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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20

林 山 2017. 7. 28. 12:31

송강정에서 드넓은 죽록들을 바라보면서 정철을 생각하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오늘날의 한국의 정치 사회를 바라본다. 민주당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분당되어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 정치 상황이 선조 이후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으로 분열된 조선시대와 유사하지 않은가? 홍길동, 임거정, 정여립, 홍경래, 장길산,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의 혁명이 성공했더라면 오늘날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최소한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역사를 쓸 수 있지는 않았을까?[끝]   


담양 송강정에서 필자


송강정 앞으로 드넓게 펼쳐진 죽록들을 바라보면서 조선 선조대 서인의 영수, 서인의 행동대장으로 동서당쟁의 중심에 서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간 정철을 생각하다. 정철의 정치적, 학문적 동지 박순과 이이, 성혼, 송익필은 송강정엘 다녀갔을까? 이들은 왜 동인들과 그토록 피튀기는 당쟁을 벌였던 것일까? 이들은 오로지 일신의 부귀영달을 위해서였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백성들 편에 서서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했던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홍길동, 임거정, 정여립, 장길산, 홍경래, 전봉준 같은 혁명가들이 아니었을까? 


어찌하여 송강정에는 창평에서 정철과 그토록 절친하게 지냈던 김성원의 시 한 수도 걸려 있지 않은 것일까? 또 어찌하여 정철의 스승 송순, 김윤제, 임억령, 김인후, 양응정, 기대승의 시 한 편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성혼의 시 한 수라도 없었다면 정말 외롭고 쓸쓸한 송강정이 될 뻔했다. 


'정승(政丞) 10명이 죽은 대제학(大提學)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大提學) 10명이 문묘 배향(文廟配享) 현인(賢人)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봉건시대의 옛말이 있다. 조선시대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東方十八賢) 또는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은 정공신(正功臣)이나 종묘(宗廟)에 배향된 공신들 보다 더 높은 최고의 명예를 누린 유학자(儒學者)들이었다. 따라서 만인의 칭송을 받는 가장 존귀한 위치에 오른 문묘 배향 인물을 배출한 가문에서는 자손 대대로 더 없는 영예로 여겼다.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은 홍유후 (弘儒侯) 설총(薛聰), 문창후 (文昌侯) 최치원(崔致遠), 문성공 (文成公) 안유(安裕)문충공 (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문경공 (文敬公) 김굉필, 문헌공 (文憲公) 정여창(鄭汝昌), 문정공 (文正公) 조광조, 문원공 (文元公) 이언적, 문순공 (文純公) 이황, 문정공 (文正公) 김인후, 문성공 (文成公) 이이, 문간공 (文簡公) 성혼, 문원공 (文元公) 김장생, 문열공 (文烈公) 조헌, 문경공 (文敬公) 김집(金集), 문정공 (文正公) 송시열, 문정공 (文正公) 송준길, 문순공 (文純公) 박세채(朴世采)다. 이황 이후 동인은 단 한 명도 문묘에 배향되지 못 했음을 알 수 있다. 서인도 소론의 영수 박세채를 제외하면 김인후부터 송준길까지 모두 노론 계열이다. 이는 선조 이후 서인의 노론 계열이 정치 투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의 지배세력으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송시열 등은 이 글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김집은 누구인가? 그는 김장생의 아들이자 이이의 서녀사위로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종증조 할아버지다. '서포만필'과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은 그의 종손자다. 그는 아버지 김장생으로부터 이이, 성혼의 성리학과 송익필의 예학을 전수받는 한편 성혼과 송익필,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김집은 송시열, 김상헌(金尙憲),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북벌론을 주창하는 한편 안방준,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대동법을 반대한 인물이다. 국제 정세에 까막눈이었던 북벌론자들은 조청전쟁(병자호란)을 불러와 인조의 삼전도 굴욕 등 국제적인 대망신을 당하게 한 주역이었다. 


조선 최고의 개혁법인 대동법은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경감시키는 반면 조세 부담이 늘어난 대지주들에게는 불리했다. 대지주들이 대동법을 결사반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지주들은 누구였을까? 조선 최고의 대지주는 왕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왕족과 집권층 벼슬아치들이었다. 송시열은 대전 지역의 대지주였다. 따라서 사대부 지주 계층을 옹호했던 김집,송시열, 송준길, 안방준 등 집권 노론계 벼슬아치들은 대동법을 죽기 살기로 반대했던 것이다. 


송준길은 송시열의 친척으로 서인의 중진 김장생과 김집, 송이창(宋爾昌), 남인의 소장파 리더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송준길의 장인이 정경세, 정경세의 스승이 남인의 영수 류성룡이다. 송준길의 사위가 인현왕후의 아버지이자 숙종의 장인 민유중(閔維重)이다. 남인의 영수 허적은 노론의 거두 민유중에게 외가 쪽으로 당숙뻘이 된다. 민유중은 명성황후(明成皇后) 민비(閔妃)의 7대 외조부가 된다. 송준길만큼 혈연, 학연이 화려한 사람도 드물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과 함께 자의대비 복상에 대해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서인의 온건파 리더 송준길은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한편 남인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그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박세채는 문묘에 배향된 서인 가운데 유일한 소론이다. 그는 김상헌, 김집, 박의(朴猗)의 문인으로 대동법의 재실시를 주장하여 전국으로 확대시켰다. 허새(許璽)의 옥사를 계기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박세채는 나량좌(羅良佐) 등과 함께 소론을 결성하고 영수가 되었다.


선조 이후 조선의 지배세력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서인들은 송시열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다. 조선 망국의 주역인 서인당 노론계는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 친일파로 변신해 나라를 팔아먹었으며,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자 이들은 또 재빨리 친미파로 변신함으로써 대를 이어 부귀영달을 누릴 수 있였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우익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친일파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서인에 이르게 된다.  


역사는 정치 투쟁에서 승리한 자들의 기록이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는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서인, 친일파, 친미파,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쓴 것이리고 봐야 한다. 아직도 우리 역사는 일제시대 일본인 역사 교수들에게 배운 역사학자들이 오염시킨 식민사관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친일파와 해방 이후 친미파를 거쳐 정부 수립 이후 국사편찬위원회까지 장악한 서인의 후손들로 인해 한국의 역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선조 이후 조선을 장악한 서인들은 국제 정세에 어두운 나머지 두 번의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자초했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에 눈이 먼 나머지 국제사회에서 중립적인 실리 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을 군사반란으로 전복시키고 무능한 인조를 왕으로 세움으로써 두 번의 조청전쟁(병자호란, 정유재란)을 자초하여 백성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일본 등 주변국들이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있을 때 서인들은 주자학의 공리공담에 빠져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송시열 초상화(다음백과)


승리자 지배층이 기록한 역사에서 이이, 성혼, 송시열 등은 주자학의 종주이자 위대한 학자, 선비겠지만 패배자 피지배층이 바라본 역사에서 이들은 조선을 망하게 한 일등공신이자 조선 최대의 역적인 것이다. 송익필도 마찬가지다. 승리자의 역사에서 송익필은 당대 최고의 천재 유학자이자 서인의 제갈공명일지 모르지만 패배자의 역사에서 바라본 송익필은 천하의 모사꾼으로 개인의 부귀영달을 위해 기축옥사를 기획하여 정철로 하여금 수천 명의 선비들을 학살하게 한 간흉인 것이다. 송익필에 의해 동서당쟁이 더욱 심화되고 격화되었으며, 나아가 조일전쟁과 조청전쟁까지 초래했으니 그가 조선 사회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서인의 이이, 성혼, 송익필, 정철, 김장생, 송시열..... 동인의 이산해, 유성룡, 정인홍, 김성일, 이덕형..... 그리고 조선 왕조 봉건체제를 뒤집어엎고, 썩은 벼슬아치들을 쓸어버린 뒤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했던 홍길동, 임거정, 정여립, 홍경래, 장길산, 전봉준..... 승자가 쓴 역사에서 왕조에 충성한 자는 충신이 되고, 백성을 사랑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한 혁명가들은 역적으로 몰렸다. 패자의 시각으로 쓴 역사에서는 과연 어떨까? 만약 홍길동, 임거정, 정여립, 홍경래, 장길산, 전봉준이 살아 있다면 동인과 서인 유학자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화폐에는 그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인물의 얼굴 초상이 들어간다. 한국의 화폐 5만원권은 신사임당, 만원권은 세종, 5천원권은 이이, 천원권은 이황, 백원짜리 동전은 이순신이 주인공이다. 신사임당은 다들 알다시피 서인의 원조 이이의 어머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조선 왕조 전제정권 시대의 인물들이고, 세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무능했던 선조 때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과연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인물들인가? 정치적 승리자들은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패배자들도 이에 동의할까?    


역사는 반복되는가? 오늘날의 한국의 정치 사회를 바라본다. 민주당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분당되어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지금의 한국 정치 상황이 선조 이후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으로 분열된 조선시대와 유사하지 않은가? 역사를 승자의 집장에서 바라볼 것인가, 패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중립적 입장에서 바라볼 것인가? 그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금물이이다. 하지만 홍길동, 임거정, 정여립, 홍경래, 장길산, 전봉준이 이끄는 혁명군이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만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새 세상을 여는 데 성공했더라면 오늘날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최소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지금보다는 훨씬 더 정의로운 역사를 쓸 수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정철이 창평으로 낙향할 때마다 묵묵히 지켜보았을 죽록천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자미가 흐드러지게 필 때 여울이 붉게 물든 자미탄을 보러 다시 오고 싶다.  


2017. 7.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