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8년(중종 23) 봄에 33살의 임억령은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그는 안수(安璲), 임설(任說), 최희맹(崔希孟), 이승효(李承孝), 홍섬(洪暹), 최연(崔演) 등과 가진 춘방계(春坊契) 모임에서 계축(契軸)을 짓고 시첩을 만들었다. 춘방은 세자(世子) 또는 세손(世孫)의 교육을 담당했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이다. 계축은 조선시대에 동방(同榜)이나 동갑 또는 같은 관사의 관원 등이 계를 만들고 이를 기념하여 그 사실과 시문(詩文)을 적어 권축(卷軸)으로 만들어 나누어 가지던 일을 말한다. 그해 가을 임억령은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에 이어 사인(舍人)이 되었으며, 이듬해 휴가를 얻어 해남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1530년(중종 25) 봄 35세의 임억령은 무관직인 임치(臨淄) 첨절제사(僉節制使, 첨사)에 제수되었다. 3월 그는 전라도 서남부 여러 섬의 말을 점검하면서 지은 기행시(紀行詩)들을 모아 '승부록(乘桴錄)'으로 엮었다. 이때 이관(李瓘)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그해 4월 11일 박상이 하동(荷洞)에서 세상을 떠나자 임억령은 '제눌재문(祭訥齋文)'을 지어 스승의 죽음을 애도했다. 제문에서 그는 스승의 행적이 모범되고 문장이 뛰어났음을 칭송했다. 같은 해 명종비(明宗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沈氏)도 세상을 떠났다. 이 무렵 임억령은 시 '보현사(普賢寺)'를 지었으며, 11월에는 허가를 얻어 해남의 고향집에 다녀왔다.
1531년(중종 26) 3월 임억령은 윤구에게 시 '감춘(感春)'을 지어 보냈다. 기묘사화 직후인 1521년의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돼 전라도 장흥(長興)에 유배 와 있던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과 헤어지면서 시를 지어 주었다. 4월에는 학감(學監) 강흔수(姜欣壽)와 시를 주고받았다. 또 한시 '영광암천원근(靈光岩泉園芹)'을 남겼다. 9월에는 허가를 얻어 고향에 다녀왔다. 이듬해 임치 첨절제사에서 해직된 뒤 내직(內職)에 임명되어 상경하였다. 중종은 그에게 종삼품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을 제수하였다.
1533년(중종 28) 38세의 임억령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서 가까운 화순의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자청하였다. 1533년은 한양의 성균관(成均館)에서 이황과 김인후가 만나 교유를 시작한 해였다. 당시 동복에는 기묘사화로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1482~1536)가 유배를 와 있었다. 2월 위로차 최산두를 찾은 임억령은 그와 함께 응취루(凝翠樓)에 올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에서 운을 딴 차운시(次韻詩)를 지었다. 응취루는 동복현 객사(客舍) 남쪽 부근에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응취루는 1474년(성종 5) 동복현감 유의(柳誼)가 지은 것이다. 임억령의 칠언율시는 이 무렵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不才慙愧竹符分(부재참괴죽부분) 재주도 없이 벼슬살이 함에 낯 부끄러워
來臥江南谷口雲(내와강남곡구운) 강남의 곡구 찾아와 구름 속에 숨어사네
園栗過擧供老母(원율과거공노모) 뒷동산에서 좋은 밤 거둬 노모께 드리고
溪魚盈尺貢明君(계어영척공명군) 시내의 큰 물고기는 명현 군자께 올리네
林深山鬼黃昏出(임심산귀황혼출) 숲 계곡 깊어 저녁에는 도깨비도 나오고
地僻江遠白晝開(지벽강원백주개) 심심 산골이라 낮에도 대문 활짝 열렸네
往往城南崔大處(왕왕성남최대처) 기껏 가봐야 성의 남쪽이 가장 큰 곳이니
穩聽諧笑醉云云(온청해소취운운) 농담과 웃음 소리 들으며 취해서 살리라
재주도 없이 벼슬아치가 된 것이 부끄러워 두메산골을 찾아와 지내지만 좋은 밤은 노모에게 드리고, 큰 물고기는 명현, 군자에게 올리면서 유학자로서 충효(忠孝)와 안분지족 (安分知足)의 삶을 살고 있다. 낮에는 원숭이 소리 들리고, 밤에는 도깨비가 나올 정도로 궁벽한 곳이라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소탈하게 살겠다는 뜻이다. 재주도 없는 벼슬아치라서 부끄럽다는 것은 겸양의 표현일 수 있다.
'죽부(竹符)'는 중국 한(漢)나라 때 태수 등 지방 수령을 임명할 때 동호부(銅虎符)와 함께 받았던 대나무로 만든 부절(符節)이다. 부절의 절반은 자신이 가지고 다녔으며, 나머지 절반은 조정에 보관하였다. '와(臥)'는 '은둔하다'의 뜻이다. '곡구(谷口)'는 서한(西漢) 정박(鄭璞)의 호다. 정박은 자가 자진(子眞)인데, 성제(成帝) 때에 외척대신(外戚大臣) 왕봉(王鳳)이 예의를 다해 초빙해도 응하지 않고, 산시성(陝西省) 경양현(涇陽縣)의 서북쪽, 예천현(醴泉縣)의 동북쪽 곡구(谷口)에 묻혀 살면서 호를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고 했다(漢書 卷72 高士傳中). 임억령이 은근히 자신을 은일자(隱逸者) 정박에게 비유한 것이다. '백주개(白晝開)'가 '백주문(白晝聞)'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백주문(白晝聞)'이라면 '원제(猿啼)'가 생략된 것이다. 조선시대 시인들은 종종 '원숭이가 운다(猿啼)'는 표현으로 외지고 궁벽하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운을 고려하면 '문(聞)'을 쓰는 것이 맞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유서석록(遊瑞石錄)' 의하면 '최산두가 기묘사화에 연루돼 이 고을로 정배 되었는데, 하루는 손님과 동반하여 달천(동복천, 적벽강)으로부터 물의 원류를 더듬어 이 명승을 찾아내는데 이르렀다. 이에 남방 사람들이 비로소 적벽(赤壁)을 알게 되어 시인 묵객의 노는 자취가 잇따르게 되었으니 임석천(林石川)이 이름을 짓고 김하서(金河西)가 시를 지어 드디어 남국의 명승지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산두가 화순 적벽을 발굴하고, 임억령이 이름을 붙였으며, 김인후가 적벽가를 지었다는 것이다.
동복현감 재임시 임억령은 절의를 크게 행했으며, 문풍을 크게 진작시켰다고 하여 칭찬이 자자했다. 임억령의 선정을 회상하는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차태백운유회석천선생(次太白韻有懷石川先生)'이란 시가 있다.
차태백운유회석천선생(次太白韻有懷石川先生) - 고경명
誰知林峒俗(수지임동속) 오늘날 동북현 고을 좋은 풍속이
正類公一變(정류공일변) 선생의 치하인 것을 누가 알리요
刃跡逐鴻泥(인적축홍니) 지금은 옛날의 자취 흔적도 없고
俛仰同掣電(면앙동체전) 세월만 번개 같이 순식간 흘렀네
'동(峒)'은 중국(中國)의 만족(蠻族)이 살던 곳이다. 동복현이 그만큼 궁벽한 고을임을 강조한 것이다. '홍니(鴻泥)'는 '설리홍조(雪裏鴻爪)'의 줄임말인데, 행종(行蹤)이 정처없이 우연히 서로 만난 것을 이른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의 '화자유민지회구시(和子由澠池懷舊詩)' '人生到處知何事 應是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인생이란 결국 무엇과 같던가? 눈 온 뒤 진창에 내린 기러기 발자국, 진창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겼어도, 날아가면 어이 다시 동서를 헤아리리?)'에서 나온 말이다. '체전(掣電)'은 찰나, 전광석화(電光石火)의 뜻이다. 고경명은 서하(棲霞) 김성원(金成遠, 1525∼1597),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년∼1593)과 함께 임억령의 제자로 식영정 4선(息影亭四仙)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해 임억령의 모친이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억령의 모친은 해남 교동에 있는 부친의 무덤 곁에 묻혔다. 임억령은 무덤 근처에 초막을 세우고 시묘살이를 했다. 같은 해 5월 20일 중종의 둘째 아들이자 인종의 이복동생으로 장차 조선 제 13대 왕이 될 명종(明宗)이 태어났다. '석천 임억령의 생애와 시문학'(임남형, 월인출판사, 2011)의 임억령 연보에는 그해 아들 임면(林沔)도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억령은 1535년 겨울이 되어서야 상복을 벗고 초막에서 내려왔다.
1536년(중종 31) 41세의 임억령은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어 유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9월 15일 그는 근정랑(勤政廊) 모임에서 병조의 정원룡(鄭元龍), 시강원의 임설(任說), 승정원의 민중명(閔仲鳴), 예문관의 최양호(崔養浩), 홍문관의 이승효(李承孝) 등과 함께 시회(詩會)를 열었다. 12월 6일 임억령은 홍춘경(洪春卿), 조사수(趙士秀)와 함께 원접사(遠接使)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나, 병으로 체직되기를 청하니 박충원(朴忠元)이 대신하였다.
1537년(중종 32) 5월 11일 42세의 임억령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제수받았다. 그는 왕명으로 시 '용산낙모(龍山落帽)'를 지어 바쳤고, 이어 시 '탕춘대(蕩春臺)'도 지었다. 임억령은 거처를 창의동(彰義洞)으로 옮겨 이거중(李居中)과 함께 머물렀다. 어느 날 그는 엄흔(嚴昕), 조사수, 임설, 신잠과 함께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1538년(중종 33) 3월 28일 43세의 임억령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9월에는 왕명으로 종묘사직제문(宗廟社稷祭文)을 짓고, 이어 시 '추림(秋霖)'을 지었다. 박우, 엄흔, 권경호(權景祜)와 더불어 시 '북계관추(北溪觀秋)'를 수창(酬唱)했다. 왕으로부터 사여(賜與)가 있었으나 무슨 사여인지는 알 수 없다.
1539년(중종 34) 6월 17일 44세의 임억령은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시 '관어대(觀魚臺)'를 지었다. 관어대는 김천일(金千鎰)이 나주 십엄강(什嚴江) 위에 지은 정자였다. 8월 10일 임억령은 사헌부 장령(掌令), 9월 4일에는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교리가 된 이튿날 임억령은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안현(安玹) 등과 함께 상소문을 올려 '임금이 신하들의 간언을 천 리 밖의 외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경솔히 여기고 있음을 책망한 뒤 군주가 스스로의 잘못이 없나 돌이켜 뉘우치고, 간언을 용납하는데 인색하지 말 것이며, 언론을 확충하고 하늘의 뜻에 감응하는 실질을 극진히 할 것'을 논하였다. 9월 30일 임억령은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권철(權轍)과 이황은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 권철은 권율(權慄)의 아버지였다. 이황은 곧 사가독서에 들어갔다.
담양 식영정
1540년(중종 35) 45세의 임억령은 사간원 사간에 이어 종3품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다. 10월에는 전라도 장성 출신의 김인후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1541년(중종 36) 3월 김인후는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4월에는 호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들어갔다. 그는 호당의 12인과 호당수계록(湖堂修契錄)을 만들어 교유하면서 사상적 토론을 통해 학문을 닦았다. 5월 15일 임억령은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이조(吏曹)의 청탁이 성행하고, 지방 수령들의 행정이 방자한 것을 논박하고 지적하면서 수령을 잘 인선하여 옛날의 퇴폐한 풍속을 바로잡을 것을 주청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임억령은 사헌부에 있을 때, 김안로가 폐지했던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三審制)인 금부삼복법(禁府三覆法)을 부활시키고, 백성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강력하게 주청(奏請)했다.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정치의 근본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9월 10일 사간원 사간이 된 임억령은 대사간 이찬(李澯) 등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신하들이 간하는 말을 듣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간한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고, 간한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간한 말을 즐거워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간한 말을 듣기만 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익함이 없고, 받아들이되 즐거워하지 않으면 언관들이 날로 소외감을 느낄 것입니다.'라면서 언로를 확충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 무렵 임억령은 사직하기 위해 조정에 들어온 함경감사(咸鏡監司) 유숙춘(柳叔春)에게 이별하는 글을 지어 주었다. 그해 문학이 뛰어나 세 번이나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청라(靑蘿) 김극성(金克誠, 1474~1540)이 세상을 떠났다. 임억령은 왕명으로 '응제견승지제김극성문(應製遣承旨祭金克誠右相文)'을 지어 김극성이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서 임금을 잘 보필하고, 자질이 뛰어났음을 기리고 애도하였다. 10월 김인후는 홍문관 정자(正字) 겸 경연관(經筵官)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에 제수되었다. 11월 29일 임억령은 홍문관 전한에 임명되었다. 임억령은 제주목사로 나가는 조사수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임억령과 김인후가 옥당에 있을 때다. 당시 옥당(玉堂, 홍문관)에서 기르던 학(鶴) 한 마리가 있었다. 이때 내노라하는 학사(學士)들은 이 학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모두 첫 구의 끝 자를 하늘 천(天) 자로 맺고, '변(邊)', '련(蓮)', '선(仙)', '연(筵)'을 운자로 삼았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쓴 '월정만필(月汀漫筆)'에 따르면 그 중 임억령과 김인후의 시가 단연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다고 한다.
학(鶴) - 임억령
數聲嘹亮沈寥天(수성료량침료천) 두어 마디 맑은 소리 하늘 높이 울어대고
蒼檜陰中苦竹邊(창회음중고죽변) 전나무 그늘 속 대밭 가를 찾아 깃든다네
煙雨幾䨪三島月(연우기매삼도월) 안개비는 삼도의 달 가린 게 그 얼마인가
風霜又倒五湖蓮(풍상우도오호련) 바람 서린 다시 또 오호 연꽃 쓰러뜨렸네
緇塵已染新毛換(치진이염신모환) 속세 먼지는 새로 난 털 검게 물들였지만
丹頂猶存舊骨仙(단정유존구골선) 붉은 이마는 오히려 옛 모습 지니고 있네
江海老人空對立(강해노인공대립) 강호의 노인 공연히 마주 보고 서 있으니
不知涼露濕秋筵(부지량로습추연) 찬 이슬 가을 자리에 젖어 옴을 모르누나
'오호(五湖)'는 옛날 중국 춘추시대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국경지대 격전지 취리(檇李)에 있던 범려호(范蠡湖)를 말한다. 취리는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의 옛이름이다. '사기(史記)' 권129 <식화열전(貨殖列傳)>에 범려(范蠡)는 서시(西施)를 이용한 미인계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고국으로 돌아오다가 오호(五湖)에 이르러 월왕(越王) 구천(句踐)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떠나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또는 범려와 서시가 오나라에 가기 전에 머물렀다고 하는 설도 있다. 전하여 강호에 은거하겠다는 뜻이다.
학(鶴) - 김인후
悔放殊姿送遠天(회방수자송원천) 고운 자태 하늘 저 멀리 보냄을 후회하노니
秪今蹤跡寄何邊(지금종적기하변) 지금은 그 종적이 어느 물가에 붙여 있는가
題詩肯弔千年柱(제시긍조천년주) 시 지어 천 년의 화표주를 조상하려 하노매
刷羽堪依十丈蓮(쇄우감의십장련) 날개를 씻으며 열 길 연꽃에 깃들 만하구나
淸轉玉簫臺畔影(청전옥소대반영) 맑은 소리 나는 옥퉁소는 누대 가에 비치고
微茫赤壁夢中仙(미망적벽몽중선) 아득히 멀고 먼 적벽강은 꿈 속의 신선이라
山高海濶無消息(산고해활무소식) 산도 높고 또 바다도 넓어 소식조차 없으니
倘記當年玳瑁筵(당기당년대모연) 혹시 그 때의 화려한 잔치 자리를 기억할까
두 시는 '월정만필'에 실려 전한다. 김인후의 시는 학을 잃어버린 뒤에 지은 것이다. '천년주(千年柱)'는 한나라 태소관(太霄觀)의 도사(道士) 정영위(丁令威)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정영위가 죽은 뒤에 학이 되어 고향 성문의 푯말(華表柱)에 앉아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古人民非, 何不學仙塚累累(새야 새야 정령위 새야. 집 떠난지 천 년만에 이제사 돌아왔네. 성은 예전 그대로지만 사람들은 다르구나.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 첩첩할꼬?)'라고 말했다고 한다. 죽은 정영위가 다시 학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알아 볼 사람도 없어서 도로 하늘로 돌아갔다는 고사다. '적벽(赤壁)'은 후베이성(湖北省) 푸치현(蒲圻縣) 서북부 양쯔강(揚子江) 남안에 있다. 적벽강에서 서기 208년 오(吳)의 손권(孫權)과 촉(蜀)의 유비(劉備) 연합군 5만 명이 수륙 양공 작전과 화공으로 위(魏)의 조조(曹操) 20만 대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대모연(玳瑁筵)'은 화려하고 호화로운 술자리를 말한다.
이 무렵 권 진사라는 사람이 임억령에게 홍시를 보내왔다. '석천시집(石川詩集)' 권1의 '조홍시(早紅枾)를 보내준 권 진사에게 감사하며'라는 제목의 시를 보면 임억령이 감을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홍시(早紅枾)를 보내준 권 진사에게 감사하며
사람들 좋아하는 것 다르지만 누가 그 맛의 바름을 알겠는가
문왕은 창포 김치 좋아하였고 증석은 대추를 즐겨 먹었지만
나는 이들과는 같지 않아서 평생 감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네
늙어도 입맛은 아직 어린애라 감 생각만 하면 침이 흐른다네
어제 송령에서 보내준 감을 안타깝게 벌써 다 먹어버렸나니
아침에 그대가 또 보내주었기에 손가락 빨지 않아도 되겠네
아마도 규룡의 알을 던져 놓은 것일까 단사가 떨어진 것일까
입술 닿자 한 입에 쏙 들어오니 마른 폐가 다시 기뻐한다네
입에 맞아 절로 신선의 약이라 누가 체증 생긴다 하였던가
되는대로 보답의 글을 짓느라 거칠어도 꾸미지도 않았다네
홍시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생각만 해도 입에서 침이 흐를까? 홍시를 맛있게 먹는 임억령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창포(菖蒲) 김치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은 '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에 보인다(文王嗜菖蒲菹). 창포 김치는 옛날 중국에서 음력 오월 단오 무렵에 담가서 먹었다. 창포 김치를 먹고 나서 백 일 후면 얼굴에 광채가 나고, 팔다리에 기운이 생기며, 귀와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증석(曾晳)'은 '효(孝)'의 대명사 증자(曾子)의 아버지다. '맹자(孟子)'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36장(曾晳章)에 '曾晳嗜羊棗而曾子不忍食羊棗(증석이 생전에 양조를 좋아했다. 그의 아들 증자는 차마 양조를 먹지 못했다.)'고 했다. 증석은 생전에 대추를 좋아했다. 증자도 대추를 좋아했지만 죽은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 차마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증자와 같은 사람을 효자라고 했다. 주(註)에 양조(羊棗)는 '羊棗實小黑而圓又謂之羊矢棗(양조는 열매가 작으며 검고 둥글다. 양시조라고도 한다.)'고 나와 있다. 양조는 고욤이라는 설도 있다.
1542년(중종 37) 봄 47세의 임억령은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왜(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영남으로 내려갔다. 4월 왜사(倭使)의 도착이 늦어지자 임억령은 시간을 얻어 합천(陜川) 가야산(伽倻山) 최치원의 은거지를 찾아 '홍류동(紅流洞), '자필암(泚筆岩)', '연화봉(蓮花峰)' 등의 시를 짓고, '고운서암소절(孤雲書巖小節)'에 차운하였다. 해인사(海印寺)에서는 시 '사문(沙門)'을 지었다. 이 시는 해인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때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 경남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신산(新山) 기슭의 산해정(山海亭)으로 임억령을 초대했다. 임억령이 '길이 매우 험하더군요.'라고 하자, 조식은 빙그레 웃으면서 '선생 같은 분들이 걷고 있는 벼슬길이 이보다 훨씬 더 험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화가 난무하던 험난한 벼슬길에 비하면 산길은 아무것도 아님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임억령이 돌아갈 때 조식은 '증석천자(贈石川子)'란 시를 써 주었다.
증석천자(贈石川子) - 석천자에게 드리다(조식)
今有石川子(금유석천자) 지금 석천이라는 사람 있으니
其人古遺節(기인고유절) 절조가 뛰어난 옛 선비로구나
芙蓉信聳豪(부용신용호) 부용이 참으로 우뚝 훤칠하니
何言大小別(하언대소별) 어찌 크고 작음을 말하겠는가
昔年邀我乎(석년요아호) 옛날 옛적에 나를 찾아주었던
山海之蝸穴(산해지와혈) 산해정 작은 오막살이 집에는
看來豆子熟(간래두자숙) 아마 콩이 익을 무렵이었는데
琬琰東西列(완염동서열) 술자리 동서로 벌여 놓았었지
石川千木奴(석천천목노) 석천이 가져온 천개의 귤들은
破甘香滿舌(파감향만설) 깨물면 향기가 입에 가득했네
歸來花判事(귀래화판사) 돌아와서는 화초를 키우는 일
其行不改轍(기행불개철) 그런 행실을 고치지 않았도다
雖飢可食言(수기가식언) 아무리 굶주린들 말을 먹으리
人益洪爐雪(인익홍로설) 사람만이 화로에 눈을 보태네
尙君明逸戒(상군명일계) 그대의 명일한 계를 숭상하니
有懸非解紲(유현비해설) 매달린 생각 풀어지지 않누나
조식은 간악한 행동을 일삼는 동생 임백령에게 여러 차례 타일러도 듣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꽃 키우는 일을 일삼은 임억령의 처신에 대해 절조가 뛰어남을 예찬하고 있다. 또 임억령을 연꽃처럼 우뚝 높아서 크기를 잴 수 없으며, 자연에 귀의해서 밝고 편안한 계를 지키는 사람으로 표현하면서 그의 인품을 칭송하고 있다. '을사전문록'에는 두 사람에 대해 '그 서로 친함이 이와 같았다. 아! 공의 현철함으로써, 기특한 재주를 지니고도 큰 사업을 하지 못하였으니, 세상이 모두 애석해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임억령이 유학자로서의 덕목인 경국제민을 위한 벼슬길과 자연에 귀의한 귀거래적(歸去來的) 삶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조식은 조선에서의 왕도정치가 애시당초 실현 불가능함을 깨닫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후학을 양성하면서 처사의 삶을 살다 간 인물이었다.
'완염(琬琰)'은 아름다운 옥(玉)으로 만든 홀(笏)의 일종으로 완규(琬圭)와 염규(琰圭)를 말한다. 전하여 아름다운 행실을 적어서 후세에 전한다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아름다운 술자리의 뜻으로 풀었다. '목노(木奴)'는 감귤(柑橘)의 별칭이다. '화판(花判)'은 신라 때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를 이르던 말이다. 신라 화랑들은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춤과 노래를 즐기며 심신을 닦았다. 여기서는 자연에 귀의한 삶을 말한다. '홍로설(洪爐雪)'은 홍로점설(紅爐點雪)이다. 빨갛게 달아오른 화로 위에 눈을 조금 뿌린 것과 같다는 뜻이다. 전하여 큰일을 하는 데 있어 작은 힘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현(懸)'은 여기서 현념(懸念), 즉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함'의 뜻으로 풀었다.
가야산 유람에서 돌아온 임억령은 왜사가 가지고 온 은(銀)을 객사로 옮기도록 한 뒤 선위사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귀경길에 올랐다. 한양으로 돌아오다가 그는 경상도 선산(善山)의 월파정(月波亭)에 올라 동명의 시를 지어 읊었다. 문경새재(聞慶鳥嶺)를 넘을 때는 영남제일관문(嶺南第 一關門) 주흘관 主屹關)과 영남제이관문(嶺南第二關門) 조곡관(鳥谷關) 중간쯤에 있는 교구정(交龜亭)에 들러 동명의 시를 남겼다.
4월 24일 조정에 들어온 임억령은 선위사로서의 임무를 마쳤다는 장계를 올렸다. 하지만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왜사의 은을 객사로 옮겼다고 해서 그를 탄핵했다. 양사는 은을 왜의 포소(浦所)에 돌려보내고 임억령을 파직할 것을 건의했지만, 의정부(議政府)와 예조(禮曹)에서는 은을 객사에 그대로 둘 것과 임억령의 파직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의정부와 예조의 탄핵 반대 상소로 그는 무사할 수 있었다.
조정에 있던 어느 날 임억령은 권철과 함께 수각(水閣)에 올라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이무렵 그는 경기도에 있는 봉황서루(鳳凰棲樓)에 올라 동명의 시를 남기고, 전생서(典牲署)의 계축(契軸)을 지었다. 그는 또 왕명으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극성의 제문을 썼다. 이 무렵 한양의 임억령 집으로 이황이 찾아와 시를 주고받았다.
1543년(중종 38) 임억령이 48세 되던 해 아들 임찬(林澯)이 태어났다. 1544년(중종 39) 임억령은 시 '구십포교(九十浦橋)'를 지었다. 이때 백광훈, 박우의 아들 인파처사(烟波處士) 박개(朴漑, 1511∼1586), 부훤당(負暄堂) 오상(吳祥, 1512∼1573),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과 함께 수창하였다.
1544년 6월 25일 임억령은 정4품 홍문관 응교(應敎)를 제수받았으나 물러날 뜻을 밝히고 고향 해남으로 내려갔다. 조정에서 거듭 불러도 나아가지 않자, 8월 7일 그에게 정3품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이황이 홍문관 응교를 제수받았다.
그해 9월 21일 임억령은 정3품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9월 29일 중종의 제1계비(第一繼妃)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의 오빠이자 인종(仁宗)의 외삼촌 윤임(尹任, 1487~1545)과 중종의 제2계비(第二繼妃)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尹氏)의 동생이자 명종(明宗)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 1509∼1565)을 벌주라는 교지(敎旨)가 내려오자 임억령은 대사헌(大司憲) 정순붕(鄭順朋), 집의(執義) 한두(韓㞳), 사간 한주(韓澍), 장령(掌令) 정희등(鄭希登), 백인영(白仁英), 헌납(獻納) 성세장(成世章), 정언(正言) 조광옥(趙光玉), 심세림(沈世霖) 등과 함께 계(啓)를 올려 조정에 허론(虛論)과 사설(邪論)이 난무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한편 군주는 사설에 현혹되지 말고 공정하고 밝은 도를 지켜야 함을 논했다.
11월 15일 유시(酉時, 저녁 5시~7시) 중종이 환경전(歡慶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임억령은 만사(輓詞)와 제문을 지어 중종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곡을 했다. 11월 20일 저녁 31세의 인종이 창경궁(昌慶宮) 명정전(明政殿)에서 즉위하고 조정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1545년(인종 원년, 명종 즉위년) 1월 7일 50세의 임억령은 집의 한두, 사간 한주 등과 함께 왕명으로 등청하여 '모든 국사는 조정에서 의논하여 결정한 것이지만 만일 착오가 있다면 대간(大諫)은 잘못을 밝혀 바로 잡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백립(白笠)을 쓸 것인가 흑립(黑笠)을 쓸 것인가 의논을 결정하는 자리에 대간들에게 동참하라는 교시를 받았습니다. 대간이 만일 참석한다면 비록 대신들의 잘못이 있더라도 누가 밝혀 바로 잡을 것입니까? 청하옵건대 동참하지 않을까 합니다.'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대간의 직무는 시비(是非)를 규명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대간이 조정의 의론에 참여하지 못 하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는 장계였다. 이 장계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전한다.
이에 대해 인종은 '성종대왕 때도 대관과 홍문관이 동참하여 이러한 의논을 가졌던 일이 있다. 어제 참판 등의 의논이 오례의(五禮儀)에 합일점을 찾았고 나도 또한 백립을 쓰고 싶은데 중신들의 의논이 하나로 되지 않았음을 의논으로 넓히고자 한 것이니 바로 잡는 것을 기대한다기보다 올바로 의논해 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라고 하교했다. 인종은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임억령 등이 재차 아뢰기를 ‘대간의 직책이란 옳고 그름을 밝혀 바로 잡는 것인데 조정 대신들과 함께 자리를 하여 이 일을 논의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신의 직책을 떠나 대신들과 함께 논의하는 것은 월권이며 일의 원칙에 큰 잘못을 남기는 것이므로 감히 사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억령은 아무리 왕의 교시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일이면 직간도 서슴지 않았다. 인종은 스스로 3년 동안 백립을 쓰기로 결정했으니 대간들은 굳이 논의하지 말라고 하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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