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1 - 전라도 해남현 석천동에서 태어나다

林 山 2017. 11. 24. 16:18

남도의 정자와 그 주인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기행에는 시와 역사가 있고, 낭만과 풍류가 있다. 배롱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 조선시대 호남의 사종(詞宗)이라 일컬어진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식영정(息影亭, 대한민국 명승 제57호)를 찾았다. 식영정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담양군(潭陽郡) 남면(南面) 지곡리(芝谷里) 산 75-1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담양군 봉산면(鳳山面) 제월리(齊月里) 제월봉(霽月峰, 제봉산)에 있는 기촌(企村) 송순(宋純, 1493∼1582)의 면앙정(俛仰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과 고서면(古西面) 원강리(院江里) 쌍교(雙橋)에 있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송강정(松江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북구(北區) 충효동(忠孝洞)에 있는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의 환벽당(環碧堂, 대한민국 명승 제107호)에 이어 네 번째 담양 정자기행이다.


동강조대에서 바라본 성산과 장원봉


지리산(智異山, 1,915m)을 떠나 북진하던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전라북도 장수군 지지리 영취산(靈鷲山, 1,075.6m)에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의 가지를 친다. 금남호남정맥은 장안산-팔공산-삿갓봉-성수산-마이산-부귀산을 지나 조약봉에 이른 다음 다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갈라진다. 조약봉을 떠난 호남정맥은 만덕산-박이뫼산-갈미봉-경각산-오봉산-성옥산-왕자산-고당산-망대봉-내장산-백암산-추월산-용추봉-강천산-광덕산-봉황산-서암산-만덕산-국수봉-까치봉(424m)-유둔재-백남정재-북산-북봉을 지나 무등산(無等山, 1,187m)으로 달려간다. 


성산호에서 바라본 무등산


호남정맥이 까치봉에 이르기 전 옹정봉(瓮井峰, 493m)에서 서쪽의 성산호(星山湖, 광주호)를 향해 뻗어간 산줄기에는 원봉(壯元峰, 342m)이 솟아 있고, 장원봉 바로 남쪽에는 성산(星山, 별뫼, 240m)이 솟아 있다. 식영정은 바로 성산에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끄트머리의 가파른 벼랑 위에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사이로 난 언덕길을 올라가면 수백 년 묵었음직한 노송들과 오래된 배롱나무로 둘러싸인 식영정이 무등산을 바라보며 운치있게 앉아 있다. 식영정 정남쪽으로 증암천의 충효교 건너편 동산에는 환벽당이 있고, 남동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소쇄원이 있다.  


1563년 송순은 식영정의 시를 차운하여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고 하면서, 소쇄원(瀟灑院)과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 동(증암천) 안에 세 명승(一洞之三勝)'이라고 극찬했다. '동(洞)'은 동천(洞天)인데, 신선이 사는 선계를 상징한다. 선계 중에서도 산수가 빼어난 경승지 세 곳의 정자원림을 가리켜 일동삼승이라고 한 것이다.  


담양 식영정


식영정은 동쪽 바로 곁 낮은 계곡에 있는 서하당(棲霞堂)과 부용당(芙蓉堂)과 함께 정자원림을 구성하고 있다. 식영정 남남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충효마을에는 환벽당이 있고, 환벽당에서 남동쪽 300~400m 바로 앞에는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1567년~1596)의 취가정(醉歌亭)이 있다. 식영정 남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창암촌(蒼巖村)에는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소쇄원(瀟灑園)이 다. 소쇄원에서 남동쪽으로 2~3km 거리에는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의 독수정(獨守亭)이 있다. 송강정은 북서쪽으로 약 20리, 면앙정은 북북서쪽으로 약 30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 서하당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이 조선시대 누정문화(樓亭文化)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담양이 누정문화의 중심지가 된 것은 16세기 조선의 당쟁(黨爭), 사화(士禍)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유혈 쿠데타에 참여한 공으로 권력을 독점한 보수 훈구파(勳舊派)와 이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개혁 사림파(士林派)의 갈등과 투쟁은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불러왔고, 그 결과 사림파의 처절한 참패로 귀결되었다.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사림은 유학자(儒學者)로서의 대의와 명분, 도학자(道學者)로서의 선비정신을 지키고, 학문과 심신을 도야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누정을 세우게 된다. 경국제민 (經國濟民)의 큰 포부를 가지고 환로(宦路)에 진출했지만 정치 현실에 절망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좌절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 선비들은 강호(江湖)의 누정에 의탁해서 그들의 고뇌와 불만을 해소하는 한편 사대부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의 삶과는 무관한 벼슬아치들의 당쟁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벼슬을 내던지고 낙향하거나 사화에 희생되어 유배된 선비들은 담양, 광주 등 남도에 정자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시를 짓고 음풍농월하면서 조선조 사림문화의 꽃을 피웠다. 호남 유학(儒學)의 사종(師宗)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 ~ 1560), 당대 최고의 유학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등은 조선의 성리학을 이끌었던 호남의 유학자들이었다. 임억령은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일컬어졌으며, 정철은 여기서 가사문학을 꽃피웠다. 

 

식영정 노송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올린 유실형 정자다. 가운데에 방을 배치한 다른 정자들과는 달리 서북쪽 한쪽 귀퉁이에 온돌방을 배치하고, 방의 앞과 옆으로는 마루를 널찍하게 깔았다. 


정자 아래로는 푸르른 성산호(광주호)가 펼쳐져 있어 눈을 시원하게 한다. 정자 뒤에는 정철의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보이는 '성산별곡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성산별곡비'를 너무 크게 세워 놓아 식영정의 풍취를 해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식영정에는 임억령의 시비를 세워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도대체 누가 왜 정철의 시비를 식영정에 세웠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임억령의 문학과 식영정의 역사를 몰각한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라남도는 식영정을 정철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송강정, 환벽당과 함께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으로 묶어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했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임억령 관련 유적인 식영정과 서하당, 김윤제 관련 유적인 환벽당이 어째서 정철 유적인가? 정철은 환벽당을 드나들며 김윤제로부터 글을 배웠고, 식영정을 드나들며 임억령으로부터 시를 배웠을 뿐이다. 관료주의 탁상행정으로 인해 역사가 왜곡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식영정 '성산별곡' 시비


식영정의 주인 임억령은 1496년(연산군 2) 2월 16일 전라도 해남현(海南縣) 동문 밖 석천동(石川洞), 지금의 해남읍 해리에서 충순위(忠順衛)를 지내고 판서(判書)에 추증된 임우형(林遇亨)과 음성 박씨(陰城朴氏) 박자회(朴子回)의 딸 사이에서 5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대수(大樹), 호는 석천(石川)이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개울 이름 석천을 호로 삼았다. 임억령의 오형제 중 첫째는 임천령(林千齡), 둘째는 임만령(林萬齡), 네째는 괴마(槐馬) 임백령(林百齡, ?~1546), 다섯째는 임구령(林九齡)이다. 이름에 '구(九), 백(百), 천(千), 만(萬), 억(億)' 등 숫자를 쓰는 것은 무병장수와 부귀공명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임억령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에서 중랑장(中郞將) 벼슬을 한 임양저(林良貯)다. 경순왕(敬順王)이 고려(高麗)로 귀순할 때 임양저가 있는 힘을 다해 말렸지만 듣지 않자 그의 후손들은 여러 고을에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때 해남현(海南縣)으로 이주한 사람이 임억령의 선조(先祖)다. 증조(曾祖)는 참의(參議)에 추증(追贈)된 임득무(林得茂), 할아버지는 진안현감(鎭安縣監)을 지내고 참판(參判)에 추증된 임수(林秀)다. 


임수가 해남의 호족 초계 정씨(草溪鄭氏) 정문명의 사위가 되면서 임억령은 해남 땅과 인연을 맺게 된다. 해남 육현(海南六賢) 중 한 사람인 귤정(橘亭) 윤구(尹衢, 1495∼?)의 외할아버지와 임억령의 할머니는 친남매 간으로 윤구와 임억령 두 사람은 내외재종형제(內外再從兄弟)가 된다. 또 같은 해리에서 일 년 차로 태어났기에 두 사람은 죽마고우로 지내면서 성장하였다. 임억령은 윤구의 동생 윤행(尹行), 윤복(尹復)과도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윤구의 증손자가 바로 정철,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으로 꼽히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다.  


임억령의 어린 시절은 정치적 혼란기였다. 1498년(연산군 4)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풍자한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사초(史草)로 싣자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가 이를 대역죄로 몰아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들이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무록(誣錄)했다는 죄명으로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허반(許磐) 등을 능지처참형(凌遲處斬刑)에 처한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로 인해 성종(成宗) 대부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파는 큰 타격을 입었다. 


1502년(연산군 8) 7살의 임억령은 숙부 은일공(隱逸公) 임우리(林遇利)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임우리는 김종직의 학맥을 이은 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의 제자였다. 임억령은 고매한 인품과 학덕을 갖췄던 숙부 임우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8세 되던 해 임억령은 시 한 수를 지어 산속의 승려에게 주었다. 


쪽박이 비니 또한 마음도 비었구나

내 산승(山僧)에게 이를 말 있으니

뒷날 방장산(方丈山)에 가을 오면

함께 쌍계의 달이나 길어볼까 하오


어린 아이가 지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출중한 시였다. 임억령은 어려서부터 시재(詩才)가 뛰어나고 총명했음을 알 수 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여 폐비된 뒤 사사(賜死)된 성종비 윤씨(연산군 생모)의 복위문제를 계기로 궁중세력(宮中勢力)이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세력(府中勢力)을 제거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갑자사화로 폐비 윤씨의 사사에 찬성했던 사옹(簑翁)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비롯한 윤필상(尹弼商), 이극균(李克均), 성준(成浚),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이주(李胄)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고, 이미 죽은 한치형(韓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어세겸(魚世謙), 심회(沈澮), 이파(李坡), 정여창(鄭汝昌), 남효온(南孝溫)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 훈구파의 친위 쿠데타((親衛 coup d’État, self-coup)로 임사홍(任士洪), 신수근(愼守勤) 등 궁금세력(宮禁勢力)과 결탁한 연산군(燕山君)을 폐위시키고 중종(中宗)을 왕으로 세운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다. 중종반정을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훈구파가 장악했다. 


1508년(중종 3)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이 임피현령(臨陂縣令, 군산시 임피면)으로 부임했다. 3년 만기가 되자 박상은 임피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인 전라도 광산(光山, 광주)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듬해 임억령이 1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형제들은 어머니의 엄격한 훈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그해 임억령은 동생 백령과 함께 어머니의 뜻에 따라 박상과 그의 아우 육봉(六峰) 박우(朴瑀, 1476∼1547) 형제의 문하에 들어갔다. 박상, 박우 형제는 임억령의 인품과 시인으로서의 자질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들이다.  


그대 데리고 공자에게 여쭤보려고

저 수사(洙泗)의 물가 따라가리라

대과는 다행히 따먹히지 않았으니

주워다가 내 대그릇에 거둬두리라


박상이 임억령, 백령 형제를 반기면서 읊은 시다. 박상은 일찌기 임억령이 큰 열매(大果)가 되리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수사(洙泗)'는 공자(孔子)가 살았던 노(魯)나라 곡부(曲阜) 북쪽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 두 강의 앞머리를 딴 글자로 공자의 학풍을 뜻한다.   


인조 때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야사집 '기제잡기(寄齊雜記)'에 "임숭선(林嵩善, 숭선부원군 임백령)의 어머니는 성품이 엄숙하고 훌륭하였으며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반드시 어진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둘째 아들은 석천인데 이름은 억령, 자는 대수요, 셋째 아들은 숭선인데 이름은 백령, 자는 인순이며, 모두 눌재 박상에게서 수업하였다. 자 대수는 동한(東漢)의 대장 풍이(馮異)에게서 따온 것이다. 풍이는 늘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논공행상이 벌어질 때마다 혼자 나무 그늘 아래로 피했기 때문에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눌재가 일찍이 석천에게 '장자(莊子)'를 가르치면서 '너는 반드시 문장가가 되리라.'고 하였고, 숭선에게 '논어(論語)'를 가르치면서 '너는 관각(館閣, 조선시대 홍문관, 예문관)의 문장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임억령은 호남의 사종(詞宗), 임백령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으니 박상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박상은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 김종직 김굉필 -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여 호남 사림의 종주가 된 학자이다. 박우의 아들이 훗날 서인(西人)의 영수가 된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이다. 박상은 특히 비련의 치마바위 전설의 주인공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 복위에 관한 상소로도 유명하다. 이 일로 조정에서는 그에게 중죄를 내리려고 했으나 우찬성(右贊成) 안당(安瑭)의 극력 반대로 무사할 수 있었다. 복위 상소 이후 박상은 사림의 존경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생전의 조광조도 박상을 '강상(綱常)의 법도를 세운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박상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원우완인(元祐完人)'이라 평하기도 했다.   


원우완인(元祐完人)은 중국 북송(北宋)의 철종(哲宗, 趙煦) 대 원우(元祐) 연간(1086~1093)에 활동한 유안세(劉安世, 1048~1125)를 가리킨다. 송명신언행록 후집 권12(宋名臣言行錄 後集 卷12)에 그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유안세는 보수파 정치가 사마광(司馬光)의 제자다. 철종이 즉위하고 사마광이 집권하자 그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갔던 유안세는 장돈(章惇)에 의해서 밀려났다. 그 후 30년 동안 전전하다가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권력을 잡은 환관 양사성(梁師成)이 유안세에게 자식을 위해서라도 관직에 나오라고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자, 그는 “내가 자식을 위했더라면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밀려난 지 거의 30년이 되도록 일찍이 권력을 가진 자에게 편지 한 자 주고받은 적이 없다. 나는 ‘원우의 완인’으로 그대로 남고 싶으니 그 마음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편지를 되돌려 보냈다. 사마광을 추종하고 왕안석(王安石)이 이끄는 개혁파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당파를 원우당인(元祐黨人)이라고 하며, 완인(完人)이란 덕행이 완미(完美)한 사람이란 뜻이다. 


2017. 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