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17

林 山 2017. 7. 25. 11:31

선조 조일전쟁으로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로 몽진하다. 귀양에서 풀려난 정철 선조를 호종하다. 고경명 6천 의병군, 조헌의 7백 의병군 금산에서 옥쇄하다. 정철 충청과 호남 양호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다. 명군이 적극적으로 왜군과 전투에 임할 것을 요청하러 정철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들어가다. 정철 사은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논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나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에 우거하다가 세상을 떠나다. 송익필 동인들의 추적을 피해 전라도 진안 운장산(雲長山)에 은거하다. 성혼 대왜 강화를 요구한 명나라에 동조하다 벼슬에서 물러나다.


1592년(선조 25) 4월 중순 조일전쟁(朝日戰爭) 곧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왜군은 선봉대를 부산포로 상륙시킨 뒤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북진했다. 백성들은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황급하게 개성으로 도망쳤다. 선조는 개성으로 몽진할 때 가까운 파주에 살면서도 어가를 호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혼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성혼은 아들 성문준(成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그의 처지를 밝히고, 안협(安峽), 이천(伊川), 연천(連川), 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며 피난하였다. 이천에서 주필(駐蹕)하던 세자가 성혼을 불러들이자 그는 전 삭녕 부사 김궤(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다. 정철의 '기성중심문준(寄成仲深文濬)'이란 시는 이 무렵에 쓴 것으로 보인다.  


기성중심문준(寄成仲深文濬)- 성중심 문준에게 부치다(정철)

 

漠漠胡天雪(막막호천설) 막막한 북방 하늘에 눈 내리니

蕭蕭楚客魂(소소초객혼) 쓸쓸한 초나라 굴원의 혼인 듯

殘年大狼狽(잔년대랑패) 늙으막에 큰 낭패를 만났으니

 悔不用君語(회불용군어) 그대 말 안들은 걸 후회한다네 


'중심(仲深)'은 성문준의 자다. '호천(胡天)'은 함경도 등 북방 지역을 가리킨다. '초객(楚客)'은 초나라 회왕(懷王)에게 버림받고 경양왕(頃襄王)에게 추방되어 타향에서 유랑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굴원(屈原)을 말한다. '대낭패(大狼狽)'는 건저문제로 선조에게 버림받고 강계로 유배당한 일을 가리킨 듯하다. '군어(君語)'는 '그대의 말'인데,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다.


5월 선조가 국난 극복을 위해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자 개성의 유생들은 정철을 다시 기용하라고 추천했다. 당시 개성은 유생의 절반 이상이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라고 할 정도로 기호학파의 세력이 강한 곳이었다. 기호학파 서인들은 '동인들이 망친 나라를 바로 세우라'면서 이이와 성혼의 백년지기이자 정치적 동지 정철을 천거한 것이다. 


1년 전 정철을 '교활하고 간독'하다고 했던 선조는 다급하게 '충효대절이 지극한 경이여, 되도록 빨리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라.'면서 유배지로 사람을 보냈다. 왜군이 쳐들어온 지 두 달도 채 안돼 전 국토가 유린되자 선조와 세자는 개성을 떠나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5월 말일 정철은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시를 지었다. 꿈 속에서 시를 짓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몽중작(夢中作) - 꿈에 짓다(정철)


昭代收遺直(소대수유직) 태평 세상이라 곧은 이 거두어지니

天墀曉鐸鳴(천지효탁명) 대궐 뜰에서 새벽 목탁 소리 울리네


'소대(昭代)'는 나라가 잘 다스려져 태평한 세상을 말한다. '유직(遺直)'은 고인의 올곧은 도리를 지닌 사람, 옛 성현의 풍도(風度)가 있는 정직한 사람이다. '천지(天墀)'는 제왕의 궁전 뜰을 이른다. 


이 시에는 '壬辰五月, 適在江界時, 夜夢作此, 翌日蒙放, 仍下召命, 獎以忠孝大節, 卽向行在, 迎駕於平壤(임진년 오월에 귀양지 강계에서 꿈에 이 시를 짓고 이튿날 방면되었다. 이에 소명을 내리고 충효대절로 추장함으로 즉시 행재소로 향하여 평양에서 어가를 맞았다)'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꿈을 꾸고 난 이튿날인 6월 1일 정철은 영중추부사를 제수받고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정철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을 때 진옥은 이별가 '송별(送別)'을 부르며 그를 떠나보냈다.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이별의 슬픔이 진하게 배어 있는 시였다. 


송별(送別)-떠나보내며


人間此夜離情多(인간차야이정다) 오늘 밤도 이별하는 사람이 많겠지요

 落月蒼茫入遠波(낙월창망입원파) 밝은 달빛만 아득히 물결 위에 지네요

惜問今宵何處泊(석문금소하처박)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머무시는지요

旅窓空聽雲鴻過(여창공청운홍과) 객창에서 외론 기러기 울음 듣겠지요


'송별'은 진옥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조원(趙瑗)의 소실(小室) 이옥봉(李玉峯)의 작품이다. 이옥봉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 3대 여류시인으로 일컬어진다. 특히 이옥봉의 '몽혼(夢魂)'이란 시가 유명하다. 조선 정조 때 여류시인 유한당(幽閑堂) 홍원주(洪原周)가 이 시를 지었다는 설도 있다.    


훗날 정철의 부인 유씨는 한양으로 올라온 남편에게 진옥을 데려오도록 권했다. 조선시대만 해도 축첩은 흠이 아니었다. 정철도 진옥에게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청했으나 그녀는 끝내 그 청을 거절했다. 진옥은 정철의 첩이 되어 천대받는 삶보다는 황진이처럼 자유로운 삶을 원했던 것이다. 진옥은 짧은 만남 끝에 긴 이별을 한 정철을 그리워하며 강계에서 홀로 지냈다고 한다.  


정철은 평양의 행재소에서 선조를 알현했다. 평양에서 선조 곁에 머물던 정철은 어느 달 밝은 밤에 대동강변의 명승지 연광정(練光亭)에 올랐다.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대동강을 바라보면서 정철은 '연광정대월(練光亭對月)'이란 시를 지어 읊었다. 


연광정대월(練光亭對月)-연광정에서 달을 바라보다(정철) 


深夜澄江靜不波(심야징강정불파) 밤은 깊어 맑은 강가 물결 고요한데

桂輪升壁素華多(계륜승벽소화다) 벽위로 오른 달 환한 빛 가득하구나

 天邊島嶼微微見(천변도서미미현) 하늘가 섬들은 고요하게 드러나는데

樓外汀洲漠漠斜(루외정주막막사) 누대 밖 물가는 아스라이 비끼었네

 超忽直疑遊紫府(초홀직의유자부) 아득히 먼 신선 세계에서 노니는 듯 

杳冥還似泛銀河(묘명환사범은하) 어두운 하늘의 은하에 떠 있는 듯해

 萬家岑寂嚴城閉(만가잠적엄성폐) 만가는 적막한데 엄성은 닫혀 있구나

惟有沙禽掠岸過(유유사금략안과) 유독 갯가 새들만 언덕 스쳐 지나네


 緣空一鏡委金波(연공일경위금파) 허공에 뜬 달 금빛 물결이 드리우니

 朱箔疎纖影更多(주박소섬영갱다) 붉고 섬세한 발 그림자 더욱 많구나

 夜久素娥和露冷(야구소아화로랭) 밤은 깊어 이슬 젖은 달도 서늘한데

 樓高仙桂近人斜(루고선계근인사) 누 높아 계수나무 사람 곁에 비꼈네

明籠水國迷銀界(명롱수국미은계) 환하게 수국 감싸니 은계 희미하고

光溢天衢沒絳河(광일천구몰강하) 빛이 천계에 넘쳐 은하가 잠겼어라

 旅思悠悠愁不寐(여사유유수불매) 나그네 심사 시름겨워 잠 못 드는데

 驚禽移樹幾飛過(경금이수기비과) 놀란 새 몇 번이나 옮겨 날아가는가


'정주(汀洲)'는 얕은 물 가운데 토사가 쌓여 물 위에 나타난 곳이다. '초홀(超忽)'은 멀리서 아득한 모양이다. '잠적(岑寂)'은 외로이 솟아 있는 모양, 쓸쓸하고 적막(寂寞)한 모양이다. '엄성(嚴城)'은 경계가 삼엄한 성내(城內)다. '천구(天衢)'는 수도의 큰 거리, 하늘의 막힘없는 길, 별 이름, 수도 등의 뜻이다. '강하(絳河)'는 은하수다. '소섬(疎纖)'은 성글면서도 섬세함이다.


동래 부사로 있다가 서인이 제거될 때 파직되어 낙향했던 고경명은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관군 5만 명이 수천 명에 지나지 않는 왜군에게 어이없게 패배하자 격문을 돌려 담양에서 6,000여 명의 의병군을 조직했다. 6월 1일 담양을 출발한 고경명 의병군은 6월 13일 전주에서 큰아들 고종후(高從厚)에게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군을 막도록 하고, 22일에는 여산(礪山)으로 옮겼다. 27일 은진(恩津)에 도착한 고경명 의병군은 왜군이 금산을 점령한 뒤 호남에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연산(連山)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금산(錦山)에 도착해 곽영(郭嶸)의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고경명은 사후 그의 공적을 기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그는 광주의 포충사(表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과 종용사(從容祠), 순창(淳昌)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제봉집(霽峰集)', 저서에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이 있다.


왜군의 위협이 시시각각 다가오자 선조는 행재소를 의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정철은 선조의 어가를 평양에서 박천, 가산을 지나 의주까지 호종했다. 7월 25일 밤 의주의 선조 행재소에 명나라 우군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 전투에서 패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선조는 여러 대신을 불러들여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정철만 술에 취하여 오지 못했다. 조일전쟁 중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셨으니 정철은 요즘으로 말하면 중증의 알콜중독자였던 것 같다. 


8월 성혼은 개성 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선조가 있는 곳으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세자의 선위(禪位)를 꾀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성혼이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선조는 그를 의정부 우참찬에 특배하였다. 성혼은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편의시무9조(便宜時務九條)'를 올리고, 대사헌에 이어 우참찬을 제수받았다.


8월 18일 조헌은 700여 명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군대를 막아 싸우다가 병력과 무기의 열세로 전멸당했다. 조헌의 순국 소식을 듣고 정철은 제문을 지어 곡을 했다. 9월 왜군이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정철은 충청과 호남의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집했다.  


1593년(선조 26) 새해 정월 초하루를 맞아 정철은 간절한 바람을 담은 시 '신년축(新年祝)' 다섯 수를 지었다. 왜구는 아직도 조선 천지를 노략질하고 있었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하여 행재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신년축(新年祝) - 새해에 빌며(정철)


新年祝新年祝(신년축신년축) 새해를 축하하고 또 새해를 축하하네

所祝新年掃犬羊(소축신년소견양) 새해에 비는 바 오랑캐 물리치고

坐使鑾輿廻塞上(좌사난여회새상) 임의 수레 변방에서 오게 하시어

仰瞻黃道日重光(앙첨황도일중광) 빛나는 하늘의 해 우러러 보기를


앉아서 할 수만 있다면 왜구들을 몰아내고, 의주의 행재소로 몽진한 선조를 한양으로 모셔오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노래다. '좌사(坐使)'는 '앉아서 할 수 있다면'의 뜻이다. 정철은 양호체찰사로 충청도와 전라도에 내려가 있었음으로 여기서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난여(鑾輿)'는 천자가 타는 마차다. 난가(鑾駕)와 같다. '황도(黃道)'는 태양이 운행하는 궤도, 또는 천자가 거동하는 길이다. 


新年祝新年祝(신년축신년축) 새해를 축하하고 또 새해를 축하하네

     所祝新年朝著淸(소축신년조저청) 새해에 비는 바 조정이 맑아져서     

 痛掃東西南北說(통소동서남북설) 동서남북 붕당일랑 모두 쓸어내고

 一心寅協做昇平(일심인협주승평) 서로 공경 협력하여 태평세 되기를


'동서남북(東西南北)'은 동인과 서인, 동인에서 갈라진 남인과 북인 당파를 말한다. 서인의 강경파 행동대장 정철도 당쟁의 폐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인협(寅協)'은 '서로 공경하고 협력하다'의 뜻이다. '승평(昇平)'은 국운이 성하여 세상이 태평스러운 것이다.  


新年祝新年祝(신년축신년축) 새해를 축하하고 또 새해를 축하하네

   所祝新年年穀豊(소축신년년곡풍) 새해에 비는 바 해마다 풍년 들어   

白屋更無民戚戚(백옥갱무민척척) 가난한 백성들 근심도 다시 없고

 丹墀再聽樂肜肜(단지재청악융융) 대궐에는 풍악소리 다시 들리기를


'백옥(白屋)'은 초가, 가난한 집, 서민을 말한다. '단지(丹墀)'는 황제의 어전(御殿) 앞에 있는 붉은 돌계단이다. 지(墀)는 섬돌, 층계를 말한다. 궁전, 대궐을 뜻한다. '척척(戚戚)'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융융(肜肜)'은 화평하고 즐거운 모양, 따뜻한 모양이다. 


新年祝新年祝(신년축신년축) 새해를 축하하고 또 새해를 축하하네

所祝新年邦亂平(소축신년방란평) 새해에 비는 바 난리가 평정되어

湖海老臣歸故里(호해노신귀고리) 강호의 늙은 신하 고향에 돌아가

臥看梅蘂雪中期(와간매예설중기) 눈 속에 핀 매화꽃 누워서 보기를


난리가 평정되어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노래다. '호해(湖海)'는 '호수와 바다, 사방 각지, 세상'의 뜻이다. 강호(江湖)의 뜻도 있다. 은자(隱者)나 시인(詩人), 묵객(墨客)이 현실을 도피하여 생활하던 시골이나 자연을 말한다.  


新年祝新年祝(신년축신년축) 새해를 축하하고 또 새해를 축하하네

所祝新年士志堅(소축신년사지견) 새해에 비는 바 선비의 뜻이 굳어

夷險生死惟一視(이험생사유일시) 이험과 생사 모두를 하나로 보고

是非榮辱莫周旋(시비영욕막주선) 시비와 영욕일랑 상대하지 말기를


'이험(夷險)'은 '평탄함과 험준함'이다. '주선(周旋)'은 '일이 잘 되도록 중간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두루 힘을 씀'의 뜻이다. '상대하다'의 뜻도 있다. 


같은 달 58세의 정철은 양호체찰사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논핵을 받고 한양의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명군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은 일본과의 강화를 핑계로 공격을 중단했다. 5월 정철은 만력제(萬曆帝)를 알현하고 명군이 적극적으로 왜군과 전투에 임할 것을 요청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었다. 중국으로 떠나면서 정철은 '여류서경근동조천지행(與柳西坰根同朝天之行)'이란 시를 지었다. '연경도중(燕京道中)'이란 시도 이 무렵 쓴 것으로 보인다.


여류서경근동조천지행(與柳西坰根同朝天之行)-류서경 근과 함께 중국에 들어가다(정철)

 

關樹早蟬集(관수조선집) 관수에는 이른 매미 모였고

江天秋雨飛(강천추우비) 강 하늘엔 찬 비만 휘날리네

思君數行淚(사군수행루) 임을 생각하면 흐르는 눈물

 寄與判書歸(기여판서귀) 판서 가는 길에 부치옵나니 


 江草靑相合(강초청상합) 푸른 강풀은 서로 엉켜 있고

江雲濕不飛(강운습불비) 강 구름은 젖어 날지 못하네

沙風過岸上(사풍과안상) 모래 바람 언덕 위를 지나고

落日放船歸(낙일방선귀) 석양에 배 띄워 돌아오나니


'서경(西坰)'은 유근(柳根)의 호다. 유근은 2년 전 건저문제로 좌의정 정철이 파직당할 때 그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로 화를 면했다. 정철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들어갈 때 유근은 사은부사(謝恩副使)로 그를 수행했다.


연경도중(燕京道中) - 연경 가는 길에(정철)


粉堞圍山麓(분첩위산록) 하얀 성가퀴는 산기슭을 빙 둘렀고

淸湖接海天(청호접해천) 맑은 호수는 바다 위 하늘과 접했네

平蕪無限樹(평무무한수) 잡초 우거진 들엔 나무도 무성하고

萬落太平烟(만락태평연) 마을마다 살기 좋은 시절 돌아왔네


'옌징(燕京)'은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의 옛 이름이다. '분첩(粉堞)'은 성 위에 낮게 덧쌓아서 하얀 석회를 바른 성가퀴다. '평무(平蕪)'는 잡초가 무성한 평평한 들이다.   


정철의 요청에 대해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尚书) 석성(石星)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다. 아무 소득도 없이 귀국 길에 오른 정철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이르렀을 때 명나라 황제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절사(聖節使)로 떠나는 군서(君瑞) 홍이상(洪履祥)을 만났다. 홍이상은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정철과 함께 호종한 관료였다. 정철은 의주에서 홍이상을 배웅하는 시 한 수를 지었다. 


奉送聖節使洪君瑞朝天之行(봉송성절사홍군서조천지행)

성절사 홍군서가 천자를 배알하러 가는 길을 배웅하며(정철)

 

離懷忽忽對淸尊(리회홀홀대청준) 떠나는 회포 서운해서 맑은 술을 대하니

風雨龍灣草樹昏(풍우용만초수혼) 비 바람 치는 의주에 초목이 어두워졌네

萬壽岡陵會慶節(만수강릉회경절) 황제 폐하의 장수 비는 기쁜 날 조회하니

二年兵甲再生恩(이년병갑재생은) 이년 간 전란의 은혜가 다시 생각나누나 

光陰荏苒隨江水(광음임염수강수) 세월은 속절없이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鴻雁差池過海門(홍안차지과해문) 기러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협을 지나네

燕市悲歌今在否(연시비가금재부) 연경 저자의 애절한 노래 지금도 있을까?

爲余先弔望諸君(위여선조망제군) 나를 위해 먼저 망제군을 조문해 주시게 


萬曆癸巳夏季(만력계사하계) 만력 계사년 여름철

臨汀鄭澈拜(임정정철배) 임정 정철이 절을 올린다


'聖節使(성절사)'는 천추사(千秋使), 성단사(聖旦使)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명, 청의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이다. '淸尊(청준)'은 맑은 술, '龍灣(용만)'은 의주의 옛 지명이다. '岡陵(강릉)'은 '시경'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나오는 구절로 임금의 다복을 기원하는 이름이다. '荏苒(임염)'은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다'의 뜻이다. '差池(차지)'는 가지런하지 않은 모양, 서로 어긋나는 모양을 뜻한다. '燕市(연시)'는 전국시대 연(燕)나라 국도(國都)를 일컫는 말로 후일의 연경(燕京)이다. 예로부터 연시에는 비장한 노래를 부르며 비분강개한 기개를 과시하던 사람이 많았다. 전국시대 자객 형가(荊軻)도 고점리(高漸離)와 연경의 저자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燕市悲歌(연시비가)'는 전국시대 연나라와 조나라에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비장하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선비가 많았다. 즉 비분강개하는 우국지사를 뜻한다. 


'望諸君(망제군)'은 전국시대인 기원전 3세기 전반에 활약한 연나라의 명장 악의(樂毅)를 말한다. 중산국(中山國) 영수(靈壽) 출신의 악의는 연나라 소왕(昭王)의 초빙을 받아 아경(亞卿)에 이어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그는 조(趙)와 초(楚), 한(韓), 위(魏), 연 다섯 나라의 연합군을 이끌고 당시 강대국인 제(齊)나라를 쳐서 수도 임치(臨淄)를 함락시켰으며, 5년에 걸쳐 70여 개 성을 빼앗아 연나라에 바쳤다. 이 공으로 악의는 창국군(昌國君)에 봉해졌다. 소왕에 이어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제나라는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악의를 실각시키고 기겁(騎劫)을 장수로 임명했다. 이에 악의가 조나라로 달아나자 조나라는 그를 관진(觀津)에 봉하고 망제군(望諸君)이라 불렀다. 제나라가 기겁을 죽이고 수도 임치를 수복한 뒤에야 연의 혜왕은 악의를 잃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농후한 이 시에서 정철은 자신을 연나라의 명장 악의에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나라 혜왕이 악의를 잃고 크게 후회한 것처럼 선조도 국난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정철을 버리고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을 이 시에 담은 것이다.    


화산성 동문 망한루


11월 귀국 후 사은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논핵을 받자 정철은 사면을 청하고 물러나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에 우거했다. 이때 이미 정철은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을 앞둔 상태였다. 정철은 강화산성(江華山城)의 동문(東門)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면서 '망한루(望漢樓)'란 시를 읊었다. 


망한루(望漢樓) - 정철


望漢樓上漢江遠(망한루상한강원) 망한루 위에 올라서니 한강은 멀구나

漢客思歸歸幾時(한객사귀귀기시) 한양에서 온 나그네 어느 때 돌아갈까

邊心寄與柳亭水(변심기여류정수) 변방 떠도는 마음 류정수에 부치나니

西入海門無盡期(서입해문무진기) 한도 없이 끝도 없이 서해로 드는구나


강화도에 우거하면서도 정철은 선조가 불러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정철은 강화산성 동문인 망한루에 올라 선조가 있는 한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이 시를 읊었다.    


정철의 강화도 생활은 궁핍했다. 생계조차 꾸리기 어렵게 되자 정철은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이희참(李希參)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말년의 불우한 상황 속에서 지내던 정철은 죽기 직전에 칠언율시 '납월초육일야좌(臘月初六日夜坐)'를 읊었다.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였다.  


납월초육일야좌(臘月初六日夜坐)-섣달 초엿새 날 밤에 앉아서(정철)


 旅遊孤島歲崢嶸(여유고도세쟁영) 외로운 섬 나그네 신세 한해도 저무는데 

南徼兵塵賊未平(남요병진적미평) 저 남녘에선 아직 왜구 물리치지 못했네

千里音書何日到(천리음서하일도) 천 리 밖의 서신은 어느 날에나 오려는지

五更燈火爲誰明(오경등화위수명) 새벽녘 등잔불은 누구를 위해 밝힌 건가

交情似水流難定(교정사수류난정) 사귄 정은 물과 같아서 멈추기 어려운데

愁緖如絲亂更縈(수서여사란갱영) 시름은 실오리 같아 어지러이 더 얽히네

 賴有使君眞一酒(뢰유사군진일주) 고을 원님께서 보내주신 진일주 덕분에 

 雪深窮巷擁爐傾(설심궁항옹로경) 눈 쌓인 궁촌에서 화로를 끼고 술 마시네


이 시에는 '癸巳冬寓居江都時作此絶筆也(계사년 겨울 강도에 우거할 때 작인데 이것이 절필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궁촌에서 외롭고 궁핍하게 살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읊은 시다. 정철은 이 시를 남기고 12일 뒤인 12월 18일 송정촌 우거지에서 5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정철이 죽자 성혼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걱정하면서 자신도 그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쟁영(崢嶸)'은 산세(山勢)가 높고 험준한 모양, 재능이나 품격이 뛰어난 모양, 추위가 매우 심한 모양 등의 뜻이 있다. '사군(使君)'은 고을 원이다. '진일주(眞一酒)'는 송(宋)나라의 소식(蘇軾)이 영남(嶺南)에 있을 때 스스로 빚었다는 술이름이다. 



진안 운장산


9월 송익필은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그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으므로 그는 동인들의 추적을 피해서 숨어다녀야만 했다. 조일전쟁 기간 중 그는 전라도 진안의 운장산(雲長山, 1,126m)에 은거하면서 난리를 피했다. 성혼은 잦은 병으로 선조 일행이 정주(定州)와 영유(永柔), 해주(海州)를 거쳐 한양으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했다. 하지만 해주에서는 선조비를 곁에서 호위하였다. 


1594년(선조 27) 2월 정철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묻혔다. 사헌부에서는 선조에게 정철의 죽음을 알리며 삭탈관직할 것을 청했다. 6월 선조는 '정철은 성질이 걍팍하고 시기심이 많아 질투를 일삼았고, 사소한 사감에도 반드시 모함으로 보복하였으며, 사갈(蛇蝎) 같은 성질로 귀역(鬼蜮) 같은 음모를 품었으니, 독기가 모여서 태어난 것이며, 이에 오직 사람을 상하게 하고 해치는 것을 일삼았다. 또한 정철은 최영경에게 색성소인(索性小人, 진짜 소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음을 분하게 여겨 그를 길삼봉으로 자작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고, 저의 당이 아닌 사람은 사소한 감정에도 쳐서 없애려고 했으므로 그 해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선조실록)고 하면서 정철의 관작을 삭탈했다. 선조실록은 동인에서 분파한 북인들의 주도로 편찬된 것이다. 


서인의 시각에서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정철을 '..... 선조 초년에 전랑(銓郞)으로 기용되었는데 오로지 격탁양청(激濁揚淸)만을 힘썼으므로 명망은 높았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 정철의 재주로서 조금만 비위를 맞추었더라면 어찌 낭패를 당하여 곤고하게 되어 종신토록 굶주린 신세가 되기까지야 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기꺼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가 부회(附會)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결백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적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혜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 단점이었다. .....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戚里)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 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정철의 사후 이이의 제자 김장생은 그를 군자라 평가하면서 그를 비난한 자를 소인이라고 비판하였고, 성혼의 제자 신흠(申欽)은 '정철은 평소 지닌 품격이 소탈하고 대범하며 타고난 성품이 맑고 밝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평했다. 


정철의 제자 권필(權鞸)은 스승의 묘소 앞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스승의 풍류를 느낄 수 없음을 한탄하는 시다. 권필은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 채 술과 시를 즐기며 평생을 야인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과정송강묘유감(過鄭松江墓有感)-정송강 묘를 지나다가 느낀 감회(권필)


空山木落雨蕭蕭(공산목락우소소) 빈산에 낙엽 지고 비는 소슬한데

 相國風流此寂寥(상국풍류차적료) 상국의 풍류 이곳에서 적막하여라

 惆悵一杯難更進(추창일배난갱진) 서글퍼라 술 한잔 올리지도 못하니

 昔年歌曲卽今朝(석년가곡즉금조) 옛 권주가가 바로 지금의 일이로세


정철의 '장진주사'에 나오는 '죽은 뒤에는 누가 한 잔 술을 권할까?'라는 구절에 대해 권필은 '옛 권주가가 바로 지금의 일이로세.'라고 답하고 있다. 권필의 시 마지막 구절에서 인생무상이 진하게 느껴진다.  


권필은 광해군비(光海君妃) 류씨(柳氏)의 동생 등 외척들의 방종을 비난하는 '궁류시(宮柳詩)'를 지었다가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에 연루되어 친국을 받은 뒤 해남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그는 행인들이 동정하며 따라주는 술을 폭음하고 그 다음날 죽었다.  


성혼은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한양으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 좌참찬으로 있으면서 '편의시무14조'를 올렸으나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이 무렵 명나라는 명군을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 강화를 강력히 요구해 왔다. 성혼은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그는 또 군사적인 대치 상태를 풀어 강화하자는 허화완병(許和緩兵)을 건의한 이정암(李廷馣)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분노를 샀다. 선조는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내린 비망기에 성혼을 동조자라고 암시하였다. 이에 그는 용산으로 나와 나이가 많은 관원이 사직을 청하는 걸해소(乞骸疏)를 올린 후, 벼슬에서 물러나 연안(延安)의 각산(角山)에 들어가 우거하다가 1595년 2월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