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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2 - 벼슬길에 나아가다

林 山 2017. 11. 25. 13:12

윤구는 1513년(중종 8)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했다. 18세의 임억령은 동생 백령과 함께 광주 서창에 살고 있던 외삼촌 박곤(朴鯤)의 문하에서도 배웠다. 전주 통판(全州通判)을 지낸 박곤은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1526∼1593)의 아버지였다.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던 박곤은 임억령, 백령 형제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1515년(중종 10) 20세의 임억령은 감사(監使) 지례 전씨(知禮錢氏) 전성(錢晟)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1남1녀를 두었다. 1516년(중종 11) 윤구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들어갔다. 같은 해 봄 21세의 임억령은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고, 가을에는 진사회시(進士會試)에 합격하였다. 1517년(중종 12) 윤구는 주서(注書)에 이어 홍문관의 수찬(修撰), 지제교(知製敎),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임억령은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가 김서성(金瑞星)과 함께 공부했다. 


1519년(중종 14) 임백령은 문과에 합격함으로써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는 꿈에 경전 구절을 가르쳐 준 노인을 만나고 나서 과거에 붙었다고 한다.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 ?~?)이 지은 시화 및 일화집 '송계만록(松溪漫錄)' 하권에 '재상 임백령의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그에게 괴마(槐馬)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 공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가정(嘉靖) 병오년에 임시로 정승의 직함을 띠고 연경(燕京)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다가 오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 이것이 바로 삼공(三公)을 지나고 오년(午年, 말띠 해)에 죽는다는 참언(讖言)이었던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박동량의 '기재잡기' 권3 <역조구문 3(歷朝舊聞三)>에는 또 '석천은 성격이 소탈하며 또한 검속하려 하지 않았지만, 숭선은 단정하고 자상하여 잡된 데가 없으므로, 그 어머니가 극히 사랑하여 자리에 눕거나 일어날 적에는 언제나 숭선을 시켜 부축하게 하였는데, 일마다 마음에 들었고, 석천은 거칠고 경솔하다고 하여 일을 맡기지 않았다. 기묘년(1519)에 숭선이 22세로서 명경과(明經科)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과거 보러가는 날 새벽에 꿈을 꾸니,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네 자(字)를 내가 괴마(槐馬)라고 고쳐 주마." 하므로 그러라고 하였는데 시험장에 들어가자 시험관이, "네 자가 무엇이냐?"고 물으므로, "괴마"라고 대답하였더니, 여러 시관이 모두, "이 사람이 그 사람이로구나." 하고, 모두들 기쁜 기색으로 그를 주목하였다. 강(講)이 끝나자 시관이 말하기를, "내 꿈에 어떤 사람이 와서 이르기를, ‘괴마라는 자를 가진 유생이 있을 것인데 그 사람이 뒤에 재상이 될 사람이니, 놓칠까 두렵다.’ 하였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의 꿈이 모두 부합되었으니, 네가 마땅히 재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뒤에 김안로에게 걸려 10년 동안이나 한가한 자리에 있다가 병오년에 우의정으로 북경에 갔다가 요동에서 죽었다. 사람들이, "괴(槐)라는 것은 삼공의 상징이요, 마(馬)는 오(午)인 것이니, 이것은 그가 삼공의 한 사람이 되었다가 병오년에 죽는다는 징험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같은 해 11월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 보수 훈구파가 정치공작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 등 개혁 사림파를 제거했다. 이조 판서 안당의 천거와 중종의 신임으로 등용된 조광조 등 개혁파들은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려다가 되레 훈구파들의 역공을 받고 숙청되었다. 기재(企신광한(申光漢, 1484∼1555), 이희민(李希閔), 신용개(申用漑), 안당 등의 지지를 등에 업은 조광조는 연산군 이후 거의 폐지되었던 현량과(賢良科)를 중종에게 건의하여 다시 실시토록 하였다. 현량과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게 하여 대책(對策)만으로 시험한 제도였지만, 사실상 사림파의 기반을 구축하고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현량과의 실시와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로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 훈구파는 정치공작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훈구파에 가담한 임백령도 현량과의 실시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기묘사화로 사림의 거목 조광조는 화순(和順)의 능주(綾州)에서 사사(賜死)되고, 조광조의 후원자 형조판서 김정(金淨)은 금산, 진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기묘사화 직후 일어난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현량과로 관직에 진출한 대사성 김식(金湜)은 선산에 유배되었다가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외딴 섬으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듣고 거창에서 자결하였다. 김식은 절명시 '日暮天含黑 山空寺入雲 君臣千載義 何處有孤墳(해는 기울어 하늘은 어둑한데, 텅 빈 산사 위에 구름이 떠가네. 군신 간의 천년의 의리는 어느 외로운 무덤에 있는가?)'를 남겼다.


이때 조광조와 함께 개혁파에 속했던 임억령의 형 임천령과 임만령도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고, 윤구도 삭직되어 영암에 유배되었다. 윤구는 영암의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고향 해남에 머물면서 관로의 뜻을 버리고 조용히 살고 있었다. 임억령은 윤구에게 소식과 함께 위로의 시를 적어 보냈다. 


병기무료록봉귤정선생(病起無憀錄奉橘亭先生)

병이 나서 적적하여 귤정 선생에게 적어 받들다


野馬何貪豆(야마하탐두) 들녘 말은 어찌 콩을 탐내는고

秋鷹未解條(추응미해조) 가을 매 끈에서 풀리지 못했네

鄕園頻入夢(향원빈입몽) 고향이 자꾸 꿈 속에 들어오니

折盡碧蟠桃(절진벽반도) 푸른 반도를 모두 다 꺾었도다


여기서 '야마(野馬)'는 윤구, '추응(秋鷹)'은 임억령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끈에 묶인 매처럼 조정에 매여 있는 임억령이 들판에서 마음껏 뛰노는 말처럼 자유로운 윤구를 부러워하는 시다. 


훈구파가 조정을 장악하고, 기묘사화의 여파가 박상 등 호남 사림에까지 미치자 임억령은 중앙 정계를 혐오했다. 박상은 기묘사화에서 살아남은 조광조의 문인들을 거둠으로써 사림운동의 맥이 이어질 수 있게 한 사람이었다. 24세의 임억령은 벼슬길에 대한 뜻을 버리고 태학을 떠나 고향 해남으로 향했다. 


임억령은 해남으로 내려가던 중 금강(錦江)을 건너게 되었다. 금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 그는 '제금강루선(題錦江樓船)'이란 시를 지어 읊었다.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가는 심정을 그는 이렇게 읊었다.


제금강루선(題錦江樓船) - 금강의 누선에서 짓다


有客携妻子(유객휴처자) 한 나그네가 처자를 데리고

遙遙指海南(요요지해남) 멀리 해남땅을 향해서 가네

黃昏來古渡(황혼래고도) 황혼 무렵 옛나루에 왔는데

碧水染新藍(벽수염신람) 푸른 강물 신록에 물들었네

撲撲柳飛絮(박박류비서) 버들솜은 살랑살랑 날리고

蕭蕭風滿衫(소소풍만삼) 소슬한 바람 소매에 가득해

平生驚世句(평생경세구) 세인들 놀래킬 싯구 얻느라

性癖至今耽(성벽지금탐) 그 버릇 이제야 즐기는구나

  

이 시는 '석천시집' 권3에 들어 있다. 임억령이 해남으로 낙향하면서 금강을 건너는 배 위에서 지은 시다. 벼슬에 대한 미련보다는 인구에 회자될 만한 아름답고 멋진 시를 쓰고 싶다는 시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금강의 아름다운 봄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시인의 청신고매(淸新高邁)한 시풍이 잘 드러나 있는 시다. 이처럼 임억령은 타고난 시인이었다. '풍(風)은 사화를 일으킨 가해자, '류비서(柳飛絮)'는 피해를 당한 사림에 비유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금강루(錦江樓)'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청도 공주목>에 금강 남쪽 언덕에 있다고 했다. 


담양 식영정


1520년(중종 15) 임억령은 전라도 진도(珍島) 유람을 떠났다. 그는 진도 벽파정(碧波亭)과 영주각(瀛洲閣)에 올라 각각 한 수의 누정시를 남겼다. 벽파정은 김방경(金方慶)이 왜구를 격파한 기념으로 1207년(고려 희종 3)에 진도의 관문 나루터 어귀에 세웠다고 전한다. 1521년 할아버지 임수가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를 해남 교동(校洞) 북동쪽 언덕에 장사지낸 임억령은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1523년(중종 18) 삼년상을 마치고 28세가 된 임억령은 상복을 벗고 산을 내려왔다. 


1525년(중종 20) 30세의 임억령은 식년시(式年試) 전책(殿策)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해 9월에는 휴가를 얻어 교향 해남에 내려왔다. 휴가를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간 임억령은 스승 박우와 시를 주고받았다. 


1526년(중종 21) 양림산(兩林山) 아래 사직동(社稷洞)에 거처를 정한 임억령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淸雲洞) 청송당(聽松堂)에서 칩거하던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과 친하게 지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자연관(自然觀)과 성률관(聲律觀)을 피력한 '청송당기(聽松堂記)'를 지었다. '청송당기'에서 '천지에 즐길 만한 성음(聲音)이 적지 않으나, 솔바람 소리야말로 최고다.'라고 하면서 자연의 소리를 예찬했다. 그는 또 '장자(莊子)'를 인용하여 '피리와 비파를 녹여 끊어 버리고, 고광(瞽曠)의 귀를 틀어막아야 천하의 사람들이 귀가 밝아질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자잘한 기교로써 꾸며대는 인위적인 것과 부자연스러움을 지양하고 자연스런 성정의 드러남, 곧 천연(天然)의 무위(無爲)를 중시하는 성률관을 피력한 것이다. 이러한 성률관은 이후 평생 그의 시문학에 있어서 중요한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성수침은 조광조의 수제자이자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아버지였다. 스승이 사사되자 그는 처가가 있는 파주 우계로 들어가 은거한 채 두문분출하고 태극도(太極圖)만 탐구하면서 일생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조선의 대표적인 산림처사였다. 성수침이 우계로 돌아갈 때 임억령은 '용기재운송청송환산(用企韻送聽松還山)'이란 시를 지어 송별하였다. 


용기재운송청송환산(用企齋韻送聽松還山)

기재의 운을 써서 청송이 산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다


寂寞荒村隱少微(적막황촌은소미) 적막하고 황량한 마을에 처사가 숨었는데

蕭條石徑接柴扉(소조석경접시비) 한가닥 쓸쓸한 돌길 사립문으로 이어졌네

身同流水世間出(신동류수세간출) 육신은 흐르는 물같아서 세상에 나갔건만

夢作白鷗江上飛(몽작백구강상비) 꿈속에선 갈매기 되어서 강위를 날아가네

山擁客窓雲入座(산옹객창운입좌) 산들은 객창을 에워싸고 구름은 스며들며

雨侵書榻葉投幃(우침서탑엽투위) 비는 책상에 들이치고 나뭇잎은 휘장치네

飄然又作投簪計(표연우작투잠계) 표연히 또 벼슬길에서 물러나려 계획하니

塵土無由染素衣(진토무유염소의) 세상의 더러운 티끌에도 물들지 않으리라


성수침의 고고함을 예찬한 시다. '소미(少微)'는 소미성(少微星)이다. 처사좌(處士座)의 별로서 일명 처사성(處士星)이라고도 한다. 진(晉)나라 때 회계(會稽)의 사부(謝敷)가 약야산(若耶山)에 은거하는데 홀연히 달이 소미성을 범하였다. 이때 진나라의 은사(隱士) 대규(戴逵)의 이름이 사부보다 더 알려졌으므로 사람들이 '대규가 죽을 징조가 아닌가?'라 하였는데 조금 뒤에 사부가 죽었다. 그리하여 회계 사람들이 오중(吳中) 사람들을 조롱하기를 '오중의 고사(高士)는 죽기를 구하여도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소미(少微)'는 송(宋)나라 때 황제로부터 소미선생(少微先生)이란 호칭을 하사받은 처사(處士) 강지(江贄)를 이른다. 전하여 은거하는 처사를 뜻한다. '추잠(抽簪)'은 '비녀를 뽑아내다.'라는 뜻이다. 전하여 '퇴관(退官)하다, 사임하다,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기재(企齋)'는 당대의 문장가 신광한의 호다. 신광한은 영의정까지 지낸 생육신 신숙주(申叔舟)의 손자다. 조광조와 함께 신진사류였던 그는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있다가 기묘사화 때 연좌되어 삭직되었다.   


임억령과 성수침은 평생지기가 되어 노년에 이르기까지 서로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았다. 임억령의 시에서 두 사람의 진한 우정을 느낄 수 있다.

  

어제 그대에게 온 편지 받아보니 그대 항상 방에 누워있다고 하네

음식에 혹 고기 없을까 염려되어 나에게 닭 한 마리를 보내주었네


임억령은 성수침의 선친 대사헌(大司憲) 성세순(成世純)의 묘갈명(墓碣銘)을 짓기도 했다. 묘갈명은 문장이 뛰어난 사람에게 맡기는 법이다. 성수침이 임억령의 문장을 높이 평가했으며, 양가의 우의도 돈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해 10월 임억령은 동년배 친구인 권사성(權思誠)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갈 때 '봉노성(逢魯城)'이란 시를 지어 주었다. 1527년(중종 22) 옥당(玉堂, 홍문관)에 있다가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임억령은 중앙 정계에서 문장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료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시인이었다. 중종은 궁중에서 시회(詩會)가 열릴 때마다 임억령을 불러 시를 짓게 하였다. 그해 6월 그는 왕명으로 '문선(聞蟬)'이란 제목의 시를 지었다. '문선'은 외척 권신 희락당(希樂堂) 김안로(金安老, 1481~1537)를 풍자한 시였다.


문선(聞蟬) - 매미소리를 듣다


長夏荒村草樹交(장하황촌초수교) 긴 여름 거친 마을 풀 나무 어우러졌는데

小虫來拘細腰搖(소충래구세요요) 작은 매미가 와서 가는 허리 안고 흔드네

聲音凄切由湌露(성음처절유찬로) 소리 처량하고 슬픈 건 이슬 먹었기 때문

衫服輕殲正刻綃(삼복경섬정각초) 가벼운 옷엔 또 비단을 아로새긴 듯도 해

宿雨乍晴似磬(숙우사청흡사경) 간밤의 비가 막 개었는데 경쇠 소리 같고

斜陽欲斂更如謠(사양욕렴갱여요) 저물녘 되려 함에 다시금 타령 같기도 해

深深翳葉毋多噪(심심예엽무다조) 잎에 깊이 깊이 숨어 너무 떠들지 말거라

山鵲來不汝饒(산작래시불여요) 산까치가 와 보면 너를 가만 안 놔둘 테니


'매미'는 김안로를 비유한 것이다. 산까치가 혼내주기 전에 너무 나대지 말라고 경고한 시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막강한 권력자를 노골적으로 풍자한 시인의 용기가 참 대단하다. 그는 또 왕명을 받고 '국화(菊花)', '오작교(烏鵲橋)'란 시도 지었다. 8월에도 임억령은 왕명으로 '중추무월(中秋無月)'이란 시를 짓고, 9월에도 '명비촌(明妃村)', '낙화암(落花岩)', '적벽고풍(赤壁古風)' 시를 지었다. 


그해 가을 임억령이 교수(敎授)가 되자 과거를 보라가게 된 박상의 아들 박민중(朴敏中)이 그를 광주의 집으로 초대하여 성대한 술자리를 베풀었다. 기재(寄齋)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야사와 일기를 묶은 책 '기재잡기(寄齋雜記)'에 그 일화가 실려 있다.  


'기재잡기'에 '어느 날 민중이 과거를 보러 가게 되어 석천을 광주에 있는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성대한 술자리를 베풀고 예절을 차림이 매우 공손하였다. 술자리가 반쯤 되었을 무렵 민중이 일어나며 석천에게 청하기를 "금번에 선생님께서 시관으로 가실 것인데, 어떤 제목을 내시렵니까?" 하므로 석천이 의아하게 여기면서 "요즈음 선비들의 글 솜씨를 보면 자네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니 이번의 장원은 자네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나이 젊은 뜻 있는 선비도 오히려 그런 것을 묻는가?" 하였다. 민중이 말하기를 "제가 이 무릎을 선생님 외에는 평생 꿇지 않으려고 생각합니다. 만일 과거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나가 그것 때문에 구구한 요청을 할 것입니까?" 하였으나 석천이 위로하여 격려했을 뿐 끝내 말하지 않고 가 버렸다. 과연 민중이 장원급제를 하였다가 26살에 일찍 죽었다. 문장 하는 선비들의 승부욕이 대개 이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임억령은 대제학을 지낸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과 시와 문장에서 쌍벽을 이루었다. 정사룡은 영의정을 지낸 수부(守夫)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의 조카였다. 임억령과 정사룡은 서로 주고받은 시가 80여 수에 이를 만큼 절친한 시벗이었다. 강서파(江西派) 시인이었던 두 사람은 조선시대의 시풍이 송시풍(宋詩風)에서 당시풍(唐詩風)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누구보다 먼저 당시(唐詩)를 접했다. 임억령의 한시 영향을 받은 백광훈, 최경창과 정사룡의 문하인 손곡(蓀谷) 이달(李達, 1539~1612)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삼당시인은 조선에서의 당시 유행에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