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벽당 남동쪽 200~300m 바로 앞에는 충장공(忠壯公) 김덕령의 취가정(醉歌亭)이 있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를 앞세우고 있는 형국이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식영정(息影亭)과 임억령의 사위 서하(棲霞)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의 서하당(棲霞堂)은 환벽당에서 서북쪽으로 500m 떨어진 지실마을,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소쇄원(瀟灑園)은 남동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창암촌(蒼巖村)에 있다. 소쇄원 남동쪽 차로 2~3분 거리에는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대 병부상서(兵部尙書)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의 독수정(獨守亭)이 있다. 송강정은 북서쪽, 면앙정은 북북서쪽으로 좀 떨어진 거리에 있다. 창계천과 별뫼 기슭의 환벽당과 식영정, 소쇄원을 일러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고 했다. 환벽당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이 조선시대 누정문화(樓亭文化)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담양 취가정
담양이 누정문화의 중심지가 된 것은 16세기 조선의 당쟁(黨爭), 사화(士禍)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백성들의 삶과는 무관한 권력투쟁에 눈이 먼 벼슬아치들의 당쟁에 환멸을 느낀 선비들이 벼슬을 내던지고 낙향하거나 사화에 희생되어 유배된 선비들이 담양과 그 인근에 정자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시를 짓고 음풍농월하면서 조선조 사림문화의 꽃을 피웠던 것이다. 호남 유학(儒學)의 사종(師宗)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 ~ 1560), 당대 최고의 유학자 기대승 등은 당시 조선의 성리학을 이끌었던 호남 출신의 유학자들이었다
김성원은 증암천에 홍교(虹橋, 무지개다리)를 놓아 환벽당과 식영정, 소쇄원을 오가며 김윤제와 임억령, 양산보의 가교 역할을 했다. 김성원이 식영정을 세우고 3년이 지난 1563년 송순은 식영정의 시를 차운하여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고 하면서,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 동(증암천)안에 세 명승(一洞之三勝)'이라고 말했다. 환벽당에 마실 온 당대 최고의 시인 임억령과 당대 최고의 선비 양산보가 김윤제와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시면서 거문고 반주에 시를 읊다가 달빛을 받으며 돌아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로맨티스트 소세양, '면앙정가'의 주인공 송순, 김인후, 시문의 대가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 기대승도 환벽당을 찾아 이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김윤제는 무등산 근동에서 그 영향력이 상당했다. 환벽당에는 호남가단 1세대인 송순, 임억령, 김인후, 양산보를 비롯해서 소세양, 양응정, 기대승 외에도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1582) 등 당시 호남의 이름난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김윤제와 교유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호남 사림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거치면서 동지의식을 공유했다.
여기서 김윤제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김윤제는 소쇄처사 양산보의 처남이다. 김윤제의 여동생 김윤덕은 양산보와 결혼해서 아들 양자홍(梁子洪, 일찍 죽음)과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 1523~1594), 지암(支岩) 양자정(梁子渟, 1527~1597), 딸 앵두를 두었다. 양자징은 김인후의 수제자로 후에 그의 사위가 되었다. 자징과 자정은 고경명과 절친이었다. 양산보의 손자 천회(千會), 천경(千頃)은 1589년(선조 22) 정철이 위관을 맡은 기축옥사(己丑獄事) 2년 뒤에 일어난 신묘옥사(辛卯獄事) 때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을 무고한 죄로 죽었다. 양산보는 송순의 고종4촌 동생이다. 양산보의 어머니가 송순의 고모다. 김윤제와 송순은 한 다리 건너 사돈 간이었다.
담양 서하당
김인후는 양산보의 아들을 사위로 맞았다. 고경명은 김윤제의 종생질녀(從甥姪女) 사위다. 양산보의 4종매는 임억령과 결혼했다. 김성원은 김윤제의 조카로 임억령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김윤제의 외손녀가 정철의 부인이다. 그러니까 김성원은 11살 어린 정철의 처외재당숙(妻外再堂叔)으로 정철의 장모와 6촌 간이다. 양응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화가인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의 아들이다. 양팽손이 양산보의 6촌 형이니까 양응정은 양산보의 7촌 조카뻘이다.
담양 식영정
김윤제는 환벽당에서 호남의 사림 인사들과 교유하는 한편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가 바로 정철과 김성원이다. 김윤제는 종손인 김덕령과 그의 형 김덕흥(金德興)도 문하에 두고 공부를 시켰다. 김윤제가 정철을 만나게 된 일화가 전해 온다.
1545년 명종(明宗)의 외숙인 소윤파(小尹派) 윤원형(尹元衡)이 인종(仁宗)의 외숙인 대윤파(大尹派) 윤임(尹任)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조작한 정치공작인 을사사화에서 정유침(鄭惟沈)의 사위이자 정철의 매형 계림군(桂林君) 유(瑠)가 역모로 고변되면서 정철의 집안도 하루아침에 역적 집안으로 몰려 풍비박산이 났다. 이어 1551년(명종 6) 소윤파가 잔여 대윤파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공작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정미사화(丁未士禍)가 일어나자 정유침은 다시 경상북도 영일(迎日)로 유배되었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탄생으로 사면령을 받고 6년 간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정유침은 식솔들을 이끌고 정철의 조부 묘가 있는 전라도 담양부(潭陽府) 창평현(昌平縣)의 당지산(唐旨山) 기슭으로 내려왔다. 당지산은 지금의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송강정 뒷산이다.
16세의 정철은 어느 한여름날 둘째 형 정소(鄭沼)가 모시고 있던 어머니를 뵈러 순천으로 가다가 지실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옷을 훌훌 벗고 환벽당 아래 자미탄의 용소(龍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며칠 전 낮잠을 자던 김윤제는 환벽당 바로 아래 용소에서 청룡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김윤제는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하인을 시켜 용소에 내려가 보라고 일렀다. 용소로 내려간 하인은 멱을 감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하고 돌아와 김윤제에게 보고했다. 김윤제도 용소로 내려가 멱을 감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바로 정철이었다.
김윤제가 시험삼아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자 정철은 당당한 태도로 막힘없이 대답했다. 인종(仁宗)의 후궁 숙의(淑儀)가 큰누나, 계림군의 부인이 막내누나였기에 정철은 어려서부터 대궐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훗날 명종(明宗)이 될 왕자 등 왕족들과 어울려 놀던 사람이 아니던가! 김윤제는 영특하고 기상이 넘치는 정철을 보고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고 확신했다. 정철의 재질을 알아본 김윤제는 그의 순천행을 만류하고 환벽당에 머물게 했다. 정철은 김윤제 밑에서 김성원과 함께 공부했다.
김윤제는 정철을 만난 것을 기념하여 증암천변에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이른바 쌍송(雙松)이다. 김윤제가 낚시를 하던 조대(釣臺)와 용소는 광주댐 건설로 인해 물 속에 잠겨 버렸다.
담양 소쇄원
김윤제는 자신의 외손녀를 정철에게 출가시키고자 했다. 김윤제의 외손녀는 문화 류씨(文化柳氏) 류강항(柳强項)의 외동딸이었다. 김윤제는 사위 유강항에게 정철을 외손녀사위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유강항은 객지에서 온 정철이 사윗감으로 탐탁치 않았다. 유강항이 결혼에 난색을 표하자 김윤제는 사위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장인의 완강한 태도에 당황한 유강항은 결국 정철과 딸의 결혼을 승낙하고 말았다. 정철과 문화 류씨는 슬하에 4남2녀를 두었다.
김윤제와의 만남으로 정철은 그의 인생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유배지에서의 고달픔과 슬픔에서 벗어나 김윤제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김윤제의 주선으로 결혼도 할 수 있었으며, 처가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도움을 받으면서 생활도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환벽당을 드나들던 호남 사림의 쟁쟁한 인물들과도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정철에게 있어 크나큰 행운이었다.
김윤제의 후원으로 정철은 대학자 기대승의 문하에 들어가 북송의 철학자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의 저서에서 핵심을 발췌한 송학(宋學) 입문서인 '근사록(近思錄)'을 배웠으며, 선비로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도리를 익혔다. 기대승이 세상을 떠나자 정철은 김인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고, 21세 때부터는 양응정을 스승으로 모셨다. 또 당대의 유명한 시인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다.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벼슬길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다.
정철은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김인후와 송순, 박순, 임억령, 기대승, 양응정 등 훌륭한 스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또 여기서 김성원, 고경명, 백광훈,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 백호(白湖 ) 임제(林悌, 1549~1587) 등 기라성같은 인물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벼슬을 내던지고 환벽당으로 낙향하여 시와 술, 거문고와 노래로 세월을 보내던 김윤제는 1572년 정월 세상을 떠나 무등산 기슭에 묻혔다. 이때 정철은 부친상을 당해 2년 전부터 경기도 고양의 신원에서 시묘살이를 하다가 1572년 7월이 되어서야 돌아왔기 때문에 김윤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 했던 것 같다. 정철은 '제벽간당(題碧澗堂)'이란 시를 지어 대스승이자 처외조부 김윤제를 추모했다.
제벽간당(題碧澗堂)-벽간당에 제하다(정철)
碧澗冷冷瀉玉聲(벽간냉냉사옥성) 벽간당 냇물 돌돌 흐르는 구슬소리에
五更秋枕酒初醒(오경추침주초성) 가을 새벽 베개머리에서 술이 갓 깨네
沙翁去後增嗚咽(사옹거후증명인) 사촌옹이 떠나신 후엔 더욱 목이 메어
風樹興懷不忍聽(풍수흥회불인청) 풍수탄 감회 일어 차마 듣지 못하겠네
김윤제는 정철에게 대스승이자 처외조부였다. 또 그에게는 인자한 할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김윤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슬픔이 진하게 묻어나는 시다. 이 시에는 '沙村翁小草廬,在雙溪之上瑞石之下,一日翁以手筆題廬之北壁曰碧澗堂,翁去後,其子孫追慕請詩,惻然悲吟,書與師古,師古,其孫也(사촌옹의 작은 초가가 쌍계 위 서석봉의 아래에 있는데 하루는 옹이 손수 벽간당이라고 써서 초가집 북쪽 벽에 붙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신 뒤에 그 후손이 추모하여 시를 청하므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사고에게 써 주었다. 사고는 그 자손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풍수(風樹)'는 한영(韓嬰)이 지은 ‘한시외전(韓詩外傳)' 권9에 나오는 풍수지탄(風樹之嘆)을 말한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제(齊)나라로 들어가다가 길에서 슬피 우는 소리를 들었다. 공자 일행이 가서 보니, 고어(皐魚)란 사람이 상(喪)을 당하지도 않았는데도 거친 베옷을 입고 꺼이꺼이 통곡하고 있었다. 공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고어는 '내가 잘못한 것이 셋 있다. 젊어서 제후에게 공부하면서 부모를 돌보지 않은 점, 나의 뜻을 높이 세웠지만 군주를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한 점, 친구와 친하게 지내다 조금 사이가 끊어진 점 등 세 가지다. 나무는 흔들리지 않으려고 하나 바람은 멈추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가도 만날 수 없는 것이 부모다.’라고 하였다. 즉 '풍수'는 부모가 죽어 봉양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친부 정유침에 이어 처외조부 김윤제마저 잃은 정철은 생전에 좀더 잘해 주지 못한 풍수지탄이 가슴에 사무쳤을 것이다.
서하당 주인 김성원은 정철의 '제벽간당'에서 차운한 시를 지었다. 스승이자 당숙인 김윤제를 잃은 김성원의 슬픔도 정철 못지 않았을 것이다.
차제벽간당(次題碧澗堂韻)-제벽간당에서 차운하다(김성원)
席上鳴灘是舊聲(석상명탄시구성) 이 자리서 들리는 여울물 소린 옛 그대론데
醉魂偏向此中醒(취혼편향차중성) 취한 넋이 쏠려가자 이 속에서 술이 깨누나
沙翁已逝松翁遠(사옹이서송옹원) 사촌 선생 돌아가시고 송강마저 멀어졌으니
舊耳那堪獨自聽(구이나감독자청) 옛날 같이 귀 기울여 어이 나만 홀로 듣느뇨
김윤제도 세상을 떠났고, 친하게 지내던 동무 정철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이 되어 한양에 가 있으니 옛날에 함께 듣던 시냇물 소리를 지금은 홀로 듣고 있다. 홀로 남은 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다. 세월의 무상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환벽당 동쪽 쪽문
환벽당 서쪽 정문
쌍송 바로 맞은편에 환벽당으로 오르는 쪽문이 있다. 환벽당으로 통하는 정문은 서쪽에 있다. 김윤제의 살림집은 서문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쪽의 쪽문으로 들어가면 다소 가파른 돌계단길이 나타난다. 돌계단길을 올라서면 무등산과 성산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곳에 환벽당이 동남향으로 앉아 있다.
담양 환벽당
환벽당에서 바라본 무등산
환벽당은 축대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이다. 서쪽 2칸은 방이 마련되어 있고, 그 앞쪽과 오른쪽에 마루를 깔았다.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有室形)정자다. 환벽당 마루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무등산(無等山, 1,187m)의 북동쪽 능선에 솟은 북봉(北峰, 1,053 m)에서 북산(北山, 777.9m)을 지나 성산(星山, 별뫼, 493m)을 향해 치달려오는 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환벽당은 원래 정각형(亭閣形)으로 되어 있었는데, 후대에 중건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환벽당 당호(堂號)는 누가 지었을까? 고경명의 무등산 기행기인 '유서석록(遺書石綠)'에 '신영천자 잠이 편액하기를 환벽이라 했다고 한다.(申靈川潛 扁曰環碧云)'라는 기록이 있다. 환벽당 당호는 조선 전기의 문인화가인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이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환벽당이 처음 세워질 당시 정자 뒤편에는 울창한 대나무숲이 빙 둘러 감싸고 있었다고 한다. 대나무숲의 푸르름이 사시사철 정자를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환벽당이다. 대나무숲이 우거졌던 자리에는 지금 소나무숲이 들어서 있다.
'유서석록'은 고경명이 41세 때인 1574년 음력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 74세의 광주 목사 임훈(林薰) 일행과 함께 무등산에 오른 감상을 순한문으로 쓴 기행문이다. 무등산과 그 인근의 모습을 유려한 필치로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표현한 '유서석록'은 16세기 조선의 뛰어난 산문학(山文學)이라고 할 수 있다.
'유서석록'에는 환벽당을 찾았을 때의 일도 기록되어 있다. 환벽당과 관련해서 '식영정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정자 하나가 날아갈 듯이 서 있다. 정자 앞에는 반석이 깔려 있고, 그 아래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다. 이 정자는 학자 김윤제가 살던 곳으로 신영천(申靈川) 잠(潛)이 환벽당이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아침에 창평 현령 이효당(李孝讜)이 와서 임 선생을 뵈었다. 서하당이 임 선생을 위하여 마련한 술자리에 일원(一元) 이만인(李萬仁)이 소쇄원으로부터 뒤늦게 와서 다시 큰 잔으로 순배(巡杯)를 돌리니 술자리가 미처 파하기 전에 임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판관(判官) 안언룡(安彦龍)과 여러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환벽당 앞 작은 연못
환벽당 바로 아래에는 아주 작은 연못이 있다. 옛날에는 이 연못 근처에 김윤제의 초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정철의 '제벽간당(題碧澗堂)' 소서(小序)에는 '사촌옹의 작은 초당을 벽간당이라고 한다.(沙村翁小草廬 曰碧澗堂)'고 했다. 연못 가에 있던 작은 초정이 벽간당(碧澗堂)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벽간당은 푸른빛이 도는 맑은 시내가 있는 집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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