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9일 충주 미륵리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 사적 제317호)를 찾은데 이어 월악산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獅子頻迅寺址四獅子九層石塔, 보물 제94호)을 찾았다. 사사자 구층석탑은 용마산(말뫼산, 688m)과 망대봉(730m), 북바위산(772m)으로 둘러싸인 동산계곡 초입에 있다.
월악산
미륵대원지에서 송계계곡을 따라 난 도로를 타고 덕주산성으로 내려가다가 와룡교를 지나 덕주산성 남문 조금 못 미쳐 송계교 있는 곳에 이르면 왼쪽으로 동산계곡이 나온다. 동산계곡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오른쪽 용마산 산발치에 사자빈신사지와 사사자 구층석탑이 있다.
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남쪽)
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서쪽)
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북쪽)
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동쪽)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은 상층 기단에 네 마리의 사자를 배치하여 상대갑석을 받치게 한 특이한 형태의 석탑이다. 이런 형태의 석탑에는 불국사 다보탑(佛國寺多寶塔)과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이 있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은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보다 먼저 세워진 것이다.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석탑은 현재 4층 옥개석과 5층 탑신석까지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사라지고 없다. 높이는 4.5m이다.
하대석의 안상(서쪽)
하대석의 안상(동쪽)
중대석의 명문(남쪽)
지대석(地臺石)은 여러 장의 넓은 판석을 깔아서 만들었다.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 기단부의 하대석 각 면에는 장방형의 액(額)을 만들어 각각 3개씩의 안상(眼狀)을 새겼다. 안상 가운데의 큼직한 꽃 모양의 장식은 고려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하대석 위의 중대석도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에는 넓은 우주(隅柱)를 새겼다.
중대석 남쪽 면에는 10행 79자의 조탑연기문(造塔緣記文)이 새겨져 있다. 조탑연기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佛弟子高麗國中州月岳師子頻迅寺棟梁奉爲代代聖王恒居万歲天下大平法輪常傳此界他方永消怨敵後愚生婆娑卽知花藏述生卽悟正覺敬造九層石塔一坐永充供養 大平二年四月日謹記(불제자고려국중주월악사자빈신사동양봉위대대성왕항거만세천하대평법윤상전차계타방영소원적후우생파사즉지화장술생즉오정각경조구층석탑일좌영충공양대평이년사월일근기). 해석하면 '불제자인 고려국 중주 월악산 사자빈신사에서 동량들은 받든다. 대대로 성왕들이 영원히 만세를 거하고, 천하가 태평하며, 법륜이 이 세계에서 항상 이어지기를 바란다. 영원히 원한이 있는 적을 물리치고, 후에 이 몸이 파사에 나기를 바라며, 곧 화장 세계를 알아 정각을 깨닫기를 원한다. 삼가 구층석탑 하나를 만드니 영원히 공양할 것이다. 대평 2년 4월일 삼가 쓴다'는 뜻이다.
명문은 1022년(현종 13) 당시 거란족의 두 번째 침입을 받은 이후 불력을 빌어 외적을 물리치고자 하는 기원에서 이 석탑을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명문의 ‘경조구층(敬造九層)’이라는 글귀에서 원래 이 석탑이 9층석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자상과 불상(남쪽)
사자상과 불상(서쪽)
사자상과 불상(동쪽)
사자상과 불상(북쪽)
상층 기단은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다. 중대갑석 위의 상대석은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서리에 배치하여 상대갑석을 받치도록 하고 있다. 사자상의 앞다리 부분은 매우 간략화되어 있다. 남쪽에 배치된 두 사자상은 각각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뒤쪽에 배치된 두 사자상은 모두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중대갑석의 중앙에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머리 뒤에서 매듭을 지어 묶은 머리털은 등뒤에까지 흘러내렸다.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고, 눈썹은 가늘고 긴 초승달 모양이다. 두 눈은 치켜올렸고, 코는 납작하며, 입술은 도톰하다. 얼굴은 살집이 많아 통통하고, 턱 아래로는 반원형의 턱 주름선이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법의(法衣)는 두터운 통견(通肩)으로, 옷주름은 좌우 대칭을 이루면서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수인(手印)은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지만, 머리에 쓴 관모(冠帽)를 볼 때는 보살상이다.
불상의 머리 위 즉 상대갑석 밑면의 한가운데에는 원좌(圓座)가 있고, 그 주변에는 큰 연꽃을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이러한 장식은 다른 석탑에서는 보기 힘들다. 불상의 광배(光背) 대신 연화문을 조식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으며, 1층 탑신에 비해 2층 탑신부터 급격히 감소하는 체감비례(遞減比例)를 보이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이다. 옥개석은 4층까지만 남아 있는데, 옥개받침은 각 3단으로 매우 낮게 표현되었다.
석탑 부재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 북쪽 잔디밭에는 배례석처럼 놓여 있는 석탑 부재가 하나 있다. 달리 보면 옥개석을 뒤집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 부재가 배례석이라면 석탑의 남쪽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2016.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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