壇部), 탑신부(塔身部), 상륜부(上輪部)로 이루어져 있다. 석탑의 높이는 14.5m로 통일신라시대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석재는 화강암이다. 


탑평리 칠층석탑(서쪽)


기단부는 상하 이층기단으로 결구되어 있다. 하층기단(下層基壇)은 판석형 석재 여러 매를 결구하였으며,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모각했다. 하대갑석(下臺甲石)은 상면을 경사지게 만들었으며, 윗면에 호각형(弧角形)으로 2단의 상층기단(上層基壇) 굄대를 마련하였다. 상층기단 면석부에도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다. 상대갑석(上臺甲石)은 아랫면에 높은 부연(副椽)을 마련하였다. 상대갑석 윗면 합각부(閤閣部)는 낮은 돋을대를 만들었고, 가운데에는 사각형으로 각호각형(角弧角形)의 3단 굄대를 마련했다. 그 위에는 별도의 높은 탑신석받침대를 놓았다. 이 받침대는 탑신부의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탑평리 칠층석탑(남쪽)


탑신부는 2층 탑신석(塔身石)부터 급격한 체감비례(遞減比例)를 보이고 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의 결구 수법이다. 2층 이상은 일정한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탑신석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도 위로 올라가면서 일정한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어 안정감을 준다. 층급받침은 5단이며, 처마부는 수평으로 치석되었다.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부 끝에는 살짝 반전(反轉)을 주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합각부 처마부에는 풍탁(風鐸)을 달았던 원공이 뚫려 있다. 풍탁을 달았던 당시에는 석탑의 외관이 화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탑평리 칠층석탑(서쪽)


상륜부는 2층의 노반(露盤)이 받침대 구실을 하고 있고, 그 위에는 볼록한 원주형 석재가 있으며, 꼭대기에는 앙화석(仰花石)이 올려져 있다. 상륜부 부재들은 최초 건립 당시의 부재인지는 알 수 없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인 1917년 탑평리 칠층석탑에 대한 보수 공사를 할 때 6층 탑신석 상면에서 석재 뚜껑으로 덮힌 사리공(舍利孔)이 발견되었다. 당시 사리공에서 목제 사리함(舍利函, 奢利函)과 은제 사리호(舍利壺), 거울(古鏡) 2매, 경문(經文)으로 추정되는 종이, 유리병 등이 수습되었다. 기단 아래 석탑의 기초에서도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사리장치 안에는 정교한 황동제개부호(黃銅製蓋付壺)가 있었다. 


기단 아래에서 나온 사리구는 통일신라시대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6층 탑신석에서 나온 사리구는 고려시대에 석탑을 보수할 때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대형 석탑임에도 치석 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결구 수법도 정연하다. 또, 굄대를 마련하고 층급받침을 5단으로 치석한 점 등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이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복련문 석등 하대석


칠층석탑의 남쪽 앞에는 석등(石燈)의 하대석(下臺石)으로 보이는 8각 연화대석(蓮華臺石)이 남아 있다. 석탑과 석등은 보통 한 쌍으로 건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칠층석탑 일대에 대한 여러 차례에 걸친 지표와 발굴 조사 결과 ‘~사(寺)’명(銘)의 기와편을 비롯해서 삼국시대와 그 이후에 제작된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편들이 출토되어 고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음이 드러났다. ‘~사’명의 기와편 출토로 이곳에 사찰과 많은 건물지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사찰명과 칠층석탑의 건립 시기를 추정할 만한 결정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석탑은 일반적으로 사찰 가람에서 신앙과 예배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건립된다. 보통 사찰의 주불전 앞 중정에 석탑과 석등을 세운다. 그외 석탑은 표식적(標式的) 기능이나 비보적(裨補的) 성격으로도 건립되었다. 탑평리 칠층석탑이 고대의 주요 수로였던 남한강변의 높은 토단 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이 석탑은 불교적인 신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표식적, 비보적 기능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의 구체적인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토단(土壇)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2016. 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