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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준경묘와 영경묘를 찾아서

林 山 2017. 3. 16. 18:28

조선(朝鮮)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현조(顯祖, 5대조) 묘인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를 찾았다. 준경묘와 영경묘는 대한민국 사적 제5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준경묘는 강원도(江原道) 삼척시(三陟市) 미로면(未老面) 활기리(活耆里) 노동(蘆洞), 영경묘는 미로면 하사전리(下士田里) 동산(東山)에 있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준경묘가 있는 활기리를 먼저 찾았다. 준경묘의 주인공은 이성계의 현조부인 장군공(將軍公) 이양무(李陽茂, ? ~ 1231)로 본관은 전주(全州)다. 이양무는 내시집주(內侍執奏)를 지낸 이인(李璘)과 문극겸(文克謙)의 장녀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대장군을 지낸 이용부(李勇夫)다. 1170년(고려 의종 23) 이인은 정중부(鄭仲夫), 이고(李高)와 함께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일으킨 이의방(李義方)의 친동생이었다. 무신정변 당시 이인은 생사의 위기를 맞았으나 이의방의 동생이자 문극겸의 사위, 내시집주를 지낸 연고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양무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장군(將軍)을 지냈다. 고려시대 장군은 정4품의 무관 벼슬로 대장군(大將軍, 종3품)과 중랑장(中郞將, 정5품)의 중간 직위였다. 이양무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 평창이씨(平昌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양무는 장자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를 비롯해서 차남 이영필(李英弼), 3남 이영밀(李英謐), 4남 이영습(李英襲) 등 4형제들 두었다. 이영밀은 주부공파(主簿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고, 이강제는 삼척이씨(三陟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정중부 일파에게 이준위, 이의방, 이인 3형제가 참살될 때 이인의 아들 이양무는 기적적으로 도망해서 전주로 내려갔다. 이양무는 전주이씨 시조인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754)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전주의 자만동(滋滿洞, 지금의 校洞)에 터를 잡았다. 이양무는 이한의 17세손이었다. 전주에서 태어난 이안사는 성장하여 전주감영의 아전(衙前)이 되었다. 


이양무라는 이름은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에 '고종 8년(1221) 4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선단(崔先旦)이 과거급제자 이양무(李陽茂) 등 86인을 선발했다'는 구절에 처음 등장한다. 고려사에 나오는 이양무가 준경묘의 주인공과 동일인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만약 동일인으로 이양무가 20세 전후에 등용되었다면 과거에 급제하고 10년 뒤 요절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동일인이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이안사의 일화가 전한다. 당시 전주의 지방호족인 이안사에게 사랑하는 관기(官妓)가 있었는데, 안렴사(按廉使)로 부임한 산성별감(山城別監)이라는 자가 탐을 냈다. 지방장관인 지주사(知州事)가 그 기생을 산성별감에게 바치라고 요구하였으나 이안사는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고려 말기는 사병(私兵)을 가진 무신들이 전횡하던 시대였다. 지주사는 산성별감과 공모하여 이안사를 당시 유행하던 목자왕기설(木子王氣說)로 고려 조정에 고변하려고 했다. '李'자를 파자하면 '木'자와 '子'자가 된다. 즉, 목자왕기설은 이씨가 왕이 된다는 설이다. 목자왕기설 관련자로 고려 왕실에 알려지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할 수 없었다. 가문이 위기에 처하자 이안사는 1230년 고령의 부모와 혈족, 외족 등 170여 호를 이끌고 야반도주하여 회덕(懷德), 괴산(槐山), 제천(堤川), 정선(旌善)을 거쳐 삼척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삼척군 삼화사(三和寺, 지금의 동해시 삼화동) 근처에 정착했다.


이안사는 일족을 이끌고 삼화사 근처에서 다시 활기리로 옮겨 정착했다. 활기리 이안사가 살았다는 목조구거유지(穆祖舊居遺址)에는 돌담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구거유지에 있는 샘물은  마을 사람들이 택대(宅垈), 택전(宅田), 택정(宅井)이라 불렀는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왕대(王垈), 왕전(王田), 어정(御井)이라 불렀다. 


활기리는 1757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활지(活只)로 기록되어 있다. 계곡이 넓다고 하여 활계(闊溪)라고도 하였다. 1899년 영건당상(營建堂上) 이중하(李重夏)는 마을 노인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토대로 이양무와 그의 부인 평창이씨의 묘를 찾았다고 해서 활기(活耆)로 개명했다. 이안사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곳이라고 하여 황제가 나왔다는 뜻의 황기(皇基, 황제의 터, 일명 황터), 활터에서 활을 쏘았다고 하여 활기(弓基, 활터)라고도 한다. 활기는 황기가 변한 것이다.    


1231년(고려 고종 18) 제1차 몽골군의 침입이 있던 해 이양무가 죽었다. 1232년(고종 19) 제2차 몽골군의 침입 때 이안사는 삼화사에 열심히 참례했으며, 또 일족 일부는 묵호만(墨湖灣)으로 이동해서 15척의 배를 만들었다. 1235년(고종 22) 제3차 몽골군 침입 때 이안사는 일족을 이끌고 험준한 두타산성(頭陀山城)으로 피난했다. 


제3차 몽골군 침입의 병화(兵禍)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관기 조달을 강요했던 전주 산성별감이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236년(고종 23) 이안사는 지난날의 묵은 혐의로 인해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미리 마련해 둔 15척의 배로 일족을 이끌고 동북면 덕원부(德源府, 지금의 원산) 영흥만의 용주리(湧珠里, 후에 赤田社)로 이주하였다. 이안사 일족은 선단을 이용하여 두만강 하류의 주인이 없는 광활한 경작지대인 오동(斡東, 와뚱, 알동) 평야를 오가며 농사를 지으면서 부와 세력을 키웠다.   


1239년(고종 26)에 몽골군이 고려에서 철병(撤兵)한 뒤 1254년(고종 41) 제4차 몽골군 침입 때까지 약 15년 동안 평화가 찾아왔을 때 이안사는 덕원에서 삼척을 자주 왕래하면서 준경묘와 영경묘를 보살피고, 삼화사에도 참례하였다. 당시 이안사의 자취는 이색(李穡)의 '환조구비문(桓祖舊碑文)'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 그는 삼화사에 '금은수사경(金銀手寫經)'을 남겼다. 


1248년(고종 35)∼1253년(고종 40) 고려 조정은 이안사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하여 원(元)나라 점령지인 쌍성(雙城, 永興과 和州) 바로 남쪽의 함경도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당시 영흥 이북의 함경도는 원나라의 속령으로서 원나라 개원로(開院路, 지금의 吉林省, 遼寧省, 咸鏡道 등)에 속해 있었다. 개원로의 산길대왕(散吉大王)은 쌍성에 주둔하면서 함경도와 강원도의 접경인 철령(鐵嶺) 이북 지방을 빼앗기 위해 두 차례나 사신을 보내 이안사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이에 이안사는 김보노(金甫奴) 등 1천여 호를 거느리고 원나라에 항복했다. 


김보노 등 1천여 호는 1233년 홍복원(洪福源)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동쪽의 동양분지(東陽盆地)까지 밀려났다가 이안사의 명성을 듣고 백두대간을 넘어 이안사의 행정 구역인 덕원으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산길대왕은 이안사에게 옥배(玉杯)를 선물했고, 이안사도 혈족의 딸을 산길대왕의 아내로 보냈다. 이후 산길대왕과 이안사는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255년 경 산길대왕의 보고를 받은 원나라 황제는 여진(女眞) 땅인 오동에 개원로 정부의 남경(南京) 관할인 오동천호소(斡東千戶所)를 세운 다음 이안사를 천호소의 우두머리 천호(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했다. 당시 원나라는 두만강 요충지대의 행정관을 여진인이 아닌 이방인(異邦人)에게 맡기는 정책을 써 왔다. 이에 이안사는 덕원에서 다시 원나라 점령하의 오동으로 이주했다. 오동에서 30리 더 올라가면 국방상의 요충지인 경흥(慶興)이었다.


원나라로 들어가 지방 관청의 장관직인 남경 오천호의 다루가치에 올랐던 이안사는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 죽었다. 이안사는 함북 경흥(慶興, 孔州)의 성남(城南)에 묻혔다. 이안사의 부인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 평창이씨도 5월 15일에 죽어서 경흥의 성남 땅에 묻혔다. 1394년(조선 태조 3) 11월 6일 이안사는 목왕(穆王)으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太宗)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의 존호(尊號)를 더 올렸다. 평창이씨는 효비(孝妃)로 추존되었다.


이안사는 6남을 두었다. 장남은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 차남은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 3남은 안풍군(安豊大君) 정(精), 4남은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 ?~?), 5남은 안창대군 (安昌大君) 매불(梅拂), 6남은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이안사의 세계는 익조 이행리에서 도조(度祖) 이춘(李椿)-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으로 이어진다. 이들의 능은 모두 북한의 함흥에 있다고 전한다.  


1410년(태종 10) 이안사의 무덤을 함경남도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 現 咸南 新興郡 加平面 陵里)로 옮겨 표석(表石)을 세우고 덕릉(德陵)이라 했다. 효비는 존호를 더 올려 효공(孝恭)이라고 했으며, 무덤을 덕릉과 같은 언덕으로 옮기고 안릉(安陵)이라 했다. 

  

서낭당


두타산(頭陀山, 1,353m)에서 남쪽으로 치달리던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댓재 바로 직전의 햇댓등(963m)에서 동쪽으로 방우재능선이 갈라진다. 이 능선은 492m봉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튼 뒤 방우재산(273m)를 지나 낙동정맥의 백병산(白屛山, 1,259.3m)에서 발원하는 오십천(五十川)에서 끝난다. 햇댓등에서 댓재를 지난 백두대간은 황장산(黃腸山, 1,059m)과 1,105m봉을 지나 1,159m봉에서 동쪽으로 또 하나의 지능선을 내놓는다. 이 지능선은 동쪽으로 뻗어내려 백두대간 덕항산(德項山, 1,071m)에서 발원하는 무릉천(武陵川)과 오십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끝난다. 이 두 지능선 사이에 있는 계곡이 준경묘가 있는 활기리이다. 


전주이씨 재실


방우재능선의 492m봉에서 남남동쪽으로 분지 하나가 갈라져 303m봉으로 이어진다. 목조구거유지는 303m봉의 남동쪽 끝자락에 있다. 준경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황기교(皇基橋)를 건너면 바로 목조구거유지가 나타난다. 구거유지에는 이안사가 피신해서 살았던 집터를 표시한 비각(碑閣)이 세워져 있다.  


활기리에는 이안사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구거유지 뒷산은 적을 막는다는 뜻의 방위산(防衛山, 방우재산), 옆 골짜기는 군사가 진을 친다는 둔곡(屯谷, 둔골), 앞 골짜기는 종묘사직을 잇는다는 직곡(稷谷, 직골)이라 불렀다. 준경묘에서 뻗어내리다 방위산 앞에서 멈춘 산은 굴레를 한 말머리 같아서 말굴레산, 이 산의 오른쪽 골짜기는 말이 되새김질하는 형상이라고 해서 새김마골이라고 했다.


준경길에서 둔곡교(屯谷橋)를 건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서낭당이 낮은 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서낭은 마을의 터를 지켜주는 서낭신이 붙어 있는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성황(城隍)에서 온 서낭신은 한 나라의 도성을 지켜주는 신이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토속신으로 변하여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 서낭당은 마을의 수호신 서낭을 모셔놓은 신당으로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한다. 옛날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의 서낭당에는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고, 그 곁에는 신목(神木)으로 신성시되는 나무가 있거나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 


서낭당에서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면 산자락 양지바른 곳에 전주이씨 재실이 남향으로 앉아 있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이다. 


준경묘 가는 길


활기리 상촌 마을 준경묘 입구에는 차단봉이 설치되어 있어 차량의 통행을 막고 있다. 차량 통행을 막는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 준경묘로 가는 산길은 상당히 가파르고 멀다. 주차장에서 준경묘까지는 대략 1.8km의 거리다.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비로소 완만한 길이 나타난다. 준경묘를 보러 온 노약자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준경묘 관리 책임자에게 묻고 싶다.


정이품송 혼례 소나무 정부인송


서낭당 터


준경묘 가는 길


산기슭에는 아름드리 금강송(金剛松)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곧게 자란 아름드리 금강송은 황장목(黃腸木)이라고 해서 옛날 왕의 관을 만들거나 궁궐을 짓는 재목으로 쓰였다. 경복궁을 중수할 때도 이곳의 소나무를 베어다 썼다고 한다. 황장목은 속이 누런 소나무로 나뭇결이 고울 뿐 아니라 나이테 사이의 폭이 좁아 강하고, 잘 뒤틀리지 않는다. 또, 송진 때문에 벌레가 잘 먹지 않으며, 습기에도 잘 견딘다. 


바로 이곳에 지난 2001년 5월 8일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상판리에 있는 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과 혼례를 올린 소나무가 있다. 이날 준경묘 앞 개활지에서 산림청장의 주례로 보은군수가 신랑 정이품송(삼산초등학교 6학년 이상훈 대역)의 혼주가 되고, 삼척시장이 신부 소나무(삼척초등학교 6학년 노신영 대역)의 혼주가 되어 기상천외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정이품송의 아내가 되었으니 이젠 이 소나무를 정부인송(貞夫人松)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 


정이품송이 600살이라는 고령과 솔잎혹파리에 감염된 뒤 급격한 수세 약화로 고사 위기에 처하자 임업연구원은 우량한 2세를 얻기 위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신부 소나무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준경묘 주변에서 신부 소나무를 찾은 임업연구원은 개화 전 꽃에 비닐봉지를 씌워 자연수정을 방지한 뒤 정이품송에서 채취한 꽃가루를 받아 수정시켰다.


안내판을 보니 '정이품송 혼례 소나무는 나이 95살, 키 32m, 둘레 2.1m인 암소나무이다. 소나무의 혈통 보존을 위해서 10여 년간 연구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형질이 우수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로 선발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수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라면 세계 최고의 소나무다. 미스 인터내셔널 소나무다. 


정이품송 혼례 소나무 바로 곁에는 돌담이 남아 있다. 돌담 앞 양쪽에는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둥근 구멍이 파인 바위가 있다. 아마도 이곳에 서낭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준경묘 전경


준경묘 전경


준경묘 재실


준경묘 비각


대한준경묘비


예감


준경묘


정이품송 혼례 소나무가 있는 금강송 숲길을 벗어나자마자 노동산 정상부에 자리잡은 준경묘가 나타난다. 준경묘 앞에는 뜻밖에도 드넓은 분지(盆地)가 펼쳐져 있다. 준경묘는 왕묘의 격식에 맞게 홍살문(紅箭門)과 재실, 비각, 예감(瘞坎) 등은 갖춰져 있다. 하지만, 문무인석(文武人石)이나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수석(獸石) 등 석의(石儀)는 갖춰져 있지 않다. 예감은 제사를 다 지내고 나서 폐백과 축판(祝版)을 묻거나 축문을 태워 묻는 구덩이다. 비각에는 전서체(篆書體)로 '大韓濬慶墓(대한준경묘)'라고 오목새김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준경묘는 노동산(蘆洞山) 정상부에 풍수 용어로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앉아 있다. 신좌을향은 신방(辛方, 서쪽)을 등지고, 을방(乙方,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좌향(坐向)을 말한다. 준경묘는 안산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근산, 오른쪽에 대명산이 솟아 있고, 뒤에는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다섯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풍수에서는 구름 위로 솟은 높은 산 정상부에 맺힌 명당(明堂) 혈자리를 천궁(天宮)과 같다고 하여 천교혈(天巧穴)이라고 한다. 풍수설에서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난다고 하는 혈이다. 


풍수가들은 준경묘의 혈자리가 높으면서도 웅장한 두타산을 조종산(祖宗山)으로 해서 주산(主山)과 안산(案山), 조산(朝山), 내외청룡(內外靑龍)과 내외백호(內外右白虎), 내수(內水)와 외수(外水) 등 명당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다고 본다. 게다가 주룡(主龍)의 행맥(行脈)이 거침이 없고, 내외명당(內外明堂)이 시원하게 드넓으며, 한문(捍門)과 산돈수곡(山頓水曲), 입수도두(入首倒頭), 전순(氈脣), 요석(曜石), 천지수(天池水)와 진응수(眞應水), 어병사(御屛砂)까지 갖추고 있어 제왕지지(帝王之地) 중 으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산의 산세가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전주이씨 후손은 장손들이 허약하다. 이로 인해 조선 왕조는 장자보다 중자들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명당자리에는 반드시 전설이나 설화가 따라다니듯이 준경묘에도 백우금관설화(百牛金棺說話)가 전한다. 이안사는 전주에서 피신하여 삼척 활기리에 정착한 지 1년만에 아버지의 상을 당했다. 이안사는 이 산 저 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묫자리를 찾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하루는 활기리 노동 산마루에 이르러 몹시 피곤하여 노송에 기대앉아 쉬고 있었다. 이때 한 도승이 동자승을 데리고 나타나 한 곳을 가리키며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 이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왕이 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도승은 이안사가 가까이 있는 것도 모르고, '이곳이 발복하려면 개토제(開土祭) 때 소 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시신을 금관(金棺)에 넣어 장사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태어나 창업주가 될 것이다. 이곳은 천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동자승에게 신신당부했다. 


도승이 떠나고 난 뒤 천하 명당을 얻게 된 이안사는 뛸듯이 기뻤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도 소 100마리와 금관은 이안사에게는 무리였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는 궁여지책 하나를 떠올렸다. 마침 처가에는 흰 소 한 마리가 있었다.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인데, 소 백 마리의 '백우(百牛)'와 소리가 같다. 서로 뜻이 통한다고 믿은 그는 소 백 마리 대신 흰 소를 잡기로 했다. 금관은 더 큰 문제였다. 문득 귀리짚이 황금색이라는 사실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는 금관과 황금색의 뜻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안사는 처가에서 얻은 흰 소를 몰고 노동으로 올라와 제물로 올리고, 황금색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아버지를 장사지냈다. 이 설화도 역시 믿거나 말거나다.    


준경묘에 이어 영경묘를 찾았다. 영경묘는 준경묘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미로면 하사전리에 있다. 두타산에서 남쪽으로 치달리던 백두대간은 댓재 바로 직전의 햇댓등에서 동쪽을 향해 28번 지방도로가 휘감고 돌아가는 북쪽의 댓재능선과 남쪽의 방우재능선이 갈라진다. 두 능선 사이의 계곡에 상사전리와 하사전리가 있다.   


영경묘 입구


영경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하사전리 마을회관에서 조금 더 가면 미로면 동산리로 넘어가는 길이 갈라진다. 이 길 초입의 작은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영경묘 입구다. 영경묘 입구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영경묘 홍살문과 재실, 비각


영경묘 재실


영경묘 비각


대한영경묘비


영경묘 예감


영경묘도 준경묘와 같은 규모의 홍살문과 재실, 비각, 예감이 갖춰져 있다. 비각에는 전서체로 '大韓永慶墓(대한영경묘)'라고 오목새김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예감에는 세월이 내려앉은 흔적이 역력하다.   


영경묘 가는 길


영경묘


재실에서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을 한 굽이 더 돌아간 자리에 영경묘가 있다. 영경묘는 상당히 가파른 산기슭에 풍수 용어로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앉아 있다. 묘좌유향은 묘방(卯方, 동쪽)을 등지고, 유방(酉方,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좌향이다. 그러니까 이양무와 평창이씨는 방우재산을 사이에 두고 죽어서도 서로 바라보며 누워 있는 것이다. 영경묘에도 석의는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 풍수가들은 영경묘를 큰 자리로 보지 않는다.  


강원도 삼척의 노동과 동산에 있는 고총(古冢)이 이양무와 평창이씨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삼척군(三陟郡)을 이안사의 구거유지가 있고, 조상묘가 안치된 곳이라 하여 삼척부(三陟府)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했다. 그러나 이안사가 함경도로 이주하고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무덤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태조대부터 조선의 역대 왕들은 전국의 모든 지관을 동원하여 이양무와 평창이씨의 무덤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 조상묘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두 무덤은 나라의 보호를 받았다. 


'삼척주지(三陟州誌)'에는 '옛날 호장(戶長) 김윤식이 소장했던 고적(古蹟)에 의하면 세종29년(1447년) 10월 강원감사(江原監査) 이심(李審)과 도사(都事) 황효원(黃孝源), 삼척부사 이윤손(李允孫)이 어명으로 무덤을 찾고 있을 때, 그 지역에 살던 촌노(村老) 고봉생(高奉生), 조흥보(曺興寶), 최산봉(崔山鳳)이 목조황고묘(穆祖皇考墓, 준경묘)는 노동(蘆洞)에 있고, 황비묘(皇妣墓, 영경묘)는 동산(東山)에 있으며, 삼척부(三陟府)에서 40리쯤 떨어진 활기동에 목조가 살았던 구거지(舊居址)가 남아 있다고 증언하였다. 깊은 두메산골로 논밭과 상전(桑田)이 있는 이곳은 이 지방 사람들이 옛날부터 댁기(宅基), 댁전(宅田)이라 불러 왔다.'고 하여 이때 무덤을 찾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488년(성종 19) 6월 왕명으로 두 무덤을 찾아 묘역을 수축하려다 다시 왕명에 의해 중지하고 수호군도 철수시켰다. 1555년(명종 10)에는 왕명으로 두 묘에 수호군을 각각 2명씩 두었다. 선조 13년(1580년)에는 강원도 관찰사 정철(鄭澈)의 건의로 두 묘를 개축하고 수호군을 두었다. 정철은 또 하사전리의 무덤을 목조의 고비(考妣) 무덤이라며 수축할 것을 주장했지만, 조선 왕실에서는 무덤 주인공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정병(正兵) 임호(林籇), 역리(驛吏) 김계수(金戒守) 등이 두 묘는 삼척이 아니라 황지(黃池)에 있으며, 석의도 구비되어 있다고 증언했다. 이에 안동과 삼척의 수령에게 영을 내려 산중을 수색했으나 조상묘는 끝내 찾지 못했다. 


선조 22년(1589)에는 강릉의 무인(武人) 강사룡(姜士龍)이 황지 연화봉(蓮花峰, 1,172m) 서쪽에 두 묘가 있다고 상소하였다. 왕명을 받은 예조좌랑(禮曺佐郞) 남근(南瑾)은 지관 허서복(許徐福)과 부사 정유청(鄭惟淸)을 대동하고 탐문하였으나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 이후 이양무와 평창이씨의 무덤을 탐문하는 일은 중단되었다. 조선 말기까지 왕실에서 조상묘를 확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사 이종(李宗)은 1880년(고종 17)부터 두 무덤 근처에 거주하는 종친들과 함께 매년 10월에 시제(時祭)를 지냈다. 


1898년(광무 2) 갑자기 고종(高宗)은 활기리 노동의 묘와 하사전리 동산의 묘를 조상묘로 확정하고 대대적으로 묘역 정비를 했다. 두 묘는 왕릉의 격식에 맞게 사방 3,300척(尺)으로 경계를 정하고, 재실과 비각 등을 갖췄다. 1899년(광무 3년) 4월 16일 고종은 두 묘에 준경묘와 영경묘라는 존호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를 세워 음기(陰記)하였다. 이때부터 준경묘와 영경묘는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되었다. 11월 27일 고종은 이안사가 살던 옛 집터에 친필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 비석을 세웠고, 활기리 99번지에 새 재실을 지었다. 두 묘에는 수호군(守護軍)이 4명씩 배치되었으며, 매년 청명일(淸明日)에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이때 준경묘 헌관은 삼척군수, 영경묘의 헌관은 강릉군수가 맡았다. 1900년(광무 4) 1월 18일에는 전주 자만동(滋滿洞)에도 비와 비각을 세웠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에는 이왕직(李王職)에서 준경묘와 영경묘를 관리하고 제향을 지내다가 해방 후에는 일시 중단되었다. 


1981년 8월 5일 준경묘와 영경묘는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1981년부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봉양회(奉養會)를 설립하여 매년 4월 20일에 제향을 거행하고 있다. 2012년 7월 12일 준경묘와 영경묘는 대한민국 사적 제524호로 지정되었다. 


이양무가 묻힌 1232년부터 묘비가 세워진 1899년까지 무려 66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유교가 국가의 지도 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 왕실 조상의 무덤을 667년 동안이나 방치하다가 갑자기 묘역을 정비하고, 비석을 세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무덤의 주인공이 이안사와 평창이씨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고민은 그만큼 클 수 밖에 없었다. 


조선 왕실이 667년이나 지난 대한제국기에 갑자기 두 무덤을 조상묘로 확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준경묘와 영경묘를 왕실 묘역에 포함시킨 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라가 망해가는 시기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씨 왕조정권의 안녕과 존속을 위한 신화를 창조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따라서 두 무덤의 실제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2017. 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