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옛 중원)는 남한강의 수로가 지나는 등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치열한 쟁탈지였다. 중원을 차지하는 나라가 곧 한반도를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충주는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이었으며, 신라가 이곳을 점령한 뒤에는 중원경(中原京)이라고 했다.
신라가 중원경을 두었을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던 충주에는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많은 문화 유적이 산재해 있어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충주시 중앙탑면에는 천룡산(天龍山), 을궁산(乙宮山), 용전리(龍田里), 봉황리(鳳凰里), 태자뜰(太子坪) 등 고대의 왕실이나 최고 지배층과 관련된 지명이 상당수 존재한다.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立石) 마을에는 충주 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 국보 제 205호)가 세워져 있다. 충주 고구려비는 대한민국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 석비로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 유적이다. 이 석비는 1979년에 입석 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다.
충주 고구려비각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는 5세기 경 고구려가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비의 높이는 2.03 m, 폭은 55 cm, 두께는 33 cm이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각 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다. 금석문은 3~5㎝의 소박하고 예스러운 해서체(楷書體)로 음각되었으나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다.
충주 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처럼 4면비의 형태이다. 글자가 가장 많이 보이는 앞면을 중심으로 왼쪽 면에는 다소 글자가 많고, 오른쪽 면에서도 임자(壬子), 벌(伐), 불(不), 소(小), 중(衆), 공(公), 사(使), 소(少) 등의 글자를 확인할 수 있다. 뒷면은 마멸이 심하여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뒷면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풍화작용으로 마멸되었거나 인위적인 훼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고구려비의 비문에는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지칭했으며, 신라의 왕을 ‘매금(寐錦)’이라고 함으로써 하위국으로 표기하였다. '여형여제(如兄如弟)'는 형제 또는 상하 관계를 말한다. 고구려가 '여형여제' 신라 매금에게 의복 등을 하사했다는 표현도 있다.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는 신라에 파견된 고구려의 당주였을 것이다. 그가 고구려인인 ‘하부발위사자□노(下部拔位使者□奴)’라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비문에는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고려는 바로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사자(使者)’ 등 고구려의 관직 이름도 나온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처럼 ‘고모루성(古牟婁城)’ 등의 글자도 등장한다. ‘모인삼백(募人三百)’은 고구려가 신라인을 지칭한 말이 아닌가 한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 문화가 신라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한반도 최고(最古)의 금석문이다. 고구려비의 비문을 통해서 고구려가 신라의 종주국이었으며, 신라 영토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보호를 받고 성장했다는 학설이 입증된 것이다.
불교 전파 과정에서도 고구려 문화는 신라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는 물물 교환, 문화 교류 등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당주(幢主)'나 '도사(道使)' 같은 관직명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물 관계의 문구 중에서 ‘절사(節賜)’, ‘절교사(節敎賜)’ 등의 용어는 이두(吏讀)로서 신라의 이두가 고구려 이두에 기원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한편 ‘대왕국토(大王國土)’, ‘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의 판도와 신라의 국경 문제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고구려비를 척경비(拓境碑), 또는 정계비(定界碑)로 보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고구려비가 이곳에 세워진 것은 충주가 고구려의 국경지대였으며, 고구려 남진 정책의 요충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비 제1면(뒷면)
고구려비 제2면(우측면)
고구려비 제3면(앞면)
고구려비 제4면(좌측면)
충주 고구려비를 세운 시기는 언제고 목적은 무엇일까? 고구려비의 건립 연대는 비 앞면 상부의 ‘건흥4(建興四)’라는 문자에 준하여 추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고려대왕(高麗大王) 조왕(祖王)’으로 보았을 때 앞면 첫 행의 ‘신라매금세세위원여형여제상하(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上下)’ 구절과 4행의 ‘사매금지의복(賜寐錦之衣服)’으로 보아 장수왕 20년 이전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앞면 끝 행에 보이는 ‘개로(盖盧)’를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으로 보면 연대가 맞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비의 왼쪽 면 3행의 '신유년(辛酉年)’과 앞면 7행의 ‘12월 23일 갑인(十二月卄三日甲寅)’ 등을 통해서 연대를 추정해야 한다. 장수왕(長壽王) 대에 신유년에 해당되는 시기는 421년(장수왕 9)과 481년(장수왕 69)이다. 비문 첫머리의 우호 관계를 본다면 421년, 개로(盖盧)를 개로왕(蓋鹵王)으로 본다면 481년에 해당된다.
변태섭 교수는 '장수왕 대 12월 23일의 일진이 갑인이었던 해는 449년(장수왕 37)과 480년(장수왕 68), 506년(문자왕 15)이다. 신유년(481)과 연결지어 볼 때 480년(장수왕 68)이 주목된다. 즉, 480년에 신라 매금(왕)이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의복 등을 하사받고, 신라토내중인(新羅土內衆人)을 돌려받았으며, 신유년(481)에 위 사실을 기록한 비가 건립되었다'고 추정했다.
고구려비는 장수왕 때인 5세기 경에 세워졌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장수왕은 부왕(父王) 광대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 지방에 광개토대왕비를 세웠다.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펼쳐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했다. 장수왕이 새로 얻은 영토인 남한강 유역의 중원(中原)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고구려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문의 '조왕(祖王)'이란 말로 보아 고구려비는 장수왕의 손자인 문자왕(文咨王)이 세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 장수왕 때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이어 한반도의 중부 한강 유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중원지역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주는 기념비적인 유물이다. 고구려와 신라, 백제 등 삼국시대사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인 이 석비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매우 큰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1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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