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정계에서 활약하던 정철은 당쟁에서도 밀리고, 선조에게도 버림을 받아 담양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환벽당에 들른 정철은 '한거구점(閒居口占)'이란 시를 지어 읊었다. 한가하게 읊은 시 같지만 내용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閒居口占(한거구점) - 한거에 시를 읊다(정철)
浮雲過長空(부운과장공) 먼 하늘을 지나는 구름
一點二點白(일점이점백) 한 점 두 점 하얗구나
流水歸北海(유수귀북해) 북해로 흘러드는 물은
千里萬里碧(천리만리벽) 천 리 만 리 푸르구나
白者何爲白(백자하위백) 흰 것은 어찌하여 희며
碧者何爲碧(벽자하위벽) 푸른 것은 어이 푸른가
此理欲問之(차리욕문지) 그 뜻을 묻고자 함인데
雲忙水亦急(운망수역급) 구름도 물도 황급하네
흰 것과 푸른 것이 각각 바쁘고 급하게 제 갈 길만 가는 세태를 한탄하는 시다. 정철이 서인의 영수이자 행동대장이었음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흰 것'은 서인, '푸른 것'은 동인을 상징한다. 동양의 오방색에서 서쪽은 흰색(白), 동쪽은 푸른색(靑), 남쪽은 붉은색(赤), 북쪽은 검은색(黑), 중앙은 누른색(黃)에 해당한다.
담양 환벽당
탕평채(蕩平菜)라는 요리가 있다. 조선 영조(英祖) 때 동서남북의 당파가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의 음식상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탕평채는 청포묵(白)에 쇠고기(赤) 볶음, 미나리(靑), 김(黑)을 섞어 만든 묵무침이다. 여기서 청포묵의 흰색은 서인,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 소고기의 붉은색은 남인, 김의 검은색은 북인을 상징했다.
차환벽당운(次環碧堂韻)-환벽당운에서 차운하다(정철)
一道飛泉兩岸間(일도비천양안간) 한 줄기 샘물은 양 언덕 사이로 흐르고
採菱歌起蓼花灣(채릉가기료화만) 여뀌꽃 물굽이엔 채릉가 소리 들려오네
山翁醉倒溪邊石(산옹취도계변석) 시골 늙은이 취해 시냇가 바위에 누우니
不管沙鷗自往還(불관사구자왕환) 갈매기는 상관 않고 자유로이 오가누나
자연에 취하고 술에 취해 무위자연의 도를 즐기는 노래다.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시다. 어디선가 아낙네들의 채릉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채릉가(採菱歌)'는 마름을 따면서 부르는 노래다. 술에 취해 바위에 누워 천하태평한 산옹은 김윤제, 그런 산옹조차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갈매기는 정철 자신을 비유한 것일 수도 있다. '료화(蓼花)'는 여귀꽃이다. 옛 시인들은 강변의 풍경을 여뀌꽃을 통해서 묘사하곤 했다.
담양 동강조대
정철이 식영정의 풍취와 서하당 주인 임억령의 풍류를 예찬한 가사 '성산별곡(星山別曲)' 추사(秋詞)에도 환벽당 앞 조대(釣臺)와 용소(龍沼)에 대해 읊은 구절이 나온다.
전략..... 梧桐(오동) 서리ᄃᆞᆯ이 四更(사경)의 도다 오니 千巖萬壑(천암만학)이 나진ᄃᆞᆯ 그러ᄒᆞᆯ가. 湖洲(호주) 水晶宮(수정궁)을 뉘라셔 옴겨 온고. 銀河(은하)ᄅᆞᆯ ᄯᅴ여 건너 廣寒殿(광한전)의 올랏ᄂᆞᆫ ᄃᆞᆺ ᄶᅡᆨ 마ᄌᆞᆫ 늘근 솔란 釣臺(조대)예 셰여 두고 그 아래 ᄇᆞᄅᆞᆯ ᄯᅴ워 갈 대로 더뎌 두니 紅蓼花(홍료화) 白蘋洲(백빈주) 어ᄂᆞ ᄉᆞ이 디나관ᄃᆡ 環碧堂(환벽당) 용(龍)의 소히 뱃머리예 다하셰라. 청강(淸江) 녹초변(綠草邊)의 쇼 머기난 아해들이 석양의 어위 계워 단적(短笛)을 빗기 부니, 믈 아래 잠긴 龍(용)이 ᄌᆞᆷ ᄭᆡ야 니러날 ᄃᆞᆺ ᄂᆡᄭᅴ예 나온 鶴(학)이 제 기ᄉᆞᆯ 더뎌 두고 半空(반공)의 소소 ᄯᅳᆯ ᄃᆞᆺ 蘇仙(소선) 赤壁(적벽)은 秋七月(추칠월)이 됴타 호ᄃᆡ 八月(팔월) 十五夜(십오야)ᄅᆞᆯ 모다 엇디 과ᄒᆞᄂᆞᆫ고. 纖雲(섬운)이 四捲(사권)ᄒᆞ고 믈결이 채 잔 적의 하ᄂᆞᆯ의 도단 ᄃᆞᆯ이 솔 우ᄒᆡ 걸려거ᄃᆞᆫ 잡다가 ᄲᅡ딘 줄이 謫仙(적선)이 헌ᄉᆞᄉᆞᆯ샤. 후략.....(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빈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물 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집을 버려 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담양 환벽당 앞을 흐르는 증암천 일명 자미탄
정철의 10대손 석촌(石村) 정해정(鄭海鼎, 1850~1923)이 1884년 7월에 무등산과 화순의 적벽(赤壁) 일대를 유람하고 쓴 장편 기행가사 '석촌별곡(石村別曲)'에도 환벽당과 그 주변에에 대해 읊은 부분이 있다.
전략..... 저기 가는 노래꾼들 성산별곡 부르면서, 식영정을 오르고서 소쇄원에 잠깐 취해, 환벽당 죽림 밖에 조대에 올라서서, 노자암 자미탄을 뜻을 두고 구경했는가. 후략.....(석촌별곡)
'석촌별곡'은 1884년 6월 고종의 복제개혁령을 계기로 정해정이 무등산과 적벽을 유람한 감흥과 당시 조선의 어두운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아 읊은 가사다. 정해정은 조상의 가사문학 전통을 이어받으려는 의지가 있었다.
정철의 4남 정홍명도 환벽당의 서정을 읊은 시를 남겼다. 정철이 자주 찾아 술잔을 기울이곤 했던 만수동 이웃집(萬壽洞隣家)을 인수하여 계당(溪堂)을 지은 정홍명도 아버지만큼이나 술을 좋아했던 것 같다.
匝岸楓林照水姸(잡안풍림조수연) 언덕 단풍숲 물에 비쳐 아름다우니
湖山詩景九秋天(호산시경구추천) 늦가을 강산 풍경일랑 그림 같구나
佳辰莫漫欺吾老(가신막만기오노) 좋은 땐 나를 속여 늙게 하지 말게
頭白猶能棹酒船(두백유능도주선) 늙어도 난 외려 술 실은 배 저으리
이 시에는 '環碧堂 與洞友作重陽會(환벽당에서 마을 벗들과 중양절 모임을 갖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중양절은 음력 9월 9일이다. 중구일(重九日)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양수 9가 두 번 겹친 날이라고 해서 명절로 지냈다. 세시풍속으로는 산수유 열매를 담은 주머니를 차고 산에 올라가 국화전을 먹고 국화주를 마시며 즐기는 등고(登高)가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세시풍속이다.
정홍명은 벗들을 환벽당으로 초대하여 시주회(詩酒會)를 열었다. 시주회의 흥겨운 감흥을 읊은 정홍명의 시 한 수가 있다.
偶赴林泉約(우부림천약) 임천에 함께 가자고 약속하고
相迎皁蓋來(상영조개래) 조개에서 서로 반갑게 만났네
花欹平岸樹(화기평안수) 꽃은 언덕 나무에 기대어 피고
竹覆滿庭苔(죽부만정태) 대는 뜰에 가득한 이끼 덮었네
異味魚登釣(이미어등조) 낚시로 잡은 물고긴 맛이 좋고
淸香酒醱醅(청향주발배) 청향 머금은 술은 잘 익어가네
眞供一笑樂(진공일소락) 참으로 한바탕 웃고 즐기면서
爛熳好懷開(난만호회개) 왁자하게 좋은 뜻을 펼치누나
대나무가 우거진 환벽당에서 정다운 벗들이 만나 맛 좋은 물고기를 안주로 향기로운 술을 마시면서 회포를 푸는 정경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시다. 이 시에는 '與光山城主 約會環碧溪亭 簡務安李使君士謙同赴(광산성 주인과 환벽당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여 무안 이사군에게 같이 가자고 편지를 보내다'란 설명이 붙어 있다. '조개(皁蓋)'는 옛날 관청에서 사용하던 검정색의 비단 차양막이다.
김윤제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르자 주인을 잃은 환벽당은 점차 황폐화되어 갔다. 정홍명은 퇴락한 환벽당에서 그 옛날 기라성 같은 문인, 학자들이 드나들던 때를 회상하면서 '환벽당감구(環碧堂感舊)'란 시를 지어 읊었다.
환벽당감구(環碧堂感舊)-환벽당에서 옛 생각에 잠기다(정홍명)
亭臺夷迥壓前溪(정대이형압전계) 정자는 저 멀리 앞내를 압도하고
草樹縈紆匝近堤(초수영우잡근제) 풀 나무 우거져 제방을 둘러쌌네
石縫矮松低拂水(석봉왜송저불수) 바위틈 왜송은 나직히 물 스친 듯
墻陰苦竹細分蹊(장음고죽세분혜) 담장 대그늘에서 좁은 길 갈리네
隣僧去後收殘卷(린승거후수잔권) 이웃 중 떠난 뒤 남은 책 거두고
社鼓休時聽夕鷄(사고휴시청석계) 사고 멈추자 저녁 닭소리 들리네
興廢百年餘勝境(흥폐백년여승경) 흥폐한 백년 뒤 명승만 남았는데
老來淸賞轉生悽(노래청상전생처) 늘그막에 와 보니 되려 처연하네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자 야은(冶隱) 길재 (吉再, 1353~1419)의 '회고가(懷古歌)'를 생각나게 하는 시다. 환벽당은 의구(依舊)하되 김윤제는 간 곳 없다. 세월의 무삼함이 진하게 느껴진다. '사고(社鼓)'는 사일(社日)에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울리는 고악(鼓樂)을 말한다. 사일(社日)은 입춘(立春), 입추(立秋) 뒤의 다섯 번째 술일(戌日)이다.
기대승은 송순의 '환벽당원운(環碧堂原韻)'에서 차운하여 '차환벽당송판부운(次環碧堂宋判府韻)'이란 시를 지었다. 당시 선비들은 운(韻)을 주고받으면서 교유의 정을 주고받았다. 송순의 원운시는 찾아보지 못 했다. 지금은 환벽당에 송순의 원운시도 기대승의 차운시도 걸려 있지 않다.
차환벽당송판부운(次環碧堂宋判府韻) -환벽당의 송 판부의 시에 차운하다(기대승)
萬古仇池藏小天(만고구지장소천) 구지는 예부터 작은 하늘 간직했으니
白雲閑影自年年(백운한영자년년) 흰구름 한가한 그림자 해마다 같도다
危亭據石非無水(위정거석비무수) 바위 높은 정자엔 물 없지 않을 테고
華屋依林更有山(화옥의림갱유산) 숲속의 화려한 집 뒤에는 산도 있구나
不是遨頭甘落拓(불시오두감락척) 오두로서 호방함 달게 여긴 게 아니라
應同谷口去夤緣(응동곡구거인연) 응당 곡구와 함께 인연을 버린 거로세
人生好醜君休說(인생호추군휴설) 인생의 곱고 추함 그대는 말하지 마소
且把深盃發浩然(차파심배발호연) 우선 큰 술잔 잡고 호연지기 발하노라
'송판부(宋判府)'는 송순을 가리킨다. 판부(判府)는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의 종1품 벼슬인 판부사(判府事) 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말한다. '구지(仇池)'는 중국 깐수성(甘肅省)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 못이 있어 구지라 명명했다. 골이 깊어 서른여섯 굽이를 돌아야 정상에 오른다고 한다(宋書 卷98 氐胡傳).
'오두(遨頭)'는 정월부터 4월 사이에 태수(太守)가 들놀이하는 것, 또는 고을 수령을 가리킨다. '노학암필기(老學菴筆記)'에 '4월 19일을 청두(成都)에서 완화일(浣花日)이라 하여 오두연(遨頭宴)을 두보(杜甫)의 초당(草堂)인 창랑정(滄浪亭)에서 여는데 성중의 사람이 다 나와서 금수(錦繡가 길을 메웠다.'는 기록이 있다. '성도기(成都記)'에 '태수가 두자미(杜子美)의 초당(草堂)에 나와서 놀고 잔치할 때면 사녀(士女)들이 너른 뜰에 의자를 늘어놓고 앉는데, 이 의자를 오상(遨牀)이라 하고 태수는 놀이의 우두머리라는 뜻에서 오두라고 하였다.' 하였다. '낙척(落拓)'은 '호방하다. 거리낌없다. 실의에 빠지다. 낙담하다' 등의 뜻이다. '不是遨頭甘落拓(불시오두감락척)'은 송순의 너그러움을 칭송한 것이다.
'곡구(谷口)'는 서한(西漢)의 정박(鄭璞)을 가리킨다. 정박은 자가 자진(子眞)인데, 성제 때에 외척대신(外戚大臣) 왕봉(王鳳)이 예의를 다해 초빙해도 응하지 않고 곡구(谷口)에 살면서 호를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고 했다 한다(漢書 卷72 高士傳中). 곡구는 산시성(陝西省) 경양현(涇陽縣)의 서북쪽, 예천현(醴泉縣)의 동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應同谷口去夤緣(응동곡구거인연)'은 숨은 선비는 지조가 있다는 뜻으로, 기대승이 은연중 자신을 정박에게 비유한 구절이다.
환벽당 가는 길
김인후는 환벽당에 여러 차례 다녀갔던 것으로 보인다. 김인후는 동국 18현 중 유일하게 호남인으로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이른 봄날 환벽당에 와서 앓아 누웠던 김인후가 그 소회를 읊은 시가 있다.
環碧溪連瀟灑園(환벽계련소쇄원) 환벽당 앞 시냇물은 소쇄원에 닿았는데
江籬香動間蘋蘩(강리향동간빈번) 향기 진한 향초 사이사이 마름 떠 있네
無端病隔塞朝路(무단병격색조로) 무단히 병이 들어서 새벽길이 막혔기에
臥看梅梢月一痕(와간매초월일흔) 매화 끝에 걸린 달 흔적만 누워 보누나
'강리(江籬)'는 '향초, 천궁의 싹, 홍조류(紅藻類) 꼬시래깃과에 속한 해초(海草)'다. '빈번(蘋蘩)'은 '빈번, 개구리밥과 흰쑥, 신에게 바치는 것, 변변치 못한 제물'이다.
장성에 살던 김인후는 어느 가을 날 밤 먼 길을 떠나다가 환벽당을 지나가게 된 것 같다. 달이 환하게 비친 환벽당과 그 주변의 경치에 이끌린 김인후는 갈 길이 멀지만 말을 방주에 세워두고 이리저리 거닐면서 시 '환벽당(環碧堂)'을 지어 읊었다.
환벽당(環碧堂) - 김인후
帶得溪橋月(대득계교월) 시냇가 다리에 달이 떠 오르고
行吟水上游(행음수상유) 물 위를 거닐며 시를 읆조리네
亂松依小麓(난송의소록) 낮은 산기슭엔 밴 솔 자라있고
盤石入中流(반석입중류) 반석은 강 중간까지 뻗어 있네
在藻魚知樂(재조어지락) 마름에 숨은 고기 즐거움 알고
盈田稻有秋(영전도유추) 들판 가득한 곡식 풍년 맞았네
奇花明醉眼(기화명취안) 예쁜 꽃 취한 눈에 환하게 띄니
征馬立芳洲(정마입방주) 가던 말 멈추고 방주에 서 있네
시중유화(詩中有畵)! 왕유(王維)가 말했던가? 시 속에 한 폭의 그림이 들어 있다. 환벽당을 가본 사람은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정자와 그 주변의 풍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리라. 김인후가 보았던 그 당시의 환상적인 환벽당 월야(月夜)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이 시에는 '環碧堂在光州東, 築石爲臺, 作堂其上, 俯臨深湫, 堂主金公允悌, 字恭老, 號沙村.(환벽당은 광주의 동쪽에 있다. 돌을 쌓아서 대를 만들고 그 위에다 당을 지었는데 깊은 소를 굽어보고 있다. 당의 주인은 김윤제, 자는 공노, 호는 사촌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김인후는 '환벽당(環碧堂)'이란 시를 지은 뒤 몇 년 지나서 다시 환벽당에 들렀던 듯하다. 이는 '沙邊立馬不知年(사변립마부지년)'이란 구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綠浪粼蘸碧蘸碧天(녹랑린잠벽잠벽천) 푸른 물결 맑디 맑아 먼 하늘 잠겼는데
沙邊立馬不知年(사변립마부지년) 모래톱에 말 세운 적 어느 해인지 모르겠네
蓬茅自芘韓公舍(봉모자비한공사) 다북쑥과 띠풀 무성하여 한퇴지의 집이런가
松菊猶存陶令田(송국유존도령전) 소나무와 국화는 오히려 도령밭에 남아있네
石瀨魚蝦供俯掇(석뢰어하공부철) 시냇물 돌여울에서 물고기랑 새우를 잡다가
林柯猿狖失攀緣(림가원유실반연) 원숭이들 나뭇가지에 올라가는 걸 잊었구나
何當促席軒窓畔(하당촉석헌창반) 어느때나 마룻방 창가에 무릎을 맞대고 앉아
斗酒相將合自然(두주상장합자연) 말술을 마시면 불원간 도에 이를 수 있을까나
'봉모(蓬茅)'는 '다북쑥과 띠풀'이다. '봉유모연(蓬牖茅椽)'은 중국어에서 '쑥으로 된 창(窓)과 띠로 된 서까래, 초라하고 가난한 집, 오막살이 초가집'의 뜻이다. '한공(韓公)'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인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자(字)는 퇴지(退之)다.
'도령(陶令)'은 진(晉)나라 때의 주성(酒聖) 도잠(潛)을 말한다. 연명(陶淵明)은 그의 자다. 그가 팽택령(彭澤令)을 지냈기 때문에 '도령'으로도 불린다. 도연명의 산문시 '귀거래사(歸去來辭)' 첫 번째 구절에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 논밭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열 번째 구절에 '三徑就荒 松菊猶存(뜰 안 세 갈래 길은 잡초에 덮여 황폐하였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시들지 않고 남아 있네.)'란 구절이 있다. 환벽당과 주변의 모습을 한유의 집과 도연명의 밭에 비유하고 있다. 김윤제의 삶을 한유와 도연명에 비유한 것이다.
소나무는 지조와 절개, 국화는 은자를 상징한다. 중국 송(宋)나라 주돈이(周敦頤)는 '애련설(愛蓮說)'에서 도연명은 국화를 사랑했고, 당나라 (두태후가 모란을 좋아한) 이후 세인들은 모란을 사랑했지만, 자신은 연꽃을 사랑한다면서 '菊花之隱逸者也 牧丹花之富貴者也 蓮花之君子者也(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요, 모란은 꽃 중의 부귀자요, 연꽃은 꽃 중의 군자다.)'라고 했다. 주돈이는 진흙 속에서 자라는 연꽃이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깨끗한 꽃을 피우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연꽃을 속세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깨끗한 지조를 지키는 군자와 같다고 본 것이다.
'원유(猿狖)'는 원숭이다. 조선시대에는 한반도에도 원숭이가 살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반연(攀緣)'은 '세력이 있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거나 연줄로 삼는 것'이다. '촉석(促席)'은 '가까이 앉다, 무릎을 맞대다'의 뜻이다. '상장(相將)'은 중국어에서 '동반하다, 곧, 머지않아, 불원간'의 뜻이다.
'斗酒相將合自然(두주상장합자연)'은 당(唐)나라 때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시 둘째 수를연상케 한다. 김인후는 분명 이백의 '월하독작'을 읽었을 것이다.
월하독작(月下獨酌)-달 아래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이백)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만약 술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주성이라는 별이 어찌 하늘에 있었겠는가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만약에 술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땅엔 마땅히 주천이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天地旣愛酒(천지기애주) 하늘과 땅도 이미 술을 아끼고 사랑했거늘
愛酒不愧天(애주불괴천) 내가 술을 사랑함이 부끄러울 것이 없도다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일찌기 맑은 술은 성인에 비유함을 들었고
復道濁如賢(부도탁여현) 또한 탁한 술은 현인에 비할 만하다고 했네
賢聖旣已飮(현성기이음) 내 이미 현인술과 성인술을 다 마셨거니와
何必求神仙(하필구신선) 어찌하여 반드시 신선이 되려고 하겠는가
三杯通大道(삼배통대도) 석 잔의 술이면 큰 도를 깨달을 수 있으며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 말의 술이면 우주자연과 하나가 되리다
但得酒中趣(단득주중취) 이게 술마시는 즐거움 속에서 얻는 것이니
勿謂醒者傳(물위성자전) 술 안 마시는 자에게는 전하지도 말지어다
이백의 '一斗合自然'을 김인후는 '斗酒相將合自然'으로 읊었던 것이다.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에서 시선 이백의 호연지기와 기개를 읽을 수 있다. 김인후도 이백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르갰다.
백광훈과 함께 선조대 팔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양응정은 환벽당과 소쇄원을 차례로 돌아본 뒤 여러 수의 한시를 남겼다. 앞의 두 구절은 환벽당, 뒤의 두 구절은 소쇄원에 대한 내용이다.
環碧堂前泛小舟(환벽당전범소주) 환벽당 앞에다가 작은 배를 띄웠는데
使君心跡共淸悠(사군심적공청유) 사군의 마음도 또한 맑은 물과 같다네
今朝又赴山翁約(금조우부산옹약) 오늘 아침 산옹과 약속 있어 달려오니
石下曹蒲灑玉流(석하조포쇄옥류) 바위 아래 창포에서 옥류가 솟아나네
이 시에는 '歷賞環碧瀟灑之勝 因示鼓巖子(환벽당과 소쇄원의 승경을 차례로 감상하고 고암자에게 보여주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고암자(鼓巖子)는 양산보의 아들이자 김인후의 사위 양자징이다. '사군(使君)'은 감사나 부사 등 지방 수령에 대한 통칭이다. 여기서는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를 가리킨다. '산옹(山翁)'은 시골 노인이다. 여기서는 양산보를 가리킨다. '조포(曹蒲)'는 석창포다.
비가 내린 어느 날 환벽당에 들른 양응정은 선계와 같은 공간에서 은자의 삶을 살아가는 김윤제를 예찬한 시를 지어 읊었다. 환벽당의 작은 창에 기대어 물이 불어난 자미탄을 바라보면서 읊은 시다.
雨後溪肥沒石稜(우후계비몰석릉) 비 내린 뒤 시냇물은 불어 돌모서리를 파묻고
觀瀾盡日小窓憑(관란진일소창빙) 물 구경하느라 하루 종일 작은 창에 기대었네
簷前果熱頭時佛(첨전과숙두시불) 처마 앞 모과는 익어서 때로 머리에 부딪치고
階前魚潛手可罾(계전어잠수가증) 돌계단 앞에 숨은 고기는 맨손으로도 잡겠네
山澤臞仙面有稜(산택구선면유릉) 산골 사는 청수한 노인은 이마가 튀어나왔고
松間架屋太虛憑(송간가옥태허빙) 소나무 사이에 정자를 지으니 하늘에 기댔네
從今林壑藏鱗甲(종금림학장린갑) 이제 깊은 산속에 비늘과 껍데기를 감추고서
不受人間漁父罾(불수인간어부증) 인간 세상 어부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려네
환벽당 바로 곁에는 오래된 아름드리 모과나무가 있다. 모과가 익으면 머리에 부딪칠 만도 하다. 당시에도 모과나무가 지금 처럼 서 있었을까? 돌계단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 사는 물고기는 숨어봐야 도망 갈 곳도 없다. 청수(淸瘦)하고, 생동하는 정신을 가진 김윤제는 이마가 튀어나왔던 모양이다. 그런 김윤제가 소나무 사이로 하늘에 기댄 환벽당에 숨어 사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의 시비를 피하고, 자연과 함께 안빈낙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과 함께 조선의 삼당시인(三唐詩人)이자 선조대 팔문장가(八文章家) 가운데 한 사람인 백광훈도 어느 날 환벽당에서 머물며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환벽당(環碧堂) - 백광훈
數曲煙溪淸若空(수곡연계청약공) 연기처럼 구불구불한 시냇물 하늘을 닮았고
小堂閑夢蒲襟風(소당한몽포금풍) 소당에서 낮꿈 꾸는데 삼베옷을 스치는 바람
覺來開戶無人見(각래개호무인견) 잠 깨어 창 밖을 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斜日離離映水中(사일리리영수중) 서산에 지는 해는 뉘엿뉘엿 물속에 어리누나
낮잠을 자다가 한가로운 꿈을 꾼 한때를 읊은 한 폭의 그림 같은 시다. 환벽당 앞 자미탄에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든 정경이 한폭의 풍경화처럼 다가온다. '한몽(閑夢)'은 이백의 시 '행로난(行路難)' 첫째 수에 '閑來垂釣碧溪上 忽復乘舟夢日邊(한가로이 벽계수에 낚싯대 드리우다 홀연히 다시 배 타고 장안 가는 꿈을 꾸네.)'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백광훈은 이백의 '한몽(閑夢)'을 염두에 두었던 것일까? '日邊(일변)'은 당나라 서울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백광훈은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 때인 1549년(명종 4)에 상경하여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양응정에게 수학하였다. 백광훈은 양응정 문하에서 정철,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 동문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시와 서(書)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1572년(선조 5)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와 글씨로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이란 칭호를 얻었다.
취가정에서 바라본 평모들과 무등산
백광훈이 환벽당 앞에서 김성원과 함께 말을 타고 노래를 부르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金陵記懷贈棲霞主人卽金成遠(금릉기회증서하주인즉김성원)'이란 제목의 칠언고시도 있다. 이 시를 보면 두 사람이 얼마나 우의가 각별한 사이였는지 알 수 있다.
金陵記懷贈棲霞主人卽金成遠(금릉기회증서하주인즉김성원)
금릉에서의 회상기를 서하당 주인 김성원에게 주다(백광훈)
與子論交十載強(여자론교십재강) 그대와 사귐을 논하자면 족히 10년이 넘었는데
中間聚散何不常(중간취산하불상) 그간에 만남과 헤어짐은 무슨 이유로 잦았는지
干戈紛紛日月徂(간과분분일월조) 다툼으로 혼란한데 세월만 덧없이 흐르고 흘러
音影杳杳川關長(음영묘묘천관장) 멀고 아득한 관문인 양 가로막은 시냇물이었소
時將前事口獨語(시장전사구독어) 때때로 지나간 일들을 나홀로 중얼거려 보네요
夢尋陳跡心難詳(몽심진적심난상) 꿈꾸듯 옛일 돌아보면 심난함이 또렷이 보이고
思之不可令人愁(사지불가령인수) 생각컨대 그럴 필요 없었음에 더욱 슬퍼지네요
前年爲作光山遊(전년위작광산유) 몇 년쯤 전인가요 광산으로 여행을 떠났었지요
君家光山城正東(군가광산성정동) 그대의 집은 광산성의 정동쪽에 자리잡고 있어
瑞石峯帶蒼溪流(서석봉대창계류) 무등산 서석봉이 둘러있고 창계 물길 흘렀지요
백광훈이 오래전 김성원의 집을 방문했을 때를 회상하는 시다. '금릉(金陵)'은 전라남도 강진의 옛 이름이다. 금릉은 옛 도강현(道康縣)의 별호였다. 조선 초 도강현과 탐진현(耽津縣)을 합해서 강진군(康津郡)으로 개편했다. '기회(記懷)'는 '회상(回想)을 기록하다'의 뜻이다. '음영(音影)'은 높고 낮음(音)과 짙고 옅음(影)이다. '시장(時將)'은 '때때로'의 뜻이다. '불가령(不可令)'은 '부질없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광산(光山)'은 광주의 옛 이름이다. '서석봉(瑞石峯)'은 광주 무등산(無等産) 남동쪽 서석대가 있는 봉우리다. 무등산을 옛날에는 서석산이라고도 불렀다.
蒼溪之上詢且樂(창계지상순차락) 창계천의 상류에서 서로 위문하고 또 놀았는데
白波靑嶂眞仙區(백파청장진선구) 흰 물결과 푸른 산봉우리는 진정 선경이었지요
瓊樓綺席不敢當(경루기석불감당) 멋진 누각과 화려한 연회자리는 감당 못하지만
玉琴瑤瑟陳壺觴(옥금요슬진호상) 아름다운 옥구슬 거문고에 술자리 베풀 적에는
千松影處月如晝(천송영처월여주) 수많은 소나무 그림자는 달빛 속에서 대낮같아
一水聲時風入酒(일수성시풍입주) 물소리가 들려올 때는 술잔에 바람도 일었지요
環碧堂前竝吟騎(환벽당전병음기) 환벽당 앞에서 나란히 말타고 노래도 부르면서
瀟灑園中聯舞袖(소쇄원중련무수) 소쇄원에 이르러 중련 맞춰 소매춤도 추었는데
此時歡賞心未極(차시환상심미극) 그때의 기쁨은 마음에 흡족할 정도는 아닌지라
勝事重結江南約(승사중결강남약) 더 좋았던 것은 강남에서 놀자는 약속이었네요
백광훈과 김성원 두 사람이 담양 창계천과 환벽당, 소쇄원을 오가며 노닐던 때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옥금요슬(玉琴瑤瑟)'은 옥으로 만든 작은 거문고(玉琴)와 옥으로 만든 큰 거문고(瑤瑟)이다. '중련(中聯)'은 율시(律詩)의 팔구(八句) 가운데 함련(頷聯)인 제3, 4구와 경련(頸聯)인 제5, 6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중련'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추던 무용곡으로 보인다. 식영정에서 환벽당까지는 약 500~600m, 소쇄원까지는 약 1km의 거리다. '승사(勝事)'는 좋은 일, '중결(重結)'은 '거듭 맺다, 거듭 다짐하다'의 뜻이다. '강남(江南)'은 남도 담양을 가리킨다.
江南詞宗吾石川(강남사종오석천) 전라도의 사종이자 내 스승이신 석천 선생님은
文彩風流今謫仙(문채풍류금적선) 그 문채와 풍류가 오늘날의 적선이 분명합니다
玉堂金馬謝時人(옥당금마사시인) 옥당에 머물던 훌륭한 분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歸來獨與漁蓑親(귀래독여어사친) 홀로 돌아올 때엔 어부의 도롱이를 내주셨지요
君於門下情義俱(군어문하정의구) 그대는 대문까지 내려와 정분도 함께 주셨고요
來拜果趁梅花春(래배과진매화춘) 매화 피는 봄철에 와서 인사드리겠다 했었지요
- 후략 -
백광훈이 임억령의 집을 방문했을 때를 회상하는 부분이다. 임억령의 인간성이 매우 따뜻했음을 알 수 있다. '사종(詞宗)'은 시문(詩文)에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석천(石川)'은 임억령의 호다. 임억령은 호남(湖南)의 사종(詞宗)으로 불렸다. '문채(文彩)'는 아름답게 꾸며 쓴 멋진 문장을 말한다. '적선(謫仙)'은 벌을 받고 인간 세계로 내려온 신선인데, 여기서는 당(唐)나라 때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을 말한다. 이백은 선계(仙界)에서 인간 세상으로 쫓겨난 선인(仙人)이라고 일컬어졌다. '옥당(玉堂)'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부귀한 집이라는 뜻도 있다. '금마(金馬)'는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이다. 또 한(漢)나라 미앙궁(未央宮) 대문의 별칭이기도 하다. 미앙궁 대문 앞에 구리로 만든 말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문학에 뛰어나 황제의 조칙(詔勅)을 작성하는 벼슬아치가 드나들던 문이다. '시인(時人)'은 '그 당시의 사람'이다. '래배(來拜)'는 '찾아와 인사를 드리다'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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