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15

林 山 2017. 7. 22. 12:00

정여립을 역모로 몰아 기축옥사를 일으킨 정철 박충간 등 22명 평난공신(平難功臣) 녹을 받다. 정철, 성혼, 송익필 등 기호지방의 수구 보수적 서인들 기축옥사를 처리하면서 2,000여 명의 동인 선비들을 학살하다. 이 중 1,000여 명이 넘는 진보 개혁 성향의 호남 선비들과 수백여 명의 영남 선비들이 희생되다. 홍길동의 활빈당 정신과 임거정 농민군의 혁명 정신을 계승한 정여립의 대동계(大同契)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다.


1590년(선조 23) 2월 55살의 정철은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역모를 고변한 박충간은 형조 참판, 이축은 공조 참판, 한응인은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민인백은 예조 참의를 제수받았다. 정여립을 밀고한 학생(學生) 이수(李綏)와 강응린(姜應麟)은 당상관에 올라가고, 조구(趙球)는 정언(正言)을 제수받았다. 정여립을 역모로 몰아 기축옥사를 일으킨 박충간 등 22명이 평난공신(平難功臣)의 녹을 받았다. 


좌의정에 오른 정철은 지난해 세상을 떠난 서인의 영수 박순이 그리웠다. 정철은 기축옥사를 기회로 자신이 주축이 되어 동인들을 싹 쓸어낸 조정의 모습을 박순에게 보여주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는 '호정억박사암(湖亭憶朴思菴)'이란 시를 지어 박순을 추억했다.


호정억박사암(湖亭憶朴思菴)-호정에서 박사암을 추억하다(정철)

 

 江上高臺春草深(강상고대춘초심) 강 위 높은 대에 봄풀은 짙푸르른데

仙遊往跡杳難尋(선유왕적묘난심) 신선의 자취 아득하여 찾기 어렵네

若非跨鶴淸都去(약비과학청도거) 만약 학을 타고 선계로 안 가셨다면

正是騎星故國臨(정시기성고국림) 곧바로 별 타고 조선 땅 굽어보시리


정철은 박순이 죽어서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박순을 존경했다는 것이다. '사암(思菴)'은 박순의 호다. '청도(淸都)'는 전설 속에 나오는 천제(天帝)가 사는 궁궐을 가리킨다.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다는 곳이다. 


2월 18일 김우옹과 이발, 백유양, 정여립 등을 추천했다는 이유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노수신이 파직되었다. 좌의정 정철과 우의정 심수경(沈守慶), 대사헌 홍성민(洪聖民)과 대사간 이산보(李山甫)도 노수신을 논핵하였다. 이때 정철은 위관에서 해면되고 우의정 심수경이 정승으로서 위관을 맡았다.   


5월 심수경이 위관에서 물러나고 정철이 다시 위관을 맡아 기축옥사를 처리했다. 같은 달 선악개천리설(善惡皆天理說)을 주장한 문신이자 학자인 정개청(鄭介淸)은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와서 고문을 당한 후 경원의 아산보(阿山堡)로 귀양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이산해는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의 끈질긴 공격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로 온전할 수 있었다.  


홍절(洪梲), 홍가신(洪可臣), 김명룡, 김응남(金應南)의 아들도 모두 압슬형(壓膝刑)을 받았다. 이발과 이급의 아들은 큰 아이가 11세, 작은 아이는 5세였는데도 모두 죽였고, 이발의 모친은 압사형(壓死刑)을 받고 죽었다. 을사사화 때도 이런 악독한 일은 없었으니, 옥졸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5월 29일 이조 판서 유성룡은 우의정으로 승진하고, 최황(崔滉)이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7월 정철은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하면서 3등 광국공신(光國功臣),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처결한 공으로 2등 수충익모광국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輸忠翼謨光國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에 녹훈되었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우의정과 위관에서 물러난 정언신은 서인들로부터 정여립 일파로 계속 모함을 받은 끝에 7월 19일 국문을 받고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투옥되었고, 그후 사사의 하교가 있었으나 감형되어 갑산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조식의 문하로 학문과 인품이 높아 조야에 명성이 자자하던 영남 출신의 최영경(崔永慶)은 14살 연상의 정철의 인물됨이 소심한 소인배라고 비판한 바 있었다. 최영경은 이발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정철은 최영경을 정여립의 심복 길삼봉으로 몰았다.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된 사람들은 국문을 받을 때마다 '길삼봉이 상장(上將)이요, 정여립은 차장(次將)'이라고 진술했다. 길삼봉은 신출귀몰한 인물로 홍길동의 '길' 자와 정도전의 호인 '삼봉'을 합쳐 만든 이름이었다. 


9월 10일 최영경이 붙잡혀 왔을 때는 이항복이 문사랑청(問事郞廳, 問郞), 정철이 위관이었다. 이항복은 최영경을 적극적으로 구하고자 하였으나 유성룡은 소극적이었다. 최영경의 제자들은 성혼에게 스승을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성혼은 최영경을 너무 편벽된 사람이라고 하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최영경이 결국 감옥에서 억울하게 장살되자 동인의 화살은 정철과 성혼에게 집중되었다. 정철과 성혼에게 원한을 품은 동인들은 '흉혼독철(凶渾毒澈)', 곧 '흉악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최영경을 죽였다고 비난했고, '간혼악철(姦渾惡撤)', 즉 '간사한 성혼과 사악한 정철'이 정개청을 죽였다고 비판했다. 동인들은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을 동인백정(東人白丁), 간철(姦澈)’로도 불렀다. 반면에 서인들은 정철을 이이와 성혼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했다. 조헌은 '오로지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며 강개한 곧은 말만 하기 때문에 백관들이 두려워한다.'고 하여 정철의 강직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괘일록'에는 유홍(柳泓), 황정욱(黃廷彧), 구사맹(具思孟), 홍성민(洪聖民), 남언경(南彦經)이 정철과 세력을 의지하는 사이라고 했다. 백유함(白惟咸), 구성(具宬), 장운익(張雲翼), 황혁(黃赫), 이흡(李洽), 유홍진(柳洪辰)은 정철의 주구 노릇을 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또, 성격(成格), 이춘영(李春英), 송익필, 송한필은 정철의 심복이라고 했다. 성혼과 이이에 대해서는 서인의 영수로서 학자들이 스승으로 삼아서 유학(儒學)을 일으키는 데는 공이 있으나, 다만 자기와 친한 이에게만 너무 편벽하였기 때문에 정철에게 미혹을 당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정철을 옹호하였고, 정철도 그것을 믿고 두려워함이 없게 되어 최영경을 죽이기에 이르렀어도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고 평했다. 


기축옥사는 선조가 동인 세력의 약진을 견제하기 위해서 정철을 이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서인들은 노인과 아이를 고문할 수 없다는 법에 따라 이발의 어린 아들과 노모에 대한 고문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무시하고 이발의 어린 아들과 노모를 잔인하게 고문해서 죽게 했다는 것이다. 최영경도 정철이 석방하자고 한 것을 선조가 거부했다는 설이 있다. 정언신의 경우도 선조는 처형하려고 했지만 재상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정철의 말에 따라 유배로 감형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정황들로 볼 때 가축옥사의 주모자(주범)는 선조였고 정철은 행동대장(종범)이었다는 것이다.  


이이의 제자 이귀는 스승에게 누가 돌아올까 염려되어 정철에게 옥사를 공평하게 처리하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옥사는 이미 죄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전국 각지에서 상금을 바라거나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죄도 없는 사람을 정여립 일파로 엮어서 밀고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정철, 성혼, 송익필 3인이 정여립과 무관한 호남 유생들을 동인이라 하여 역모 관련자로 몰아 죽이는 과정에서 사림에서 존경받던 수많은 호남의 문인 학자들이 억울한 떼죽음을 당했다. 정철을 중심으로 한 기호지방의 수구 보수적 서인들은 3년여 동안 기축옥사를 처리하면서 2,000여 명의 동인 선비들을 학살하는 가해자가 되었다. 희생자 중 1,000여 명이 넘는 진보 개혁 성향의 호남 선비들이 학살되었다. 정철이 호남 선비들의 씨를 말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남의 선비도 수백여 명이 희생되었다. 


학문적으로는 노장적인 성격을 지닌 조식과 개혁 지향적인 서경덕 계열의 선비들이 대거 희생당했다. 이황 계열의 선비들은 같은 동인이면서도 정치적 협조를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철로 인해 호남의 사림은 친 정철파와 반 정철파로 분열되었다.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고, 정여립으로 인해 전라도는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힘으로써 호남 출신 인사들의 관계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기축옥사 이후 조선조 조정은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인물들과 그 기상이 사라지면서 수구 보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기축옥사는 조선조의 정치 환경을 퇴보시키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여립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기축옥사의 공초가 조일전쟁 당시 불에 타 없어져 더 이상의 자세한 연구는 어려운 실정이다. 동인과 서인 간에 정여립 모반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차는 현격하다. 동인들은 서인들에 의한 무옥설(誣獄說), 서인들은 모역설(謀逆說)을 주장한다. 


무옥설은 대의명분에서 동인에게 밀리던 서인과 안당을 멸문시킨 무고가 들통나 노비로 환천된 송익필이 형세를 반전시키기 위해 정여립의 대동계 활동을 대대적인 역모사건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커진 동인 세력을 숙청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선조와 서인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조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여립의 도피는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지는데,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 안에 각종 수신(受信) 문서들을 그대로 방치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일 이 문서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역모사건 연루자로 엮여서 죽었기 때문이다. 급보를 받고 피신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피신하는데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리고 연고지로 방향을 잡아서 추포의 손이 미치게 했을 리가 없다. 피신하려 했다면 덕유산이나 지리산 같은 심산유곡을 택했을 것이다.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인물은 노비 출신 서인의 모사꾼 송익필이라는 주장도 있다. 송익필은 '서인의 제갈공명'으로 활약하면서 자신과 가족 70여 인을 환천시킨 동인의 이발, 이길,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정여립의 대동계 활동을 역모사건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도 모반의 계획이 모호하고 증거도 턱없이 빈약하다는 점에서 선조와 서인들의 조작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모역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역의 증거로 정여립이 외친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들고 있다. 맹자가 성지화자(聖之和者), 즉 선인 중에 가장 부드럽고 유순한 사람이라고 칭찬한 유하혜(柳下惠)의 말을 인용한 하사비군(何事非君)이라는 말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발언이었다. 신채호(申采浩)는 '정여립은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그가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평했다. 


모역설 주장자들은 정여립이 정감록의 '목자(木子=李)는 망하고 전읍(奠邑=鄭)은 흥한다.'는 참언을 이용해 '전읍'은 자기를 가리킨다는 설을 퍼뜨리고 그것을 믿게 했다는 증거를 들고 있다. 한 왕조의 운수가 다히면 천명이 타성에게 내려 새 왕조가 출현한다는 설이 도참설이다. 정여립이 도참설을 고의로 조작한 것은 곧 그에게 혁명을 일으킬 뜻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여립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祭天文)’에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여 조선 왕조의 운수가 다했음을 논하고, 천명의 조속한 이행을 기도한 문구도 모역설의 증거로 들기도 한다. 전제왕조정권 하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대동세상을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정여립은 대동계원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선조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는 해석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말이 있다. 필자는 정여립이 대동계를 통해서 구시대의 적폐인 조선왕조를 타도하고 만백성이 평등한 대동세상을 열려고 한 미완의 혁명가였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기축옥사에서 희생당한 2,000여명의 동인당원들은 선조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어느 정도의 공통점 말고는 정여립의 역모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홍길동의 활빈당 정신과 임거정 농민군의 혁명 정신을 계승한 정여립의 대동계(大同契)는 그렇게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 파산서원


성혼은 양민(養民), 보방(保邦), 율탐(律貪), 진현(進賢)의 방도를 논하는 장문의 봉사소(封事疏)를 올리고 파주로 낙향하였다. 이른바 경인봉사(庚寅封事)다. 성혼은 경인봉사에서 백성을 보호하고 탐관오리를 다스리는 방법을 밝혔다. 정철은 한양을 떠나 고향 파주로 돌아가는 성혼에게 대나무 지팡이를 보내면서 '자죽장송우계(紫竹杖送牛溪)'라는 송별가를 불렀다.  


자죽장송우계(紫竹杖送牛溪)-자죽장을 우계에게 보내다(정철)


 梁園紫竹杖(양원자죽장) 양원의 자죽으로 만든 지팡이

 寄與牛溪翁(기여우계옹) 우계 성혼 선생에게 부치노라

 持此向何處(지차향하처) 대지팡이 짚고 어디로 갈까나

破山雲水中(파산운수중) 파산의 구름과 물 찾아 가네


'우계(牛溪)'는 성혼의 호다. '양원(梁園)'은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넷째 아들 양효왕(梁孝王)이 지은 대나무정원(竹園)이다.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 있던 이 정원은 한대 문사들이 꼭 한번 묵고 싶어 했던 동경의 장소였다. 하지만 양효왕이 문제의 노여움을 사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자 문사들의 발길도 끊어지고 말았다. '파산(破山)'은 '파산(坡山)'이다. 파주의 옛 이름이다. '운수(雲水)'는 구름과 물, 곧 아름다운 자연을 뜻한다.


같은 해 개성 유수(開城留守) 이우직이 죽었다. 이우직은 정철이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을 때 대사헌을 지낸 인물이었다. 이우직은 평소 희로애락을 술로 달래면서 지냈는데, 세상의 일을 물으면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냐?'고 반문하였기 때문에 하관선생(何關先生)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정철은 만시를 지어 이우직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萬事何關客(만사하관객) 만사가 객에게 무슨 관계리

惟知酒有無(유지주유무) 오직 술 있고 없음만 알 뿐


이 시에는 '出芝峯類說廉潔卷, 挽李友直性廉不事營爲, 惟日飮無何,客有言及世事, 輒以何關答之(지봉유설 염결권에서 나옴. 이우직의 만사에서 성품이 청렴하여 영위를 일삼지 않고 오직 날마다 술만 마실 뿐이며 객이 혹시 세상일을 언급하면 문득 무슨 관계냐 하였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우직도 정철만큼이나 애주가였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