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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최씨 선조들의 사당 영모사를 찾아서

林 山 2016. 10. 25. 16:03

나의 외가는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내동이다. 내동을 안골이라고도 부른다. 친가인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월현에서 외가엘 가려면 용천산을 넘어야 했다. 내 어머니는 충주 최씨(忠州崔氏) 가문 장손의 무남독녀였다. 나의 외가는 소위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부자였다. 


외조부는 측실을 얻은 뒤 외조모를 내쫓았다고 한다. 무남독녀 어머니를 놔두고 눈물을 머금고 쫓겨난 외조모는 개가하여 새남편으로부터 지극한 사람을 받으며 여러 남매를 두었다. 나는 외조모를 생전에 단 한 번 만나 뵌 적이 있다. 


외조부는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만주로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외조부는 대량의 아편을 만주로 가져갔는데, 금전을 노린 사람에 의해 살해를 당한 것이 틀림없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같은 마을에서 외조부와 함께 만주로 떠났던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홀연히 홀로 돌아온 그 사람은 많은 전답을 사들였다고 한다. 외가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외조부에 대하여 물었으나 횡설수설 모호한 이야기만 하더란다. 외가 사람들은 그 사람을 살인범으로 의심했으나 물증이 없어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충주 최씨네 장손인 외조부가 행방불명이 되자 외가 사람들은 어머니를 문맹의 편모에 찢어지게 가난한 아버지에게 팔아치우듯이 시집을 보냈다. 어머니가 상속받았어야 할 엄청난 토지는 4명의 작은외할아버지들이 분할 상속을 받았다. 외가 사람들이 왜 어머니를 아버지 같은 가난하고 무능한 사람에게 그리도 급하게 시집보냈는지 그 이유를 나중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생각을 해보자. 외가 사람들이 재산은 다 차지하더라도 어머니를 좀 번듯한 집안으로 출가시킬 수는 없었을까? 하긴 그렇게 했다면 지금의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어머니가 마땅히 상속받았어야 할 그 막대한 토지와 맞바꾼 댓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안골에는 내 어머니의 조상인 충주 최씨의 조상을 모신 영모사(永慕祠,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9호)가 있다. 내 어머니의 조상에 대해 공부도 할 겸 영모사에 들렀다. 어머니의 조상은 어떤 분들이었을까?      


추원교


안골 품골소류지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는 추원교(追遠橋)가 놓여 있다. '추원(追遠)'은 먼(遠) 조상(祖上)의 덕을 추모(追慕)하여 그 공양(供養)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추원교를 건너면 영모사 바로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영모사 전경


충주 최씨 시조 최승 신도비


충주 최씨 중시조 최공의 기적비


영모사는 846년(문성왕 8) 당(唐) 무종(武宗) 6년 발해청해(渤海淸海)에서 병마사(兵馬使)로 신라에 들어와 충주 최씨(忠州崔氏)의 시조가 된 최승(崔陞) 등 선조 8위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이다. 영모사의 건립 연대는 신라시대 말기라고 한다. 


최승은 초명이 최우(崔偶) 또는 안잠(安潛)이고, 본관은 당나라의 청하(淸河)이다. 당나라에서는 검교태부(檢校太傅), 시중청주자사(侍中青州刺史), 평노군절도관찰사(平盧軍節度觀察使), 압신라발해양번등사(押新羅渤海兩蕃等使)를 역임했고, 태자소사박능군개국후에 봉해져 식읍 천호(千戶)를 받았다. 


846년 신라 말기 지배층의 가렴주구와 심한 흉년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조정에 반기를 들고 도처에서 봉기했다. 정치,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면서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과 자연재해로 기아에 신음하던 농민들은 초적이 되거나 유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중앙 진골 귀족 간의 잦은 정쟁으로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등은 사벌주(沙伐州, 상주)를 근거지로 하여 썩을 대로 썩은 신라 조정 타도를 목표로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 농민 봉기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최승은 당 무종의 명을 받고 신라에 들어와 백성들의 봉기를 진압하였다. 


889년(진성여왕 3) 최승은 원종과 애노 등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臺夫)에 올랐고, 그후 신라의 예성(藝城, 충주)에 그대로 머물러 대대로 살았다. 최승의 후손들은 자연스레 본관을 충주로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충주 최씨의 상계가 실전되어 계보를 파악할 수 없게 되자 후손들은 호장(戶長)을 지낸 최공의(崔公義)를 중시조 제1세로 하여 충주 최씨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최공의는 고려 충선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냈고, 중원백(中原伯)에 봉해졌다. 현재 7대손인 총제공파(摠制公派), 양정공파(良貞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등이 최공의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반면, 한림공파(翰林公派)는 최고(崔暠)를 최공의와 동격으로 기록하고 그를 1세조로 하고 있다. 


총제공파는 강북파(江北派), 용인파(龍仁派), 진천파(鎭川派)등 27개 파, 양정공파는 불정파(佛頂派), 천안파(天安派) 등 14개 지파, 전서공파는 양주파(楊州派), 파주파(坡州派) 등 5개 파로 갈라졌다. 한림공파는 음성파(陰城派), 하담파(荷潭派) 등 9개 지파로 나뉘어졌다.


내 어머니의 함자는 최 재(在) 자, 분(分) 자로 충주 최씨 시조 최공의의 7대손 총제공파에서 나온 강북파 24세손이시다. 강북파는 동량면 안골이 남한강의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최홍사 비


최홍사(崔弘嗣, 1043 ~ 1122)는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국로(國老)이고, 시호는 정경(貞敬)이다. 집안이 가난하고 미천하였으나 학문에 매진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고, 문장을 잘 지어 명성이 높았다. 습유(拾遺), 보궐(補闕) 등을 지낸 후 황해도 평주(平州, 平山)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폈다.


최홍사는 1086년(선종 3) 상서예부시랑, 1096년(숙종 1) 전중감(殿重監), 1011년 예부상서 서북면병마사, 1012년 상서우복야겸삼사사(尙書右僕射兼三司使), 1103년 서북면병마사겸지중군병마사(西北面兵馬使 兼知中軍兵馬事) 등을 역임하였다. 1104년 송(宋)나라에 사은사로 간 최홍사는 송나라 사람들로부터 예절이 법도에 맞다는 칭찬을 받았고, 송 황제로부터 금폐(金幣) 등을 하사받았다. 


최홍사는 1105년(예종 1년) 검교태위수사도(檢校太尉守司徒),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겸태자태보(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兼太子太保), 판상서예부사수국사(判尙書禮部事守國史) 등을 거쳐 1107년 권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權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에 제수되어 지금의 수상에 해당하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1109년 예종이 재상들을 불러 윤관(尹瓘)이 쌓은 9성(城)의 반환문제를 논의할 때 최홍사는 이를 돌려줄 것을 건의하였고, 이어 윤관과 오연총(吳延寵) 등이 여진에게 패배한 죄를 극론(極論)하였다. 1110년 판이예부사(判吏禮部事)가 되었고, 벼슬이 추성찬화공신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감수국사상주국(推誠贊化功臣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監修國史上柱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그가 죽은 뒤 영모사에 배향되었다.


최우청 신도비


최우청(崔遇淸, ?~1184)은 향리로 고려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진례현위(進禮縣尉)가 되었으며, 명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최우청은 그 부(府)의 전첨(典籤)으로 있었다. 명종이 즉위한 뒤에는 옛날 모시던 관료라 하여 우대를 받고 승진을 거듭해 대간(臺諫)이 되었다.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자 최우청은 병마부사(兵馬副使)로 종군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조위총의 반란을 집압하고 개선하자 국자좨주(國子祭酒),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발탁되었고, 얼마 뒤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나갔다. 이때 정주도령(靜州都領) 순부(純夫)와 낭장(郞將) 김숭(金崇) 등이 여러 차례 반란을 도모하자 최우청은 정주 사람들을 설득해 순부 등을 죽였다. 이에 왕은 조서를 내려 표창과 함께 판위위사(判尉衛事)를 제수하였다가 추밀원사(樞密院使),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로 승진시켰다. 수사공(守司空),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퇴직한 뒤 명종 14년(1184)에 죽었다. 그의 아들은 최항(崔沆), 최겸(崔謙)이다.


최개국 비


최개국(崔蓋國, 1516 ~ 1579)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호조참판 최분(崔汾)의 아들로 자는 자성(子省), 호는 남악(南岳)이다. 1538년(중중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정자(正字) 등을 지낸 후 1547년(명종 2)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그해 대사헌 이미(李薇) 등과 함께 을사사화 때 살아남은 이중열(李仲悅), 성자택(成子澤), 김저(金䃴) 등을 사사하도록 상소하였다. 1548년 충청도도사로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휼한 뒤 지평에 임명되었다. 


1550년(명종 5)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으로 있을 때 구수담(具壽聃) 사건에 연루되어 삭탈관직을 당했다. 1553년 이후에는 여덟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1565년(명종 20)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있을 때는 백성을 잘 다스린 공으로 왕으로부터 향표리(鄕表裏)를 받았다. 1574년(선조 7) 호조참의에 제수되었다가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576년(선조 9)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오랜 세월 관직에 있었으면서도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최주환 기념비


최주환(崔周煥)은 비문에 정육품 현릉령(顯陵令)을 지냈다고 간략하게 나와 있다. 현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번지 동구릉 안에 있는 조선 제5대 왕인 문종과 현덕왕후의 쌍릉이다. 그밖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충주 쵰 선조들의 신도비와 기념비 외에도 충주 최씨 추원기적비가 있다. 안골 마을 동쪽 계곡에는 최개국의 묘가 있다. 


충주 최씨는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여 문하시중을 지낸 최옥(崔沃)을 비롯하여 문하시랑을 지낸 최백청(崔伯淸), 좌찬성을 지낸 최숙청(崔叔淸) 등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대사간과 충청감사를 지낸 최순(崔洵) 등을 비롯하여 문과 급제자 15명을 배출했다.


영모사 솟을삼문


영모사


영모사 재실


영모사 중수비


충주 최씨 시조묘


영모사에서 필자


돌계단을 올라 솟을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남향으로 앉아 있는 영모사 사당이 나온다. 영모사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전퇴(前退)를 두었다. 사당에는 충주 최씨 시조가 된 최승 등 선조 8위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고 있다. 충주 최씨 종중에서는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향(祭享)을 지내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충주 최씨는 2000년 기준 전국에 4,240가구 13,466명, 충청북도에 875가구 2,614명, 충주시에 341가구 1,00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현재 충주 최씨는 과거 집성촌이었던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내동에 18가구를 비롯하여 충주시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2016.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