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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성북동 산책-수연산방(壽硯山房)을 찾아서

林 山 2016. 11. 11. 15:21



우리나라 해방공간에서 최고의 단편소설가였던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을 기리기 위해 결성된 이태준기념사업회(이사장 임종헌)에서는  2016년 9월 25일 '이태준의 발자취를 따라서-2016 성북동 산책' 행사를 주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태준기념사업회 회원과 안산 여성문학회, 충주 문향회 회원 등 약 30여 명이 참가했다.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장, 중견 소설가인 안재성 작가, 최용탁 작가의 모습도 보였다.


'2016 성북동 산책'은 먼저 이태준 선생의 고택인 수연산방(壽硯山房,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에서 구본실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과 안내로 시작되었다. 구본실 문화관광해설사는 가벼운 이야기 위주의 해설로부터 역사와 문화, 자연 등 전문적인 해설이 가능한 전문가라서 이태준기념사업회에서 특별히 초빙한 것이다.   


수연산방 대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번지에 있는 수연산방은 원래 1933년에 지은 상허의 고택이었다. 아담하면서도 고격을 갖춘 이 집은 건물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건넌방, 오른쪽에 안방이 배치되어 있다. 안방 앞에는 섬세하고 화려한 누마루, 뒤편에는 부엌과 화장실을 두었다. 건넌방 앞에 놓인 툇마루는 건넌방보다 바닥을 약간 높이고 아(亞)자 난간을 둘렀다. 이 고택에 1999년 생외손녀(甥外孫女) 조상명이 상허가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전통찻집을 열었다.


수연산방은 상허가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상허는 이곳에서 '달밤(1933)', '코스모스피는 정원(1937)', '황진이(1938)', '왕자 호동(王子好童, 1942)', '돌다리(1943)' 등의 문학작품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수필 '무서록(無序錄, 1944)'에는 수연산방을 지은 과정과 집터의 내력 등이 쓰여 있다.


상허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이병기(李秉岐)는 그의 스승이었다. 1933년에는 이효석(李孝石), 이무영(李無影), 유치진(柳致眞),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문학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였다. 그는 일제가 물러간 뒤 1946년 월북했다가 거기서 숙청당했다.


상허는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시대의 암울한 현실을 문학을 통해서 저항했다. 그는 일제에 부역하는 글을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월북한 뒤에도 김일성 우상화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유일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에는 위에서 든 작품들 외에도 단편 '오몽녀(五夢女, 1925)', '아무일도 없소(1931)', '불우선생(不遇先生, 1932)', '꽃나무는 심어놓고(1933)', '손거부(1935)', '가마귀(1936)', '복덕방(福德房, 1937)', '패강냉(浿江冷, 1938)', '농군(農軍, 1939)', '밤길(1940)', '무연( 無緣, 1942)', '해방전후(解放前後, 1946)', 장편 '사상(思想)의 월야(月夜, 1946)' 등이 있다. 그외 문장론 '문장강화(文章講話, 1946)'도 있다.


구인회 북 카페


구인회 북 카페 내부


이태준과 박태원 프로필


이태준 프로필


이효석과 정지용, 이상 프로필 


김유정과 유치환, 이무영 프로필


수연산방에는 '구인회 북 카페'라는 공간이 있다. 이 북 카페에서 실제로 구인회 멤버들이 곡차례도 하고 문학에 대한 토론도 하였다고 한다. 북 카페 안에는 구인회 멤버들의 사진과 프로필이 걸려 있다. 


구인회(九人會)는 1933년 8월 이종명(李鍾鳴)과 김유영(金幽影)의 발기로 이태준,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김기림, 정지용, 조용만(趙容萬) 등 당대의 쟁쟁한 시인, 소설가 9인이 서울에서 조직한 문학단체이다. 구인회가 발족된 지 얼마 안 되어 발기인 이종명, 김유영과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朴泰遠)과 이상(李箱), 박팔양(朴八陽)이 새로 가입하였다. 그 뒤 또 유치진과 조용만이 탈퇴하고 김유정(金裕貞)과 김환태(金煥泰)가 가담하여 인원수는 늘 9명이었다. 


구인회는 당시 유행했던 경향주의 문학에 반하여 순수예술을 지향하였다. 구인회는 3∼4년 동안 월 2∼3회의 모임과 서너 번의 문학강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시와 소설'이라는 기관지를 한 번 발행하였다. 이처럼 구인회는 그리 활발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들이 문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역량으로 인해 순수예술을 추구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문학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은 구인회의 문학사적인 의의를 '시문학파(詩文學派)에서 유도된 순수문학의 흐름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1930년대 이후의 민족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썼다. 그는 또 구인회에 대해 '근대문학의 성격을 현대문학의 성격으로 전환시키고 발전시킨 점에서 그 문학사적 가치를 보유한다'고 평가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때 과연 순수문학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문학이 어떻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부터 따로 독립되어 존재할 수 있을까? 순수문학을 주장한 시인, 소설가들은 일제시대 이슬만 먹고 살았는가? 순수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요 이율배반적이다. 해방공간과 그 이후의 순수문학론은 사실 부일민족반역자들의 자기합리화에 다름아닌 측면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순수문학은 문학을 통해서 제국주의 일본과 부일민족반역자들, 해방 이후 독재정권과 부패재벌들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해온 참여문학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인회 북 카페 바깥 풍경


수연산방 마당에서


수연산방 마당에서

 

수연산방 마당에서


수연산방에 대해 설명하는 구본실 문화관광해설사   


 구인회 북 카페에서 바깥을 바라보면 툇마루와 안마당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마당에는 각종 나무와 화초들이 우거져 있어 도심 속의 아늑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가족 단위로 와도 좋고, 연인이나 친구들 끼리 와도 좋겠다.


2016.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