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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6 - 양응정과 시전을 벌이다

林 山 2017. 12. 5. 17:11

1550년(명종 5)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 금강산 아래 서당골 문암재(文庵齋)에 머물던 55세의 임억령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양응정이 그리웠던 임억령은 그를 부르는 시 '초공섭(招公燮)'을 지어 보냈다.


초공섭(招公燮) - 공섭을 부르다


自吾觀海山(자오관해산) 내가 바다와 산을 보면서부터

胸中與之壯(흉중여지장) 가슴이 그와 더불어 장쾌했네

身今脫馽羈(신금탈칩기) 몸이 이제야 굴레를 벗었으니

天馬益奔放(천마익분방) 천마가 더욱 자유 분방해졌네

人皆弔失官(인개조실관) 사람들은 벼슬 잃음 위로하고

笑指雲來往(소지운래왕) 구름 같이 오간다 비웃는다지

庭樹入秋風(정수입추풍) 뜰의 나무엔 가을바람 드는데

江湖歸意王(강호귀의왕) 강호로 돌아갈 마음 가득하네

長當從此辭(장당종차사) 영원히 이로부터 떠날 것인데

君胡不我訪(군호불아방) 그대는 어찌 찾아오지 않는고


강호에 머물며 세속의 굴레를 이제야 벗고 천마처럼 자유롭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벼슬을 잃고 뜬구름처럼 떠돈다고 비웃으며 손가락질한다. 나는 속세를 영원히 떠나려고 하는데, 그대는 어찌 나를 찾아오지 않는가? 임억령의 호방한 시풍이 이 시에서도 느껴진다. '공섭(公燮)'은 양응정의 자다. 


광주광역시 박호동 어등산 기슭에 자리잡은 박산마을 제주 양씨 집성촌


부름을 받자마자 양응정은 한겨울 눈길을 무릅쓰고 나주 박산(博山,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을 떠나 길을 나섰다. 그는 임억령을 만나러 당성(堂城, 해남) 땅을 향해 가면서 시를 지어 읊었다. 


함박눈을 무릅쓰고 망아지에 올라, 멀리 장엄한 산천을 바라보노라

생각컨대 선생은 금화백의를 입고, 향로엔 한가닥 연기 피어오르리


망아지에 탄 채 향로를 피워 놓고 기다릴 임억령을 생각하면서 읊은 시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임억령을 만나러 해남으로 가는 양응정의 모습이 그려진다. 문병 왔던 양응정이 해남에서 상당 기간 머물면서 임억령과 주고받았던 '당성수창시(棠城酬唱詩)'는 한국 고전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시전(詩戰)으로 알려져 있다. 


 차석천운(次石川韻) - 석천의 시에서 차운하다(양응정)


小閣前臨萬嶽低(소각전림만악저) 작은 누각이 앞에 있어 온산들이 낮은데

海天雲景盡籠携(해천운경진롱휴) 바다와 하늘의 구름 경치 모두를 감쌌네

先生詩法通神用(선생시법통신용) 선생의 시짓는 법은 마치 신처럼 통하여

敢放金鷄抗木鷄(감방금계항목계) 과감히 금닭 풀어 놓아 나무닭 저지하네


임억령이 은퇴하여 살고 있는 해남의 풍경을 묘사한 뒤 그의 시재를 신에 비유해서 극찬한 시다. 마지막 구에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자신의 재주(나무닭)를 이기려는 임억령의 기교(금닭)를 은근하게 비꼬는 뜻이 담겨 있다. 겸양과 풍자의 표현으로 노대가 임억령을 들었다 놨다 하는 젊은 양응정의 기개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양응정은 또 '증석천(呈石川)'이란 시도 지었다. 


증석천(呈石川) - 석천께 드리다(양응정)


十年憔悴未揚眉(십년초췌미양미) 십 년 간을 시달려 웃을 날 없더니

奬激誰期得若斯(장격수기득약사) 이 좋은 일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燈下玉觴春盎盎(등하옥상춘앙앙) 등 밑 옥 술잔에 술 흘러 넘치는데

聽詩直到唱鷄時(청시직도창계시) 시 얘기 듣다 보니 새벽 닭이 우네


양응정이 생원시에서 장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0년이 되도록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이제 임억령의 가르침을 받음에 만족해 하는 시다. 양응정은 이 일이 있은 1년 뒤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임억령과 양응정이 만났을 때의 일화가 귤옥(橘屋) 윤광계(尹光啓, 1559~1619)가 쓴 '석천집(石川集)' 서문에 있다. 서문에 '정사문(鄭斯文) 언식(彦湜)이 선생 문하에서 모시고 오래라 그때의 일을 자세히 말했다. 양송천(梁松川)이 급제하기 전에 선생과 재주를 견주어 볼 생각으로 황산곡(黃山谷, 소동파의 수제자 황정견)의 시 천 편을 외우고 와서 선생을 뵈었다. 선생은 웃으시며 대접하고, 고기가(古器歌) 일편을 지어주셨다. 지금도 그 시를 읽어보면 고기(古器)는 찢고 주물러서 고상하고 호사한 기상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무를 금치 못하게 한다. 송천이 촛불을 돋구어 밤새 읊조려서 화운(和韻) 한 수를 지어 올렸더니 선생은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만일 대수가(大樹歌)를 지어 주었더라면 이 운이 아니더라도 좋지 않았겠나?" 하셨다. 송천이 탄복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무릇 송천도 일세의 시호(詩豪)였으나 선생은 한층 더 나아갔으니 거룩하지 않으리오. 앞에서 말한 고기는 솥(鼎)을 말함이고, 정(鼎) 자는 송천의 이름자였였는데, 선생이 노래로 읊어주었고, 대수(大樹)는 석천 선생의 자다. 지금도 그 의사를 추상해 보면 사람들의 천만층 위에 초탈하셨다 하겠다.' 하였다. 천하의 시호 양응정도 임억령에게는 못 미쳤다는 것이다.  


윤광계는 '석천집' 서문에서 임억령에 대해 '근래에 시로써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시격이 분방웅양(奔放雄洋)하여 장강대하(長江大河)처럼 주야를 도도히 흘러도 다하지 않은 분은 오직 석천 선생 한 분뿐이다.’(近以詩鳴者不一 而至於奔放雄洋 如長江大河 日夜滔滔而不渴 則唯吾石川先生一人而已)라고 평했다. 윤광계는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낸 윤행(尹行)의 손자로 조헌(趙憲)의 문인이다. 윤광계도 시를 잘 지었으며, 정련(精鍊)되고 율조(律調)가 청아한 시격으로 이름이 높았다. 


윤광계는 공조좌랑(工曹佐郞)까지 올랐지만 조헌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시파(時派)의 배척을 받아 광해군(光海君) 때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해남으로 낙향하여 후학들에게 시문을 전수하였다. 조헌은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 당시 7백여 명의 의병군을 이끌고 그 10배도 넘는 왜적과 맞서 싸운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노론(老論)의 정신적 지주가 된 인물이다. 영조(英祖) 때 장헌세자(莊獻世子, 思悼世子)의 죽음을 놓고 노론과 소론(少論),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붕당은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로 분열되어 대립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데, 장헌세자의 근실하지 못함을 비판하고 영조의 조처를 지지한 노론 강경파는 벽파가 되었고, 영조의 덕이 없음을 비난하고 장헌세자를 동정한 사람들은 시파가 되었다. 시파에는 당시 불우했던 남인과 소론이 많았으며, 노론 일부도 가담하였다.   


청천당(聽天堂)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수필집 '견한잡록(遣閑雜錄)'에는 임억령의 시재(詩才)에 대해 '근래 석천 임억령이란 자가 있는데, 시에 능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 어떤 사람이 술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며 감(甘) 자 운을 부르니, 임억령이 즉시 응하기를, "늙어서야 비로소 이 맛 단 줄 알았네(老去方知此味甘)"라고 하였다. 또 삼(三) 자 운을 부르니, 응하기를, "한 잔 술에도 도통하니 석 잔을 마시지 않으랴(一杯通道不須三)" 하였다. 또 남(男) 자 운을 부르니, 곧 응하기를, "그대는 혜강(嵇康, 동진 때 죽림칠현)과 완적(阮籍, 죽림칠현)이 유계(한고조)를 조롱한 것을 아는가?(君看嵇阮陶劉季) 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不羨公侯伯子男)"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작품이다.'(近有石川林公億齡 以能詩名 有人請賦酒詩 呼甘字韵 林卽應聲曰 老去方知此味甘 又呼三字 應聲曰 一盃通道不須三 又呼男字 應聲曰 君看嵇阮陶劉季 不羨公侯伯子男 眞奇作也)라고 그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도 '행적기략(行蹟紀略)'에서 임억령에 대해 '문장은 드넓고 자유분방하였는데, 시에 더욱 뛰어나 붓을 잡으면 곧장 일필휘지로 써 내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전하며 읊었다.'(爲文章 宏放俊逸 尤長於詩 揮灑立就 一時人爭傳訟)라고 평했다. 바로 '초공섭' 같은 시를 두고 말한 것이다.     


임억령의 시 중 가장 긴 장편시인 '고기가(古器歌)'는 우의적(寓意的) 기법을 통하여 유학자로서의 현실 비판 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시다. '고기가'는 솥(鼎)이 생겨난 유래와 용도, 조선에 오게 된 내력, 솥의 위엄과 크기 등에 이어 솥의 불행한 처지를 설명하면서 그 솥에다 양응정(梁應鼎)을 비유하고 있다. '고기'의 '정(鼎)'과 '양응정'의 마지막 글자인 '정(鼎)' 자가 같은 점에 착안한 것이다. 전반부에서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가 나타났지만 쓰이지 못하고 현실의 모순과 불합리가 더욱 심해져 극한상황에 이르렀음을 암시하면서 후반부에 이르면 애민사상에 바탕을 둔 현실에 대한 개혁 의지가 드러난다.  


양응정은 5세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문인화가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 사림파의 거두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 1497~1579)호남 유학(儒學)의 사종(師宗) 김인후, 당대 최고의 유학자 기대승 등이 '원대한 그릇이요, 경세제민할 재인'으로 칭찬할 정도였다. 양응정은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서 장원한 이후 사화로 인해 수많은 청류(淸流)들이 죽음을 당하는 참담한 현실을 보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한편 사화와 관련된 선비로서 주위에 결점이 없는 사람이 없게 되자 학문하는 사람으로 자처하지 않고 잘못된 세상을 조롱하고 비웃는 방랑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인물이다. 학문과 문명으로 어려서부터 세인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던 그가 생원시에서 장원한 이후 13년이나 지나서야 문과에 급제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광주광역시 박호동 박산마을 임류정


양응정은 급제를 한 이후에도 세 번이나 파직을 당했다가 복직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대사성을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나주 박산(博山,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의 조양대(朝陽臺)애 머물면서 임류정(臨流亭)을 짓고 강학하며 후학을 길렀다. 그의 문하에서 조선의 3대 시인 정철, 조선의 삼당시인(三唐詩人) 백광훈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 최경창, 조일전쟁 4대 의병장 중 한 사람인 삼계(三溪) 최경회(崔慶會, 1532~1593) 같은 호남의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동짓날이 되자 양응정은 임억령을 위해 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뛰어난 스승을 오랫동안 모시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는 시였다. 


얼마 전까지는 백옥당에 계시더니, 산림에 물러와서는 시문에 종사하시네

문장은 한나라 문사들을 누르시고, 시가는 당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셨네

손님들 자리에서는 취미를 말하고, 책상머리에서는 기이한 재주를 펴시네

오랫동안 스승으로 모시고 싶으니, 천지는 한밤중이라 일양이 시동하리라


임억령이 해남에 내려온 것은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동생 백령 때문이었다. 그래서 몸은 비록 강호에 있었지만 중앙 정계에 대한 미련을 다 버리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마저 초로에 접어들면서 그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추촌잡제(秋村雜題)'에 담아 읊었다. 


秋村雜題(추촌잡제)-가을 마을에서 이것저것 읊다


志與江湖遠(지여강호원) 마음은 아직도 강호와 먼데

形隨草木衰(형수초목쇠) 몸은 초목처럼 시들어 가네

美人歎已暮(미인탄이모) 미인은 늙은 것을 한탄하고

楚客自生悲(초객자생비) 나그넨 자기 운명 슬퍼하네

密綱江魚駭(밀망강어해) 물고기는 잔 그물에 놀라고

機心海鳥疑(기심해조의) 바다 새는 속일까 의심하네

非無流水曲(비무유수곡) 부르는 노래 없지는 않지만

何處遇鐘期(하처우종기) 어디서 알아주는 이 만날까


'여(與)'는 문집에 '흥(興)'으로 되어 있다. '초객(楚客)'은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에게 버림을 받고 객지를 유랑하다가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진 굴원(屈原)을 말한다. 여기서는 시인 자신을 가리킨다. '밀망(密網)'은 눈이 촘촘한 그물, '기심(機心)'은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마음, 책략을 꾸미는 마음이다. '유수곡(流水曲)'은 원래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이다. 춘추(春秋) 시대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탔고, 종자기(鍾子期)는 거문고 곡조를 잘 알았다. 백아가 뜻을 태산(太山)에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는 '아, 훌륭하다. 거문고 소리여! 높고 높아 태산과 같구나.'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백아가 뜻을 흐르는 물(流水)에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는 '아, 훌륭하다 거문고 소리여! 넓고 넓어 흐르는 물과 같구나.'라고 하였다.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종기(鍾期)'는 종자기를 가리킨다.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죽산리 화동마을 장춘정


1551년(명종 6) 56세의 임억령은 나주(羅州) 영산강변의 장춘정(藏春亭)에 들러 누정시 한 수를 남겼다. 겨울에도 숲이 시들지 않고 사시사철 꽃이 피어 항상 봄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을 가진 장춘정이다.


임억령의 오언절구 편액


西湖勝絶地(서호승절지) 서호에 멋진 절승지 있어

花木一軒染(화목일헌염) 한 정자 꽃나무에 물드네

若未乘再訪(약미승재방) 생전에 이곳 다시 못오면

何妨化蝶尋(하방화접심) 죽어 나비로 꼭 찾아오리


장춘정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왔기에 살아 생전에 다시 못 오면 죽어서 나비가 되어서라도 꼭 찾아오리라고 했을까? 정자가 꽃나무에 물든다는 표현이 얼마나 멋진가! 시인이 대단한 낭만가객(浪漫歌客)임을 알 수 있다. 


장춘정은 장춘(藏春) 유충정(柳忠貞, 1509~1574)이 나주시(羅州市) 다시면(多侍面) 죽산리(竹山里) 화정마을의 영산강변에 세운 누정이다. 장춘정에는 임억령의 오언절구 외에도 기대승의 정기(亭記)와 박순, 송순, 임복(林復), 박개(朴漑), 임제, 양응정 등 쟁쟁한 시인들의 한시 편액이 걸려 있다. 안내판에는 장춘정의 건립 연대가 1561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임억령이 1551년에 장춘정을 방문해서 누정시를 남겼다는 연보와 맞지 않는다. 임억령의 연보가 맞다면 장춘정은 1551년 이전에 세워졌다고 봐야 한다.  


이 무렵 우이정(偶爾亭)이 불에 타면서 걸려 있던 임억령의 한시 판액이 물속으로 떨어졌다. 이때 물이 역류하는 현상이 일어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6월 임억령은 오위(五衛)에 두었던 정사품(正四品) 서반 무관직인 호군(護軍)을 제수받고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정읍현(井邑)과 금구현(金溝縣,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동헌에 들러 시 한 수씩을 남겼다. 정읍에서는 동헌에 걸려 있는 시에서 운자를 빌어 칠언절구 '차정읍동헌운(次井邑東軒韻)'을 지었다. 이 시는 장지연(張志淵)이 편찬한 역대 한시선집(漢詩選集)인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실려 있다.    


차정읍동헌운(次井邑東軒韻) -정읍 동헌의 시에서 차운하다


護軍雖散亦王官(호군수산역왕관) 호군이 한가한 관직이나 또한 왕이 내린 벼슬

內賜豳風再拜看(내사빈풍재배간) 빈풍을 내려주시니 두 번 절하고 들여다 보네

白髮老臣心耿耿(백발노신심경경) 흰 머리 신하 늙었지만 정신 되레 또렷하나니

隔墻隣女夜舂寒(격장인녀야용한) 담 너머 이웃 여인의 밤 절구소리 쓸쓸하구나


관직에 임명하고 귀한 서적까지 하사한 임금의 은총에 감사하는 시다. 담 너머 이웃 여인의 밤 절구소리가 쓸쓸하게 들리는 것은 나그네의 향수가 투사된 것일 수도 있다. 


이 시에는 '自註。副護軍林某。雖病伏草間。朝廷連付西班。乃六月。內賜異端辨正豳風七月篇。政院之傳。適到此邑。君寵至此。故云爾'라는 주가 달려 있다. 호군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오위(五衛)의 실직(實職)이었으나 후기에 와서는 문무관이나 음직(蔭職)에서 임명하여 녹봉만 지급하고 실제의 직무가 없는 산직(散職)으로 변하였다명종은 임억령을 호군 벼슬에 임명하면서 '이단변정(端辨正)'과 '빈풍칠월편(豳風七月篇)'이란 서적도 하사했음을 알 수 있다. '빈풍(豳風)'은 '시경(詩經)'의 편명이다. '빈풍(豳風)' <칠월편(七月篇)>은 주(周)나라 농민들이 농사와 길쌈에 종사하는 생활을 읊은 일종의 월령가(月令歌)다. 이 시가는 주공(周公)이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위하여 백성들의 농사짓는 어려움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이단변정(異端辨正)'은 중국 명(明)나라 세종(世宗) 초기 사람인 첨릉(詹陵)이 지은 책으로, 유학(儒學)을 비판한 학설들을 공박한 저술이다. 첨릉은 당송(唐宋) 시대 배불론(排佛論)을 총정리하고, 불교와 도교(道敎)를 비판하고 배척하면서 적극적으로 유학을 옹호했다. '이단변정'은 명종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신영(申瑛)이 명나라에 사행(使行)을 다녀오면서 구입해 가지고 왔다.  


7월에는 내전에서 '빈풍칠월편'을 내려 읽은 뒤 연제하도록 승정원에 명을 내렸다. 승정원에서는 그 명을 받들어 '세병연계축(洗兵宴契軸)'을 만들었다. 이 무렵 임억령은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인재(忍齋) 홍섬(洪暹, 1504∼1585)을 위해 시를 지어 그를 위로하였다. 


저 하늘가에는 기러기 구슬피 울고

나그네가 되어 다시 강남으로 가네

나이가 듦에 걸어 다니기 근심이고

늙은 말은 산에 매여서 곤란하구나

나라를 위한 붉은 마음 깨끗하지만

죽은 동생 생각하니 눈물 아롱지네

깊은 밤 고향달은 멀리 아스라하니

누가 이 늙은이를 즐겨 붙잡아줄까


그해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이 세상을 떠났다. 임억령은 만사를 지어 조문하였다. 두 차례나 장원급제를 하여 문명을 떨친 나세찬은 권신 김안로(金安老)를 서슴지 않고 탄핵하고,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 등 권신에게 맞서는 기개가 있었다. 


1552년(명종 7) 57세의 임억령은 소렴당(泝濂堂)과 관물당(觀物堂)을 찾아 시 한 수씩을 남겼다. 소렴당은 금구현 응향각(凝香閣) 서쪽에 있던 객관이다. 관물당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교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학자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이 학문을 강론하던 정자인지 알 수 없다. 이 무렵 아들 임달(林澾)이 태어났다.


2월 29일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기(李芑)를 탄핵했고, 전라도 관찰사 박수량(朴守良)은 광주목사 임구령의 파직을 청했다. 임구령이 이기의 사반인(私伴人, 사적 수하)을 조사할 때 사사로이 비호헸다는 이유였다. 광주목사에서 파직되어 전라도 영암에 정착한 임구령은 구림(鳩林) 대동계(大同契)를 창설했고, 지남제(指南堤, 모정저수지) 간척을 주도했다. 그의 사위가 홍랑(洪娘)과의 슬픈 사랑으로 유명한 최경창이다.  


조정에서는 문정왕후의 수렴첨정이 끝나고 명종의 친정 체제로 들어갔다. 7월 18일 낙향한 지 7년만에 임억령은 다시 부름을 받고 출사하여 정3품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 그 직전 이황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제수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옴으로써 두 사람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이황은 도학, 임억령은 문학에 심취해서 가는 길은 비록 달랐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교유시가 '석천집(石川集)'에 5편 10수, '퇴계집(退溪集)'에 10편 22수가 실려 있어 두 사람 사이의 교분을 짐작할 수 있다. 


9월 12일 임억령은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임명되었다. 조정에 있으면서 임억령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등 당대의 대학자들과 교류하였으며, 정사룡(鄭士龍), 신광한(申光漢), 노수신(盧守愼), 정유길(鄭惟吉) 등 명사들과도 두루 교유하였다. 사림파 인사들과도 친밀하게 사겼는데, 특히 성수침과는 남다른 교분이 있었고, 영남의 처사 조식과도 시로써 교유하였다. 


임억령이 칠언절구 '화산폭포도(華山瀑布圖)'를 지은 때도 아마 이 무렵이 아닌가 한다. 누가 '화산폭포도'를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화산폭포도(華山瀑布圖) - 화산폭포 그림을 보고 읊다


急雨暮崖掛白龍(급우모애괘백룡) 소나기 내린 저물녘 벼랑에는 백룡이 걸려 있고

詞人健筆氣成虹(사인건필기성홍) 시인의 힘찬 필력 무지개 이루고도 남을 기세네

侯家屛障應無比(후가병장응무비) 고관의 집 병풍에도 비교할 작품 결코 없으리니

我是人間富貴翁(아시인간부귀옹) 내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부귀한 늙은이로다


'백룡(白龍)'은 장쾌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비유한 말이다. 고관대작들의 집에도 없는 '화산폭포도'를 가지고 있으니 마음만큼은 최고의 부자라는 자긍심이 담겨 있는 시다. 


'화산폭포도'는 중국의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인 화산의 폭포를 그린 것일까, 아니면 한양 삼각산(三角山)의 별칭인 화산의 폭포를 그린 것일까?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삼각산의 폭포일 가능성이 크다. 삼각산은 예로부터 연화산(蓮華山), 화산, 화악(岳), 부아악(負兒岳), 부르칸모르 등으로 불렸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이후에는 북한산(北漢山)으로 불리고 있다. 


이 무렵 임억령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시우인(示友人)'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석천시집'에는 이 시의 제목이 '시자방(示子芳)'으로 되어 있다. 자방은 이란(李蘭)의 자다. 


시우인(示友人) - 벗에게 보이다


古寺門前又送春(고사문전우송춘) 옛절 문앞에서 봄이 또 떠나는데

殘花隨雨點衣頻(잔화수우점의빈) 빗물에 젖은 꽃잎 옷에 달라붙네

歸來滿袖淸香在(귀래만수청향재) 소매에 청향 물씬 남아 돌아오매

無數山蜂遠趁人(무수산봉원진인) 수많은 벌들 저 멀리서 따라오네


옛절에서 가는 봄에 대한 아쉬운 감회를 적어 친구에게 보인 시다. 꽃 속에서 노닐다가 돌아오는데, 소매에 향기가 남아 있어, 수많은 벌이 쫓아온다는 표현이 참으로 낭만적이고 멋지다. 산벌들이 따라온다는 표현으로 산사의 운치와 꽃잎의 향기가 자신의 몸에 오랫동안 배어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도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서 이런 운치를 높이 사서 '당인(唐人)의 풍격(風格)이 있다.’고 평했다. 자연과 하나가 된 몰아일체의 경지를 재치있게 묘사함으로써 의 정취를 운치있게 담아낸 점을 높이 평가한 듯하다. 이 시는 '석천집'과 허균(許筠)의 '국조시산(國朝詩刪)' 권3, 남용익(南龍翼)의 '기아(箕雅)' 권3 등에 수록되어 있다.


그해 17살의 정철은 김윤제의 주선으로 그의 외손녀이자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강항(柳强項)의 외동딸과 결혼하고 창평의 성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 해 송순은 담양부사 오겸(吳謙)의 도움을 받아 면앙정을 중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