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5년 1월 10월 50세의 임억령은 고향 해남으로 돌아왔다. 7월 1일 묘시(卯時, 오후 5시~7시)에 인종이 세상을 떠났다. 임억령은 만사와 제문을 지어 인종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곡했다. 7월 6일 인종의 이복동생인 11살의 명종이 조선의 제13대 왕으로 즉위했다.
왕위 교체기에 조정은 명종의 친모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尹氏)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중심으로 한 소윤(少尹) 일파와, 인종(仁宗)의 외삼촌 윤임(尹任)이 이끄는 대윤(大尹) 일파의 권력쟁탈전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명종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문정왕후 윤씨가 섭정여왕(攝政女王)이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임억령은 금산군수(錦山郡守)로 나가 있었다.
8월 23일 문정왕후는 '윤임과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이 수상하다'면서 동생 윤원형에게 형조판서 윤임과 대윤파 일당을 제거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이 밀지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서막이 올랐다. 윤원형과 그의 형 윤원로(尹元老), 첩 정난정(鄭蘭貞), 병조판서 이기(李芑), 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 공조판서 허자(許磁), 호조판서 임백령 등 소윤파는 대윤파 제거를 위한 정치공작을 모의했다. 임백령은 한 동네에 살던 윤임을 끊임없이 감시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임백령은 그의 형 임억령에게 모의 사실을 알리고 동참할 것을 제의했다. 임억령은 급히 상경하여 동생에게 정치공작으로 피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성격이 호방하고 출세욕이 강한 임백령이 말을 듣지 않자 자책감을 느낀 임억령은 11월 7일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병이 나은 뒤에 올라오라는 명을 받았다. 명을 받자마자 그는 한양을 떠나 귀향길에 올랐다.
조선왕조실록 1545년 11월 7일 조에는 '금산군수 임억령이 신병으로 사직원을 내니 윤허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서 사관은 임억령에 대해 '사람됨이 소탈하여 얽매인 데가 없었으며, 또 영화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생과 함께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쾌히 멀리 떠나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았으니 그의 동생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평하고 있다.
임억령은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강 나루터로 향했다. 그는 한강 나루터까지 배웅하러 나온 동생 백령에게 시 한 수를 지어 건넸다.
好在漢江水(호재한강수) (나 떠나간다) 잘 있거라 한강수야
安流不起波(안류불기파) 물결 일으키지 말고 고요히 흘러라
'한강수(漢江水)'는 을사사화 주동자 중 한 사람인 임백령을 가리킨다. 동생 백령이 외척 권신들과 함께 붕당을 일으켜서 죄 없는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을 하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였다. 또 정치적으로 다른 길을 가는 동생에 대한 의절 선언이었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 22∼24 <설부(說部)>에 수록된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는 '석천 임억령은 기개가 뛰어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누차 청현(淸顯)한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응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외직으로 나가 있는 때가 많았다. 그의 아우 백령이 을사년의 공신에 참여해서 권세가 일세를 경도하게 되자, 당시 승지로 있던 석천은 서둘러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났다. 백령이 굳이 만류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한강을 건너면서 시를 지어 주었는데, <好在漢江水 安流不起波>라 하였다. 그 후로 서울에는 오지 않으니 사론(士論)이 그를 옳게 여겼다. 백령이 죽은 뒤 만년에야 서울에 왔고, 자청하여 강원 감사로 나가서는 바다와 산을 두루 구경하며 많은 글을 지었으므로 지금까지 그곳 산수를 빛내고 있다. 정치의 교화도 청녕(淸寧)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을사사화 때 화를 당한 인물들의 전기를 모아 엮은 책인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幽憤錄)' <임억령전(林億齡傳)>에도 '을유년 과거에 올라,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학식이 올바른 방향이 있고 마음이 강직하며, 영특한 기운이 넘치고, 문장이 호방하였으며, 일을 당해서는 민첩하였고, 평생에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경우가 적었다. 을사년 화가 일어날 적에, 공은 나가면 충(忠)과 신(信)을 구비하고, 들어와서는 침묵을 지키고 말하지 않았다. 그의 아우 임백령이 몰래 권신들과 결탁하고 사림에게 화를 일으키려 하자, 공이 훈계하는 시를 주었는데, 지극히 간절하고 비분(悲憤)하였으나 임백령이 듣지 않았다.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 말하면, 형제간에는 마땅히 화복을 같이 해야 하나, 그 불의를 보고 간절히 꾸짖기를 이같이 하였고, 또 몸을 그 사이에 더럽히지 않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好在江漢水 安流莫起波>라는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식영정에서 바라본 성산호(광주호)
윤원형의 오른팔 임백령은 소윤파와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과 영의정 유관, 이조 판서 유인숙 등 대윤파 선비들을 역모로 몰아 논핵(論劾)했다. 백인걸(白仁傑)과 권벌(權橃) 등이 대윤파에 대한 논핵의 부당함을 주장했으나 결국 윤임과 유관, 유인숙 등은 사사(賜死)되었다. 소윤파는 정철의 매형인 계림군(桂林君) 유(瑠)마저 역모 관련자로 몰아 죽였다. 이미 사사된 유인숙은 경기감사 김명윤(金明胤)의 밀고에 의해 계림군과 봉성군(鳳城君)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 효수(梟首)되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며, 가족들도 모두 사형당했다.
임백령은 을사사화 때 세운 공으로 정난위사공신(定難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해졌으며,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하였다. 임백령의 아우 구령도 을사사화에 참여한 공으로 위사공신에 책록되었다. 임구령은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 남원부사(南原府使), 나주목사(羅州牧使)를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가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사화로 인해 형 두 명은 유배를 당했고, 임억령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동생 두 명은 벼락출세를 했다. 당시 임백령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당시 사평에 '노회한 이기, 치밀한 임백령, 잔혹한 정순붕, 독살스러운 윤원형이 간사한 동아리를 맺고 명사를 일망타진하였으니, 하늘이 어찌 이러한가!'라는 말이 있었다.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신광한도 소윤에 가담하여 대윤의 제거에 공을 세움으로써 위사공신에 책록되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서 사관은 '을사사화을 기획한 인물은 임백령, 이를 수행한 인물은 임구령이다. 임구령은 이기와 윤원형을 자기 아버지처럼 섬겼다. 을사년에 임구령은 정순붕의 아들 정현(鄭礥), 윤원형의 종숙 윤돈인(尹敦仁)의 무리들과 함께 밤에 재상의 집을 가만히 엿보았는데 종적이 흉칙하고 비밀스러워 여우같았다.'고 기록했다.
완산(完山)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을사사화의 발단이 된 임백령과 기생 옥매향(玉梅香)에 대한 기록이 있다. 임백령과 윤임은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이때 한양에는 미모가 빼어난 평양 출신의 명기 옥매향(玉梅香)이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원래 옥매향은 임백령의 정인(情人)이었는데, 나중에 윤임이 그녀를 빼앗아 첩으로 삼았다. 벼슬이 낮아 정인을 빼앗긴 것으로 생각한 임백령은 이를 갈면서 윤임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다짐했다. 드디어 임백령에게 복수의 기회가 왔다. 소윤파의 정치공작 을사사화의 주동자가 된 것이다. 역모로 처형된 윤임 등 대윤파의 식솔들을 공신들에게 노비로 분배하는 과정에서 임백령은 옥매향을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을사사화는 임백령에게 있어 연적에 대한 처절한 사랑의 복수극이기도 했던 셈이다.
임억령은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 길에서 우연히 화동(花洞) 임백영(任百英, 1525~1595)과 함께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던 약관(弱冠)의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을 만났다. 박광전의 기품과 자질이 남다름을 알아본 임억령은 그에게 '군자는 마땅히 자기 몸을 단속하고 자신을 규제하여(檢身律己) 중후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이에 감복한 박광전은 임억령의 충고를 평생 잊지 않고 몸가짐의 신조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후에 김인후, 기대승, 이항,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과 함께 호남 5현(湖南五賢)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고향 해남에 내려온 임억령은 창평의 성산에도 별서(別墅)를 짓고 측실(側室)로 맞이한 양씨 부인을 살게 했다. 이때 서하당과 부용당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양산보의 4종매(四從妹)라고 알려진 양씨 부인은 서출(庶出)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만 해도 서출녀(庶出女)는 양반가의 측실(側室)이 되거나 기생(妓生)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조선시대 유명한 시기(詩妓)였던 황진이(黃眞伊)이나 매창(梅窓)도 서출이었다. 황진이는 신분차별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 용기있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서출녀들은 대부분 굶주림이라도 면하기 위해 양반가의 측실로 들어갔다.
서하(棲霞)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의 사후에 그의 유고를 모아 엮은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 행장에 '庚申公三十六歲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爲終老計(경신년 공이 36살 때 창평의 성산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짓고 생애를 마칠 계획으로 삼았다.)'란 기록이 있다. 식영정과 서하당을 김성원이 36살 때인 1560년에 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김성원의 호와 서하당의 당호가 같은 데서 비롯된 오류다. 당시 누정을 세우려면 선비로서 벼슬도 지내야 했고, 또 상당한 재력이 필요했다. 당시 관직 경력도 없던 김성원이 누정을 세울 만한 여건이나 형편이 되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서산 유씨(瑞山柳氏) 유사(柳泗)의 딸과 이미 결혼한 몸이었던 김성원은 임억령의 딸을 측실로 맞아들였다. 맞아들였다기보다는 임억령이 그에게 주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녀는 임억령과 양씨 부인의 소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하당은 임억령이 양씨 부인을 위해 지었고, 후에 사위가 된 김성원과 딸 부부에게 살림집으로 주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546년(명종 1) 5월 51세의 임억령은 동생 백령의 추천으로 내려진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는 깊은 산속 외진 곳에 들어가 제문을 지어 녹권을 불사르면서 시로써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竹老元逃削(죽로원도삭) 대나무가 늙었으니 베이는 것 피하였고
松高不受封(송고불수봉) 소나무는 고상하여 벼슬 받지 않는다네
何人與同調(하인여동조) 누가 송죽처럼 지조를 함께 지키려는가
窮谷白頭翁(궁곡백두옹) 깊은 골짜기에 머리 흰 백두옹뿐이로다
송죽 같은 지조를 위해 형제간의 우애도 끊고자 하는 결의를 노래한 시다. 녹권을 불사른 것은 출세와 세상의 부귀영화를 하찮게 여기고, 벼슬살이의 진퇴와 공사(公私)의 구분을 분명히 한 올곧은 지식인으로서의 선택이었다. 임억령은 시문에 능하고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당시의 문인들이 존경하였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했던 그는 이직(吏職)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幽憤錄)'에는 '금산군수로 있을 적에 임백령이 원종공신녹권을 내자, 이에 산골에 물러가 있으면서 제문을 짓고 불에 태워버렸다. 일찍이 시를 남겼는데, <竹老元逃削 松高不受封 何人與同調 窮谷白頭翁> 하였으니 대개 자신의 정경(情景)을 읊은 것인데 지금도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사대부들이 그 의(義)를 높이 여겼다.'고 전한다.
임억령이 벼슬을 버리고 해남으로 돌아와 은거한 것은 사화가 난무하는 중앙 정계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낙향은 을사사화의 주역 중 한 사람인 동생 백령 때문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그는 해남 마포에 은거하면서 느낀 서글픈 심정을 '득영자운(得營字韻)'에 담아 읊었다.
득영자운(得營字韻) - '영(營)' 자 운(韻)을 얻다
已熟小槽酒(이숙소조주) 술통에서 술 익어가는 소리가
如聞疏雨聲(여문소우성) 성근 빗소리를 듣는 듯하여라
醉來終日臥(취래종일와) 취하여 하루종일 누워 있으니
長悔十年營(장회십년영) 십년 간의 경영이 후회스럽네
막걸리가 익어갈 때는 기포가 올라오는 소리가 마치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비슷하다. 세상사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동생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지난 일이 후회스럽다는 것이다. 임백령이 주동적으로 가담한 을사사화로 인해 대윤파 대신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임억령이 느낀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임억령은 고향인 해남의 마포(馬浦) 명봉산(鳴鳳山) 아래 서당골(지금의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에 마포별업(馬浦別業)과 문암재(文庵齋)를 세우고 오로지 화초를 가꾸면서 후진 양성에만 힘썼다. 별업은 요즘의 별장이다. 문암재에서 에서 공부한 대표적인 제자에는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 박백응, 고경명, 충장공(忠壯公) 정운(鄭運, 1543~1592), 광주의 박순종 형제 등을 들 수 있다. 마포에 은거할 당시 임억령의 한가하고 소박한 삶은 '억마포별업(億馬浦別業)'이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사대부로 불리기 싫었기에, 늙은 농부 되리라 생각했네
새집은 봉사 아래에 짓고, 옛집은 대숲 한가운데에 있네
타향살이할 땐 예사 생각했지만, 옛벗들 반갑게 만났네
시골 얘기 끝날 줄 몰라, 강에 뜬 달 소나무 위로 솟았네
임억령은 또 해남현의 치소인 금강산(金剛山, 481 m) 아래 부춘동(富春洞), 지금의 해남읍 해리(海里)에 있던 부춘재(富春齋)에서도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담양과 강진을 오가며 선비들과 시주(詩酒)를 나눴다. 해남 해리에서는 유달리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최부, 임억령, 윤구, 유희춘, 윤선도 취죽헌(翠竹軒) 박백응(朴伯凝, 1525~1587) 등 조선시대 해남 6현(海南六賢) 가운데 대부분이 해리 출신이다. 이들은 또 서로 혈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임억령과 박백응은 숙질(叔姪) 간이자 사제 간이었고, 윤구와 윤선도는 조손(祖孫) 사이였으며, 최부와 유희춘은 숙질 간이었다. 이들은 호남의 학맥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학과 문학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1546년 임백령은 우의정(右議政)을 차함(借銜)하여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갔다. 그러나 그는 연경(燕景, 北京)에서 병을 얻어 이듬해 6월 19일 명나라에서 돌아오던 도중 영평부(永平府)에서 죽어 고양(高陽)에 장사지냈다. 시호(諡號)는 처음에 별다른 공로가 없다고 해서 소이(昭夷)라 정했으나, 문정왕후 윤씨가 다시 짓게 하여 문충(文忠)으로 고쳤다. 하지만 후에 을사간당(乙巳奸黨)으로 지목되어 훈작(勳爵)을 삭탈당했다.
아우 백령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통한 소식을 듣고 임억령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는 아우를 잃은 안타깝고 슬픈 심정을 시로써 남겼다.
바닷길 건너 멀고도 먼 타국, 아침 하늘에 북두성도 아득하여라
먼지 뒤범벅 옷은 너덜해지고, 수륙 천리라 귀밑 살쩍도 여위어
끼니 때 요기를 더하려 해도, 가을 찬바람이 먼저 와 재갈 물리고
모래투성이 머리 둔 곳만 알려줄 뿐, 짝 잃고 홀로 부르며 헤매네
아우를 먼저 떠나보내는 형의 슬픔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애도시다. 그는 이어 죽은 다음에라도 아우와 더불어 서로 의지하면서 즐겁게 살고 싶었다.
아우는 돌아와서 지하에 터를 닦고, 형은 병들어 인간세상에 기대 있네
저승에서 만나면 슬프고 애닯아도, 꿈 속에서나 의지하고 즐겁게 사세
임억령과 백령의 정치적인 노선은 비록 달랐지만 형제의 지극한 우애는 변함이 없었다. 형은 그렇게 사랑하는 아우를 떠나보냈다. 임백령이 죽은 이후 옥매향의 이야기는 알 수 없다. 사극 '여인천하'에서 옥매향은 임백령의 출세를 예언하면서 '괴마'라는 호를 지어준 승려를 따라서 산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역사적 사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중앙 정계에 있는 동안 임억령은 을사사화를 전후하여 자신과 친한 인물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들의 몰락을 바라보면서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바람이 부는 정치 현실에 대한 갈등은 '송문명부시(送文明赴試)'에도 드러나 있다.
송문명부시(送文明赴試) - 과거 시험 보러 가는 문명을 보내며
貧別將何贈(빈별장하증) 가난한 사람 이별하며 무엇을 주나
秋溪對黙然(추계대묵연) 가을 시냇물을 대하고는 말이 없네
王門深似海(왕문심사해) 조정은 마치 바다처럼 깊은 곳이라
客路遠如天(객로원여천) 나그네 가는 길은 하늘처럼 멀구나
親友皆憐屈(친우개련굴) 친한 벗들 모두 꺾어짐이 슬프지만
朝廷豈棄賢(조정기기현) 조정이 어찌 어진 사람을 버려두랴
無垂和氏淚(무수화씨루) 변땅 화씨처럼 눈물만 흘리지 말고
更着祖生鞭(갱착조생편) 다시 조생의 채찍을 잡아 보시게나
'송문명부시(送文明赴試)'는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문명(文明)이란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 지어 준 오언율시다. 시인은 조정의 깊이를 '바다(海)', 조정에 이르는 거리를 '하늘(天)'에 비유했다. 벼슬길에 오르는 것도 힘들지만 정치 현실은 그보다 더 어렵다는 뜻이다. 친한 벗들이 숙청되거나 좌천되어 불우한 신세가 되자 시인은 이를 슬퍼하면서 자신도 언제 그들과 같은 신세가 될지 모르는 정치 현실에 대해 안타까와하고 있다. 하지만, 조정은 어진 사람을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니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 여왕(廬王)에 이어 무왕(武王)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변화(卞和)처럼 눈물만 흘리며 소극적으로 임하지 말고, 남보다 먼저 행함으로써 높은 지위에 오른 진(晉)나라 조적(祖逖)처럼 국가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임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는 '진서(晉書)' <유곤전(劉琨傳)>의 조생지편(祖生之鞭) 고사를 들어 경세제민(經世濟民)해야 하는 유자(儒者)의 자세를 말한 것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관수정
이 무렵 임억령은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에 있는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1459~1547)의 관수정(觀水亭)에 들렀다. 그는 정자 주인의 원운시에서 차운하여 '경차(敬次)'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임억령의 '경차(敬次)' 편액
경차(敬次) - 삼가 차운하다
百年荒僻野亭寒(백년황벽야정한) 궁벽한 두메의 오래된 정자는 서늘한데
春水如今上石欄(춘수여금상석란) 봄물은 변함없이 돌난간 위로 흐르도다
朝作名臣居相府(조작명신거상부) 조정의 대신으로 일할 때는 명신이었고
暮爲漁父釣沙灘(모위어부조사탄) 나이 들어선 어부로 여울에서 낚시하네
平生食檗眞堪法(평생식벽진감법) 한평생을 깨끗이 살아서 법도를 지켰고
餘事能詩亦可觀(여사능기역가관) 한가할 때에 읊은 시들도 볼만하였다네
我本年來慵病甚(아본년래용병심) 나도 또한 요즈음 게으름병이 심하오매
欲䏂夫子滌塵肝(욕수부자척진간) 선생 좇아서 티끌마음 씻어내고 싶어라
霜髥雪鬢照人寒(상염설빈조인한) 흰수염 하얀 머리털 비춰보니 쓸쓸하고
徙倚晴川夕照欄(사의청천석조란) 냇가를 거닐매 저녁노을 난간에 어리네
吟罷閑雲生遠峀(음파한운생원수) 읊조림을 마치자 산봉우리에 구름 일고
睡甘疎雨響高灘(수감소우향고탄) 단잠에 흩뿌리는 빗소리 여울에 울리네
迷塗那似回車返(미도나사회거반) 길을 잃고서 수레를 돌이키어 되돌리듯
當局何如袖手觀(당국하여수수관) 닥쳐온 일들을 어찌하여 팔짱끼고 보리
野蔌山薇今政軟(야속산미금정연) 들나물과 산 고비는 그야말로 부드러워
村盤肯歎食無肝(촌반긍탄식무간) 시골밥상 즐기지만 먹고 싶지는 않도다
弘文典翰(홍문 전한) 石川林億齡(석천 임억령)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항상 깨끗하게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난 선생을 따르고 싶다. 하지만 시국이 어수선한데 어찌 초야에 묻혀 팔짱을 끼고 볼 수만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송흠에게 나라의 큰일을 맡을 것을 은근히 권유하는 시다. 송흠은 조선의 '소학(小學)' 권위자 김굉필, '표해록(漂海錄)'의 주인공 최부, 박상,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주기론자(主氣論者) 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과 함께 조선시대 전기 호남 사림의 5대 사문(師門)을 이룬 인물이다. 그는 1543년 종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경연지사(經筵知事)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관수정을 짓고 제자 양성에 힘썼다. 송순은 송흠의 조카뻘이자 제자였으며, 학포(學圃) 양팽손(梁彭遜, 1488~1545)도 그의 문하였다.
1547년(명종 2) 임억령의 동생 구령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재직하고 있었다. 광주를 찾은 임억령은 광주동헌(光州東軒)과 경희루(慶喜樓)에 올라 각각 시 한 수씩을 남겼다. 4월 그는 스승 박상의 문집인 '눌재유집(訥齋遺集)'을 간행하였다. 박상의 아우 박우는 서문에서 임억령에 대해 '옛것을 좋아하고, 엄박 우아한 분으로 유명한 사람의 글은 잃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이 문집을 좋아했다.'고 쓰고 있다. 9월 28일 스승 박우의 부음을 들은 임억령은 나주 상가(喪家)로 달려가 조문하였다.
1548년(명종 3) 53세의 임억령은 해남에서 창평과 강진을 오가며 두루 산천경개(山川景槪)를 유람했다. 이 무렵 그는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을 한시 9수로 번사(翻詞)하였다. '소상팔경'은 '청련집(靑蓮集)'에만 이후백의 작품으로 되어 있고, 다른 시조집에는 무명씨로 되어 있다. 또, 작자가 조헌(趙憲)이라고 밝혀져 있는 것도 있어서 '소상팔경'이 이후백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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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5 - 장편 영웅서사시 '송대장군가'를 짓다 (0) | 2017.12.04 |
[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3 - 노모 봉양을 위해 동복현감을 자청하다 (0) | 2017.11.27 |
[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2 - 벼슬길에 나아가다 (0) | 2017.11.25 |
[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1 - 전라도 해남현 석천동에서 태어나다 (0) | 2017.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