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의 발자취를 따라서-2016 성북동 산책' 행사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성북동(城北洞) 골목길을 걷기로 하였다. 서울의 진산 삼각산(三角山, 북한산) 백운대를 떠난 산줄기가 남쪽으로 만경대와 용암봉, 일출봉, 시단봉, 보현봉을 지나 형제봉으로 뻗어내린다. 형제봉에서 북악터널과 정릉터널을 넘어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와 계곡 일대에 자리잡은 동이 성북동이다.
성북동은 1968년 11월 '월간 문학'에 실린 김광섭의 서정시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동이다. 성북동에는 과거와 현재, 부자와 빈자, 대저택과 달동네가 공존하고 있다. 도로 사정과 환경이 좋은 저지대에는 부자들의 저택들이 들어서 있고, 가파른 산비탈 급경사지에는 달동네가 자리잡고 있다.
성북동 전경
성북동 달동네
성북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한양의 수비를 위한 어영청(御營廳)의 북둔(北屯)이 도성 북쪽에 설치되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성북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숭신방(崇信坊)에 속하였고, 1894년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성북동이었다. 1911년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5부8면제에 의해 한성부가 경기도(京畿道) 경성부(京城府)로 격하되면서 성북동은 경성부 숭신면(崇信面)에 예속되었다. 1914년 경성부의 행정구역이 개편, 축소될 때 종래의 숭신방의 ‘숭’자와 인창방(仁昌坊)의 ‘인’자를 따서 숭인면(崇仁面)으로 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城北里)가 되었다. 1936년에는 경성부가 다시 확대되면서 성북리는 경성부에 재편입되어 성북정(城北町)이 되었다가 1943년 조선총독부가 구제도(區制度)를 실시하면서 성북정은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해방 후인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고칠 때 다시 성북동이 되었고, 1949년 동대문구를 나눠 성북구를 설치할 때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1963년에는 성북천(城北川)에 놓인 운수교(雲水橋)를 중심으로 남동쪽은 성북동1가, 서쪽은 성북동2가로 나누어졌는데, 그후 성북동2가는 1975년 다시 성북동으로 환원되었다.
선잠단지
성북동 선잠단지(先蠶壇址, 사적 제83호)는 고려 성종 2년(983)에 쌓은 제단으로 단의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역대 왕비들은 누에를 길러 명주를 생산하기 위하여 매년 정월 5일 잠실의 정남향 쪽에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1908년 7월 선잠단은 선농단(先農壇)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져 현재 그 유지만 남아 있다. 한말에는 461평의 터만 남았으며, 1910년 이후에는 민유화(民有化)되었다. 현재는 선잠단지 주변을 정리하여 보존하고 있다.
성북동 산책
성북동에서 필자(뒤, 앞은 최용탁 작가)
성북동에 있는 볼거리에는 최순우 고택(崔淳雨古宅),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이태준 고택(李泰俊古宅) 수연산방(壽硯山房), 만해한용운심우장(萬海韓龍雲尋牛莊), 숙정문(肅靖門), 혜화문(惠化門), 창의문(彰義門) 등이 있다.그외 삼청각(三淸閣), 길상사(吉祥寺), 선잠단지, 북악산길, 미아리고개 등의 볼거리도 있다.
상북동을 떠나면서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를 음미하다.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廣場)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祝福)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採石場) 포성(砲聲)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九孔炭)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平和)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광섭-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를 통해 인간들이 삶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자연을 파괴한 결과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돌아와 인간의 삶이 황폐화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산업화에 대한 김광섭의 우울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성북동에는 이태준, 한용운, 백석, 김영한, 법정 등 많은 옛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한양 도성의 북쪽 마을 성북동을 마음에 담은 채 귀로에 오르다.
2016.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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