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마패봉(역봉) 동쪽 1.2km 지점에서 북쪽을 향해 떠난 계명지맥 (鷄鳴枝脈)은 지릅재, 북바위산(779m), 망대봉(730m), 대미산(680.8m), 발치봉(550m), 남산(636.1m), 마즈막재, 계명산(775m), 뒷목골산(후곡산, 298m), 광명산(팽고리산, 148.5m)을 지나 대문산(탄금대, 200m)에 이른 다음 탄금대교 앞 달천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끝난다. 계명지맥 발치봉에서 서쪽 달천(達川)으로 뻗어간 능선에는 충주의 진산 대림산(大林山, 待林山, 待臨山, 489m)이 솟아 있다.
대림산
충주분지의 북쪽은 남한강, 서쪽은 달천, 동쪽은 계명산과 남산, 남쪽은 발치봉과 대림산이 에워싸고 있다. 대림산은 충주시 직동과 살미면 향산리의 경계를 이루면서 창골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창골은 달천에 인접해 있고,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대림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천혜의 요새지라고 할 수 있다.
대림산에는 임도령에 대한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충주에 가난한 총각 임도령이 늙고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어느 날 임도령은 노모의 약을 구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에 사는 친척을 찾아 떠났다. 남한산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임도령은 인가를 찾아 해매다가 외딴 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묵게 되었다. 그 집에는 자신을 용왕의 딸이라고 소개하는 아름다운 처녀 혼자 살고 있었다. 그날 밤 임도령은 비몽사몽간에 아름다운 처녀와 운명적인 연분을 맺고, 다음날 곧바로 모년 모월 모시 충주 달천 가에 있는 산 아래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만 들은 채 헤어졌다. 아침이 되자 정신을 차린 임도령은 광주의 친척집을 다녀온 뒤 그 산 아래에서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살짜리 옥동자를 안은 선인이 나타나 용녀가 못 오는 사연을 말한 뒤 '이 아기가 바로 네 아들이다. 잘 기르도록 해라.'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 뒤 이 산을 임도령이 용녀를 기다렸다고 해서 대림산(待臨山), 또는 임도령을 기다렸다고 해서 대림산(待林山)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다.
대림산에는 삼국시대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월은사지, 남산성과 함께 고려시대 항몽(抗蒙) 전적지로 추정되는 산성터와 봉수대터, 조선시대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어린 시절 무예를 연마했다는 삼초대(三超臺)가 있다.
창골 입구
대림산성 서문지
대림산성 서문 치성지
대림산성 서쪽 성벽
성안마을 창골
제1전망대에서 바라본 달천
제1전망대에서 바라본 달천과 충주시내 전경
대림산 서쪽 바로 앞에는 조선시대인 1392년부터 구한말 1910년까지 존재했던 한양에서 동래까지 잇는 영남대로(嶺南大路), 지금은 국도 3번 중원대로가 지나가고 있다. 영남대로와 함께 달천이 나란히 흐른다. 달천은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의 비로봉(毘蘆峰, 1,021m)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보은군 내북면, 괴산군 청천면과 괴산읍, 충주시 달천동을 지나 칠금동과 가금면 창동리 사이에서 남한강으로 합류한다.
대림산성 북문지
대림산 정상부
대림산 정상
대림산 정상에서 필자
대림산 정상에서 바라본 충주시내
대림산 정상에서 바라본 월악산과 주흘산
대림산 정상에서 바라본 금봉산 석종사
대림산성 동문지
동문 치성지
대림산성 남문지
종주바위 사모바위
종주바위에서 바라본 대림산성 남문지
종주바위에서 바라본 두룽산
종주바위에서 필자
종주바위 사모바위
창골에서 바라본 대림산
충주는 한반도의 중심지이자, 한양과 영남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외적이 계립령이나 이화령, 조령을 넘어 영남으로 남하하거나 반대로 영남에서 북상하려면 반드시 충주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컸다.
조선시대 충주의 중요성은 봉화체계에서도 드러난다. 조선시대 충주는 봉화체계 5개의 직봉(直烽) 제2거(炬)가 지나가고 있다. 하나는 죽령 봉수에서 단양 소이산 봉수, 청풍 오치 봉수, 충주 심항산 봉수(心項山烽燧), 마산 봉수(馬山烽燧), 음성 가섭산 봉수(迦葉山烽燧), 망이산성 봉수을 거쳐 경기도 죽산의 건지산 봉수로 연결되었다. 다른 하나는 계립령(鷄立嶺)을 넘어오는 마골산 봉수(麻骨山烽燧)에서 연풍 주정산 봉수(周井山烽燧), 충주 대림산성 봉수를 거쳐 마산 봉수로 연결되어 직봉과 합쳐졌다.
대림산 봉수는 최초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그 기록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주목(忠州牧) 성지조(城址條)에는 '대림산 봉수는 남쪽으로 연풍현 주정산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마산에 응한다.'고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원현(忠原縣) 봉수조(烽燧條)와 조선시대 말기에 편찬된 충청도 읍지(忠淸道 邑誌) 충주목조에는 대림산 봉수대에 별장 1명, 감관 5명, 군인 10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략적 요충지인 충주의 방어를 위해 이 지역에는 충주읍성(忠州邑城)을 중심으로 3~5km 이내에 남산성(南山城), 대림산성(大林山城, 충청북도 기념물 제110호), 문주리 산성(文周里山城), 용관동 산성(龍觀洞山城), 탄금대 토성(彈琴臺土城), 충주영액(忠州嶺阨) 등 많은 산성과 평지성이 축조되어 근접 방어선 역할을 했다. 특히 근접 방어선 중 충주읍성의 남쪽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는 대림산성은 문경에서 조령과 이화령을 넘어 충주로 들어오는 영남대로가 바로 앞으로 지나고 있어 충주 지역의 다른 그 어떤 성곽보다도 중요시되었다.
충주읍성을 중심으로 16~20km 이내에 있는 남동쪽의 월악산성(月岳山城)과 덕주산성(德周山城), 한훤령산성(寒喧嶺山城), 북쪽의 장미산성(薔微山城), 봉황산성(鳳凰山城), 견학리 토성(見鶴里土城), 동산미 토성(東山美土城) 등은 충주의 외호 방어선 역할을 했다. 북쪽의 남한강과 서쪽의 달천은 천연 해자(垓子) 구실을 하였다.
대림산성의 둘레는 4.906km이고, 성벽의 높이는 4~6m 이다. 성벽은 동벽 585m, 서벽 538m, 남벽 1,555m, 북벽 2,228m로 성의 장축 방향인 동서 길이가 1,227m, 남북 길이가 782.6m이다. 면적은 365,079㎡이다. 성벽의 안쪽에는 4~5m 너비의 회곽도(廻郭道)가 조성되어 있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서문지를 제외하고는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지 않다.
대림산성은 충주와 인근의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크며, 봉수대가 있는 최고봉을 중심으로 동서 방향으로 길쭉하고, 서쪽이 좁은 삼태기 모양의 장타원형을 이루는 포곡식 산성이다. 일부 석축을 하였지만 대부분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이다. 곳곳에 암문터와 치성(雉城), 망루(望樓), 장대(將臺), 각루(角樓), 창고 등을 설치하였던 건물지와 우물지가 남아 있다. 산성 전체에서 여장(女墻)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치성지는 10여개소에 이르는데, 대부분 능선을 따라 길게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서문지, 동문지 등 경사가 완만해서 방어가 취약한 부분에는 2중, 3중의 방어벽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대림산성은 가장 낮은 서문지(100m)와 가장 높은 봉수대지(487.5m)와의 비고가 387.5m에 이를 정도로 고도차가 심하여 성 내부에서 성벽까지의 경사가 30°에 이를 정도로 매우 가파르고 험준하다. 심한 고도차로 인해 외부에서 성 안이 들여다보이는 단점도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서문의 성벽을 높이 쌓은 흔적이 있다.
건물지는 현재 10여개소 이상에서 확인되고 있다. 성 안에는 지휘소, 창고, 병사들의 숙소 등 산성의 방어와 관련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골의 지명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 대림산성은 충주읍성의 물자를 비축하는 창고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방어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가 식수원이다. 대림산성에는 봉수대에서 발원한 개울이 서쪽의 달천으로 흘러들고 있으며, 또 성 안 곳곳에는 샘물이 솟아나고 있어 비교적 수량이 풍부한 편이다. 남문지 부근과 북쪽 성벽 안쪽의 해발 420m 지점 등 현재 대림산성에는 3개소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대림산 정상 봉수대에서는 북쪽으로 충주시내, 북동쪽으로 남산성이 한눈에 조망된다. 북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3번 국도와 달천, 달천 건너편의 가섭지맥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문지와 종주바위에서는 중원대로가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1977년 문화재관리국이 발간한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攬)에서는 대림산성을 '삼국시대 축조된 성으로 추정되며, 달천변의 험준한 산 위에 조령으로 통하는 대로를 막아 충주의 남쪽을 방어하는 요새로서 둘레는 약 5km 나 되며 봉수터가 있다. 임경업 장군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으며 또한 임진왜란 때에도 사용되었다. 현재 석성의 잔존 부분은 있으나 거의 다 붕괴되었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였다. 충청북도 문화재지(忠淸北道 文化財誌)에는 '성안에서는 신라계 및 백제계의 토기 조각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중 백제계 토기 조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림산성을 삼국시대에 쌓은 산성으로 설명하고 있는 자료들이다.
그러나 정밀 지표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앃은 성이 아닐 수도 있음이 드러났다. 우선 축성 방법에 있어서 삼국시대 산성들이 대부분 석축인 데 비해 대림산성은 토석혼축이고, 성벽의 축조가 조잡하다는 점 등은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보기 어렵다. 유물도 백제 토기편 등 삼국시대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토기가 소량 나왔을 뿐 대부분 고려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대궐터로 알려진 경작지에서는 건물의 초석(礎石), 많은 양의 토기와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주로 병과 접시, 소호, 매병 등 다양한 고려청자편과 도기편, 어골문과 무문, 선조문, 격자문의 평기와편과 암기와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대형 건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법 또한 상감이나 음각, 양각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고급 청자류도 많이 나와 산성의 축성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청화백자 조각도 출토되었다. 특히 봉수대 근에서는 조선시대의 기와와 도기, 백자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축성법이나 유물로 판단하면 대림산성은 통일신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지방정부나 호족세력이 쌓았거나 고려시대에 축성되어 조선시대에도 계속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산성의 형태와 축성법으로 볼 때 대림산성은 평시에 병력이 상주한 것이 아니라 성내 창고 등에 군량미나 병장기 등을 보관하였다가 유사시에 민관군이 함께 성으로 들어가 입보농성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림산성 안 창골 마을에는 대궐터, 창터, 절터라고 불리는 경작지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의 개로왕 21년(475)에 대궐과 창고를 지었던 곳이라고 한다. 개로왕은 대림산성을 쌓아 적을 방어하는 한편 성 북쪽에 있는 안림동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대림산성에 주둔 중인 백제군이 남산성(南山城)의 신라군과 격전을 치렀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대림산성 남문지 바로 아래에는 ‘종주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종주'는 1231년(고종 18) 제1차 려몽전쟁 당시 대림산성에서 고려군을 지휘한 충주부사 우종주(于宗柱)를 가리킨다. 우종주는 양반별초(兩班別抄), 판관 유홍익(庾洪翼)은 노군(奴軍)과 잡류별초(雜類別抄)를 거느리고 대림산성으로 들어가 입보농성했다. 몽골군이 진군해 오자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별초와 함께 성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노군과 잡류별초는 성을 끝까지 사수하여 몽골군을 물리쳤다.
몽골군이 물러가자 우종주 등은 충주로 돌아와 관가와 양반들의 집에서 사용하던 은그릇을 검사하였다. 노군이 몽골군이 약탈해 갔다고 말했는데도 호장 광립 등은 노군의 우두머리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를 눈치챈 노군은 '몽골군이 오면 모두 달아나 숨고 지키지 않더니, 어찌 그들이 빼앗아 간 것을 도리어 우리들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고 하는가. 어찌 먼저 일을 도모하지 않으리오.' 하고는 들고 일어나 음모를 꾸민 벼슬아치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대림산성은 고려시대 제5차 려몽전쟁에서 김윤후 장군이 몽골군을 물리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1253년 몽골 원수 예케는 동군의 주력부대와 서군의 주력부대를 합류시킨 대군을 이끌고 10월 10일경 충주로 내려왔다. 천룡성을 점령한 몽골군은 충주 인근 지역을 초토화하여 충주산성을 고립시켰다. 예케군은 영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충주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충주산성에는 처인성 전투에서 몽고 장군 살리타를 사살하여 제2차 려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김윤후가 충주산성방호별감(忠州山城防護別監)으로 와 있었다.
충주산성 전투를 지휘하던 몽고군 원수 예케는 갑자기 병이 들어 본대의 일부 병력만을 이끌고 평주로 돌아갔다. 고려와 몽고의 화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충주산성에서는 예케의 부장 아모간과 홍복원이 지휘하는 몽고군의 포위 공격이 70여 일 이상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충주산성 안의 비축식량과 방어용 시석은 바닥나고 군민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더 이상 수성전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충주산성이 함락의 위기에 처하자 김윤후 장군은 군민과 노비들을 모아놓고 '누구든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면 귀천의 차별 없이 벼슬을 주겠다'고 선포하고 이들이 보는 앞에서 노비문서를 모조리 불살라버린 뒤 몽고군으로부터 노획한 소, 말들을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이에 사기가 오른 충주산성의 군민들은 70일 동안 죽을 힘을 다해 성을 지켰다. 충주산성 전투의 결과는 방호별감 등 지휘관의 전투 준비와 지휘 능력이 전투의 성패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준다. 여기서 충주산성은 남산성이 아니라 대림산성이다.
대림산성은 조선시대 조일전쟁 당시에도 사용되었다. 조선군은 대림산성에 매복해 있다가 조령을 넘어 북상한 왜군이 성 바로 밑 영남대로를 지나갈 때 폭약과 돌 등으로 공격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왜군은 영남대로를 지나지 않고 달천 상류에서 강을 건너 풍동을 지나 충주시내와 탄금대로 진격하였다. 결국 조선군의 작전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2016.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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