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9 - 담양부사로 나가 '풍영정십영'을 짓다

林 山 2017. 12. 8. 15:40

1557년(명종 12) 3월 8일 62세의 임억령은 담양부사(潭陽府使) 겸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제수받으면서 담양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담양부사로 나가면서, 조광조의 문인으로 평생 처사의 길을 걸어간 오랜 벗 성수침에게 '다만 일신 먹이고자 다섯 말 녹봉에 굽혔지만, 해적 떼 습격할까, 산수로 돌아갈 계획을 이루지 못했소.'라고 변명했다. 그만큼 그는 수시로 왜적들이 출몰하는 고향 해남의 바닷가로 돌아가기가 꺼림칙했다. 임억령이 담양부사로 부임한 직후에 지은 시 두 수가 심수경의 수필집 '견한잡록(遣閑雜錄)'에 실려 전한다.


朝趨北闕暮南州(조추북궐모남주) 아침엔 조정에 나갔다가 저녁에 남도 오니

比明時僞許由(절비명시위허유) 명군 다스리던 시절 가짜 허유에 비유하네

蹤迹似雲舒或卷(종적사운서혹권) 흔적 자취는 구름 같아 나타났다 사라지고

行藏如水止還流(행장여수지환류) 행적 진퇴는 물같아 멈췄다가 다시 흐르네

何妨混世陶腰折(하방혼세도요절) 난세에 도잠이 허리 굽힌들 뭐가 해로울까

追悔爭名羿毅遊(추회쟁명예의유) 명예를 다투며 후예와 노닐던 일 뉘우치네

歸老海邊吾已决(귀로해변오이결) 돌아와 바닷가에서 늙을 걸 이미 결심하니

黃花朱橘故園秋(황화주귤고원추) 노란 꽃 바알간 감귤 고향의 가을이로구나


사람의 일이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바쁜 벼슬아치로 부귀공명을 좇던 지난날을 후회하면서 가을엔 국화와 감귤이 아름다운 고향 바닷가에서 늙어가고 싶다는 노래다. 


'북궐(北闕)'은 경복궁(景福宮)을 가리킨다. 동궐(東闕)은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 서궐(西闕)은 경희궁(慶熙宮)에 해당한다. 남궐(南闕)에 해당하는 궁은 없다. 남궐이라 부를 만한 건물은 현 덕수궁(德壽宮, 옛 경운궁)이다. 경복궁의 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덕수궁은 애초에 궁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성종(成宗)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개인 저택이었다. 조일전쟁이 끝난 뒤 돌아온 선조(宣祖)가 궁궐이 불타버려 거처할 곳이 없게 되자 덕수궁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 되었다. '남주(南州)'는 전라도 담양을 말한다. 


'명시(明時)'는 순(舜)과 함께 성군(聖君)의 대명사로 일컬어진 제요 도당씨(帝堯陶唐氏)가 다스리던 중국 신화시대를 말한다. '허유(許由)'는 양성(陽城) 괴리(槐里) 출신으로 패택(沛澤)에 숨어 산 은자(隱者)다. 제요가 천하를 물려주려고 하자 이를 거절하고 기산(箕山)에 숨었고, 또 구주(九州)의 장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를 영수(潁水)에 씻었다고 한다(사기 권34). '도요절(陶腰折)'의 '도(陶)'는 도잠(陶潛)이다. 연명(淵明)은 그의 자다. 405년 11월 도연명이 고향에서 가까운 심양군(尋陽郡) 팽택현령(彭澤縣令)으로 부임한 지 80일쯤 되었을 때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 순찰관)가 순시를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다. 이에 낙향을 생각하고 있던 도연명은 누이마저 세상을 떠나자 '오두미(五斗米, 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미련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나온 작품이 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와 '귀전원거(歸田園居)'다. 이후 도연명은 죽을 때까지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예(羿)'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궁술의 명인 후예(后羿)를 말한다. 하(夏)나라 때 유궁씨(有窮氏) 부락의 수령이었던 예는 활솜씨가 뛰어나고 용감했다. 예는 공명심에 불타서 토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다니는 풍신을 활로 쏘았고, 자신의 충성심과 능력을 증명하려는 듯 지구 위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던 10개의 태양 가운데 9개를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 제요의 기지로 화살 1개를 감추게 하여 지금의 태양이 남아 있게 되었다. 후에 그는 하왕(夏王) 태강(太康)의 통치를 뒤엎고 왕이 되었지만, 사냥만 좋아하고 백성들을 돌보지 않다가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吏散空庭鳥印蹤(이산공정조인종) 아전들 돌아간 빈 뜰에는 새들만 날아들고

杏花踈影月明中(행화소영월명중) 살구꽃 그림자 듬성듬성 달 밝은 밤이로세

白頭强厭烏紗帽(백두강염오사모) 하얀 머리에 억지로 오사모를 쓰기 싫어서

客去而懸客至籠(객거이현객지롱) 손님이 가면 걸어두고 오면 머리에 쓰누나


아전들이 퇴근하고 난 뒤 달이 뜬 관아의 적막한 풍경을 묘사하면서 벼슬살이에 대한 뜻이 별로 없음을 내비치고 있는 시다. '오사모(烏紗帽)'는 조선시대 벼슬아치가 쓰던, 검은 깁으로 만든 모자다.


기대승은 임억령이 담양부사로 부임하자 병풍에 '나의 뜻을 기술한다'는 제목의 칠언율시 4수를 적어 보냈다. 이 무렵 기대승과 임억령은 자주 만나 도(道)에 대해 논의하는 한편 시를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크고 작음은 두루 분간 어려우니, 봉새 멥새 본디부터 멀리 날기 좋아하네

나는 털 간직한 채 가시덤불 의지하는데, 영공은 큰 날개 펄럭이며 재주 굽어보네

티끌 속에 초라한 깃털 물씬 깨닫는데, 하늘 끝에 황홀한 시름 그야 물론 많으리라

소요유의 참된 뜻 외람되게 묻고자 하니, 이 마음 끝내 딴 곳에서 구하지 않으리라


기대승이 자신을 멥새, 임억령을 봉새에 비유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소요유(逍遙游)의 참뜻을 묻고 있는 시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길재-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김종직-김굉필-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 1504)-조광조-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1521)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한 기대승은 이황, 김인후,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1509~1561), 이항과의 논쟁을 통해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정립한 이기일원론자였다. 


호남의 사림은 현상을 중시하는 기대승, 이항 등 주기론자(主氣論者)들이 다수였으며, 영남의 사림은 현상의 원리를 중시하는 이황 등 주리론자(主理論者)들이 다수였다. 혹자는 호남의 정자들은 그 주인이 대개 주기론자였기에 현상을 살피기에 유리한 탁 트인 곳에 자리잡았고, 영남의 정자들은 그 주인이 대부분 주리론자였기에 이면에 내재하는 원리처럼 은밀한 곳에 자리잡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기론과 주리론의 차이가 정자의 지정학적 차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견강부회 같기도 하지만 일면 그럴 듯한 면도 있다. 


기대승과 임억령도 호남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던 주기론자였다. 두 사람은 같은 주기론자로서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기대승은 담양 관아나 성산을 자주 찾아와 임억령과 학문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았다. 임억령도 기대승을 위한 답시를 지었다. 


만첩준령은 울퉁불퉁 한 줄기 강물이 둘렀는데, 병든 몸은 여기서 관리 되어 지낸다네

밤이 오면 꿈은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고, 술 취한 뒤에 정신은 오히려 구주를 벗어나네

훌륭한 분이 이 늙은이를 찾아주고, 또 멋진 시 보내와 시름 달래주기도 함에 감사하네

고요히 읊어봄에 내 머리를 상쾌하게 하니, 편작의 주후방을 다시 구하지 않아도 되리


자신을 찾아주고, 멋진 시까지 보내준 기대승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다. 임억령은 기대승의 시가 천하의 비방처럼 머리를 시원하게 해준다고 극찬하고 있다. 편작(扁鵲)의 '주후방(肘後方)'은 '수서(隋書)' <경적지(經籍誌)>에 신선이 되는 비방(秘方)이라고 하였다. 


3월 20일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가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부음을 듣고 임억령은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다. 기대승은 만시(輓詩)를 지어 양산보의 죽음을 애도했다. 양산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지 화순 능주에서 사사되자 벼슬길에의 뜻을 내던지고 담양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짓고, 은거하면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깊이 연구하면서 김인후, 성수침 등과 교유하였다. 양산보는 조광조 사후 김인후와 함께 사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2월 27일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단 7일 동안 왕비의 자리에 앉았다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공신들에 의해 폐비된 비운의 여인이었다.


1558년(명종 13) 정월 초에 기대승이 임억령을 사모하는 시 8수를 보내왔다. 이 무렵 임억령은 '죽우당부(竹雨堂賦)'를 지었다. 죽우당(竹雨堂)은 성혼이 파주(坡州) 우계에 우거하던 곳으로 그는 당호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죽우당부'에서 임억령은 죽우당에 대나무가 자라지 못함에도 당호(堂號)를 '죽우(竹雨)'라고 한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대나무를 사랑하지만 얻을 수 없으므로 그림으로 걸었는데‚ 주렴계(周濂溪)의 연꽃이나 도연명(陶淵明)의 국화는 모두 기(氣)로써 벗하는 것이니 벽에 걸린 그림이 진짜는 아니지만 마음 속에 거울처럼 비친다. 빗소리 또한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깃드는 것이니 때를 가리지 않는다. 은거하는 속에서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는 것이며‚ 당에 대나무가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2월 15일 임억령은 관루(官樓)에 올라 시를 지었다. 이어 곡성군 석곡면 온수리에 있던 관어대(觀魚臺)를 찾아 누정시를 남겼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 기슭의 풍영정


임억령은 또 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 1503~1584)의 풍영정(風詠亭,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852)을 찾아 김인후의 '풍영정십영(風詠亭十詠)'에서 차운하여 '선창범주(仙滄泛舟)', '현봉요월(懸峰邀月)', '서석청운(瑞石晴雲)', '금성제설(錦城霽雪)', '월출묘애(月出杳靄)', '나산촌점(羅山村店)', '양평다가(楊坪多稼)', '유시장림(柳市長林)', '수교심춘(繡郊尋春)', '원탄조어(院灘釣魚)' 등 칠언절구 10수를 남겼다. 이황도 김인후의 '풍영정십영'에서 차운한 시 10수를 지었다. 


임억령의 '풍영정십영' 편액


선창범주(仙滄泛舟) - 선창에 배 띄우고

 

白藻紅蓼暮江秋(백조홍료모강추) 흰마름 홍여뀌꽃 가을이 저무는 강에

生計蕭然一小舟(생계소연일소주) 생계라고는 쓸쓸하여 작은 배 하나로

初有意時思濟渡(초유의시사제도) 처음 생각할 때는 건너가려 했었지만

到無心處載沈浮(도무심처재침부) 무심한 곳에 이르러 부침을 알았노라

落帆望暫天邊雨(낙범망잠천변우) 돛을 내리고 하늘가의 비를 바라보며

後棹恐驚沙上鷗(후도공경사상구) 느린 노질에도 갈매기 놀랄까 두렵네

作箇生涯猶未足(작개생애유미족) 여태 살아온 생애가 아직도 부족하니

與君天外訪瀛洲(여군천외방영주) 그대와 함께 세상밖 신선세계 찾으리


인생이란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물결에 따라 가라앉을 때도 있고 떠오를 때도 있다. 부침을 알았다는 것은 인생무상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돛을 내리고 삶을 관조하니 노질에 갈매기가 놀랄까 염려가 된다. 이런 경지가 곧 무위자연의 신선세계가 아닐까! 


현봉요월(懸峰邀月) -현봉의 달맞이


長風萬里掃天東(장풍만리소천동) 만리 바람 불어와 동쪽 하늘 쓸어내고

獨曳枯笻陟彼崇(독예고공척피숭) 대지팡이 끌며 나홀로 높은 곳 오르네

雲外微灔(운외미승은홍염) 구름 밖으로 살짝 내민 은쟁반같은 달

天心孤掛玉壺空(천심고괘옥호공) 하늘 가운데 빈 옥호가 외로이 걸렸네

山川相他鄕遠(산천상격타향원) 산천과 서로 떨어진 타향 멀고 멀지만

君我同看一照中(군아동간일조중) 그대와 난 같은 달을 바라보고 있다네

聞說春來思訪戴(문설춘래사방대) 듣자 하니 봄엔 대규 찾으려 생각하나

輿(죽여수진동초융) 대가마는 얼음이 녹아야 갈 수 있으리


'戴(대)'는 중국 동진 때의 조각가이자 화가, 학자였던 戴逵(대규)를 가리킨다. 그는 거문고의 명인으로도 이름을 떨쳤으나 결코 왕이나 제후를 위해 연주하지는 않았다. 인품이 고결하여 당시 유명한 사안(謝安), 사현(謝玄), 왕순(王珣), 왕휘지(王徽之) 등에게 존경을 받았다


서석청운(瑞石晴雲) - 서석에 구름 걷히고


誰將玉筍揷鴻濛(수장옥순삽홍몽) 누가 저 멋진 멧부리를 하늘에 꽂았을까

千丈巍巍拔俗雄(천장외외발속웅) 천 길 높이 속계에서 솟구쳐 웅장하구나

最愛無心閑出岫(최애무심한출수) 무심히 멧부리서 나와 한가한 것도 좋고

更憐多態細隨風(갱련다태세수풍) 바람 따라 수시로 변하는 모습도 예쁘네

遙知巢鶴衣猶濕(요지소학의유습) 멀리 둥지의 학은 깃털 젖었음을 알겠고

想見歸僧路不通(상견귀승로불통) 돌아가는 스님 길 막혔음도 미뤄 알겠네

奇狀正宜吾輩對(기상정의오배대) 기이한 모습 우리들 대하기에 꼭 맞으니

相思卽席時同(상사즉석세시동) 그 자리에서 함께 했던 때를 그리워하네


'옥순(玉筍)'은 죽순(竹筍)의 미칭(美稱)으로 수려한 뭇 산봉우리를 뜻한다. '홍몽(鴻濛)'은 하늘과 땅이 아직 갈리지 않은 상태, 천지자연의 원기(元氣)를 말한다. 여기서는 하늘로 풀이했다. '외외(巍巍)'는 높고 큰 모양이다.

 

금성제설(錦城霽雪) - 금성에 눈 개이고


天際週遭比列城(천제주조비열성) 하늘의 끝 둘레는 열성에 비할 만하고

層陰迢遆接崢嶸(층음초체접쟁영) 짙은 그늘은 아득히 높은 산과 만나네

朔風初靜千林亞(삭풍초정천림아) 울창한 숲에 불던 삭풍 막 잠잠해지고

寒旭微生萬峀明(한욱미생만수명) 겨울 해 떠오르니 온 산이 밝아오누나

閉戶不妨終日臥(폐호불방종일와) 문을 닫고 온종일 잠 자더라도 괜찮고

聳肩重覺滿懷淸(용견중각만회청) 어깨 추키니 가슴 가득 맑아짐 깨닫네

篋中我有王恭氅(협중아유왕공창) 상자 속에 나는 왕공의 학창의 있으니

會上峰頭踏月行(회상봉두답월행) 우리 상봉에서 만나 달빛 밟고 거니세


'崢嶸(쟁영)'은 산세(山勢)가 높고 험준한 모양, 산이나 계곡 따위가 가파른 모양이다. '한욱(寒旭)'은 겨울 해다. '왕공창(王恭氅)'은 '세설신어(世說新语)'에 나오는 이야기로 동진시대 왕공(王恭)이 신선술을 닦고 학의 날개로 만든 옷을 입고 하늘을 날았다는 고사다. 학창(鶴氅) 또는 학창의(鶴氅衣)는 신선들이 입는 새의 깃털로 만든 옷으로, 도포(道袍)를 뜻한다. '세설신어' <기선(企羨)>에 “맹창(孟昶)이 영달이 영달하기 이전에 그의 집이 경구(京口)에 있었다. 그가 일찍이 보니 왕공(王恭)이 학창의를 입고 높은 수레에 탔는데 때마침 눈발이 약간 흩날리고 있었다. 맹창은 울타리 사이로 그 광경을 엿보고 감탄하기를 '이는 참으로 신선 속의 인간이다.(此眞神仙中人也)' 하였다.”에서 나온 말이다. '진서(晉書)' <왕공전(王恭傳)>에도 같은 내용의 고사가 나온다. 


 월출묘애(月出杳靄) - 월출산의 짙은 노을


金岡一脈落天南(금강일맥낙천남) 금강산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려

削出金鰲頂上簪(삭출금오정상잠) 금오산 정상 위에 비녀를 깎아 꽂았네

夕氣霏微凝滴滴(석기비미응적적) 저녁 기운 알알이 맺혀 가랑비 날리고

巖花紅濕拂毿毿(암화홍습불삼삼) 바위 꽃 발그레 젖어 우수수 떨어지네

依稀玉井峰頭九(의희옥정봉두구) 희미한 옥정은 봉우리 맡에 아홉 있고

漂渺仙岑海上三(표묘선잠해상삼) 선산은 바다 위에 아득히 셋이나 있네

此是少年吟嘯處(차시소년음소처) 여기는 어린 시절 시를 읊었던 곳이라

至今魂夢逐煙嵐(지금혼몽축연람) 혼은 지금 꿈속에서 노을 찾아 가누나

 

'삼삼(毿毿)'은 털이 긴 모양, 버들가지 같은 것이 가늘고 길게 늘어진 모양이다. 여기서는 꽃이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표현했다. '옥정(玉井)'은 옥정성(玉井星)이다. 서방칠수(西方七宿)의 제7수인 삼수(參宿)에 딸린 ㄷ자 형태의 네 별로 우물을 주관하는 별자리로 여겨졌다. '천문류초(天文類抄)'에서는 이 별자리에 객성(客星)이 들면 수해(水害)가 생기고 상사(喪事)가 있으며, 나라의 땅을 잃는다고 하였다. 삼수는 군진(軍陣)을 지휘하는 장군 별자리다. 그래서 삼수에 딸린 옥정성을 군정(軍井)이라 하여 병영의 우물을 관장하는 별자리로 인식되기도 했다. '선잠(仙岑)'은 신선이 산다는 산이다. '연람(煙嵐)'은 안개와 아지랑이다.


나산촌점(羅山村店) - 나산의 시골 마을

 

百年相聚一墟中(백년상취일허중) 오랜 세월을 한 곳에 모여서 살아가니

地勢嵚岑强學峰(지세금잠강학봉) 땅의 형세 높고 험한 강학의 봉이로세

婚嫁不曾他處問(혼가부증타처문) 혼처는 일찌기 다른 데서 찾지 않았고

有無長與近隣同(유무장여근린동)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모두 같았네

鷄鳴茅屋天將曉(계명모옥천장효) 닭이 울자 곧 초가집에 날이 밝아오고

雪滿柴門歲已冬(설만시문세이동) 눈 덮힌 사립문엔 겨울이 이미 깊었네

最是望來如畵處(최시망래여화처) 으뜸은 달이 그림처럼 뜨는 그 곳에서

短笻斜對夕陽紅(단공사대석양홍) 지팡이 비낀 채 저녁노을 바라보는 것

 

'금(嵚)'은 '높고 험하다, 가파르다', '강학(强學)'은 '부지런히 배우다'의 뜻이다. '()'은 망월(朢月)로 음력 보름날 밤에 뜨는 둥근 달이다. '단공(短笻)'은 짧은 대지팡이를 말한다.  

 

양평다가(楊坪多稼) - 양평에 농사 많고


凉風一路稻香傳(량풍일로도향전) 서늘한 가을바람 벼 익는 냄새 전하고

晩嚲鰕鬚露泫然(만타하수로현연) 새우 수염 이삭 이슬 머금고 늘어졌네

澗水自添田水滿(간수자첨전수만) 산골물은 절로 보태 논밭 가득 채우고

壟雲還與野雲連(농운환여야운련) 언덕 위 구름은 들녘 구름에 잇닿았네

登之場圃舂之杵(등지장포용지저) 채마밭에 다녀온 뒤 또 방아도 찧으니

居者積倉行者饘(거자적창행자전) 사는 이는 곳집에 쌓고 떠돌이는 먹네

自古詩人歌蟋蟀(자고시인가실솔) 시 쓰는 사람은 곧 노래하는 귀뚜라미

不妨爲酒醉村筵(불방위주취촌연) 술을 빚어 마을 잔치 열어도 괜찮으리

 

'간수(澗水)'는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다. '장포(場圃)'는 집 가까이에 있는 채소밭을 말한다. '실솔(蟋蟀)'은 귀뚜라미다. '연(筵)'은 잔치의 뜻이다.

 

유시장림(柳市長林) - 유시의 긴 숲

 

平郊楊柳望悠悠(평교양류망유유) 너른 들의 버들을 한가히 보고 있자니

歲久依依漸掩樓(세구의의점엄루) 긴 세월 하늘하늘 누각을 가리고 있네

霧暗晩鸎啼小市(무암만앵제소시) 안개 속 꾀꼬리는 작은 고을에서 울고

雨餘飛絮長洲(우여비서박장주) 비에 날린 버들솜 긴 물가에 떨어지네

腰支無力垂垂嚲(요지무력수수타) 허리는 버틸 힘이 없어 점점 늘어지고

眉葉多情箇箇修(미엽다정개개수) 눈썹 잎은 정도 많아 일일이 다듬었지

此是渭城離別處(차시위성이별처) 여긴 왕유가 친구와 헤어지던 그 위성

低枝攀折老枝樛(저지반절노지규) 낮은 가지는 꺾이고 늙은 가진 굽었네

 

'의의(依依)'는 연약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양이다. '수수(垂垂)'는 '점차, 서서히'의 뜻이다. '위성(渭城)'은 산시성(陜西省)의 성도 시안(西安)에서 동북쪽으로 25km 거리에 있는 셴양(咸陽)의 옛이름이다. 예로부터 셴양은 버드나무로 유명하여 위성류(渭城柳)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인천 소래습지공원에 있는 진귀한 버드나무 이름도 생김새가 중국 셴양에 많이 자라는 버들과 같다고 해서 위성류다. 


이 시에서 '위성'은 당나라 왕유(王維)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일명 '위성곡(渭城曲)'에서 온 말이다. '위성곡'은 위성의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사신이 되어 안서(安西) 지방으로 떠나는 친구 원이(元二)와 헤어지면서 읊은 이별가(離別歌)다.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渭城曲) - 안서로 사신 가는 원이를 송별하며(왕유)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 위성에 내린 아침비 먼지를 가라앉히니

客舍靑靑柳色新(객사청청류색신) 객사의 버들빛은 더욱 푸르고 새로워라

勸君更盡一杯酒(권군갱진일배주) 그대에게 권하노니 다시 한잔 마시게나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서쪽으로 양관 나서면 친구도 없으리니


중국에서는 정인이나 친구와 이별할 때 시냇가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며 작별 인사를 한다. 머나먼 안서(安西, 지금의 新疆省 庫車縣 당나라 때 都護府를 둔 곳)로 떠나는 친구와 헤어지면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려고 하는데, 아침에 내린 비로 먼지가 가라앉아 위성 객사의 버들빛이 유난히 더욱 푸르게 보인다. 이별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고, 이별의 아픔을 잠시라도 잊게 하기 위해 술 한 잔을 더 권한다. 양관(陽關, 甘肃省 敦煌에 있으며, 실크 로드의 주요 관문이었음)을 나서면 술 한 잔 권할 친구도 없기 때문이다. 이별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시다.  


'저지반절(低枝攀折)'은 '유지반절(柳枝攀折)'에서 온 말로 이별을 뜻한다.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며 이별의 아쉬운 정을 노래한 시에 당나라 때 양거원(楊巨源)의 '절양류곡(折楊柳曲)'이 있다. '절양류곡'이 널리 퍼지면서 이별을 노래한 시에 많이 인용되었다. 


수교심춘(繡郊尋春) - 수교에서 봄을 찾다

 

嫩水濈濈自入川(눈수즙즙자입천) 작은 개천은 졸졸 큰 시내로 흘러들고

新林冉冉曉光鮮(신림염염효광선) 새 숲은 하늘하늘 새벽빛이 더욱 곱네

農人告我春初及(농인고아춘초급) 농민들은 내게 첫 봄이 왔노라 알리고

童子巾車奉聯(동자건거봉몌련) 수레 탄 아이들은 소매 나란히 받드네

好鳥知時煙外美(호조지시연외미) 새들은 때를 알아 안개 너머 아름답고

晩山多態雨餘姸(만산다태우여연) 비 개인 저물녘 산의 모습도 고운지고

悠悠快活無人會(유유쾌활무인회) 한가로이 쾌활함을 아는 이 하나 없어

倚杖看天意渺然(의장간천의묘연) 지팡이 기대 하늘 보니 뜻이 묘연하네


'즙즙(濈濈)'은 한데 모이는 모양이다. '염염(冉冉)'은 (털·나뭇가지·잎 따위가) 부드럽게 아래로 드리운 모양, 천천히 움직이는 모양, 한들거리는 모양이다. '건거(巾車)'는 베나 비단 따위로 막(幕)을 쳐서 꾸민 수레다. '천의(天意)'는 하늘의 뜻, 임금의 마음, 자연의 이치다. 

 

원탄조어(院灘釣魚) - 원탄에서 낚시하다

 

平沙皎皎小灘橫(평사교교소탄횡) 넓은 모래밭 사이로 작은 여울 흐르고

無數寒魚作隊行(무수한어작대행) 수많은 찬 물고기들 떼를 지어 가누나

病棄高山眞得計(병기고산진득계) 병들어 높은 산에서 즐길 생각 버리고

晩稱漁父未爲生(만칭어부미위생) 늙어 어부 됐으나 생계 삼음이 아닐세

百年地僻龍蟄(백년지벽용사칩) 오랫동안 외진 곳에 용 뱀처럼 숨으니

萬頃人稀雪月明(만경인희설월명) 광막한 세상 사람은 없고 설월만 밝네

莫效渭川川上老(막효위천천상노) 위천 가에서 낚시하던 노인 닮지 마오

至今魚鳥怨無情(지금어조원무정) 여태 새 물고기들 그 무정함 원망하니

 

'교교(皎皎)'는 '교교하다, 깨끗하다, 새하얗고 밝다, 결백하다'의 뜻이다. '위천천상로(渭川川上老)'는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을 말한다. 강태공은 웨이수이(渭水)에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의 부름을 받고 주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7월 20일 임억령은 휴가를 얻어 공무에서 잠시 벗어났다. 8월 임억령은 영암(靈巖)의 쌍취정(雙醉亭)을 찾아 누정시 '등쌍취정(登雙醉亭)'을 지었다. 쌍취정은 임구령이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에 모정저수지(지남제)를 축조 한 뒤 영풍정(迎豊亭)이 있던 자리에 세운 정자다. 그 뒤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쌍취정은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로 옮겨져 수래정(修來亭)이라 불리고, 그 자리에는 지금의 원풍정(願豊亭)이 들어섰다. 쌍취정은 간 곳 없고 임억령의 시만 남아 전한다.


등쌍취정(登雙醉亭) - 쌍취정에 올라


長勞南北夢(장로남북몽) 오랫동안 남북에서 시달린 몸

偶把海山杯(우파해산배) 우연히 해산에서 술잔을 잡네

萬一君恩報(만일군은보) 만일 임금의 은혜를 갚거들랑

與君歸去來(여군귀거래) 나는 그대 곁으로 돌아가리라

天地靑山萬(천지청산만) 넓은 세상에는 청산도 많지만

江湖白髮雙(강호백발쌍) 강호에는 백발만 두 명뿐이네

一杯須盡醉(일배수진취) 술잔을 들고 취하도록 마시라

綠蟻滿村缸(녹의만촌항) 항아리엔 거른 술 가득하니까

小屋如龜殼(소옥여구각) 자그마한 집은 거북껍질 같고

秋山以錦文(추산이금문) 가을 산들은 비단무늬 같구나

機心都己盡(기심도기진) 거짓된 마음일랑 모두 버리고

吾與白鳩群(오여백구군) 내 비둘기와 더불어 벗하리라


'江湖白髮雙(강호백발쌍)'은 임억령과 그의 아우 구령을 가리킨다. '녹의(綠蟻)'는 걸러 놓은 술에 뜬 거품이다. '吾與白鳩群(오여백구군)'은 벼슬을 버리고 비둘기를 벗삼아 자연에 은거하겠다는 다짐이다.  


임억령은 태인(泰仁)의 피향정(披香亭)에 올라 오언절구를 지었고, 옥과(玉果) 동헌을 찾아 시 한 수를 남겼다. 피향정은 신라 헌안왕(憲安王, 857∼860) 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재임할 때 세웠다고 전하는 누정이다.  


元亮新埋地(원량신매지) 원량은 얼마전에 땅에 묻혔고 

孤雲舊上天(고운구상천) 고운은 옛날에 하늘에 올랐네 

空餘池水在(공여지수재) 다만 연못에는 물만 남아있어 

白露滴秋蓮(백로적추련) 이슬이 가을 연꽃에 떨어지네 


'원량(元亮)'은 신잠의 자다. 신숙주의 증손자로 태인현감을 지낸 신잠은 임억령과 도의로써 교유하던 사이였다.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신잠과 그 옛날 최치원이 머물렀던 태인이었기에 임억령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피향정은 최치원이 세웠다고는 하지만 초창연대를 알 수 없다. 지금도 피향정 앞에 있는 호수는 그 당시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이조민(李肇敏)의 '괘일록(掛一錄)'에 실려 전한다. 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 1568~1629),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1~1900)도 피향정을 찾아 임억령의 시에서 차운한 시를 지었다.


어느 날 조선의 이하(李賀)라고 일컬어지는 백광훈이 담양으로 스승 임억령을 찾아왔다. 백광훈은 벼슬에 대한 뜻을 일찌감치 버리고 전국 각지를 방랑하면서 시와 서도(書道)를 즐긴 김삿갓(金炳淵) 이전의 진정한 방랑시인이었다. 백광훈이 고향 장흥으로 돌아가던 날 임억령은 '송백창경환향(送白彰卿還鄕)'이란 시를 지어 그를 송별했다. 


송백창경환향(送白彰卿還鄕) - 고향으로 돌아가는 백창경을 보내며 

  

江月圓還缺(강월원환결) 강 달은 찼다가 다시 기울고

梅落又開(매화락우개) 뜨락의 매화는 지고 또 핀다

逢春歸未得(봉춘귀미득) 봄 되어도 돌아가지 못 하니

獨上望鄕臺(독상망향대) 나 홀로 망향대에 올라 보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을 안타까와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향 의식과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초월 의식이 드러난 증별시(贈別詩)다. 임억령은 벼슬보다는 자연 속에서의 은일한 삶을 꿈꾸고 있었기에 걸림이 없이 자유롭게 방랑하는 백광훈이 부러웠을 것이다. 백광훈은 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또 이산해, 최경창, 최립고담(孤潭) 이순인(李純仁, 1533∼1592), 중호(重湖) 윤탁연(尹卓然, 1538∼1594), 청천(菁川) 하응림(河應臨, 1536~1567),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 등과 더불어 선조(宣祖) 대 팔문장(八文章)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해에 김성원은 생원과 진사를 뽑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임억령의 사위가 되었다.   


1559년(명종 14) 전라도에 심한 가뭄이 들어 농민들이 큰 고통을 받았다. 64세의 임억령은 담양의 백성들을 위해 '기우성황신문(祈雨城隍神文)'을 지어 성황신에게 비를 빌었다. 그는 '고을(邑)은 신(神)에 의지하고‚ 신은 백성(民)에 의지하니 백성과 신은 그 형세가 공존(相因)하는 것이므로 먹지 못하면(無食) 백성도 없고(無民), 백성이 없으면 신도 없으니(無神) 죄없는 백성에게 비를 내려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또 칠언시 형태의 '용추기우제문(龍湫祈雨祭文)'을 지어 용추(龍湫)의 용왕에게도 비를 빌었다. 


7월 27일 임억령은 담양부사에서 물러났다. 겨울이 되자 김인후가 임억령을 찾아와 밤새도록 시주를 나눴다. 두 사람은 을사사화 때 함께 벼슬을 내던지고 낙향할 만큼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반가움에 임억령이 먼저 시를 읊었다. 


그대는 이제 병든 늙은이라서, 대은동 깊숙이 깃들어 사네

사립문 두들기는 사람도 없어, 대낮에도 이불 끼고 산다오


당시 전라도 장성에 살고 있던 김인후는 병이 들었던 모양이다. 늙고 병들면 찾아오는 사람도 없게 마련이다. 병들고 외로운 김인후를 위로하는 시다. 김인후도 답시를 읊었다. 


갈 곳이 있어 대문을 나섰는데, 길 잃고 화양동에 들어 왔구려.

시선이 이 사이에 깃들어 있어, 한 골짜기 한가한 구름이 꼈네.


김인후는 성산을 화양동(華陽洞), 임억령을 시선(詩仙)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시선 하면 당나라 이백이 아니던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중화(中華)'의 ‘화(華)’, '일양래복(一陽來福)'의 ‘양(陽)’을 따서 '화양동(華陽洞)'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처럼 화양동이라는 이름에는 조선조 유학자들의 뿌리깊은 숭명사대주(崇明事大主義)의 사상이 깊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역(周易)'에서 상괘(上卦) 곤괘(坤卦, ☷)와 하괘(下卦) 진괘(震卦, ☳)로 이루진 복괘(復卦)는 하나의 양(陽)이 다섯 음(陰)의 아래에 생기는 형상으로 음이 지극한 곳에서 양이 점차 회복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양은 군자의 도(道)를 상징하므로 복괘는 사라졌던 군자의 도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는 길한 괘다. 따라서 화양은 ‘되돌아간다(反, 復)’는 뜻이니, 지금의 혼탁한 세상은 반드시 바른 세상으로 돌아가고, 지금의 은거도 언젠가는 세상에 나아가 도를 실천하는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임억령에게 성산은 강호에서 은일한 삶을 살아가는 은거지인 동시에 학문을 도야하는 공간이자 계산풍류(溪山風流)와 문학의 근거지였으며, 또 그가 관직에 나아가거나 물러나는 거점이었다.


임억령이 또 읊었다. 그는 김인후를 빙옥에 비유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빛을 주는 그런 존재라고 칭송하면서 두 사람이 격의없이 시주를 나누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부귀와 영화도 버리고 곡구(谷口)의 정자진(鄭子眞)처럼 강호에서 농사나 지으며 은자로 살아가겠다는 강호가였다. 

  

하서는 빙옥 같은 모습을 지녀서, 그 빛이 옆사람을 비쳐주네

사람들 좀처럼 가까이 못 하는데, 오활한 이 늙은이와 친하네

손을 잡고 설월을 마주 대하고, 긴 파람에 온 이웃들 놀래키네

아무리 도성 안에 산다 하지만, 적막한 골짜기와 뭐가 다르리

거문고 책 좌우로 널려 있고, 술병은 한가운데 마련해 놓았네

술은 청주와 탁주가 섞여 나오고, 붓 휘두르면 귀신도 놀래라

얻고 잃음은 변방의 말 같아서, 영고와 성쇠 하늘에 맡겼다오

부귀와 영화는 나의 소원 아니니, 은자 정자진을 따르는 걸세


김인후도 답시를 지어 읊었다. 그는 임억령이 속세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라 친하기 어렵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사람이라고 칭송한 다음  두 사람의 교유가 더없이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석천옹 그 모습 당당하고 빼어나니, 어찌 속세 중의 사람이랴

그 풍채 일찌기 우러러 사모했지만, 한번 웃고 친하기 어렵네

화산의 언덕에 살 때는, 매일 구름과 소나무 벗삼아 소요했네

마침 눈이 온 뒤에 찾아와, 차가운 시냇가에서 문을 두드렸네

아이 불러 따뜻한 방으로 맞이하고, 한가히 시화 주고 받았지

당의 문을 열고 말술 내와, 읊고 노래하니 심신이 화평하여라

격자창엔 따스한 햇볕 찾아 들고, 솔바람 소리도 풍류를 아네

술에 취해서 말타고 돌아오니, 흥겨운 이 맛을 뉘라서 알리요

 

'화산(華山)' 또는 '화악(華嶽)'은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의 옛 이름이다. 임억령이 한양의 조정에 있을 당시 그의 거처는 삼각산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담양부사에서 물러난 임억령은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갔다. 그는 사위 김성원에게 송별시를 남기고 해남의 본가를 향해 떠나갔다.


산과 물 좋아하여 난간에 올라도 보고, 소나무 사랑하여 뜰에서 또 서성이네

돌아오는 봄에 다시 만나고자 하니, 나를 위해 이 바위경치나 다스려 주시게


성산의 아름다운 암경(岩景)을 보러 내년 봄에 다시 올 것이니, 사위에게 성산의 정자원림 관리를 부탁한다는 시다. 김성원은 장인을 배웅하면서 답시를 지어 읊었다. 

  

가시덤불 벤 언덕엔 난초 자라나고, 오동을 심은 뜰엔 봉황이 내려왔네요

우의를 머물게 하여도 붙들 수 없으니, 긴 창문 밖에 가을비만 내리는군요


벽오동을 심은 뜻은 봉황을 보고자 한 것이다. 봉황은 바로 선산 임씨가 낳은 당대 최고의 스타 시인 임억령이었다. 가을비가 정든 장인과의 이별을 더욱 구슬프게 하고 있다.  


해남군 해납읍 해리 금강산 금강골


해남으로 돌아간 임억령은 담양과 강진의 별장을 오가며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했다. 유가적 이념을 지닌 사대부로서 임억령은 경국제민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너무나 컸으며, 거기서 오는 갈등 또한 심각했다.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임억령이 선택한 것은 바로 귀거래(歸去來)였다. 그의 현실 극복을 위한 귀거래 의식은 '차정중운(次正中韻)'에 잘 나타나 있다. 


차정중운(次正中韻) - 정중의 시에서 차운하다


秋陰和露曉霏霏(추음화로효비비) 가을 음기 이슬과 섞여 새벽엔 서리 무성하고

日色悠陽映戶微(일색유양영호미) 아침 햇살 노을 같이 창에 희미하게 비치누나

性癖琴書長作伴(성벽금서장작반) 성품은 거문고와 책 가까이 하는 병 지녔지만

身單童僕暫相依(신단동복잠상의) 외로운 몸 어린 하인과 서로 의지하며 지내네

抛人日月看相落(포인일월간상락) 버림을 받은 사람은 해와 달도 멀리함 알겠고

入夢江湖覺卽非(입몽강호각즉비) 꿈속에서 보았던 강호는 깨고 보면 곧 아니네
歲歲重陽常遠客(세세중양상원객) 해마다 중양절엔 저 멀리 나그네 신세 되리니
江花無主照柴扉(강화무주조시비) 주인 없는 사립문에 갈대 꽃만 홀로 비춰주리


'차중정운(次正中韻)'은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을 때 지은 시다. 가을의 싸늘한 기운은 버림받은 몸을 더욱 외롭게 한다. 버림을 받았기에 해와 달도 멀리하는 듯하다. 해와 달도 멀리한다는 것은 임금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의미도 있다. 꿈에 본 강호가 깨어나면 곧 아니고, 주인 없는 사립문에 자라난 갈대꽃만을 비춰준다는 구절에서 더욱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임억령의 귀거래 의식은 유가적 세계관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노장적 세계관으로 해결하려고 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귀거래 의식은 현실 참여를 거부하고 도피하는 도가적 은둔(隱遁)이 아니라 잠시 현실에서 물러나 심신을 수련하면서 자연주의적 삶을 추구하는 유가적 은일()에 가깝다. 사실 은일은 조선의 유자들에게 최고의 덕목 가운데 하나였다. 


어느 날 백광훈은 스승 임억령을 모시고 땅끝으로 여행을 떠나 바닷가 절에서 하루 묵었다. 이때 백광훈이 쓴 시가 '옥봉시집(玉峰詩集)' 상권에 실려 있는 '해림사차석천선생(海臨寺次石川先生)'이란 제목의 오언절구다.


해림사차석천선생(海臨寺次石川先生) - 땅끝 바닷가 절에서 석천 선생과 묵다(백광훈)

 

幽人夜不寐(유인야불매) 은거하시는 분임에도 밤에 잠 이루지 못하시고

月出鳥驚棲(월출조경서) 달이 뜨니 새들도 잠자리에서 깜짝깜짝 놀라네

多少秋山葉(다소추산엽) 가을 산은 이미 단풍이 바알갛게 물들어가는데

還愁舊路迷(환수구로미) 옛날 벼슬길 생각에 시름겨워하시는 건 아닐지


단풍이 붉게 물드는 가을 달 밝은 밤 잠 못 드는 임억령을 바라보면서 스승이 옛날의 소위 잘 나가던 때의 벼슬길을 생각하고 혹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고 떠보는 시다. 임억령이 이 시를 보았다면 가슴이 뜨끔했을지도 모르겠다. '해림사(海臨寺)'는 절 이름이 아니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이름 없는 암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차(次)'는 여기서 '묵다'의 뜻이다. '조경(鳥驚)'의 숨은 뜻을 알아야 한다. 새들이 놀란 것은 떠오른 달 때문이 아니다. 환하게 떠오른 달을 보기 위해 문을 '덜커덩' 하고 여는 소리에 놀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