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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을 두고 온 학교를 찾아서

林 山 2016. 11. 16. 18:11



사람은 자신의 과거와 흔적이 묻어 있는 것을 그리워하기 마련인가 보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라는 말도 있잖은가! 주말을 맞아 문득 내가 교직에 있을 때 몸담았던 학교가 보고 싶어졌다.  내 청춘을 두고 온 학교들을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괴산 감물초등학교


맨 처음 찾아간 학교는 1983년 3월 초에 내가 첫 발령을 받아서 부임한 괴산군 목도중고등학교(牧渡中高等學校) 감물분교장(甘勿分校場)이었다. 목도중고등학교 감물분교장은 괴산군 감물면 오성리 감물초등학교(甘勿初等學校)에 설치되었던 초미니 중학교였다. 학생들은 감물중학교(甘勿中學校) 교사를 새로 짓기 전까지 여기서 공부를 하였다. 나도 여기서 첫 초보 국어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감물초등학교는 1933년 5월 15일 감물공립보통학교(甘勿公立普通學校)로 개교했으며, 1950년 6월 4일 감물국민학교(甘勿國民學校)로 개칭했다. 1991년 2월 28일에는 매전분교장(梅田分校場)을 통합하고, 1995년 2월 28일에는 이담분교장(裡潭分校場)을 통합했다. 1996년에는 감물초등학교로 교명을 개명하였다.


광전리 옛 감물중학교


1986년 6월 22일 괴산군 감물면 광전리에 새 교사가 완공되어 목도중고등학교 감물분교장은 감물중학교로 독립하여 개교하였다. 새 학교 건물로 이사했을 때 학생들과 함께 뛸듯이 기뻤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1987년 2월 13일 감물중학교는 제1회 졸업생 91명을 배출하였다. 하지만 나는 1987년 3월 초 고향인 충주 산척중학교(山尺中學校)로 발령이 나 감물중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교직을 떠난 한참 뒤인 2013년 2월 28일 감물중학교가 폐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날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던 적이 있다. 2013년 3월 4일 감물중학교는 목도중학교(牧渡中學校), 장연중학교(長延中學校)와 통합되어 기숙형 중학교인 괴산오성중학교(槐山五城中學校)로 새출발하게 되었다. 괴산오성중학교는 감물면 오성리 감물초등학교 서북방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엣 감물중학교 교사는 괴산 흙사랑영농조합이 설립한 '흙사랑 살림터'가 들어와 있다. 


주말이 되면 죽이 맞는 선생님들과 함께 감물면 오성리 앞을 흐르는 달천으로 나가 투망을 치기도 했다. 또, 도전저수지와 이담저수지로 밤낚시를 가기도 했다. 당시에는 숙직제도가 있던 시절이라 숙직실에서 어죽을 끓여 막걸리를 마시며 밤늦도록 놀기도 했다.  


오성리 하숙집


40여년 전에 하숙을 했던 하숙집에도 들렀다. 하지만 하숙집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주인이 바꼈다. 당시 하숙생들 중에는 감물초등학교와 감물중학교 선생님들이 많았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조를 패러디하여 감회를 읊다.


사십여 년 전 하숙집을 홀로 찾아드니

하숙집은 의구하되 주인은 간 곳 없네

어즈버 40년 세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의기가 투합한 하숙생들은 하숙집 맞은편에 있던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구우며 술추렴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시골 선술집에도 색시가 있었는데, 밤이면 밤마다 선술집 창문 너머로 술상을 두드리는 젓가락 장단과 흥겨운 뽕짝 노래 소리가 들려오곤 했었다.   


충주 산척중학교


교정의 장승과 솟대


고향인 충주시 산척면 영덕리 산척중학교에 도착하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교정 서편에는 희망 장승과 꿈 솟대가 세워져 있었다. 내가 산척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산척중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산척국민학교를 졸업한 해는 1968년이고, 산척중학교가 개교한 해는 1971년 3월 9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산척중학교에 재직 중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조합원으로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위한 교육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해직되었다. 당시 노태우 독재정권은 공안기관을 앞세워 교육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전교조를 극심하게 탄압했다. 노태우 독재정권은 나에게도 빨간 색깔을 칠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으로 기소했으나 사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대법원에서 내 사건을 맡았던 상고심 주심 대법관이 바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이회창 대법원장이었다. 대법원 상고심은 전교조 관련 국가공무원법 위반에 대해서만 내게 벌금형 50만원을 선고했다. 이회창에 대한 별로 안좋은 추억이다.


이후 나는 긴 해직생활에 들어갔다. 1995년에는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에 들어가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영원히 복직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에 다니던 중 1998년 10월 1일 정부의 특별임용조치로 해직된 지 10년만에 단양중학교에 복직되었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정식으로 사표를 내고 교단을 떠나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으로 돌아갔다.


민주화운동관련자증서


2003년 나는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2007년 8월 1일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임종헌, 귀하는 대한민국의 민주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켰으므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의 규정에 의하여 이 증서를 드립니다.'라고 씌어진 민주화운동관련자증서를 받았다. 


나의 10년 세월을 어쩌면 이 증서 한 장과 맞바꾼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또 같은 길을 걸어갈 것이다. 세월은 가고 민주화운동관련자증서 한 장만 달랑 남았다.


요즘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분노한 시민들은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을 들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2016.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