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18

林 山 2017. 7. 26. 11:28

서인의 모주 송익필 친구 도움으로 당진 숨은골로 은거지를 옮기다. 이몽학의 승속군 봉기 실패하다. 김덕령 이몽학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무고로 옥사하다. 정철의 외재당숙 김성원 왜적에게 죽다. 서인의 영수 성혼 파산의 우계에서 세상을 떠나다. 이순신 명량해전에서 순국하다. 송익필 당진의 숨은골에서 죽다. 당파의 부침에 따라 성혼, 이이, 정철의 관작 삭탈과 회복이 반복되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제향과 철향도 반복되다. 장길산 농민군 홍경래 농민군 봉기 실패로 돌아가다. 동서당파 4색, 6색, 8색 당파로 분화하다.   


1596년(선조 29) 63세의 송익필은 전라도 진안의 운장산에서 내려와 친구인 김진려(金進礪)의 도움으로 충남 당진군 면천면 마양촌(馬羊村, 지금의 당진군 송산면 매곡리 숨은골, 숨어골)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문인과 젊은 유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송익필은 당진의 마양촌에 은거하면서 주자의 '가례(家禮)'를 보충 설명하고 주석을 달은 '가례주설(家禮註說)'을 지었다. 또, 그는 이이와 성혼, 정철, 윤두수 등과 학문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은 글들을 묶어 '현승편(玄繩編)'을 엮었다. 


같은 해 7월 민심이 조선 왕조로부터 이반된 것을 알게 된 서얼 출신의 왕족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 지금의 부여군 홍산면)의 무량사(無量寺)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몽학은 '무능한 선조와 모리배 벼슬아치들을 쓸어버린 뒤 새로운 세상을 열어 백성을 구제하겠다.'고 부르짖었다. 어사 이시발(李時發) 휘하의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도 백성들의 민심 이반을 직접 목격하고 이몽학의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몽학은 한현, 김경창(金慶昌), 이구(李龜), 장후재(張後載), 사노(私奴) 팽종(彭從), 승려 능운(凌雲)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동갑회(同甲會)를 중심으로 600~700여 명의 승속군(僧俗軍)을 규합했다. 


이몽학의 승속군은 홍산현에 이어 임천군(林川郡), 정산현(定山縣), 청양현(靑陽顯), 대흥현(大興縣)을 차례로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洪州城)을 공격했다. 홍주 목사 홍가신(洪可臣)이 무장 박명현(朴名賢), 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홍주성을 철통같이 방어하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승속군에서 이탈하여 관군과 내통하는 자가 속출했다. 이때 승속군의 김경창, 임억명(林億命), 태근(太斤) 등이 이몽학을 죽이고 관군에 항복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덕령(金德齡)은 이몽학의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고 의병군을 이끌고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 운봉에서 이몽학의 반란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덕령은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되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최담년(崔聃年), 곽재우(郭再祐)고언백(高彦伯), 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된 김덕령은 20일 동안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옥사하고 말았다. 김덕령은 김윤제의 종손이자 김성원의 조카였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광주호 옆 성안마을 뒷동산 소재 취가정


어느 날 정철의 문인 권필의 꿈에 비운의 의병장 김덕령이 나타났다. 권필은 김덕령이 술에 취해서 부르는 '취시가(醉時歌)'를 받아 적었다. 환벽당 바로 옆의 취가정(醉歌亭)에는 '취시가' 시비가 세워져 있다. 


醉時歌(취시가) 취해서 부르는 노래

此曲無人聞(차곡무인문) 이 노래 듣는 이 아무도 없네

我不要醉花月(아불요취화월)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바라지 않고

我不要樹功勳(아불요수공훈) 큰 공훈 세우는 것도 바라지 않네

樹功勳也是浮雲(수공훈야시부운)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 같은 것이요

醉花月也是浮雲(취화월야시부운) 자연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 같은 것일세

醉時歌無人知(취시가무인지) 취해서 부르는 이 노래 알아주는 사람 없으니

我心只願長劍奉明君(아심지원장검봉명군) 내 마음은 다만 장검 들고 명군 받들기 원할 뿐


'취시가'는 사실 이 시의 제목이 아니다. 이 시 앞에 있는 서문에는 '꿈속에서 작은 책 하나를 얻었는데, 바로 김덕령 장군의 시집이었다. 그 첫머리에 실린 한 편 제목이 취시가인데, 나도 두세 번 읽어 보았다. 그 가사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너무나 서글퍼서 그를 위하여 절구 한 수를 지었다.'는 내용의 글이 있다. 서문으로 보아 '취시가'는 권필이 꿈속에서 김덕령의 시집을 읽은 내용이다. 권필은 '취시가'의 후일담에 해당하는 시 한 수를 남겼다. 


將軍昔日把金戈(장군석일파금과) 장군은 지난날 쇠창을 잡고 나섰건만

壯志中摧奈命何(장지중최내명하)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운명 어이하랴

地下英靈無限恨(지하영령무한한)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이여

分明一曲醉時歌(분명일곡취시가) 한 곡조 취시가 속에 분명히 드러나네


자신의 뜻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역적으로 몰려 원통하게 죽어간 김덕령의 한은 시간을 달리해서 권필에게 전해져 '취시가'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선조는 김덕령뿐만 아니라 곽재우, 이산겸(李山謙) 등 의병장들을 거의 다 죽였다. 백성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의병장들이 백성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받는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 왕조정권을 타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597년(선조 30) 제2차 조일전쟁(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 정사조(鄭士朝) 등은 성혼에게 부난의 취지로 조정에 입궐하여 선조를 배알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성혼은 죄가 큰 죄인으로서 선조의 처결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입궐하지 않았다. 


같은 해 동복 현감(同福縣監) 김성원은 각지의 의병들과 손을 잡고 현민(縣民)들을 보호하다가 어머니와 함께 성모산성(聖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왜적을 만나자 그는 온몸으로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함께 살해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그 산을 모호산(母護山)이라고 불렀다. 모호산은 지금의 모후산(母后山, 母後山, 919m)이다. 모후산은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남면과 순천시 주암면, 송광면의 경계에 솟아 있다. 그 동쪽에는 보성강 주암호가 있다.   


파주시 파주읍 항양리 산8-2 소재 성혼 묘


1598년(선조 31) 동서붕당과 기축옥사, 조일전쟁에 연루되어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성혼이 파산의 우계에서 세상을 떠났다말년의 성혼은 기축옥사와 조일전쟁 때의 처신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이러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성혼은 '우계집(牛溪集)' 6권 6책과 '주문지결(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爲學之方)' 1책 등의 저서를 남겼다.


같은 해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露梁)에서 퇴각하기 위해 집결한 500척의 왜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선두(船頭)에 나서서 수군을 지휘하던 이순신은 그만 왜군의 유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순신은 무능한 선조와 썩어빠진 벼슬아치들이 자신을 죽일 줄 알고 자결했다는 설이 있다. 조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배의 갑판에서 갑옷도 입지 않고 진두지휘했다는 것은 이미 그가 자결할 결심을 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이순신은 교활하고 무능한 선조와 당파싸움에 눈이 먼 벼슬아치들에게 모함을 받고 수치스런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왜적의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는 편이 명예로운 길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진시 원당동 144 숨은골 소재 송익필 묘


1599년(선조 32) 8월 8일 송익필은 당진시 북면(北面) 원당동(元堂洞) 숨은골의 우거지에서 죽었다. 그는 원당동 숨은골 뒤편 야산에 묻혔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로 활약했던 송익필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송익필은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아무리 고관, 귀족이라도 한 번 친구로 사귀면 자(字)로 부르고 관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송익필의 문하에서 김장생을 비롯해서 김집(金集), 정엽(鄭曄), 서성(徐渻), 정홍명(鄭弘溟), 강찬(姜澯), 김반(金槃), 허우(許雨)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무이시단(武夷詩壇)을 이끌었던 송익필은 이산해, 최경창, 백광훈, 최립, 이순신,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대 8문장가로 불렸다. '제율곡문(祭栗谷文)'은 조선 23대 문장의 하나로 일컬어졌으며, '은아전(銀娥傳)'은 당대로서는 보기 드문 전기체(傳記體)의 글이다. 송익필의 제자와 후학들은 누대에 걸쳐 그를 위한 신원운동을 벌였으나 모두 묵살당했다. 그의 저서로는 '구봉집(龜峰集)', '현승집(玄繩集)' 등이 있다.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5-1 소재 자운서원


1602년(선조 35) 대북(大北)의 영수 정인홍(鄭仁弘)이 중심이 되어 성혼을 논핵했다. 성혼은 정철과 함께 관작이 삭탈되었다. 이후 동인이 득세한 광해군대에는 성혼의 관작이 회복되지 않았다. 1609년(광해군 1)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종명(鄭宗溟)이 부친 정철의 원통함을 상소하여 신원되었다. 1615년(광해군 7) 김장생은 경기도 파주시(坡州市) 천현면(泉峴面) 동문리(東文里) 자운산(紫雲山) 기슭 이이의 묘소 밑에 스승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紫雲書院)을 세웠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 즉위년)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중립적인 실리 외교정책을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명나라에 대해 철저한 사대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서인들로서는 광해군의 줄타기 실용주의 외교노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서인당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해군과 집권 대북당을 몰아내고 선조와 함께 조선 역사상 가장 무능한 인조(仁祖)를 왕으로 세웠다. 서인당이 자신들 마음대로 정국을 주무르기 위해서는 인조 같은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다. 서인당의 집권으로 이이는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624년(인조 2) 정철은 관작이 회복되었다. 서인들은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들의 학문적 뿌리인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시도했다. 그러나, 문묘종사가 지니는 상징성으로 인해 역대 왕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625년(인조 3) 김장생 등의 제자들이 상소하여 스승 송익필의 양민 환원을 요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김장생은 끈질기게 송익필의 복권을 청원하는 상소를 계속 올려 마침내 스승을 복권시켰다. 이 무렵 좌의정 김류(金瑬)가 소북 남이공(南以恭)을 대사헌으로 등용하려 하자 서인은 반대파 소서(少西)와 찬성파 노서(老西)로 갈라져 대립했다. 정철의 4남 정홍명과 이귀(李貴), 장유(張維) 등은 소서, 김류, 신흠(申欽), 김상용(金尙鎔) 등은 노서였다. 1633년(인조 11) 성혼은 관작이 회복되고 제향도 허락되었다. 그는 또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59년(효종 10, 현종 즉위년) 효종(孝宗)이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 곧 장렬왕후(莊烈王后)보다 먼저 죽었다.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가 죽은 아들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1차 예송(禮訟)이 벌어졌다. 이른바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어머니보다 장남이 먼저 죽으면 어머니는 3년, 차남부터는 1년 상복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 아닌 차남이라는 것이었다. 서인은 송시열의 예론에 따라 왕도 사대부와 같은 예를 적용해야 한다면서 1년설을 주장한 반면 남인은 최고의 예로 대우해야 한다면서 3년설을 주장하였다. 기해예송에서는 1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서인이 승리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조정 관료들은 백성들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상복 입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웠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환희산 기슭의 정철 묘


1665년(현종 6) 정철의 후손 정양(鄭瀁)은 경기도 고양에 있던 정철의 묘소를 송시열이 터를 잡아 준 충북 진천군(鎭川郡) 문백면(文白面) 봉죽리(鳳竹里) 어은(漁隱)의 환희산(歡喜山, 402.6m) 중턱으로 이장했다. 1674년(현종 15, 숙종 즉위년) 현종(顯宗) 때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남인들은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1년으로 해야 한다는 기년설(朞年說), 서인들은 9개월이면 된다는 송시열의 예론에 따라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면서 2차 예송이 벌어졌다. 이른바 갑인환국(甲寅換局)이다. 


주자학의 대가이자 기호학파의 주류 송시열은 복상 논쟁에서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부터는 모두가 서자'라고 해석했다. 이는 효종이 적자가 아닌 서자의 신분으로 왕통을 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으로,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대한 민감한 문제였다. 전국의 유생들은 송시열의 예론에 대해 찬반으로 갈라졌고, 남인들은 김석주(金錫胄)와 결탁해서 송시열 등 서인당을 맹렬히 공격했다. 현종이 기년설을 수용함으로써 2차 예송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여 허적(許積)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남인은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인 허목(許穆), 윤휴(尹鑴) 등의 청남(淸南)과 온건파인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등의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었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결국 유배를 당하고 말았다.   


숙종은 집권 세력을 자주 교체하면서 외척을 기용함으로써 특정 당파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하고 충성 경쟁을 유도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변덕이 죽 끓듯 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숙종은 성급하고 변덕이 심했다.  


1680년(숙종 6) 3월 남인의 영수 허적은 충북 충주 출신의 조부 허잠(許潛)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도중에 비가 내리자 숙종은 유악(油幄, 기름을 먹인 장막)을 허적에게 갖다 주라고 명했다. 하지만 허적은 허가도 나기 전에 이미 유악을 가져간 상태였다. 왕궁에서 쓰는 군수품인 유악은 개인적인 이유로 빌려갈 수 없는 것이었다. 허적 등 남인들의 정국 주도에 불만을 갖고 있던 숙종은 이 일을 계기로 서인들을 대거 요직에 기용했다. 이른바 경신환국(庚申換局) 또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다.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의 족질인 병조 판서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정원로(鄭元老) 등은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을 왕으로 삼으려고 그 형제들과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했다. 이른바 '3복(三福)의 변'이다. 허견 등이 전시사령부인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경기도 이천의 둔군(屯軍)에게 매일 특별군사훈련을 시켰고, 도체찰사부가 지휘하던 개성 대흥산성에서도 훈련이 있었는데, 이는 복선군 옹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도체찰사부는 남인들이 북벌(北伐)을 위해 설치한 군사기구였고, 당시 도체찰사는 영의정 허적이었다. 숙종은 부체찰사로 김석주를 임명하여 허적을 견제하였다.


김석주의 치밀한 모사로 복선군과 허견은 처형됐고, 허적은 삭직된 뒤 사사되었으며, 윤휴도 사약을 받았다. 고변자 정원로도 처형되었다. 또, 유혁연(柳赫然)과 이원정(李元楨), 오정위(吳挺緯), 허새(許璽) 등 100여 명 이상의 남인들이 처형되거나 유배형을 받았다. '3복의 변'으로 남인 세력은 물론 그들과 가깝게 지낸 종친 세력까지 제거당했다. 인조의 3남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 복창군(福昌君), 복선군, 복평군(福平君) 3형제는 숙종과 오촌 간이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은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분열되었다.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세력은 송시열의 노론과 김석주, 김만기(金萬基), 민정중(閔鼎重) 등 왕실 외척이었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소재 정철 신도비


1681년(숙종 7) 성혼은 유학의 도통에 공헌이 인정되는 인물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2년(숙종 8)에는 이이도 문묘에 배향되었다. 1684년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정철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가 세워졌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김수증(金壽增)이 전서하고 글씨를 썼다. 


1685년(숙종 11) 정철에게 문청(文淸)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9년(숙종 15) 숙종은 후궁 장씨(張氏)의 소생 왕자 윤(昀)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양자로 들여 원자로 삼으려고 했다. 숙종의 정비는 노론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였으나 1680년 죽었고, 노론 민유중(閔維重)의 딸 계비 인현왕후는 원자를 낳지 못했다. 송시열을 필두로 한 노론은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젊기 때문에 태어난 지 두 달 밖에 안 된 후궁 소생을 원자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숙종은 왕자 윤을 원자로 확정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송시열은 거듭 시기상조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숙종은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들을 대거 유배시키고, 송시열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또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비하려 할 때 반대 상소를 올린 노론들도 귀양을 보냈다.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기사환국으로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중전이 되고, 원자 윤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민암(閔黯)과 이의징(李義徵) 등 남인에게 되돌아갔다. 


남인이 정권을 잡자 이이와 성혼은 문묘에서 철향되었다. 1691년(숙종 17) 정철은 다시 관작이 삭탈되었다. 동서당파의 부침에 따라 이이와 정철, 성혼도 같은 운명을 겪어야만 했다. 이 무렵(1690~1696년) 황주에서 이계상(李季祥)이 '송강가사' 이선본(李選本)을 간행했다. 이선본은 황주본(黃州本)이라고도 하고, 일사본이라고도 한다. 이선본은 발문을 쓴 이선의 이름을 딴 것이다. 황주본은 간행된 곳이 황주이기에 원래 소장자였던 방종현(方鍾鉉)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소장자인 방종현의 호를 따서 일사본(一簑本)이라고도 한다. 


1694년(숙종 20) 노론계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맏손자 김춘택(金春澤)과 소론계인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赫)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벌이다가 함이완(咸以完)의 고변으로 체포되었다. 우의정 민암 등 남인은 복위운동에 연루된 서인들을 모두 하옥시켜 심문했다. 


그러나 중전 장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숙종은 민씨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서인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숙종이 총애하던 숙원 최씨(淑媛崔氏)를 남인이 독살하려 한다고 고변했다. 이에 숙종은 남인을 축출하고 다시 서인을 불러들였다. 또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고, 중전 장씨는 빈으로 강등시켰다. 이른바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갑술환국으로 남구만(南九萬)을 비롯한 소론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은 재기할 힘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이이와 성혼은 문묘에 복향되었고, 정철과 송시열은 다시 관작이 회복되었다. 성혼을 제향하는 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같은 해 정철은 전남 담양군 창평면 해곡리에 창건된 송강서원(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조선왕조 봉건체제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면서 혁명의 기운이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조정의 고관대작들과 지방의 수령들은 파당을 이루어 백성들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쟁과 수탈만을 일삼았다. 그 결과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도처에서 빈민들이 굶어죽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구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는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장길산(張吉山)이다.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장길산(張吉山) 농민군은 운부(雲浮)의 승려 세력, 이영창(李榮昌) 등 서류(庶類)들과 연합하여 백성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던 조선 왕조정권을 타도하고 북벌까지 도모하려고 했다. 운부는 명나라에서 귀화하여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승려였다. 


장길산 농민군은 함경도 경흥의 서수라(西水羅), 평안도 벽동(碧潼) 등지에서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마상(馬商)으로 활동하는 한편 평안도 운산(雲山), 양덕(陽德) 등의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다. 이들은 장차 한양으로 쳐들어갈 계획까지 세웠다.   


장길산 농민군의 거사 계획은 이절(李梲), 유선기(兪選基) 등이 조정에 고변함으로써 위기에 봉착했다. 이들은 "어느 날 이영창이 이절의 집에 와서 자면서 갑자기 묻기를, ‘그대가 장지(葬地)를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 스승을 가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이란 중은 바로 운부로서, 당시 나이 70세로 송조(宋朝)의 명신(名臣)이었던 왕조(汪藻)의 후손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중국에서 표류하여 우리나라에 도착하였으며, 머리를 깎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은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통찰하고 중간으로는 인사(人事)를 관찰하여 재주가 옛날의 공명(孔明)과 유기(劉基, 명나라 초기 학자)에 밑돌지 않는다는 자였습니다. 그가 불경(佛經)을 승도(僧徒)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옥여(玉如), 일여(一如), 묘정(卯定), 대성(大聖), 법주(法主) 등 1백여 인을 얻어 그 술업(術業)을 전수(傳受)시키면서 팔도(八道)의 중들과 체결(締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장길산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鄭), 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라고 고변했다.


숙종은 많은 상금을 내걸고 장길산을 토벌하라고 명했지만 그는 끝내 잡히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홍길동의 활빈당, 임거정의 농민군, 정여립의 대동계를 계승한 장길산 농민군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696년(숙종 22) 5월에서 1698년 1월 사이에 의성 현감을 지냈던 정호(鄭澔)가 '송강가사' 의성본(義城本)을 간행했다. 문묘종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이후 이이는 성혼과 함께 서인의 학문적 연원으로 큰 존중을 받게 되었다. 문묘에 종사되었다는 것 자체가 국가에서 이들의 학문적 권위를 인정한 것이었다.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지속적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이이와 성혼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정신적 지주이자 대학자로 추숭을 받게 되었다.   


1701년(숙종 27) 9월 16일 인현왕후 민씨가 원인 모를 병마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그 직후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就善堂) 주변에 신당을 지어 놓고 궁인과 무당을 시켜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한 사실이 밝혀졌다. 희빈 장씨가 위기에 처하자 장씨와 그의 소생인 세자를 지지하던 소론은 숙종에게 장씨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분노한 숙종은 희빈 장씨를 사사하고, 소론계 인사들도 귀양을 보내거나 파직시켰다. 이른바 ‘무고(巫蠱)의 옥(獄)’이다. 노론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당진시 원당동 소재 입한재


1704년 4월에서 1705년 1월 사이에 관북감찰사로 있던 정호가 '송강가사' 관북본(關北本) 간행했다. 1706년(숙종 32) 송강서원은 사액을 받았다. 1720년(숙종 46) 윤봉구(尹鳳九)는 충남 당진군 원당동에 송익필의 사당인 입한재(立限齋)를 세웠다. 1740년(영조 16) 정철은 정습명(鄭襲明), 정몽주(鄭夢周)의 위패를 모신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원리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정사도(鄭思道)와 함께 추가 배향됐다. 


1747년(영조 23) 성주 목사를 지냈던 정철의 5대손 정관하(鄭觀夏)가 '송강가사' 성주본(星州本) 간행했다. 정관하는 정천(鄭洊)의 아들이다. 성주본은 정천의 발문에 의하면 의성본과 황주본에 잘못된 곳이 많아 이를 여러 사본과 대조해 바로잡아 새로 엮었다고 간행 동기를 밝히고 있다. 또 정관하는 다시 발문을 붙여 아버지가 미처 간행하지 못한 것을 자신이 발간한다고 하고 있어 고증이 가장 확실한 판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쌍교 소재 송강정


1752년(영조 28) 충청도 관찰사 홍계희의 상소로 송익필에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증직했다. 1762년(영조 38) 김장생의 6대손에 의해 송익필의 저서 '구봉집'이 발간되었다. 1768년(영조 44) 정호의 손자 정실(鄭實)이 관서지방에서 '송강가사' 관서본(關西本) 간행했다. 1770년(영조 46) 정철의 후손들은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정자를 새로 세우고 이름을 송강정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권의 부패정치, 지방관들의 학정과 수탈, 삼정의 문란 등 사회적 모순은 점점 더 깊어갔다. 평안도 용강(龍岡) 태생의 홍경래(洪景來)는 사회적 모순의 근원인 조선왕조의 전복을 목표로 농민군을 이끌고 저항했다. 1811년 12월 홍경래는 서얼 출신의 우군칙(禹君則)과 함께 군사와 자금을 모으고 평안북도 가산(嘉山)의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삼아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홍경래는 농민에서 지방의 아전, 서얼, 양반 지식인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홍경래 농민군은 한때 청천강 이북을 평정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관군의 반격으로 정주성(定州城)이 함락되면서 홍경래는 결국 교전 중에 총에 맞아 전사했다. 홍길동, 임거정, 장길산 농민군과 정여립의 대동계 정신을 계승한 홍경래(洪景來) 농민군의 봉기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홍경래 농민군의 혁명정신은 이후 이필제(李弼濟)의 농민군 봉기,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 삼남농민봉기)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다가 전봉준(全琫準), 손화중(孫華仲), 김개남(金開南)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 폭발했다.


1868년(고종 5) 송강서원과 오천서원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없어졌다. 1894년(고종 31) 후손 정운학(鄭雲鶴)은 창평 군수로 있을 때 정철의 시문집 '송강집(松江集)'을 간행했다. '송강집'은 정철의 유고 중에서 간행되지 않았던 속집, 별집, 별집부록과 이미 간행되었던 원집, 연보를 보완하고 수정하여 간행했다. 수록된 한시는 절구(絶句) 417수와 율시(律詩) 131수, 배율(排律) 12수와 고시(古詩) 23수 등이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소재 박순 신도비


1905년(고종 42) 송익필 사후 3백여 년이 지나서야 족보에서 누락되어 빠져 있던 그의 이름이 등재되었다. 1909년(순종 3)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박순의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외 11세손인 이최수(李㝡秀)가 글씨를 썼으며, 외 10세손인 이승회(李承會)가 전액을 하였다. 1910년(순종 4) 송익필은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에 추증되고, 문경(文敬) 시호가 내려졌다. 197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던 오천서원이 복원되었지만, 송강서원은 복원되지 못했다. 2007년 8월 송익필은 경기도에서 '북부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정철은 오늘날까지도 그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정철은 서인의 행동대장으로 기축옥사를 통해서 2,000여 명에 이르는 동인들을 학살한 권력지향주의자였다는 비판을 받는가 하면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는 칭송도 받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는 해석하는 사람의 몫이다.   


정철은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를 남겼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 권2에 '주문답(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短歌雜篇)' 32수, '성은가(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 등이 실려 있다. 


정철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송강가사'는 목판본으로 황주본, 의성본, 관북본, 성주본, 관서본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지만, 관북본은 확인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남아 있다. 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가 있다. 성주본과 황주본 '송강가사'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