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저문제(建儲問題)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밀었던 정철 평안도 강계에서 위리안치형에 처해져 정치 생명 끝장나다.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들이 정권을 잡다. 서인의 모사꾼 송익필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다. 정철 귀양지 강계에서 기생 진옥을 만나 조선 문학사상 가장 뜨겁고 노골적인 구애시(求愛詩)를 날리다.
1591년(선조 24) 2월 세자를 책봉(冊封)하는 이른바 건저문제(建儲問題)가 대두되었다. 선조비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는 소생이 없었고,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소생 임해군(臨海君)이 장자, 광해군(光海君)은 차자였다. 임해군은 난폭하고 방탕하여 세자에 오르지 못하고, 선조는 인빈 김씨(仁嬪金氏) 소생 신성군(信城君)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의인왕후는 생모(生母)가 살아 있는 신성군보다는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되는 편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대신들 사이에서도 암암리에 광해군 세자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좌의정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했다. 세 사람은 함께 입궐하여 선조에게 후사 문제를 건의하자고 제안했지만 이산해가 병을 핑계로 약속한 날짜에 나오지 않자 정철은 유성룡과 함께 입궐하여 선조를 알현했다. 그때 유성룡이 주청을 망설이자 정철은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정철의 건의를 듣자마자 선조는 '지금 내가 아직 40살도 안 되었는데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분노했다. 김공량(金公諒)은 여동생인 인빈 김씨에게 정철의 주장이 신성군을 해치려는 음모임을 선조에게 고하게 하였다.
와해 직전에 있던 동인들은 건저문제를 계기로 정철을 논핵하면서 대공세를 펼쳤다. 유생 안덕인(安德仁) 등 5명은 연명으로 주색에 빠져 국정을 그르친 정철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정철이 사직서를 올리자 노여움이 풀리지 않은 선조는 그를 체임(遞任)시켰다. 3월 정철은 용산촌사로 물러나 선조의 명을 기다렸다. 윤3월 양사(兩司)가 정철이 붕당을 지어 조정을 멋대로 움직이고, 반노로 지목된 송익필, 한필 형제와 어울려 주색에 빠져 명분과 체통을 잃었으며, 조정의 인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혐의로 논핵하자 선조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파직했다. 정철과 함께 호조 판서 윤두수(尹斗壽), 좌찬성 윤근수(尹根壽) 등 서인의 영수도 파직되었다.
선조는 세자 책봉 논의를 막는 한편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서인들을 숙청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선조는 동인들의 철천지 원수 정철을 제거하기 위한 탄핵을 받아들였다. 선조는 지나치게 커진 동인 세력을 정철을 시켜 숙청한 다음 그 죄를 정철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고나 할까! 토끼를 잡고 나니 사냥개는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건저문제로 인해 정철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완전히 끝장났다고 봐야 한다.
6월 다시 양사가 계를 올려 정철의 귀양을 청하자, 처음에는 명천으로 귀양 보냈다가 다시 경남 진주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 만에 북관의 평안도 강계로 이배되었다. 이이와 성혼의 제자 이조 정랑 유공진(柳拱辰)도 정철과 같은 당파라 하여 함경도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다. 선조는 정철을 위리안치형(圍籬安置刑)에 처하면서 '정철은 성질이 교활하고 간독하여 배소에 가서 잡인과 서로 통하여 또 어떤 큰 죄를 저지를지 알 수 없으니 위리를 엄하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귀양지 강계에서 정철은 '거국(去國)'이란 시를 읊었다. 유공진의 시를 차운해서 쓴 '강정대주차유낭중공진운(江亭對酒次柳郞中拱辰韻)'이란 시도 있다.
거국(去國) - 나라를 떠나와서(정철)
去國魂頻逝(거국혼빈서) 조정 떠났지만 혼이야 자주 가나니
傷時鬢已秋(상시빈이추) 슬픈 때라 귀밑머리도 이미 세었네
終南一千里(종남일천리) 남산이라 일천 리 아득하기만 한데
歸夢幾時休(귀몽기시휴) 돌아가는 꿈 어느 때에 그칠 것인가
시절은 어지러운데 임금의 곁을 떠나 있어, 꿈 속에서나 만나볼 수 밖에 없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노래한 시다. '거국(去國)'은 임금 곁을 떠나거나 유배가는 것, 또는 곤외(閫外)의 신하가 됨을 말한다. '상시(傷時)'는 시대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종남(終南)'은 종남산(終南山), 곧 궁궐에서 가까운 산, 남산을 가리킨다.
강정대주차유낭중공진운(江亭對酒次柳郞中拱辰韻)
강정에서 대작하며 낭중 유공진의 운을 차하다(정철)
調元手拙手(조원수졸수) 나라 살림에는 졸렬하지만
把酒卽眞人(파주즉진인) 술잔 쥐면 바로 신선이라네
富貴今猶在(부귀금유재) 부귀야 아직도 남아 있나니
江天萬柳春(강천만류춘) 강천엔 버들 가득 봄이로세
정철의 실각은 이산해의 계략이었다는 설이 있다. 동인들은 정철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결국 이산해, 정인홍 등을 중심으로 한 조식과 서경덕 계열의 동인 강경파는 북인(北人), 유성룡과 우성전(禹性傳) 등을 중심으로 한 이황 계열의 동인 온건파는 남인(南人)으로 분열되었다. 북인의 인맥은 조식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일대의 호남과 영남 서부 출신들이 많았고, 남인의 인맥은 그보다 동쪽 경상도 일대의 인사들이 많았다. 기축옥사가 주로 지리산 주변 영호남 동인들의 씨를 말렸던 만큼 이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북인들이 정철을 더 괘씸하게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남인의 영수 유성룡은 정철과 비교적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다.
북인의 주도로 서인의 영수 정철, 윤두수 등은 실각하고, 도승지(都承旨) 박점과 우승지(右承旨) 황혁(黃赫), 충청 감사(忠淸監司) 이성중(李誠中), 사인(舍人) 우성전 등은 관작이 삭탈되었다. 양천회와 양천경(梁千頃) 등 최영경을 무고한 자들도 잡혀와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양천회, 천경 형제를 비롯해서 정여립 역모 관련자들을 고변한 인물들은 무고로 잡혀와 정철의 사주를 받아서 고변했다고 자복한 뒤 곤장을 맞고 죽었다. 하지만 선조는 정철에게 더 이상의 죄를 묻지는 않았다. 선조가 자신이 정철을 토사구팽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56세의 정철은 평안도 강계에서 귀양살이에 들어갔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조경(趙儆)은 하늘 같은 전직 좌의정이 유배를 오자 전전긍긍했다. 정철이 언제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최고 권부에 복귀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조경은 정철을 현직 재상을 대하듯 극진히 대우했다. 하지만 조경은 유배형을 받고 위리안치된 정철을 우대했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
정철은 어느 날 밤 온갖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 한 채 뒤척이고 있었다. 한때 조선 최고위직인 좌의정까지 올랐다가 불운하게도 북관으로 귀양살이를 왔으니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정철은 무료함을 달래려고 나직이 시를 읊었다.
江界謫中次梁靑溪大樸韻(강계적중차양청계대박운)
강계 귀양지에서 양청계 대박을 차운하다(정철)
黃昏有佳月(황혼유가월) 황혼에 아름다운 달이 있어서
吾與美人期(오여미인기) 나는 미인과 더불어 기약했지
劒閣卒來坦(검각졸래탄) 검문관도 급히 오면 평탄커늘
太行何事危(태행하사위) 태행산이 무슨 일로 위태하리
誰能識上古(수능식상고) 누가 능히 옛날의 일 알까마는
方欲問無爲( 방욕문무위) 바야흐로 무위를 묻고 싶어라
滿酌一杯酒(만작일배주) 한 잔의 술을 가득하게 부어서
共歡堯舜時(공환요순시) 다함께 요순시절을 기뻐하나니
귀양지에서의 울분과 실의를 달래고, 가는 세월을 붙잡는 데는 시작(詩作)과 독서, 그리고 술보다 좋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 양대박은 학관 출신으로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다. 조일전쟁 때 그는 의병장이 되어 담양의 고경명 의병군과 함께 왜군과 싸웠다. 의병을 일으킬 때 그가 지은 창의격문(倡義檄文)은 유려한 문장과 고결한 기개로 유명한 글이다. 정철은 양대박의 한시에서 차운하여 이 시를 지어 읊었던 것이다.
이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철이 누운 채로 대답하니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바람처럼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야심한 밤 갑작스런 여인의 방문에 정철은 저으기 놀랐다. 하지만 장옷을 벗자 드러난 선녀처럼 아름답고 고운 여인의 자태에 정철은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여인이 '천기(賤妓) 진옥(眞玉)이라 하옵고 일찍부터 대감의 성을 들었사오며, 더우기 대감의 글을 흠모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철이 다급하게 '그래? 내 글을 읽었다니 무엇을 읽었는고?' 하고 묻자 진옥은 '사미인곡과 장진주사를 읽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 진옥은 '제가 거문고를 타 올릴까요?' 하고는 시 한 수를 읊었다.
淸源棘裏(청원극리)-강계의 가시 울타리 속에서(정철)
居世不知世(거세부지세)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겠고
戴天難見天(대천난견천) 하늘을 이고서도 하늘 보기 어렵네
知心唯白髮(지심유백발) 내 마음 아는 것은 오직 흰 머리 뿐
隨我又經年(수아우경년) 나를 따라 또 한 해가 지나가는구나
정철은 깜짝 놀랐다. 세월의 무상함을 읊은 자신의 시를 진옥이 읊는 것이 아닌가! 정철은 진옥의 가야금 선율에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어느덧 진옥은 정철을 연모하게 되었고, 정철의 가슴도 진옥에 대한 춘정으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북관 험지에서의 어렵고 힘든 유배 생활에서 진옥은 정철의 유일한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다. 정철은 진옥을 품고 싶은 마음에 구애시 한 수를 날렸다.
여진옥상수답(與眞玉相酬答)-진옥과 더불어 수답하다(정철)
옥(玉)이 옥(玉)이라커늘 반옥(半玉)만 너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적실(的實)하다.
내게 살송곳 잇던니 뚜러볼가 하노라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에 '정송강여진옥상수답(鄭松江與眞玉相酬答)'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는 시조다. '반옥(半玉)'은 가짜 옥, 품질이 나쁜 옥을 말한다. '살송곳'은 남자의 성기를 비유한 것이니 참으로 적나라하고 직설적인 구애시(求愛詩)다. 조선 문학사상 이보다 더 뜨겁고 노골적인 구애시는 아마 없을 것이다. 조선의 상남자 정철이 노골적인 구애시를 부르자 가야금을 뜯고 있던 진옥은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가를 불렀다.
철이 철이라커늘-진옥
철(鐵)이 철(鐵)이라커늘 섭철(攝鐵)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잇던니 뇌겨볼가 하노라
정철의 노골적인 구애에 진옥은 한 술 더 떠 화끈한 허락시(許諾詩)로 화답했다. '반옥(인조옥)'에 '섭철(불순물이 섞인 철)', '진옥'에 '정철', '살송곳'에 '골풀무', '뚜러볼가 하노라'에 '뇌겨볼가 하노라' 등 댓구법을 사용한 재치 있으면서도 거침없는 화답시였다. '섭철(攝鐵)'은 불순물이 많이 섞인 철을 말한다. '正鐵(정철)'은 '鄭澈(정철)'의 음차(音借), '골풀무'는 바람을 불어넣어 불을 피우는 풀무인데, 남자의 성기를 녹여내는 여자의 성기를 비유한 것이다. 시에 담겨 있는 뛰어난 재치와 해학이 놀랍다. 진옥도 정철 못지 않게 뛰어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마침내 오랫동안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뜨거운 운우지정을 나누었다.
남원 기생 자미 또는 강아와 강계 기생 진옥이 동일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정철이 강아에게 준 시, 정철과 진옥이 주고 받은 시들을 검토해보면 동일인이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 우선 진옥과 강아(자미)는 이름부터 다르다. 그리고, 전라도 관찰사로 있던 정철은 1582년 9월 승정원 도승지 겸 예문관 직제학이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서 1591년 6월 건저문제로 탄핵을 받고 강계로 귀양을 갔다. 만약 진옥이 강아라면 헤어진 지 약 9년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9년이라는 세월은 정철이 강아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을까?
문제는 또 있다. 당시의 교통 사정을 고려하면 아녀자 홀몸으로 전라도 남원에서 그 먼 북관의 평안도 강계까지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만일 정철이 강계까지 강아를 데리고 갔다면 저런 시를 주고받을 수 없다. 또 강아가 정말 진옥이었다면 늦은 한밤중에 정철을 찾아갈 필요가 있었을까?
의기 강아 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에는 정철을 기리는 송강문학관과 함께 강아의 무덤이 있다. 강아묘의 묘비 앞면에는 '義妓江娥墓(의기강아묘)'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松江 鄭澈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시 남원의 동기인 紫薇를 사랑하자 세상사람들이 松江의 字를 따서 江娥라 불렀다. 松江은 1582년 9월 도승지에 임명되어 江娥에게 석별의 詩를 지어주고 임지인 한양으로 떠났다. ..... 그 후 江娥는 松江에 대한 연모의 정이 깊어 함경도 강계로 귀양가 위리안치 중인 松江을 찾았으나,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의 특명으로 松江은 다시 소환되어 1592년 7월 전라 충청도 지방의 도제찰사로 임명되었다. 江娥는 다시 松江을 만나기 위해 홀홀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남하하다가 적병에게 붙잡히자 의병장 李亮의 권유로 자기 몸을 조국의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적장 小西行長을 유혹, 아군에게 첩보를 제공하여 결국 전세를 역전시켜 평양 탈환의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江娥는 素心보살이란 이름으로 입산수도하다가 고양 신원의 松江 묘소를 찾아 한 평생을 마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에도 강아는 정철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건저문제가 터진 이후 조정의 헤게모니는 다시 동인들에게로 돌아왔다. 정철이 숙청되자 기축옥사의 배후로 지목된 송익필은 동인들의 추적을 피해 이름을 바꾸고 또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성혼과 김계휘(金繼輝) 등은 송익필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 김계휘는 동방 18현 중 한 사람이자 예학의 태두 김장생(金長生)의 아버지였다. 김계휘의 동생 김은휘(金殷暉)는 자신의 집에 송익필, 한필 형제의 가족을 10여년 동안 숨겨주며 먹여 살리기도 했다. 김장생, 조헌, 성혼, 윤근수, 윤두수 등은 송익필을 도와 충청도와 전라도 광주 등지로 피신시켰다.
송익필의 5언율시 '道上(도상)'은 아마도 동인들의 추적을 피해 도망을 다니던 이 무렵에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인의 막후 실력자에서 졸지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송익필의 비애가 느껴지는 시다.
道上(도상)-길 위에서(송익필)
曠野悲風急(광야비풍급) 광야에 슬픈 바람 휘몰아쳐 불고
蕭條閭間稀(소조려간희) 마을마저 드물어 더 쓸쓸하구나
危時門閉早(위시문폐조) 시절이 위태로우니 문 일찍 닫고
山遠客來遲(산원객래지) 산길은 멀어 손님이 오기 어렵네
落照孤雲外(낙조고운외) 석양은 외로이 구름 밖에 지는데
長天一鳥歸(장천일조귀) 머언 하늘 새 한 마리 돌아오네
東南居未定(동남거미정) 사방을 둘러봐도 살 곳은 없는데
悵悵更臨岐(창창갱림기) 기로에 선 이 마음 더욱 쓸쓸하네
같은 해 송익필은 조정에 자수하여 탄핵을 받고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 성혼은 '율곡집(栗谷集)'을 평정하였다. 박순은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1등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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