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白頭大幹) 속리산(俗離山) 천왕봉(天王峰)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은 충청북도 북부를 동서로 가르며 안성의 칠장산(七長山)까지 이어져 한강과 금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한남금북정맥의 보현산(普賢山)에서 가섭지맥(迦葉枝脈)과 부용지맥(芙蓉枝脈)이 갈라진다. 보현산을 떠난 부용지맥은 부용산, 매방채산, 자주봉산, 햇골산, 평풍산을 지나 남한강과 달내강의 합수머리인 상봉에 이른다.
부용지맥의 평풍산에서 북동쪽으로 하나의 분맥(分脈)이 갈라지는데, 이 분맥은 을궁산을 거쳐 남한강변의 장미산(薔薇山, 337m)으로 이어진다. 장미산은 충청북도 충주시(忠州市) 중앙탑면(中央塔面) 가흥리(可興里)와 장천리(長川里), 하구암리(下九岩里)에 걸쳐 있다. 이 산은 남한강변을 따라 길게 뻗어간 산의 형태가 긴 꼬리 같다고 하여 장미산(長尾山)이라고도 한다.
탄금호에서 바라본 장미산
중앙탑면 장천리 양품골에서 바라본 장미산
장미산성 북문지
북쪽 성벽, 북문지, 봉학사
북쪽 성벽
중앙탑면 가흥리 일대
장미산은 산세는 낮지만 멀리 충주 일대와 남한강 주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전망이 매우 뛰어난 곳이다. 산 정상까지는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장미산 정상부 능선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대규모 포곡식(包谷式) 석성(石城)인 장미산성(薔薇山城, 사적 제400호)이 있다. 산성의 둘레는 2.94km이다. 장미산성 안에는 1895년에 봉루암으로 창건되었다가 후에 봉학사(鳳鶴寺)로 이름을 바꾼 절이 있다.
북쪽 성벽에서 동쪽 성벽으로 회절하는 지점의 치성지
중앙탑면 장천리, 남한강, 금가면 일대
탄금호
성곽
장미산성은 산 정상부 능선의 외연을 따라 계곡을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축조되었다. 정상부는 남북 방향으로 긴 대지를 이루고 있는데, 북쪽으로 흐르는 계곡 양쪽으로 능선이 길게 뻗어간다. 동쪽과 남쪽, 서쪽은 경사가 급한 험준한 지형이다. 남쪽 성벽의 가장 낮은 지점에는 남문지와 수구지가 있다.
장미산성에는 충주산성처럼 남매축성 설화가 전하고 있다. 옛날 충주시 노은면의 가마골이라는 마을에 누이 보련과 남동생 장미가 살고 있었다. 남매는 둘 다 명산의 정기를 받아서 장차 장수가 될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옛날에는 한 집에서 장수가 두 명이 나면 다른 한 명은 반드시 희생을 시키는 관습이 있었다. 남매는 희생자를 정하기 위해 성 쌓기 내기를 하기로 하였다. 보련은 노은, 장미는 가금(지금의 중앙탑면)에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아들인 장미보다 보련의 속도가 빠르자 어미는 애가 탔다. 어미는 아들을 돕기 위해 딸이 성을 쌓고 있는 산으로 떡을 해가지고 가서 '네가 너무 빠르니 이 떡 좀 먹고 쉬었다 쌓도록 해라.'고 말했다. 보련이 떡을 먹고 나서 마지막 돌 한 개를 가지고 올라가는 중에 장미는 성 쌓기를 끝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기에서 진 보련은 어미를 원망하면서 집을 떠났다. 이튿날 밤 큰 별이 보련의 집을 향해서 떨어졌다. 이후 보련이 성을 쌓은 산을 보련산, 장미가 성을 쌓은 선을 장미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쪽 성벽
장미산성은 충주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달천과 합류한 남한강이 남쪽에서 흘러와 장미산성의 동쪽을 돌아 북쪽으로 흐른다. 장미산성의 서쪽에는 을궁산이 솟아 있고, 남쪽과 동쪽 그리고 북쪽의 삼면은 남한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장미산성은 남한강의 수로와 육로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장미산성의 남쪽과 동쪽으로는 남한강은 물론 남한강과 달천의 두물머리, 서쪽으로는 장호원에서 충주로 통하는 중앙탑면 하구암리 일대의 교통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장호원에서 제천으로 통하는 가흥리 일대의 교통로가 한눈에 조망된다. 장미산성 주변에는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제1401호),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누암리 고분군(사적 제463호) 등 삼국시대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어 충주(옛 중원)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장미산 정상부
필자
중앙탑면 하구암리 일대
서쪽 성벽
장미산성의 성벽은 높이 6m, 윗면 너비 3m이며, 곳에 따라 높이 6.9m, 너비 5.1m까지 넓혀 축조하였다. 치성은 북벽의 서쪽과 동쪽 끝에 2개소, 동벽의 능선에 3개소, 동남벽에 1개소, 서벽에 3개소 등 모두 9개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북벽에서 서벽으로 회절하는 지점의 치성은 석축성벽을 쌓은 후 장방형의 목책을 돌려 설치한 것으로 장축 11m, 폭 3.7m의 규모이다. 이 치성은 북쪽에서 접근하는 적을 쉽게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곡을 타고 침투하는 적을 조기에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목책 치성은 청원 남성골 산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장미산성 안에는 근접 투석전(投石戰)에 대비하여 석환(石丸) 보관을 위한 석곽 시설이 확인되었다. 숯을 굽기 위한 2기의 목탄요(木炭窯)도 확인되었다.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결과 목탄요는 1호가 1110AD, 2호 1200AD로 측정되었다.
장미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토기류와 철기류이다. 토기는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 세격자문(細格子文)의 토기병, 점열문(點列文)과 파상문(波狀紋)이 새겨진 토기발, 구연부편(口緣部片) 등이 출토되었다. 이중 원저단경호, 조족문(鳥足紋) 토기 등 한성백제시대의 토기는 장미산성의 축조연대를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철기류는 대부분 무기류이지만 일부 농기구도 확인되었다. 무기류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것으로 보이는 철촉(鐵鏃)과 갑옷에 사용된 소찰갑(小札甲) 등이고, 농기구로는 보습편 등이 나왔다. 철촉은 토기류와 동일한 시기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노은면 보련산
장미산성에서는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의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토기류 등 한성백제시대의 유물도 다수 확인되었다. 한성백제시대 유물의 출토는 5세기 말 이전에는 이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음을 시사한다. 장미산성의 남쪽 남한강변에 세워진 충주 고구려비는 원래 백제의 영토였던 이 지역이 5세기 말경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따라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신라는 557년(진흥왕 18) 고구려로부터 충주 지역을 빼앗아 국원소경으로 삼고, 이듬해부터 귀족의 자제나 육부의 호민을 이주시켜 지배권을 강화했다. 이처럼 장미산성은 백제에서 고구려, 고구려에서 신라로 이어지는 지배국의 변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
2016. 9. 11.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주박물관 석조문화재를 찾아서 (0) | 2016.11.09 |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정혜원융탑을 찾아서 (0) | 2016.11.01 |
충주 고구려비를 찾아서 (0) | 2016.10.27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찾아서 (0) | 2016.10.26 |
충주 최씨 선조들의 사당 영모사를 찾아서 (0) | 2016.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