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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성북동 산책-심우장(尋牛莊)을 찾아서

林 山 2016. 11. 14. 18:00



구본실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로 '2016 성북동 산책' 두 번째 코스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만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 성북구 성북동 222-1, 2번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을 찾았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서 일어난 3.1운동 당시 만해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승려로서 '님의 침묵'을 쓴 시인이기도 하다.   


심우장 대문


심우장


심우장


심우장 현판


심우장은 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고, 조선일보사 창업자 방응모(方應謨) 등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방응모는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대표적인 친일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방응모와 만해는 1928년부터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있던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만해는 새해가 되면 방응모, 홍명희와 함께 황해도에 있는 백천온천에도 같이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 독립운동가였던 만해가 친일파 거두와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모르는 어떤 깊은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만해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있던 남쪽을 등진 곳에 터를 잡고 북향으로 집을 지은 뒤 당호를 심우장(尋牛莊)이라고 지었다. 만해는 1934년 심우장에서 첫 장편소설인 '흑풍(黑風)'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심우장은 남향을 선호하는 전통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이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는 것이 싫어서 만해가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던 만해는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심우장(尋牛莊)은 불교 선종(禪宗)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만해는 오세인(五歲人), 성북학인(城北學人)이라는 필명 외에 목부(牧夫), 실우(失牛)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목부'는 ‘소를 키우는 사람’, '실우'는 '소를 잃어버리다'라는 뜻이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서 내 마음 속의 소를 키운다는 것은 곧 깨달음을 향해 용맹정진하겠다는 서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심우장이란 곧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란 뜻이다.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지붕을 올린 민도리 소로수장집이다. 구조는 중앙에 안방과 대청을 두고, 좌우 양쪽에 건넌방을 배치했다. 서재로 쓰던 오른쪽 건넌방 처마 밑에는 '尋牛莊(심우장)' 편액이 걸려 있다. 안내판에는 '尋牛莊' 현판이 독립운동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작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의 낙관을 보니 일창(一滄) 유치웅(兪致雄)으로 되어 있다. 성북동 주민자치센터 문화체육과에 문의하니 위창이 쓴 편액은 언제 사라졌는지 행방이 묘연하고, 지금의 현판 글씨를 쓴 일창 유치웅은 위창의 제자라고 한다. 


심우장 관리사무소


심우장 안방


심우장 안방 전시장


심우장 사랑방


사랑방 툇마루에서 필자


'2016 성북동 산책' 참가자 기념사진


만해가 세상을 떠난 뒤 심우장에는 그의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이 이곳 건너편에 자리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만해사상연구소로 사용토록 하였다. 심우장은 1985년 7월 5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만해가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와 시화, 그의 글이 실린 잡지와 신문,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016.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