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3년(명종 8) 10월 7일 조정에서는 영의정 심연원(沈連源), 좌의정 상진(尙震), 우의정 윤개(尹漑), 좌찬성 윤원형 등이 올린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법을 고쳐서 서얼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하자는 안을 놓고 회의가 열렸다. 태종(太宗) 대부터 시행되어 오던 악법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일찌기 조광조도 서얼금고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이이도 이에 동조했다.
'경국대전' 예전(禮典) 제과조(諸科條)의 '서얼 자손은 문무과(文武科) 생원 진사시(生員進士試)에 응시할 수 없다.'는 조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이들은 '서얼은 대부분 창녀(娼女)나 비자(婢子)의 소생이기 때문에 사류(士類)에 낄 수 없다.'고 한 것은 인정하지만 '사대부로서 아내가 죽은 뒤 다시 예를 갖추어 장가를 들지 않았거나 혹은 아내가 살아 있으나 아들이 없어서 양가(良家)의 처녀를 구해 첩으로 삼았을 경우, 이들의 소생은 창녀나 비자의 소생과는 비교할 수 없다.'면서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박잡함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고 해서 등용하지 않는다면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왕자(王者)가 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양가의 여자나 사대부의 서녀를 취하여 첩을 삼은 자에게서 난 자손과 천첩의 자식으로 속신(贖身)하여 양민이 되어 양가의 여자를 취하여 아내로 삼은 자에게서 태어난 자손은 문무 양과와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여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하되 청직(淸職)이나 현직(顯職), 중직(重職)은 주지 말고, 과거를 거쳐 출신(出身)한 자가 아니면 동서반(東西班)의 정직(正職)을 주지 말도록 해야 한다.'면서 '한족(寒族)으로서 금고된 자는 비록 미천하더라도 두드러진 하자가 없다면 또한 이 예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의론을 폈다. 이른바 서얼허통법(庶孼許通法)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다.
악법 서얼금고법 개정안인 서얼허통법에 대해 호군 임억령을 비롯해서 예조 판서 정사룡(鄭士龍), 병조 판서 이준경(李浚慶), 공조 판서 이명규(李名珪), 지중추부사 박수량(朴守良), 호조 참판 권찬(權纘), 이조 참판 심통원(沈通源), 형조 참판 채세영(蔡世英), 공조 참판 김익수(金益壽), 동지중추부사 민응서(閔應瑞), 이조 참의 민기(閔箕), 병조 참지 권철(權轍) 등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이들은 재주와 능력은 뛰어나지만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어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서얼 출신에게도 인재 등용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543년(중종38) 잡과에 한해 2품 이상 관원의 첩에서 난 증현손(曾玄孫)의 응시가 허용되었지만, 이 조치로 서얼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우찬성 신광한(申光漢), 판돈녕부사 김광준(金光準), 이조 판서 안현(安玹) 등은 '경국대전의 법을 따라 예전처럼 서얼에게 과거 시험을 보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서얼허통법에 대해 반대했다. 이들은 '적서의 구분을 세워 존비의 등급을 엄중히 하고, 개가금지법(改嫁禁止法)을 만들어 부녀의 도리를 바로잡게 한 것 외에도 중국과 다른 점을 모두 들어 일일이 말할 수 없다.'면서 '법이란 풍속에 따라서 세워지는 것으로서 국속(國俗)이 이미 안정되어 상하가 모두 오랫동안 편안하게 여겨온 것을 고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서얼 자손에게는 문무과 생원 진사시의 응시를 허락하지 않고, 서용할 때에도 또한 한품(限品)을 둔 것이 법전에 실려 있다.'면서 '옛법을 경솔하게 고쳐 서얼 자손을 과거에 응시케 하면 명분이 문란해져서 서얼이 적자를 능멸하거나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해치는 풍조가 생길 수 있다.'고 염려했다.
유교 근본주의 입장에서 좌참찬 임권(任權), 우참찬 신영(申瑛), 호조 판서 조사수(趙士秀), 지중추부사 이미(李薇), 장언량(張彦良), 형조 판서 이명(李蓂), 한성부 판윤 심광언(沈光彦), 병조 참판 정응두(丁應斗), 예조 참판 원계검(元繼儉), 한성부 좌윤 김명윤(金明胤), 동지중추부사 주세붕(周世鵬), 윤담(尹倓), 이몽린(李夢麟), 방호지(方好智), 한성부 우윤 이광식(李光軾), 병조 참의 이세장(李世璋), 형조 참의 이윤경(李潤慶), 공조 참의 김홍윤(金弘胤), 대사성 임열(任說), 예조 참의 원혼(元混), 첨지중추부사 경혼(慶渾), 상호군 박공량(朴公亮), 판결사 허백기(許伯琦), 호조 참의 안위(安瑋), 홍문관 부제학 이탁(李鐸), 직제학 박영준(朴永俊), 전한 이영현(李英賢), 응교 이사필(李士弼), 부응교 심전(沈銓), 교리 이감(李勘), 부교리 신여종(申汝悰), 수찬 윤의중(尹毅中), 부수찬 정척(鄭쾩), 정자 김계휘(金繼輝), 박계현(朴啓賢) 등은 서얼허통법을 반대했다. 유교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은 어쩌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탈레반과도 일맥상통한 면이 있었다.
서얼금고법과 서얼허통법 사이에서 상호군 이황은 중도론을 폈다. 이황은 '사람을 쓰는 법은 그 재덕의 우열을 볼 뿐이지, 신분이 어떠한가는 따지지 않았다. 예로부터 뛰어난 사람들 중에는 서천(庶賤)으로부터 출세하여 공을 세우고 나라를 도운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만은 서얼들을 벼슬길에 허통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그간에 비록 재기가 출중한 자가 있더라도 하류에 묻힌 채 살다가 죽었으니, 이는 옛날의 인재를 뽑음에 귀천을 논하지 않는다는 뜻에 어긋난다.'면서도 '이 법을 개정하는 데는 두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 첫째는 국속(國俗)을 갑자기 변경할 수 없고, 둘째는 대방(大防)을 갑자기 허물 수 없다.'면서 '인물이 있을 경우, 대신 및 해조(該曹)에서 그때그때 의논하여 결재를 받아 시행한다면 대방(大防)을 무너뜨리지 않고도 인재를 뽑음에 귀천은 따지지 않는다는 의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절충론의 입장에 섰다.
명종은 '서얼도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하라!'면서 '양첩의 아들로서 양처를 취했을 경우에는 손자에 이르러서 허통한다. 천첩의 아들로 양처를 취했을 경우에는 증손자에 이르러 허통한다. 높은 관직은 주지 말아 적자를 깔보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단서조항을 달아 '서얼은 과거 시험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이 비록 조선의 법이지만, 국가가 인재를 아끼는 뜻에서 볼 때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 예조에서 상세한 조항을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서얼허통법으로 서얼들도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서얼이라는 꼬리표는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이언적(李彦迪)이 강계 적소에서 '서얼에게 과거 시험을 볼 수 있게 허용한 제도는 인재를 널리 쓰려는 방법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마는, 높은 자리에 있는 신하가 사사로운 뜻을 품고 이를 행하려 하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사사로운 뜻을 품은 신하는 바로 윤원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사관들도 '조정 신하들 대부분이 반대했으나 음흉한 정사룡, 간사한 권찬, 허황된 심통원, 나약한 채세영 등이 협조하여 그 논의를 통과시켰다. 이 논의를 주관하여 충동질한 자는 윤원형, 여기에 빌붙어서 창의한 자는 윤춘년이다. 심연원 등은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대의로써 만세의 강상을 부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윤원형에게 제압을 당하여 구구하게 그 논의에 찬동하였으니 장차 저런 재상을 어디다 쓰겠는가!'라고 쓰면서 서얼허통법을 반대했다. 조선시대 왕조실록을 쓰는 사관들도 유교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첩을 두는 양반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서얼의 수 역시 크게 늘어났다. 영조, 정조 때에는 서얼의 수가 전체 양반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따라서 서얼을 차별하는 금고법은 조선 최고의 악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윤원형이 첩 정난정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얼허통법은 당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진보 개혁적인 법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임억령은 시대적 사명에 부응하여 서얼허통법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얼허통법은 결국 번복되어 서얼들은 과거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10월 21일 임억령은 외직인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 이때 강원도 감영으로 이이가 찾아왔다.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도 이이를 따라와 임억령에게 사사를 받았다. 이이는 임억령의 시에서 차운하여 '차석천견기운(次石川見寄韻)'이란 시를 지었다. 그는 임억령의 인물됨에 탄복하여 '평생 꿇지 않았던 무릎을 오늘 그대 앞에서 꿇는다.‘고 하면서 극진한 추앙의 마음을 표했다.
차석천견기운(次石川見寄韻) - 석천이 주신 시에서 차운하다(이이)
石川古遺士(석천고유사) 석천 선생님은 옛 은사이시니
風雨生揮筆(풍우생휘필) 붓 휘두르면 풍우 일어나고요
俊逸與淸新(준일여청신) 뛰어난 재지 맑고도 깨끗함은
公今合爲一(공금합위일) 바로 지금 공에게 해당합니다
興來百紙盡(흥래백지진) 흥 나면 종이 백 장 써 치우고
倏忽成卷帙(숙홀성권질) 잠깐새 시는 거질을 이루지요
小子才可愧(서자재가괴) 소자의 재주 부끄럽기만 하여
不能窺堂室(불능규당실) 방과 대청 엿보지도 못하네요
一席得親炙(일석득친자) 한 자리에서 가르침을 받으니
何幸同時出(하행동시출) 같은 시대 태어나 다행이지요
生平不屈膝(생평불굴슬) 평생 무릎 꿇어보지 않았지만
今日爲公屈(금일위공굴) 오늘에야 영공 앞에 굽힙니다
'청신(淸新), 준일(俊逸)'은 중국 당나라 최고의 시인 이백(李白)을 이르는 말이다. 두보(杜甫)는 이백의 시에 대하여 '표연(飄然), 청신(淸新), 준일(俊逸)하다.'고 평했다. 임억령의 시재에 감복한 이이가 그를 시선(詩仙) 이백과 동렬에 놓고 극찬을 한 것이다. '친자(親炙)'는 스승이나 존경하는 분의 가까이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음을 뜻한다.
최립은 시문에 능하여 명나라 학자들도 격찬할 만큼 대중국 외교문서 작성의 1인자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등과 함께 선조대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렸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문장과 차천로(車天輅)의 시, 한호(韓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1554년(명종 9) 정월부터 59세의 임억령은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금강산 등 관동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정월에는 수종사(水鐘寺), 오정(梧亭)에 다녀온 뒤 시를 지었고, 2월에는 강릉의 청허루(淸虛樓), 종각루(鐘閣樓), 사새진(沙塞津),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해학정(海鶴亭), 삼척의 죽서루(竹西樓)에 오른 뒤 누정시를 남겼다.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 상권에는 임억령이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기 전 꿈에 시 한 연구(聯句)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風飄枯葉江干墮(풍표고엽강간타) 바람이 불어와 마른 잎 강 언덕에 지고
雲抱遙岑海上生(운포요잠해상생) 구름은 먼 산 안고 바다 위에 일어나네
권응인은 '그후 그가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관동팔경(關東八景) 중 제6경인 삼척의 죽서루에 올라보니, 보이는 것이 과연 이전의 꿈과 맞았다. 사람의 일이란 미리 정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임억령이 죽서루에 올라 읊은 시가 '등죽서루(登竹西樓)'다.
등죽서루(登竹西樓) -죽서루에 올라
江觸春樓走(강촉춘루주) 강물은 봄 누각을 부딪히면서 달려가고
天和雪嶺圍(천화설령위) 하늘은 눈덮힌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네
雲從詩筆湧(운종시필용) 구름은 시쓰는 붓을 따라서 솟아오르고
鳥拂酒筵飛(조불주연비) 새는 술자리를 스치듯 아슬히 날아가네
浮雲如今是(부운여금시) 기분이 구름처럼 떠오르는 지금은 옳고
趨名悟昨非(추명오작비) 명리 뒤쫓던 지난날의 그릇됨 깨달았네
松風當夕起(송풍당석기) 저녁때가 되어 소나무에 바람 일어나니
蕭颯動荷衣(소삽동하의) 서늘하게 은자의 옷자락을 날려 올리네
죽서루에 올라 주변의 산들과 오십천(五十川)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구름이 일어나듯 마구 솟아오르는 흥취를 읊은 시다. 이 시에서도 벼슬살이보다는 시인으로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심정이 드러나 있다. 눈을 이고 있는 두타산(頭陀山, 1,353m)의 웅장한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두타산은 죽서루에서 보이지 않는다.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이 시에 대해 '웅장하고 거침없다.(雄放)', '질탕함이 가히 볼만하다.(跌宕可見)', '음절이 아주 잘 들어맞고 신기가 호탕하게 오른다.(音節諧捷 神氣豪上)'고 평했다.
삼척 죽서루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죽서루는 서쪽으로 흐르는 오십천을 내려다보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죽서루는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했고, 1403년(태종 3) 삼척부사 김효손(金孝孫)이 중창했다. 누각의 '第一溪亭(제일계정)' 편액은 조선 현종 3년(1662년)에 삼척부사 허목(許穆),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와 '竹西樓(죽서루)' 편액은 숙종 41년(1715년)에 삼척부사 이성조(李聖肇)가 글씨를 쓴 것이다. '海仙遊戱之所(해선유희지소)' 현판은 조선 헌종 3년(1837년)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의 글씨다.
3월에는 강릉의 경호(鏡湖, 경포대),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이화정(梨花亭), 비선정(秘仙亭),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사선정(四仙亭), 춘천의 모진정(母津亭), 소양정(昭陽亭), 봉의루(鳳儀樓), 수월정(水月亭)을 유람하고 기행시를 지었다.
관동팔경 가운데 제3경인 양양의 낙산사 의상대(義湘臺)에서 동해 바다 위를 날고 있는 갈매기를 바라보면서 읊은 '낙산사영(洛山寺詠)'이 허균(許筠)의 '성수시화(惺수詩話)' 실려 전한다.
낙산사영(洛山寺詠) -낙산사에서 읊다
心同流水世間出(심동류수세간출) 마음은 흐르는 물 같이 세상으로 나오고
夢作白鷗江上飛(몽작백구강상비) 꿈속에서는 흰갈매기 되어 강 위를 나네
허균은 '성수시화'에서 '낙산사영'의 이 구절에 대해 '임억령은 사람됨이 고매하고 시 역시 사람됨과 같았다(林億齡爲人高邁 詩亦如其人). <낙산사영>은 마치 용이 오르고 비가 내리는 형세로 문세가 날아 꿈틀거려 그 기이한 경치와 자못 장려함을 다툴 만하였다(洛山寺詠龍升雨降之狀。文勢飛動。殆與奇觀敵其壯麗). 그 시에 <心同流水世間出 夢作白鷗江上飛>라 한 구절은 기상이 높아 신룡이 바다를 희롱하는 뜻이 있다(其 心同流水世間出。夢作白鷗江上飛。矯矯神龍戲海意).'고 평했다.
이때 임억령은 낙산사에 머물고 있던 서산대사(西山大師)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을 만났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서산대사에 대한 시 9수를 지었다. 서산대사와 낙산사에서 헤어질 때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은 송별시 '증청허자(贈淸虛子)'도 그 중 하나다. 이처럼 임억령은 유자(儒者)이면서도 불자(佛者)인 서산대사와 교류가 깊었다.
증청허자(贈淸虛子) - 청허자에게 주다
岩松元自曲(암송원자곡) 바위옆 솔은 원래 절로 굽어지고
水月不成圓(수월불성원) 물에 비친 달은 둥글지 못하다네
他日師如訪(타일사여방) 언젠가 훗날 대사가 찾아올 때는
眉岩雪竹邊(미암설죽변) 예쁜 바위에 설죽이 한창일 걸세
척박한 바위틈에서 자라는 나무는 곧게 자라기 어렵고, 물에 비친 달은 물결 때문에 완전히 궁근 원을 이루기 어렵다는 자연의 섭리와 세상의 이치에 달관한 경지를 읊으면서 해남에서의 만남을 언약한 시다. 그후 서산대사가 해남 대흥사(大興寺)와 강진 백련사(白蓮寺)에 종적을 남긴 것은 이때의 언약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미암(眉巖)'은 해남의 금강산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해남 출신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이 바위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임억령은 금강산에 올라 구룡폭포 암벽에 '후세천하제일명승지지(後世天下第一名勝之地)'라는 글귀를 새기고 시를 지었다. 그는 내금강 장경봉(長慶峯)의 장안사(長安寺, 지금의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들러 오언절구 '증장안사주지의자(贈長安寺主持義孜)'를 남겼다. 장안사는 한때 서산대사가 주석했던 명찰이다.
증장안사주지의자(贈長安寺主持義孜) - 장안사 주지 의자에게 주다
巨刹中原刱(거찰중원창) 총림 큰 사찰을 중원에 세우니
名山天下知(명산천하지) 이름난 산임을 천하가 다 아네
前川洗筆硯(전천세필연) 앞내에서 벼루와 붓 씻다 보니
草木助新詩(초목조신시) 초목들 새 시상 떠오르게 하네
시상이 저절로 떠오를 만큼 환상적인 금강산의 경치에 감탄하는 시다. 장안사는 고성군 외금강면 창대리 신계사(新戒寺, 新溪寺), 고성군 서면 백천교리 유점사(楡岾寺), 회양군 내금강면 장연리 만폭동(萬瀑洞)의 표훈사(表訓寺)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힌다.
임억령은 관동팔경을 유람하고 쓴 기행시(紀行詩)들을 모아 '동행록(東行錄)'을 엮었다. '동행록'에 대해 '임진왜란 때 왜구가 해주에 침입하여 부용당에 걸려 있던 한시 편액을 모두 부쉈으나 유독 정현과 김성일 두 사람의 시만 남겨두었다. 김성일은 시에 능하지는 못 했지만,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 그가 보여준 강직함을 일본인들이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없애지 않았던 것이다. 정현의 시는 왜구들도 절창임을 알았으므로 남겨둔 것이다. 또 왜구들이 강릉에 이르러 관부의 여러 한시 현판은 모두 남겨두고, 오직 임억령의 장편 고시만을 떼어서 배에 싣고 돌아갔으니, 왜인들 역시 시를 아는가 보다.'라는 시화가 전해 온다.
이 무렵 임억령은 이이와 더불어 '금강구룡연부(金剛九龍淵賦)', '추강도부(秋江圖賦)', '추천부(秋天賦)', '억만폭동부(憶萬瀑洞賦)'를 지었다. 정사룡과도 시를 주고받았다.
금강구룡연(金剛九龍淵) - 금강산 구룡연에서
魯國難龍橫海鱗(노국난룡횡해린) 노나라는 큰 인물 받아들이기 어려워
千層石寶沕然珍(천층석보물연진) 천층의 보배돌에 오묘한 보물인 것을
向來絶頂無人士(향래절정무인사) 어찌 전부터 빼어난 인재가 없으랴만
未見其淵況見身(미견기연황견신) 그 못도 못 보거늘 하물며 그 몸이랴
그해 6월 13일 임억령은 강원도 관찰사에서 물러나 한양으로 올라왔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9년(1554) 조에 '임억령은 강원도 관찰사 직무에는 힘쓰지 않고 병을 조리한다는 핑계로 방안에 촛불을 켜놓은 채 시를 짓고 읊는 것만 좋아하므로 백성들이 그의 면목(面目)을 보지 못한 자가 많다. 임억령의 인간됨은 성격이 크고 넓으며 문장력이 풍부하고 뛰어나지만 맡은 바 관리의 임무를 다하는 데는 사실상 소질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서도 벼슬에 큰 뜻을 두지 않은 그의 방외적(方外的) 성격을 지적한 것이다.
임억령은 자신의 후임으로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나가는 청천당(聽天堂) 심수경(沈守慶, 1516~1599)에게 송별시를 지어 주었다. 심수경은 그서 수필집 '견한잡록(遣閑雜錄)'에서 임억령의 시재(詩才)를 매우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임억령에 대해 '근래 석천 임억령이란 자가 있는데, 시에 능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 어떤 사람이 술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며 감(甘) 자 운을 부르니, 임억령이 즉시 응하기를, "늙어서야 비로소 이 맛 단 줄 알았네(老去方知此味甘)"라고 하였다. 또 삼(三) 자 운을 부르니, 응하기를, "한 잔 술에도 도통하니 석 잔을 마시지 않으랴(一杯通道不須三)" 하였다. 또 남(男) 자 운을 부르니, 곧 응하기를, "그대는 혜강(嵇康, 동진 때 죽림칠현)과 완적(阮籍, 죽림칠현)이 유계(한고조)를 조롱한 것을 아는가?(君看嵇阮陶劉季) 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不羨公侯伯子男)"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작품이다.'(近有石川林公億齡 以能詩名 有人請賦酒詩 呼甘字韵 林卽應聲曰 老去方知此味甘 又呼三字 應聲曰 一盃通道不須三 又呼男字 應聲曰 君看嵇阮陶劉季 不羨公侯伯子男 眞奇作也)라고 그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한편, 임억령은 성수침의 부탁을 받고 성세순(成世純, 1463~1514)을 추모하는 '대사헌송공비명병서(大司憲宋公碑銘幷序)'를 지었다. 성세순은 연산군 때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과감한 직간으로 유명했다. 비명에는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시절 판윤(判尹) 박건(朴楗)이 찬탄한 것과 연산군 때 강직하고 직언을 잘 한 심순문(沈順門)을 변호한 것‚ 정승 권균(權鈞)의 경대를 받은 것 등을 특별히 기록하였다. 성세순은 성수침의 아버지, 성혼의 할아버지였다.
또 임억령은 '종실숭천수가야금찬병서(宗室崇川守伽耶琴贊幷序)'을 지어 지음(知音)의 이치가 종실(宗室) 숭천수(崇川守)에게 전해진 것을 칭송했다. 이 글은 가야금에 붙인 찬(贊)이다. 벽강루(碧江樓)에 올라 누정시를 남긴 것도 이 무렵이다.
그해 친하게 지내던 벗 신잠이 세상을 떠났다. 임억령은 만사를 지어 그의 죽음을 에도하였다. 신잠의 그림 가운데 '탐매도(探梅圖)'는 유명하다. 한 은둔자가 동자와 함께 눈 속에서 매화를 찾아가는 그림이다.
1555년(명종 10) 59세의 임억령은 정록계축(正錄契軸)을 지었다. 정록소(正錄所)는 조선 초 성균관에 설치된 정록소는 과거 응시 자격의 심사, 즉 녹명(錄名)을 담당하던 부서였다가 1444년(세종 26) 성균관과 예문관, 교서관 삼관(三館)이 공동으로 녹명을 담당하게 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하지만 정록소 건물인 정록청(正錄廳)은 그대로 남아 성균관 낭관들의 집무소로 사용되었다.
이 무렵 동인(東人)의 영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찾아와 함께 '용호도부(龍虎圖賦)'를 지었다.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낸 대북파(大北派)의 영수 이산해는 박순, 이이, 정철 등 서인과 치열한 당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임억령은 이산해의 글씨와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용호도부(龍虎圖賦)
글씨는 용의 꼬리와 수염이 꿈틀거린 것 같고
시는 강과 바다가 동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네
이산해의 글씨와 시에 대해서 극찬을 한 시다. '시는 강과 바다가 동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네' 구절은 중의적인 의미가 엿보인다. 이산해가 동인의 강경파인 대북의 영수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임억령의 시를 보고 이산해는 '林石川嶺東題咏中有<長風一萬里片月古今秋>之句自非謫仙風骨何以得此咏歎之餘仍成一絶(임석천이 영동에서 읊은 시 중에 <장풍일만리 편원고금추)라는 구절이 있는데 적선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처럼 감탄할 만한 시를 지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한 절을 짓는다.)'라고 하면서 화답시를 지었다.
石川當日擅騷場(석천당일천소장) 석천선생은 당대의 문단을 전단했고
玉節東遊寶唾香(옥절동유보타향) 동백으로 왔으니 주옥같이 향기롭네
仙鶴一歸蓬島廻(선학일귀봉도회) 선학이 금강산으로 날아들어간 곳에
海天如水月蒼茫(해천여수월창망) 해천이 물같고 달마저도 창망하도다
이산해도 임억령을 당대의 문단을 휩쓴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옥절(玉節)은 옥으로 만든 부신, '동(東)'은 동백(東伯)이다. 동백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를 달리 이르던 말이다. '보타(寶唾)'는 좋은 글귀나 명언을 이르는 말이다. '선학(仙鶴)'은 임억령을 신선에 비유한 것이다. '봉도(蓬島)'는 영주산, 방장산과 함께 중국 전설상에 나오는 삼신산의 하나다. 여기서는 금강산을 가리킨다. '해천(海天)'은 바다 위의 하늘이다.
5월 왜적이 달량(達梁, 해남군 남창포구)을 타고 삽시간에 완도, 진도, 강진, 장흥, 영암을 휩쓸면서 살인과 약탈, 납치를 자행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다. 해남은 임억령의 고향이었기에 그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8월 성수침은 유명한 선비들만 초빙하여 시회를 열었다. 그는 먼저 사언율시 '파산(坡山)' 일명 '파산사언시(坡山四言詩)'를 짓고 문객들에게 차운시를 짓게 하였다. 임억령도 초빙을 받아 차운시를 지었다.
머리털에는 본래 때가 없는 법이니
어찌 머리 감기를 수고로이 하리요
관모라는 것은 끈이 없는 것이기에
어찌 깨끗하게 씻을 일이 있으리요
생을 마칠 때까지 즐거움은 있어도
하루 아침에 생기는 근심은 없노라
만일 저 옛날의 선현들에 비한다면
전국 시대 철인 장주처럼 노닐리라
이때 상진, 조식, 이황, 김인후, 송순, 주세붕, 오겸, 조욱(趙昱), 성운(成運), 성제원(成悌元), 성륜(成倫), 김이원(金履元), 김홍윤(金弘胤), 이문건(李文楗), 홍봉세(洪奉世), 조준룡(曹俊龍), 이희안(李希顔), 신호(申濩) 등도 차운시를 지었다. '석천 임억령의 생애와 시문학(임남형 저)' 연보에는 신잠(1491!~1554), 송연(宋演, 1621~?), 송세형(宋世珩, ?~1553), 박효남(朴孝男, 1553~1611)도 차운시를 지었다고 했으나 연대가 맞지 않는다.
노수신은 임억령의 시를 보고 차운한 시와 글을 보내왔다. 을사사화 때 이조 좌랑에서 파직된 노수신은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 성동리(城東里, 진도읍 성내리)로 이배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성동리고요
그대 문은 해상촌에 있지요
늘 석천에게 가고 싶었지만
물결 사나워 꺼리기만 했소
그대의 이름 크게 날렸으니
맑고도 겸허한 명망 높아라
어찌하여 좋은 구경 해볼까
사십에도 좋은 평판 없네요
성수침은 자신의 시와 문객들의 차운시를 모아 시첩을 만들어 아들 성혼에게 전했다. 훗날 성혼의 아들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 1559∼1626)은 성혼의 문인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4)과 함께 이 시첩을 '파산수창집(坡山酬唱集)'으로 간행하였다.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는 '파산수창집'을 보고 선현들의 시에 감동받아 장문의 발(跋)을 지었다. 이 발문은 성수침의 문집 '청송집(聽松集)'에 실려 있다.
1556년(명종 11) 61세의 임억령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이찬(李澯, 1498~1553)을 추모하는 비명(碑銘) '유조선국가선대부한성부좌윤이공비명병서(有明朝鮮國嘉善大夫漢城府左尹李公碑銘幷序)'를 지었다. 비명에서 그는 이찬이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을 때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과 만난 일‚ 경주부 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 도적들을 위무(慰撫)한 일 등을 기록하였다.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404번지에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 1427~1497)의 신도비가 있는데, 극암(克庵) 이창신(李昌臣, 1449~?)이 지은 비문의 글씨를 쓴 사람이 바로 이찬이다. 임억령은 또 '병조계도서(兵曹契圖序)'를 지었다.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10 - 환벽당 소쇄원 누정시와 식영정기를 짓다 (0) | 2017.12.09 |
---|---|
[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9 - 담양부사로 나가 '풍영정십영'을 짓다 (0) | 2017.12.08 |
[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7 - 퇴게 이황과 시학 논쟁을 벌이다 (0) | 2017.12.06 |
[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6 - 양응정과 시전을 벌이다 (0) | 2017.12.05 |
[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5 - 장편 영웅서사시 '송대장군가'를 짓다 (0) | 2017.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