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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11 - 식영정가단이 형성되고 '식영정제영'을 짓다

林 山 2017. 12. 11. 19:10

어느 날 식영정에 들른 면앙정의 주인 송순은 정자에 걸려 있는 '식영정운(息影亭韻)'에서 차운하여 '차김상사성원식영정운(次金上舍成遠息影亭韻)'이란 제목의 오언사운(五言四韻) 2수를 지었다. 원운시는 아마도 임억령의 사위 김성원이 지었던 것 같다. 운자는 '정(亭), 성(星), 정(庭), 경(扃)’이다. 


차김상사성원식영정운(次金上舍成遠息影亭韻) -김상사 성원의 식영정운에서 차운하다(송순)


維南多勝地(유남다승지) 남쪽에는 승지도 정말 많아

隨處有林亭(수처유림정) 가는 곳마다 멋진 정자로세

我臥村爲企(아와촌위기) 내 지내는 마을은 기촌이고

君居山是星(군거산시성) 그대 거하는 산은 별뫼일세

親疎同世分(친소동세분) 친소는 달라도 정분은 있어

來往一家庭(내왕일가정) 한 집안처럼 서로 오간다네

匹馬尋常到(필마심상도) 말 타고 언제든지 들르리니

松關愼勿扃(송관신물경) 솔빗장 아예 닫지 마시기를


息影與環碧(식영여환벽) 식영정에 또 저 환벽당마저

今爲魯衛亭(금위노위정) 이제는 노위의 정자 되었네

溪山明似錦(계산명사금) 시내와 산은 비단같이 곱고

第宅列如星(제택열여성) 집들은 별처럼 늘어서 있네

自可同風月(자가동풍월) 본래부터 풍월도 함께 하여

元非異戶庭(원비이호정) 모두가 한 식구로 지낸다네

只憐瀟灑老(지련소쇄노) 다만 소쇄옹이 안타까운 건

衰草沒雲扃(쇠초몰운경) 시든 풀 무덤에 누웠음이라


이 시의 앞부분에 '때는 계해년(1563년) 가을, 주인 김군이 임석천을 위하여 새로 이 정자를 지어주니 석천이 식영이라 이름 붙였다.', 뒷부분에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이 일동의 삼승(一洞之三勝)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때에 소쇄옹이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구에 그를 기리는 글을 적는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연보에는 1545년에 서하당, 1560년에 식영정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식영정과 서하당 두 정자의 건립 연대에 대한 보다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이 시로 볼 때 송순은 식영정을 자주 드나들면서 임억령과 가깝게 지내며 시주를 나눴음을 알 수 있다. '노위(魯衛)'는 '정여노위(政如魯衛)'에서 유래했다. 중국 노(魯)나라의 시조 주공(周公)과 위(衛)나라의 시조 강숙(康叔)이 형제인 데에서 온 말이다. 두 나라의 정치가 서로 비슷함을 가리킨다.


담양 식영정


기대승도 식영정에 종종 들러서 임억령과 시주를 나눴다. 기대승은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이란 제목의 시 5수를 지었다.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는 임억령과 김성원의 은일한 삶을 예찬하는 시다.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 - 식영정운에서 차운하다(기대승)


昔拜石川老(석배석천노) 옛날에 석천옹을 찾아 뵙고자

徘徊松下亭(배회송하정) 소나무 밑 정자에서 서성였네

人間猶脫屣(인간유탈사) 인간 세계 헌신처럼 내던지고

天上自騎星(천상자기성) 하늘에 올라가서 별을 타리라

落日雲生岫(낙일운생수) 석양 구름은 멧부리에서 나고

秋風葉滿庭(추풍엽만정) 갈바람에 낙엽 뜰에 가득하네

逢君言勝槪(봉군언승개) 그대에게 승경 이야기 들으니

吾欲款幽扃(오욕관유경) 나도 그윽한 곳을 찾아가고파


息影初無作(식영초무작) 식영은 본래 지음도 없음인데

憑高更製亭(빙고갱제정) 높은 곳에다 정자 만들었구나

衆山擎落日(중산경낙일) 뭇산들은 떨어지는 해 받들고

一水帶飛星(일수대비성) 한줄기 물에는 별빛이 담겼네

雨罷苔連竹(우파태련죽) 비오자 이끼 대밭까지 퍼지고

春深鳥下庭(춘심조하정) 한봄이라 새들 뜰에 내려앉네

逍遙自得意(소요자득의) 소요하며 스스로 뜻 얻은지라

空復掩柴扃(공부엄시경) 부질없이 사립문 다시 닫았네


棲霞成一室(서하성일실) 서하당에 방 한칸을 들였는데

息影有孤亭(식영유고정) 식영이란 외로운 정자도 있네

俯仰看天地(부앙간천지) 굽히고 우러러 천지 바라보며

行藏問日星(행장문일성) 나가고 숨음을 성신에게 묻네

桑麻翳幽徑(상마예유경) 뽕나무 삼대는 오솔길 가리고

鳥雀噪荒庭(조작조황정) 새떼는 묵은 뜰에서 지저귀네

寂寞何人到(적막하인도) 적막한 곳이라 누가 찾아올까

松關只自扃(송간지자경) 솔빗장 스스로 닫아 걸었는데


吾友金剛叔(오우김강숙) 나의 동무인 김강숙 성원군은

松間作草亭(송간작초정) 소나무 사이에 초정을 지었네

里名今道石(리명금도석) 마을 이름은 석리라 이르는데

山號舊聞星(산호구문성) 산도 예부터 성산이라 들었네

命駕思探勝(명가사탐승) 수레 마련하여 탐승 생각하고

開襟行步庭(개금행보정) 흉금을 열고 정원을 거닐리라

春風可相約(춘풍가상약) 봄바람에 서로 기약할 만하니

紅綠映林扃(홍록영림결) 숲속 문에 울긋불긋 비치누나


石底溪邊宅(석저계변택) 바위벼랑 아래 시냇가 집에는

編茅起小亭(편모기소정) 띠풀로 자그마한 정자 세웠네

閒身朝倚柱(한신조의주) 아침엔 한가히 기둥에 기대고

幽思夜觀星(유사야관성) 밤에는 그윽하게 별을 보노라

露藥紅迷牖(로약홍미유) 촉촉한 작약 창에 발그레하고

霜篁翠覆庭(상황취복정) 서리맞은 대숲 뜨락을 덮누나

時聞酒熟(시문사주숙) 마을에 술이 익었다는 소문에

扶杖出雲扃(부장출운경) 지팡이 짚고 구름문을 나서네


'天上自騎星(천상자기성)'은 '장자莊子)' <大宗師>에 '부열(傅說)은 동유(東維)를 타고 기미(箕尾)에 올라 열성(列星)과 견준다.'고 하였다. 훌륭한 사람은 죽어도 영혼이 흩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 - 식영정운에서 차운하다(기대승)


草色看如積(초색간여적) 풀빛을 바라보니 쌓인 듯하고

光乍到亭(춘광사도정) 봄빛은 그새 정자에 이르렀네

嬌陰迷遠樹(교음미원수) 그늘은 멀리 나무에 희미하고

輕霧動晴星(경무동청성) 안개 날아가자 별이 반짝이네

酒熟斟盈斝(주숙짐영가) 농익은 술 가득하게 따르는데

花開墜在庭(화개추재정) 꽃이 피더니 뜨락에 떨어지네

無人與來往(무인여래왕) 서로 내왕하는 사람도 없으니

谷鳥喚巖扄(곡조환암경) 골짝 새만 바위문에 우는구나


淡淡松風起(담담송풍기) 솔솔 소나무에 바람 일어나니

微凉滿一亭(미량만일정) 서늘한 기운 정자에 가득하네

琴書携驥子(금서휴기자) 거문고와 책에 인재도 데리고

耕耨任奴星(경누임노성) 논밭 일은 하인들에게 맡겼네

急雨聲搖壑(급우성요학) 소나기 소리는 골짝에 울리고

明虹影過庭(명홍영과정) 무지개 그림자 뜨락을 지나네

翛然罷幽夢(소연파유몽) 쓸쓸히 깊은 꿈에서 깨어나니

步屐到前扄(보극도전경) 어느덧 대문 앞에 이르렀다네


寥廓天開境(료곽천개경) 드넓은 하늘은 지경을 열었고

朣朧月照亭(동롱월조정) 달은 몽롱하게 정자를 비추네

良宵生逸興(량소생일흥) 기막힌 밤이라 흥취 일어나고

皓彩失恒星(호채실항성) 밝은 광채에 별빛을 잃는구나

玉露頻翻袖(옥로빈번수) 이슬은 자주 소매에 묻어나고

金花半隱庭(금화반은정) 금국화는 반쯤 뜨락에 숨었네

凝神愜淸賞(응신협청상) 마음 집중하여 맑게 감상하니

信有機扄(불신유기경) 문이 잠기었음을 믿지 않노라


搖落驚山樹(요락경산수) 잎 떨어져 산나무 놀래키더니

瓊瑤復擁亭(경요부옹정) 옥구슬이 다시 정자를 덮었네

人間堪臥雪(인간감와설) 사람 눈속에 누워있을 만한데

歲去自周星(세거자주성) 세월은 흐르고 별은 돌아오네

縹緲思玄圃(표묘사현포) 아스라이 먼 현포를 생각하고

蒼茫問大庭(창망문대정) 창망하게 조정 일도 물었노라

前溪西日照(전계서일조) 앞 시내에 저녁노을이 물드니

晩色靜林扄(만색정림경) 황혼빛이 숲 대문에 고요하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에 따라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은자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참 한가롭고 평화로우면서도 낭만적인 시다. 사상의 깊이와 물아일체의 경지가 느껴진다.   


'기자(驥子)'는 '기자용문(驥子龍文)'에서 유래한 말인데, 훌륭한 자제(子弟)를 뜻한다. 중국 후위(後魏) 때 배선명(裵宣明)의 두 아들 경란(景鸞)과 경홍(景鴻)은 모두 뛰어난 재주가 있어 경란을 기자(驥子), 경홍을 용문(龍文)이라고 불렀다. '노성(奴星)' 은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하인 이름이다. 하인, 노복의 뜻이다. 


'요락(搖落)​'은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려 떨아지는 풍경을 뜻한다. 당(唐)나라 시인 소정(蘇頲)의 '汾上驚秋(분상경추)'라는 시에 나오는 말이다. 


汾上驚秋(분상경추) - 분수에서 가을에 놀라다(소정)


북풍취백운(北風吹白雲) 북풍이 흰구름 불어 날리는데

만리도하분(萬里渡河汾) 만리 타향에서 분수를 건너네

심서봉요락(心緖逢搖落) 낙엽지는 계절 사무치는 생각

추성불가문(秋聲不可聞) 가을바람 소리 차마 못듣겠네


'와설(臥雪)'은 '와설면운(臥雪眠雲)'의 준말이다. '눈밭에 눕거나 구름 위에 잠을 잔다'는 뜻으로 자연과 하나가 된 삶을 산다는 뜻이다. '원안와설(袁安臥雪)' 고사(故事)를 화제(畵題)로 한 당(唐)나라 왕유(王維)의 그림이 있다. 동한(東漢)의 원안(袁安)이 아직 벼슬을 하지 않던 어느 날 낙양(洛陽)에 큰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눈을 쓸고 걸식을 하였지만, 어쩐 일인지 원안의 집 앞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사람들이 눈을 치우고 들어가 보니 원안은 방안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까닭을 묻자 그는 '공연히 돌아다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것이었다. 이이는 이 고사를 원안이 자신의 고요한 본성을 지킨(守靜) 즐거움으로 높이 평가했다.  


'현포(玄圃)'는 중국의 전설에서 천제가 살고 있다는 곳이다. 중국 곤륜산(崑崙山) 위에 있다고 전해지는 서왕모(西王母) 또는 선인의 거처라고도 한다.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 - 식영정운에서 차운하다(기대승)


歷盡山無等(력진산무등) 무등산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來尋息影亭(래심식영정) 그림자도 쉬는 식영정 찾았네

坐間排玉燭(좌간배옥촉) 자리 사이마다 촛불 배치하니

松裏見疎星(송리견소성) 솔밭 사이로 별빛 아스라하네

醉興渾抛蓋(취흥혼포개) 거나한 흥취에 술잔도 버리고

狂懷欲臥庭(광회욕와정) 분방한 심회 뜨락에 누이고저

明朝有何事(명조유하사) 아침에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幽磴不須扃(유등불수경) 깊은 돌길엔 빗장도 필요없네


淸風吹老樹(청풍취노수) 시원한 바람은 노거수에 불고

白日麗春亭(백일려춘정) 눈부신 해는 봄정자에 걸렸네

美酒傾三亥(미주경삼해) 좋은 술일랑 삼해를 기울이고

嘉蔬對五星(가소대오성) 맛좋은 나물 오성을 대하누나

從容見山水(종용견산수) 여유롭게 산과 물을 구경하고

偃蹇在門庭(언건재문정) 오연하게 문안 뜨락에 있도다

君與吾同趣(군여오동취) 그대는 나와 취향마저 같으니

徘徊雲滿扄(배회운만경) 구름 가득한 문가를 서성이네

   

기대승이 식영정을 찾아 임억령과 함께 술을 마시고 그 취흥을 읊은 시다. 임억령과 기대승 두 사람은 취향도 같아서 서로 의기투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해(三亥)'는 해(亥)의 일진(日辰)이 세 번 든 것인데, 그 해에는 장마가 진다는 말이 있다. 많이 마신다는 뜻이다. '오성(五星)'은 금ㆍ목ㆍ수ㆍ화ㆍ토 다섯별인데, 여러 가지 나물 반찬을 먹는다는 뜻이다. 


풍영정(風詠亭)의 주인 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 1503~1584)도 식영정에 들러 오언사운시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과 칠언절구를 남겼다. 김언거는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으로 낙향하여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에 풍영정을 짓고 이황, 김인후, 임억령 등 당대 최고의 학자,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 - 식영정운에서 차운하다(김언거)


天地容吾輩(천지용오배) 하늘과 땅 우리를 용납하시어

江湖一草亭(강호일초정) 강호에 아담한 초정 세워졌네

君顔方濯濯(군안방탁탁) 그대의 얼굴은 한창 빛나는데

我髮已星星(아발이성성) 나의 머리는 이미 새하얗구려

峽月常留榻(협월상류탑) 산달은 언제나 평상에 머물고

雲山自遶庭(운산자요정) 구름산은 저절로 뜰을 둘렀네

他時風雪夜(타시풍설야)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 밤이면

乘興扣巖扃(승흥구암경) 흥 올라 바위빗장 두드리려네


名園亭子倚層陰(명원정자의층음) 멋진 동산의 정자 높은 그늘 기대고

息影題扁謝世心(식영제편사세심) 편액 속 식영은 속세의 뜻 떠났구려

松老石川餘舊藻(노송석천여구조) 솔처럼 늙은 석천의 옛글 남아 있어

釣臺斜日獨登臨(조대사일독등림) 조대 해거름 혼자 올라 내려다 보네


정철도 송순, 김언거, 기대승과 같은 운자를 써서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을 지었다. 주역과 별자리 점을 잘 보는 은자가 거문고를 잘 타서 자주 찾게 된다는 내용의 시다.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 - 식영정 운에 차운하다(정철)


幽人如避世(유인여피세) 숨어사는 사람이 세상을 피하여

山頂起孤亭(산정기고정) 산정에 외로운 정자를 세웠구나

進退朝看易(진퇴조간역) 아침엔 주역으로 진퇴를 정하고

陰晴夜見星(음청야견성) 저녁에는 별자리로 날씨를 아네

苔紋上古壁(태문상고벽) 이끼무늬는 해묵은 벽을 오르고

松子落空庭(송자락공정) 솔방울은 빈 뜨락에 떨어지누나

隣有携琴客(린유휴금객) 이웃에 거문고 연주가가 있어서

時時叩竹扃(시시고죽경) 때때로 대나무 사립을 두들기네


秋山落葉滿(추산낙엽만) 가을 산기슭에 낙엽은 가득한데

何處問君亭(하처문군정) 그대의 정자를 어디에서 물을꼬

一水低殘月(일수저잔월) 물위엔 새벽녘의 달이 나직하고

中天耿小星(중천경소성) 하늘에는 작은 별이 깜박거리네

虫音滿幽室(충음만유실) 벌레소리 깊숙한 방에 가득한데

樹影散空庭(수영산공정) 나무 그림자는 빈뜰에 흩어졌네

時復攬衣出(시부람의출) 때때로 옷자락 걷어부치고 나와

手開巖畔扃(수개암반경) 바위에 걸쳐놓은 빗장을 여나니


'유인(幽人)은 산정에 식영정을 세운 김성원을 비유한 것이다. 정철이 김윤제의 외손녀사위였기 때문에 김성원은 그와 처외재당숙(妻外再堂叔) 간이었다. 김성원은 시에도 능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한다. 


고경명은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 외에도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 '식영정사시영화고봉(息影亭四時詠和高峯)' 등 많은 식영정제영을 남겼다. 송순, 김언거, 기대승, 고경명, 정철 네 사람이 같은 운자를 쓴 것으로 보아 식영정가단(息影亭歌壇, 성산가단)의 일원으로서 자주 만나 시주(詩酒)를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임억령이 식영정에 머물자 송순, 김윤제를 비롯해서 성수침, 김인후, 유희춘, 기대승백광훈, 김성원, 고경명, 정철,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등 호남의 기라성(綺羅星) 같은 시인 문사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은 식영정에서 임억령과 힘께 계산풍류를 즐기면서 시주를 나눴다. 이들이 바로 식영정가단을 형성한 주요 인물들이다. 기대승과 백광훈,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은 임억령을 흠모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인의 모주(謀主) 송익필도 식영정을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정철과의 인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임억령은 식영정에 머물면서 성산과 그 주변의 경치를 읊은 연작제영시(連作題詠詩) '식영정제영(息影亭題詠)' 20수 등 수많은 한시들을 남겼다. 그가 식영정에서 지은 담양 성산 관련 한시는 줄잡아도 500여 수를 헤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억령의 '식영정제영' 편액 


식영정제영(息影亭題詠)-식영정 제목을 붙여 읊다(임억령)


광주광역시 충효동 취가정 앞 평모들에서 바라본 무등산


서석한운(瑞石閑雲) - 무등산의 한가로운 구름


溶溶嶺上雲(용용령상운) 산봉우리 위에 뭉게뭉게 이는 구름

纔出而還斂(재출이환렴) 겨우 나온 듯하더니 다시 흩어지네

無事孰如雲(무사숙여운) 일이 없다면 누구나 다 구름같으니

相看兩不厭(상간양불염) 마주 바라봐도 서로 싫증나지 않네


무등산 위로 한가로이 흘러가는 구름을 노래한 시다. '서석(瑞石)'은 무등산의 옛 이름이다. 무등산은 서석산 외에도 무돌뫼(무진악),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무진악은 무돌의 이두음으로 신라 때부터 쓰인 명칭이다. 무돌의 뜻은 무지개를 뿜는 돌이란 뜻이다. 무등산이란 이름은 서석산과 함께 고려 때부터 불려지기 시작했다. 


충효교에서 바라본 창계천


창계백파(蒼溪白波) - 창계의 흰 물결


古峽斜陽裏(고협사양리) 옛 골짜기는 저녁 노을에 잠기고

蒼龍噴水銀(창룡분수은) 푸른 용은 수은 머금어 뿜어내네

囊中如可拾(낭중여가습) 주머니에 물울 담을 수만 있다면

欲寄熱中人(욕기열중인) 더위 속 사람들에게 보내줄 텐데


석양에 물든 창계천(蒼溪川)의 물결을 묘사한 뒤 시원한 물을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보내주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애민사상이 담겨 있는 시다. 창계천은 지금 증암천(甑巖川)이라고 하며, 자미탄(紫薇灘), 죽록천(竹綠川), 송강(松江) 등의 별칭이 있다. 증암천은 무등산 북사면 꼬막재를 사이에 두고 원효계곡(元曉溪谷)과 절골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흘러 환벽당과 식영정 사이를 지나 성산호로 들어간다. 성산호에서 고서면의 북쪽으로 흐르던 증암천은 주산리(舟山里)에서 석곡천(石谷川)과 창평천(昌平川)을 합친 다음 봉산면 와우리(臥牛里)에서 영산강(榮山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수함관어(水檻觀魚) - 물가 난간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며 


吾方憑水檻(오방빙수함) 물가 난간에 기대 서 있노라니

鷺亦立沙灘(로역립사탄) 백로도 물가 모래톱에 서 있네

白髮雖相似(백발수상사) 흰 머리털은 비록 서로 같지만

吾閑鷺不閑(오한로불한) 난 한가한데 백로 홀로 바쁘네


난간에서 바라보는 물가의 서경(敍景)과 느낌을 읊은 시다. 백로와의 대조를 통해서 시인의 유유자적한 삶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은 정자로 모이고, 해오라기는 모래 여울로 모인다. 사람의 머리털과 해오라기의 깃털이 하얀 것은 같지만 하는 행동은 전혀 다르다. 정자는 선비들에게 학문과 휴식의 공간이지만 물가 모래톱은 백로에게 생존의 현장이다. 물고기는 시인에게 관조의 대상이지만 백로에게는 먹이일 뿐이다. 여기서 백로는 출세를 위해 환로(宦路)에 매몰되어 바쁘게 살아가는 벼슬아치들을 풍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정치적 상황에 의한 부침에 따라 자의든 타의든 벼슬에서 물러나 정권에서 소외된 선비들은 산간벽지 명승지에 누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울분과 불만을 해소했다. 또 같은 처지의 선비들은 누정을 중심으로 유유상종(類類相從) 모여들어 조정의 실정과 탐관오리들을 비판하고, 언젠가 경국제민(經國濟民)하게 될 날을 꿈꾸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동지의식을 공유했다.


양파종과(陽坡種苽) - 양지바른 언덕에 외를 심으며


有陰皆可息(유음개가식) 그늘에서는 모두가 쉴 수 있듯

何地不宜苽(하지불의과) 어느 땅인들 외를 심지 못하랴

細雨荷鋤立(세우하서립) 가랑비에 호미 메고 서 있으니

蕭蕭沾綠蓑(소소첨록사) 도롱이 소슬히 비에 젖어 오네


가랑비가 내리는 날 오이를 심는 시골의 한가하고 여유로운 삶을 노래한 시다. 도롱이를 입은 시골 노인이 호미를 든 채 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벽오량월(碧梧涼月) - 벽오동나무에 떠오른 서늘한 달


秋山吐涼月(추산토량월) 가을 멧부리가 서늘한 달을 토하여

中夜掛庭梧(중야괘정오) 한밤중 오동나무 높이 걸어 놓았네

鳳鳥何時至(봉조하시지) 봉황새는 그 어느 때나 이르려는가

吾今命矣夫(오금명의부) 나에게는 살아갈 날도 얼마 없는데


시인은 뜰의 벽오동나무에 걸린 달을 바라보면서 봉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봉황이 나타나면 태평성대가 된다고 했다. 봉황은 성군을 상징한다. 시인이 죽기 전까지 태평성대를 가져올 성군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봉황은 기린, 거북, 용과 함께 영물(靈物)로 여겨져 왔다. 고대 중국인들은 봉황이 출현하면 군자가 천자의 자리에 오른다고 믿었다. '장자(莊子)' 〈추수(秋水)〉 편에 '봉황은 벽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도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도 않으며,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옛날 출세와 부귀영화를 꿈꾸던 사람들은 봉황이 날아오기를 고대하며 뜰에 벽오동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다 안오시뇨.....'라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창송청설(蒼松晴雪) - 푸른 소나무에 눈부시게 하얀 눈


萬徑人皆絶(만경인개절) 길마다 사람 자취 모두 끊어지고

蒼松蓋盡傾(창송개진경) 창송은 눈을 못 이겨 기울어졌네

無風時落片(무풍시락경) 바람도 없을 때 눈송이 떨어지니

孤鶴夢初驚(고학몽초경) 외로운 학 꿈꾸다 후다닥 놀라네


폭설이 내리고 난 뒤 날이 화창하게 개면서 소나무 위에 쌓인 눈이 눈부시게 빛나는 강촌의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당송(唐宋) 8대가 중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의 '강설(江雪)'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폭설이 내린 적막강산의 숨막히는 풍경을 '萬逕人踪滅(만경인종멸)'이라고 노래한 유종원, '萬徑人皆絶(만경인개절)'이라고 읊은 임억령의 시상이 놀랍도록 같지 않은가! 


성산호반의 동강조대


조대쌍송(釣臺雙松) - 낚시터의 두 소나무


雨洗石無垢(우세석무구) 빗물에 씻긴 바위는 티끌 하나 없고

霜侵松有鱗(상침송유린) 서리 맞은 소나무는 비늘 있는 듯해

此翁唯取適(차옹유취적) 이 늙은이 오로지 알맞음만 취할 뿐

不是釣周人(부시조주인) 세월 낚던 주나라 그 사람 아니라네


시인은 자연 속에서 한가하게 유유자적하고자 하며, 고기를 낚는 것에는 뜻이 없다. 시인이 낚고자 한 것은 세월이다. 세월을 낚는 듯이 보였던 강태공(姜太公)은 사실 주(周) 문왕(文王)의 마음을 낚고자 했다. 주 문왕이 자신을 만나러 올 때까지 강태공은 낚시질 시늉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강호에 은둔한 채 지조와 절개를 강조하면서 안빈낙도가를 불렀던 선비들도 대부분 강태공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임억령은 강태공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주인(周人)'은 주나라의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 곧 강태공이다. 문왕을 도와 은(殷)나라를 격파한 그는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으로 제(齊)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다. 태공망이라는 이름은 문왕이 웨이수이(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 선군인 태공(太公)이 오랫동안 바라던 어진 인물이라고 여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환벽영추(環碧靈湫) - 환벽당의 영추


澄湫平沙浪(징추평사랑) 용소 평평한 모래톱엔 물결 일고

飛閣望如船(비각망여선) 날아갈 듯한 정자 배처럼 보이네

明月吹長笛(명월취장적) 쏟아지는 달빛 아래 젓대를 부니

潛蛟不得眠(잠교부득면) 물속 이무기도 잠 못들어 하노라


'영추(靈湫)'는 환벽당 아래에 있던 못을 말한다. 영추를 옛날에는 용소(龍沼) 또는 용추(龍湫)라고도 불렀다. 영추 맑은 못의 물에 비친 환벽당이 배처럼 보인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시인의 젓대 부는 솜씨는 물속의 이무기도 잠 못 들어 할 만큼 일품이었던 모양이다.   


송담범주(松潭泛舟) - 송담에서의 뱃놀이


明月蒼松下(명월창송하) 밝은 달 푸르른 소나무 아래에

孤舟繫釣磯(고주계조기) 외로운 배 낚시터에 매어 놓자

沙頭雙白鷺(사두쌍백로) 모래톱에 있던 해오라기 한 쌍

爭拂酒筵飛(쟁불주연비) 다투어 술자리 위를 빙빙 도네


달밤에 소나무가 둘러선 연못에서 뱃놀이를 마치고 술자리를 벌이자, 모래톱에 있던 해오라기 한 쌍이 한 자리 차지하려는 듯 낮게 날면서 빙빙 도는 정경을 노래한 시다. 환상적인 달밤에 뱃놀이가 끝난 뒤 가진 술자리는 꽤나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석정납량(石亭納涼) - 석정의 피서


礙日松爲蓋(애일송위개) 소나무를 양산삼아 햇빛 가리고

搘頤石作床(지이석작상) 바위로는 평상삼아서 턱을 괴네

蕭然出塵世(소연출진세) 호젓이 티끌세상 벗어난 듯하여

六月裌衣涼(유월협의량) 유월 삼복인데 겹옷도 서늘하네


음력 유월 소나무 그늘 아래 바위에 턱을 괴고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피서를 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한여름 산림의 그늘에서는 겹옷을 입어도 서늘할 때가 있다.   


학동모연(鶴洞暮煙) - 학동의 저녁 연기


孤煙生野店(고연생야점) 한 줄기 연기 주막집에서 일어나

漠漠帶山腰(막막대산요) 아스라이 산허리 띠 같이 둘렀네

遙想松間鶴(요상송간학) 멀리 소나무 사이에서 졸던 학이

驚飛不下巢(경비불하소) 놀라서 날더니 통 내려오지 않네


들판 주막집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산허리를 띠처럼 두르고 있다. 학은 그 연기에 놀라서 날아올랐다가 둥지로 내려올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강촌의 평화로운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한 시다.  


평교목적(平郊牧笛) - 들녘 목동의 피리소리


牧童倒騎牛(목동도기우) 목동이 소를 거꾸로 타고서

平郊細雨裏(평교세우리) 들녘 가랑비 맞으며 가는데

行人問酒家(행인문주가) 나그네 주막집을 물어 보니

短笛山村指(단적산촌지) 단소로 저 산마을 가리키네


목동이 소를 거꾸로 타고 가랑비를 맞으며 들판을 가로지르는 풍경은 가히 목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우도(尋牛圖)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단교귀승(短橋歸僧) - 다리를 건너 돌아가는 스님


深峽橫沙路(심협횡사로) 모랫길은 산속 깊은 골 가로지르고

孤村照夕曛(고촌조석훈) 외로운 마을엔 저녁 노을이 비치네

一筇潭底影(일공담저영) 대지팡이 그림자 연못에 드리운 채

雙眼嶺頭雲(쌍안령두운) 두 눈은 산마루 구름을 바라보누나


고즈넉한 산마을엔 석양이 비치고, 산골짜기를 가로지른 모랫길을 걸어가던 스님은 다리에 우두커니 서서 산마루에 걸린 구름을 바라본다. 스님은 구름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인생은 뜬구름 같은 것.....    


백사수압(白沙睡鴨) - 모래톱에서 조는 오리


溪邊沙皎皎(계변사교교) 시냇가 모래밭은 희디 희고 

沙上鴨娟娟(사상압연연) 모래톱 오리는 곱디 고우네

海客忘機久(해객망기구) 나그네는 속세 잊은지 오래

松間相對眠(송간상대면) 솔 사이에서 함께 졸고 있네


속세를 잊은 나그네가 고운 오리와 소나무 사이에서 마주보고 졸고 있다. 나그네는 시적 화자다. 자연과 시적 화자가 하나가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노래한 시다.   


노자암(鸕鶿巖) - 가마우지 바위


蒼松水中央(창송수중앙) 창송은 물 한가운데 서있고

夕陽明滅處(석양명멸처) 저녁 노을이 어른거리는 곳

鸕鶿驚路人(노자경로인) 가마우지 그만 행인에 놀라

飛向靈湫去(비향영추거) 영추를 향해 날아가 버리네


가마우지가 노닐던 노자암의 풍경을 노래한 시다. 옛날에는 자미탄에 가마우지도 살았던 모양이다. 가마우지는 물고기를 잘 잡기 때문에 고기잡이용으로 길들이기도 했다. 


담양 명옥헌 연못의 자미화


자미탄(紫微灘) - 배롱꽃 여울


誰把中書物(수파중서물) 누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今於山澗栽(금어산간재) 여기 골짝에 배롱꽃 심었나

仙糚明水底(선장명수저) 선녀같은 단장 물에 비치니

魚鳥亦驚猜(어조역경시) 고기도 새도 놀라 시샘하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배롱꽃 여울(자미화)을 노래한 시다. 증암천은 배롱꽃, 곧 자미화(紫薇花)가 아름다워 자미탄(紫薇灘)이라고도 부른다. 7~8월 배롱꽃이 필 무렵 식영정은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한다. 배롱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물 위에 떨어진 꽃잎들이 수면을 온통 진분홍색으로 물들이는 장관이 연출된다. 고기도 새도 놀라서 시샘할 만큼 말이다. 


도화경(桃花逕) - 복사꽃 길 


石徑雲埋小(석경운매소) 돌길 구름에 가려 짧아지고

桃花雨剪齊(도화우전제) 복사꽃 봄비에 우수수 지니

更添今日寂(갱첨금일적) 오늘은 더 더욱 적막하구나

正似昔人迷(정사석인미) 옛사람 헤맨 곳이 여기던가


가파른 산 돌길에는 구름이 짙게 끼어 있고, 봄비에 복사꽃 우수수 떨어지니 더욱 적막하다. 옛사람이나 시인이 찾아가려는 곳은 도화원경(桃花源境)인지도 모르겠다. 도화원경, 곧 무릉도원 (武陵桃源)은 속세를 떠난 사람들의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떠오르게 하는 시다.     


방초주(芳草洲) - 향풀 우거진 모래톱


晴沙明似雪(청사명사설) 하얀 모래는 눈처럼 빛나고

細草軟勝綿(세초연승면) 어린 풀은 솜보다 부드럽네

中有白頭叟(중유백두수) 가운데 흰머리 늙은이 있어

閒隨黃犢眠(한수황독면) 한가로이 송아지 따라 조네


이 시도 '백사수압(白沙睡鴨)'처럼 물아일체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향풀이 우거진 모래톱에서 가운데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누런 송아지와 함께 꾸벅꾸벅 졸고 있다. 이 얼마나 한가로운 정경인가!


서하당의 부용당


부용당(芙蓉塘) - 연꽃 피는 연못

 

白露凝仙掌(백로응선장) 흰 이슬 연잎에 맺혔는데

淸風動麝臍(청풍동사제) 맑은 바람 사향내 감도네

微詩可以削(미시가이삭) 졸시는 다듬을 수 있지만

妙語有濂溪(묘어유염계) 묘한 말은 염계에 있구나


부용당의 연잎에 맺힌 이슬과 사향내를 머금은 맑은 바람을 노래하면서 송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을 신묘한 말이라고 감탄하는 시다. 부용당(芙蓉塘)은 서하당 바로 서쪽에 나란히 앉아 있는 부용당(芙蓉堂) 앞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선장(仙掌)'은 연잎을 의인화한 표현이다. '염계(濂溪)'는 중국 후난성(湖南省) 도현(道縣)에 있으며, 소수(瀟水)로 흘러 들어가는 시냇물이다. 주돈이는 그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 '애련설'에서 주돈이는 연꽃이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기에 군자의 꽃이라고 극찬했다.  


선유동(仙遊洞) - 신선이 노니는 동천


蒼溪小洞天(창계소동천) 푸른 시내 감도는 작은 동천은

明月淸風裏(명월청풍리) 밝은 달 시원한 바람 속이로다

時下羽衣翁(시하우의옹) 그 때 마침 우의옹 내려오는데

不知何道士(부지하도사) 무슨 도사인지 알 수 없네그려


庚寅暮春不肖後孫奉錫謹揭(경인모춘불초후손봉석근게) 경인년 늦봄 불초 후손 봉석이 삼가 걸다


창계천이 감도는 청풍명월의 선경 소동천에 날개옷을 입은 노인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무슨 도사인지는 알 수 없다. '동천(洞天)'은 하늘과 통하거나 신선이 사는 곳이다. '우의(羽衣)'는 선녀(仙女)나 도사(道士)가 입는다는 새의 깃으로 만든 날개옷이다. 


임억령은 조선시대 다른 시인들에 비해 오언절구나 오언율시를 특히 많이 남겼다. 오언시는 칠언시에 비해 시상의 표현이 비교적 자유롭고 쉬우며 간편하다. 그가 오언시를 많이 남긴 것은 자유분방한 그의 성품과도 관련이 있다. 


임억령은 제자들인 김성원과 고경명, 정철과 함께 식영정 4선(息影亭四仙)으로 일컬어졌다. 그래서 식영정을 사선정(四仙亭)이라고도 한다. 임억령은 또 김인후와 기대승, 양응정과 더불어 성산 4선(星山四仙)으로도 불렸다.   


조선 중기 담양 지방의 정자원림(亭子園林)은 한시, 시조, 단가, 가사문학 등 한국 고전문학의 산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담양의 임억령을 중심으로 한 식영정가단과 송순을 중심으로 한 면앙정가단(免仰亭歌壇)은 호남가단의 새로운 지평을 열면서 조선의 시가문학을 이끌었다. 송순과 임억령은 호남가단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호남지방에는 담양의 면앙정가단, 식영정가단 외에도 소쇄원가단(瀟灑園歌壇), 장흥의 기산가단(岐山歌壇)과 관산가단(冠山歌壇), 영암의 간죽정가단(間竹亭歌壇), 해남의 부용동가단(芙蓉洞歌壇)과 금쇄동가단(金鎖洞歌壇) 등이 형성되어 활동했다. 이들 가단 중에서도 면앙정가단과 식영정가단은 단연 으뜸이었다.   


면앙정, 환벽당, 식영정, 소쇄원, 서하당, 송강정의 주인들은 서로 혈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임억령의 부인은 양산보의 4종매, 임억령의 사위 김성원은 김윤제의 조카였다.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사위,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妻外再堂叔)이다. 김윤제의 여동생은 양산보의 부인, 양산보는 송순의 고종사촌 동생이었다.  


임억령은 박상의 문하에 있으면서 호남의 사림과 많은 교유를 가졌다. 호남의 사림은 중앙 정계를 멀리 했기 때문에 대체로 비판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박상, 박우를 비롯해서 최산두, 양팽손, 송순, 나세찬, 이항,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1504~1547), 김인후, 나옹(懶翁) 유성춘(柳成春, ?~?), 유성춘의 동생 유희춘, 양응정, 박순, 기대승 등은 조광조의 개혁적 정치 노선에 동조했던 인물들이었다. 


세조의 유혈 쿠데타를 도와 공신이 되면서 중앙 정계의 실권을 장악한 훈구파들에 의해 조광조가 사사되면서 개혁이 좌절되자 보수파 신료들에 강한 불만과 불신을 품고 있던 호남의 사림은 호남문화의 중심지인 담양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누정을 짓고 시가문학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담양 지역의 누정들은 경세제민을 위한 토론장이자 대의(大義)와 명분(名分)도 없는 국정 운영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훈구파들에 대한 성토장이기도 했다. 임억령의 방외적 기질은 호남사림의 정치 현실에 대한 불만과 그 자신의 성품이 어우러져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방외적 기질은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시학적 바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