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0년(명종 15) 정월 16일 고향 장성에서 은거하던 김인후가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은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했다. 임억령은 김인후의 부음을 듣고 통곡하면서 만장을 지었다.
임억령은 해남을 떠나 양씨 부인이 살고 있는 담양 성산의 서하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임억령의 본격적인 계산풍류가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8월 임억령은 관북(關北)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고, 백두산(白頭山)에 올라 암벽에 글을 새겼다.
태초에 천지가 생겨난 이후로 몇 천 년이나 지났나
하늘 땅도 응당 늙었기에 청산 역시 백두 되었으리
그해 가을 임억령은 서하당 바로 근처 가파른 언덕 위에 식영정을 세웠다. 서하당은 사위 김성원에게 주어 딸과 함께 살게 했다. 김성원은 당호 서하당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서하당을 김성원이 지었다는 잘못된 주장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0월 명나라 사신이 조선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억령은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조정 대신들은 그가 명나라 사신들과 겨룰 만한 시재(詩才)가 있다고 여겨 초빙한 것이다. 이때 송순, 이황도 함께 초빙을 받았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환벽당
11월 면앙정의 주인 송순과 시를 주고받았다. 이어 김윤제의 환벽당에 올라 누정시를 지었다. 임억령은 자미탄 건너편으로 빤히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환벽당에 자주 들렀을 것이다. 환벽당 동쪽 벽에는 '환벽당(環碧堂)'이라는 제하에 그의 오언절구 1수, 오언율시 2수가 판각되어 있다.
임억령의 '환벽당' 편액
환벽당(環碧堂)
烟氣兼雲氣(연기겸운기) 연기는 저 구름 기운에 합쳐지고
琴聲雜水聲(금성잡수성) 거문고 소린 또 물소리와 섞이네
斜陽乘醉返(사양승취반) 저물녘 술에 취한 채 돌아오는데
沙路竹輿鳴(사로죽여명) 모랫길 대가마 소리만 날 뿐이네
微雨洗林壑(미우세림학) 보슬비가 숲 골짜기를 씻어 주니
竹輿聊出遊(죽여료출유) 대가마 타고서 놀러 나갈 만하네
天開雲去盡(천개운거진) 하늘 열리고 또 구름도 흩어지니
峽坼水橫流(협탁수횡류) 넓은 골짝엔 물이 넘쳐 흘러가네
白髮千莖雪(백발천경설) 백발엔 천 가닥의 눈빛이 서리고
蒼松五月秋(창송오월추) 푸른 솔은 오월에도 가을 같아라
飄然蛻蟻穴(표연태의혈) 개미굴 같은 이곳을 훌쩍 벗어나
笙鶴戲瀛洲(생학희영주) 신선 학 타고 영주에서 노닐리라
自得顏瓢樂(자득안표락) 안회의 저 안빈낙도 스스로 얻어
無心羿彀遊(무심예구유) 마음 비우고 예의 경지에 노니네
夢涼松月上(몽량송월상) 소나무에 걸린 달 꿈속처럼 찬데
窓濕水雲流(창습수운류) 촉촉한 창가엔 물과 구름 흐르네
村酒寧嫌薄(촌주녕혐박) 시골 술이라 한들 어찌 싫어할까
山田敢望秋(산전감망추) 산밭에서 어찌 감히 풍년 바라리
騎牛細雨裏(기우세우리) 가랑비 속에 소를 타고 다니면서
吾道付滄洲(오도부창주) 나의 도를 창랑주에 부쳐 보리라
환벽당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벼슬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하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다. 이 시에는 '石川 林億齡 檀紀四千二百八十三年庚寅暮春 不肖後孫泰炳謹稿(석천 임억령 단기 4283년 경인 음력 3월에 불초 후손 태병이 삼가 쓰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호남기록문화유산' 홈페이지에는 이 시 판액에 대해 '임억령이 쓴 오언절구 1수, 오언율시 2수가 함께 판각되어 있다. 이 판액은 1950년 후손 김태병(金泰炳)이 판각하여 만든 현판이다. 임억령의 시 중 오언율시 2수는 문집 '석천집(石川集)' 3권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죽여(竹輿)'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가마다. '태의혈(蛻蟻穴)'은 '개미굴'로 당(唐) 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의 남가일몽(南柯一夢)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순우분은 자신의 집 남쪽에 있는 홰나무 밑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꿈에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부마가 되어 남가군(南柯郡)의 태수로 20년 동안 부귀를 누렸다. 꿈에서 깨어 홰나무 밑의 구멍을 파 보니 큰 개미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개미가 곧 괴안국의 왕이었다. 또 남쪽 가지로 뚫린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자신이 태수가 되어 다스리던 남가군이었다. 남가일몽은 부귀공명의 허무함을 비유한 말이다. '개미굴'에서 벗어남은 곧 현세의 부귀공명을 벗어남을 말한다. '생학(笙鶴)'은 신선이 학을 타고 생황을 연주하는 것이다. 신선이 타는 선학(仙鶴)을 뜻한다.
'안표(顏瓢)'는 공자(孔子)의 제자 안회(顔回)의 단표누항(簞瓢陋巷) 고사를 말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공자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안연(顔淵)을 보고 '어질구나!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골목에서 사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런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아니하니, 어질구나! 안회여!'라고 칭찬하였다. 부귀공명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은일자적하며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말한다.
'예구(羿彀)'는 ‘후예(后羿)의 화살(彀)'을 말한다. '장자' 〈덕충부(德充符)〉에 '명사수인 예(羿)의 사정거리 안에서 노니는 자 가운데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자는 적중되기에 꼭 알맞다(遊於羿之彀中 中央者中地也).'는 말이 있다. 여기서 유래한 '예구'는 '예의 화살이 미치는 범위'란 뜻으로 형법(刑法)을 비유하는데 여기서는 관직을 말한다. 임억령이 관직 따위에 마음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수운(水雲)'은 수운향(水雲鄕)의 준말로, 은자(隱者)가 사는 청유(淸幽)한 곳을 가리킨다. '창주(滄洲)'는 滄浪洲(창랑주)의 준말로 동해(東海)의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이다. 물가의 수려한 경치를 뜻하는 말이다. 남조 제(南朝齊)의 시인 사조(謝朓)가 선성태수(宣城太守)로 나가서 창주의 정취를 마음껏 누렸다는 고사가 유명하다. 두보(杜甫)의 오언율시 '강창(江漲)'의 강물이 불어난 정경을 읊은 것 가운데 '가벼운 돛은 가기에 편하고, 나의 도는 창주에 부치네(輕帆好去便, 吾道付滄洲).'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杜少陵詩集 卷十).
임억령은 '환벽당(環碧堂)'이란 제목의 칠언율시 한 수도 남겼다. '쇠노(衰老)'란 시어로 보아 임억령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쓴 시임을 알 수 있다.
환벽당(環碧堂)
萬山圍處一川橫(만산위처일천횡) 만산이 둘러쳐지고 시내 한줄기 흐르는 곳
醉後憑軒鶴背明(취후빙헌학배명) 취하여 난간에 기대니 학이 내려다 보이네
鍾鼎山林元有分(종정산림원유분) 벼슬아치 처사는 원래 분수가 다른 것이니
眼前樽酒未宜輕(안전준주미의경) 눈앞의 한잔 술도 가벼이 여기지 말지어다
夕陽沙際小船橫(석양사제소선횡) 해질녘 모랫가에 작은 배 한척 비스듬한데
布傘如蓮水底明(포산여련수저명) 연잎 같은 일산이 물 아래까지 비추는구나
衰老縱無兼濟力(쇠노종무겸제력) 노쇠한 몸이라 세상을 구제할 힘도 없어서
斜風細雨往來輕(사풍세우왕래경) 비낀 바람 가랑비 맞으며 홀가분히 지내네
'종정(鍾鼎)'은 조정의 벼슬길에 올라 부귀를 누림을 뜻한다. '산림(山林)은 산림거사, 자연에 숨어살면서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를 말한다. 두보의 당시(唐詩) '청명(淸明)' 첫째 수에 '鍾鼎山林各天性 濁醪麤飯任吾年(벼슬아치와 산림거사는 각각 천성이 다르니, 탁주와 거친 밥 먹으며 살아도 아랑곳하지 않노라).'에 나오는 말이다.
1561년(명종 17) 정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임억령은 송순, 이황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 입궐했으나 명나라 사신들의 방문이 취소되어 다시 돌아왔다. 이 무렵 김성원이 해남으로 임억령을 찾아와 시를 주고받았다. 이어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1507∼1581)에게 '산정잡제(山亭雜題)' 칠언절구 19수를 지어 부쳤다.
1562년(명종 18) 67세의 임억령은 해남읍 남천리(南川里) 남각산 남쪽 기슭 남천(南川)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던 남곽초당(南郭草堂)을 찾아 시를 남겼다. 이 무렵 김서성의 아버지 김홍석(金弘錫)이 세상을 떠나자 곡하며 만장을 지었다.
임억령은 해남에서 강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김성원이 강진으로 찾아와 시를 주고받았다. 이이와 최립도 한양에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정언식(鄭彦湜 1538∼?) 편에 임억령을 사모하는 시 한 수씩을 보내왔다. 정언홍(鄭彦洪 1536∼?), 정언식 형제는 해남의 해리 뒷산 미암 아래 곡구당(谷口堂)에 살면서 임억령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공부했다. 정언홍, 언식 형제는 고려 문종(文宗) 대에 예부상서(禮部尙書)와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낸 초계 정씨(草溪鄭氏) 시조 정배걸(鄭倍傑)의 후손이었다. 정언홍, 언식 형제는 우애도 깊어서 호도 곡구(谷口)로 같았다. 먼저 이이의 시다.
선생께서 벼슬을 버리고 초야로 오셨으니, 한가한 세월 넉넉히 얻었구려
솔바람 고요한데 화롯불 꺼져가고, 그윽한 유자숲 댓가마길 평온하지요
대둔산 찾은 발길따라 구름도 따라오고, 강가 손님배 달빛이 전송하네요
구수에서 품은 생각 다소간 기록하여, 한편의 싯구를 선생님께 보냅니다
이이는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묻혀 계산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임억령을 칭송하면서 시를 통해 안부를 전하고 있다. 이처럼 임억령은 이이가 가장 존경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다음은 최립의 시다.
벼슬을 마다하고 떨어진 갖옷 입더니, 만년에도 넉넉하신 임을 알겠구려
시대를 걱정하는 일 제현들 할 일인데, 달 구름 구경하며 조용히 지내시네
천한 몸 공연히 신선의 꿈을 품었건만, 머나먼 장도라서 노 젓기 어렵구려
차가운 집에서 좌립하며 싯귀 읊었으니, 즐겁던 그 시절 기억이나 하실까
최립도 은자로서의 임억령을 예찬한 뒤 서로 시를 주고받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그리운 마음을 읊고 있다. 최립에게 있어 임억령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임억령은 벼슬길에서보다 초야에 묻혀 시흥이 일어날 때마다 자유로이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는 시인으로서의 삶이 훨씬 더 행복했던 것 같다. '투린사(投隣舍)'란 시에 강호에서 유유자적 시를 지으면서 계산풍류를 즐기는 그의 낭만적인 삶이 잘 나타나 있다.
투린사(投隣舍) - 이웃집에 던지다
詩成獨寫芭蕉葉(시성독사파초엽) 시를 지어 홀로 파초잎에 베껴 쓰고는
吟罷遙投寂寞翁(음파요투적막옹) 읊은 뒤 멀리 적적한 노인에게 보내네
日暮悠悠東北眺(일모유유동북조) 날 저물 제 동북쪽을 유유히 바라보니
白雲紅樹淡天容(백운홍수담천용) 흰 구름 붉은 나무에 하늘빛도 맑구나
파초잎에 시를 적어 보낸다는 표현이 참으로 낭만적이다. 낭만이 없고서는 이런 표현이 나올 수가 없다. 여기서 '적막옹(寂寞翁)'은 누구일까? '동북(東北)'은 그냥 단순히 동북쪽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11월 26일 임억령의 막내동생 임구령이 남원부사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가 죽으면 백일장(白日葬)을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563년(명종 18) 정월 30일 임구령의 장례식이 열렸다. 임억령은 형의 도리를 다해 동생의 죽음을 애도했다. 임구령은 영암군 서호면 청용리 영모정 마을 뒤 야산에 묻혔다.
이 무렵 임억령은 환학당(喚鶴堂)과 강선루(降仙樓)를 찾아 시를 남겼다. 환학당(喚鶴堂)은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수남학구당(水南學求堂)을 주도적으로 세운 조여심(曺汝諶, 1518~1584)의 호다. 수남학구당이 들어선 자리에는 원래 향적사(香積寺)라는 절이 있었다. 왕씨 고려가 망하고 이씨 조선이 들어서자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어 수많은 사찰들이 폐사되거나 빼앗기고, 승려들은 쫓겨났다. 향적사도 피탈의 위기에 처하자 환학당이라는 승려가 여러 승도들을 불러들여 강학했다. 이에 그의 제자들이 환학당의 뜻을 받들어 학구당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어 잠사시(岑師詩)의 시첩을 만들었다. 잠사(岑師)는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 가운데 하나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의 호 중 '잠' 자가 들어가는 호에는 잠사 외에도 잠선(岑禪), 잠로(岑老)가 있고, 설잠(雪岑)이라는 법호도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쇄원
임억령이 같은 성산 자락에 자리잡은 이웃마을 양산보의 소쇄원을 찾아 오언율시 '소쇄정차운증양중명(瀟灑亭次韻贈梁仲明)' 두 수를 지은 때도 이 무렵이다. 임억령의 16대손인 임남형(林南炯)과 임대식(林大植)이 판각한 이 시는 소쇄원 제월당(霽月堂)에 '소쇄정(瀟灑亭)'이란 제목으로 걸려 있다. 제월당에는 스승과 같은 운자를 취한 김성원과 정철의 시도 걸려 있다. 운자는 심(心), 음(陰), 음(吟), 금(禽)과 비(扉), 위(圍), 희(稀), 미(微)다.
임억령의 '소쇄정' 편액
소쇄정차운증양중명(瀟灑亭次韻贈梁仲明) - 소쇄정 차운시를 양중명에게 주다
梁子園亭好(양자원정호) 양군의 동산 정자가 좋기도 하거니
瀟然淨客心(소연정객심) 나그네 시름도 시원히 씻기는 델세
人賢忘巷陋(인현망항누) 사람 어질어서 시골 누추함도 잊고
地古易寒陰(지고역한음) 땅도 오래되어 시원한 그늘이 많네
世事生吳興(세사생오흥) 세상일 하다 보면 고향생각 나거니
鄕情奏越吟(향정주월음) 향수에 젖어 고향 노래도 부르노라
小童催我起(소동최아기) 어린애가 나를 재촉해 일어나 보니
簷際已喧禽(첨제이훤금) 저기 처마에 새들 벌써 시끄럽다야
昔年尋谷口(석년심곡구) 옛날에 이 골짜기를 찾아왔을 때는
落葉擁柴扉(낙엽옹시비) 낙엽이 사립문에 가득 쌓여 있었지
激激水舂急(격격수용급) 물레방아 급히 도는 소리 요란하고
蒼蒼山木圍(창창산목위) 나무들은 온 산을 푸르게 에둘렀네
慰人村釀釅(위인촌양엄)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은 막걸리라
逃難鬢毛稀(도난빈모희) 난리 피하느라 수염 털도 성글었네
若得閑田地(약득한전지) 만약 한가한 전지를 얻는다고 하면
吾將作少微(오장작소미) 내 장차 소미좌에 정자를 지으리라
'오흥(吳興)'은 '진서(晉書)' <문원전(文苑傳)>의 고사에서 생겨난 말이다. 후한(後漢)의 오군(吳郡) 사람 장한(張翰)은 낙양(洛陽)에서 벼슬하다가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그리운 나머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오흥'은 이 고사에서 생겨난 말로 본래는 벼슬살이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여기서는 양산보가 벼슬에 있다가 고향으로 내려온 것을 가리킨다. 오흥(吳興)이라는 지명도 있다. 오흥은 중국 저장성(浙江省) 북부의 태호(太湖) 남안에 위치한 현으로 예로부터 호주(湖州)라 불렸다. 원지(園池)가 많고, 근교에는 변산(弁山)의 명승지로 유명하다. 조맹부(趙孟䫍)의 고향이 오흥이라서 조오흥(趙吳興)이라고도 한다.
'월음(越吟)'은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 사람 장석(莊舃)이 초(楚)나라에 가서 벼슬하여 높이 올라갔는데 한번은 병이 나서 누워 있었다. 초왕(楚王)이 사람을 시켜 장석에게 가보게 하면서 '장석이 자기의 고국을 생각하는지 알아보라.'고 하였다. 사신이 가서 보니 장석은 고국을 잊지 못하여 병중에도 월나라의 노래를 부르면서 향수를 달랬다(史記 卷70 張儀列傳). '소미(少微)'는 태미(太微)의 서쪽에 있는 네 별의 이름이다. 임억령은 실제로 소쇄원(태미)의 서북쪽에 식영정(소미)을 지었다.
양중명(梁仲明)은 양산보의 아들 양자징(梁子澂, 1523~1594)이다. 양자징은 김인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두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정철, 성혼, 중봉(重峰) 조헌(趙憲, 1544∼1592) 등과 교유하였다.
'식영정' 편액
7월 임억령은 '식영정기(息影亭記)'를 지어 정자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식영정기'는 두 개가 있다. '식영정(息影亭)' 편액은 단아한 팔분체(八分體)로 쓰여져 있다.
임억령의 '식영정기' 편액(출처 호남기록문화유산)
식영정기(息影亭記)
金君剛叔吾友也, 乃於蒼溪之上, 寒松之下, 得一麓, 構小亭, 柱其隅, 空其中, 苫以白茅, 翼以凉簟, 望之如羽盖畫舫, 以爲吾休息之所, 請名於先生, 先生曰: “汝聞莊氏之言乎? 周之言曰 ‘昔有畏影者, 走日下, 其走愈急, 而影終不息, 及就樹陰下, 影忽不見.’ 夫影之爲物, 一隨人形, 人俯則俯, 人仰則仰. 其他往來行止, 唯形之爲然. 陰與夜則無, 火與晝則生, 人之處世, 亦此類也. 古語有之曰 ‘夢幻泡影.’人之生也, 受形於造物, 造物之弄戱人, 豈止形之使影? 影之千變, 在形之處分, 人之千變, 亦在造物之處分, 爲人者, 當隨造物之使, 於吾何與哉? 朝富而暮貧, 昔貴而今賤, 皆造化兒爐錘中事也. 以吾一身觀之, 昔之峩冠大帶, 出入金馬玉堂, 今之竹杖芒鞋, 逍遙蒼松白石, 五鼎之棄, 而一瓢之甘, 皐䕫之絶, 而麋鹿之伴, 此皆有物弄戱其間, 而吾自不之知也, 有何喜慍於其間哉?” 剛叔曰: “影則固不能自爲, 若先生屈伸, 由我非世之棄. 遭聖明之時, 潛光晦迹, 無乃果乎?” 先生應之曰: “乘流則行, 得坎則止, 行止非人所能, 吾之入林, 天也, 非徒息影. 吾冷然御風, 與造物爲徒, 遊於大荒之野, 滅沒倒影, 人不得望而指之, 名以息影, 不亦可乎?” 剛叔曰: “今始知先生之志. 請書其言, 以爲誌."
癸亥七月日 荷衣道人書[김군 강숙은 나의 벗이다. 창계의 위쪽, 푸른 솔숲 아래 한 기슭을 얻어서 작은 정자를 지었다. 모퉁이에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는 텅 비게 해서, 흰 띠풀을 덮고 서늘한 대자리를 둘러, 바라보면 마치 그림으로 장식한 배 위에 새가 날개를 펴고 앉아 있는 형상이다. 이에 내가 쉴 장소로 삼고는 정자의 이름을 나에게 청했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장주의 말을 들어봤는가? 장주가 말하기를, "옛날에 그림자를 무서워한 사람이 있었는데 낮에 달려가면 그림자는 더 빨리 달려서 그림자가 끝내 쉬지 않고 따라오다가 나무 그늘에 이르러서야 문득 보이지 않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무릇 그림자는 끈질기게 사람을 따라다니므로 사람이 엎드리면 그림자도 엎드리고, 사람이 쳐다보면 그림자도 쳐다본다. 그 밖에도 가면 가고 쉬면 쉬니 오직 그의 형세가 그런 것이다. 그늘이나 밤에는 없어지고 불빛이나 낮에는 생긴다.
사람의 처세도 또한 이런 유다. 옛말에, "사람의 한평생이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다(夢幻泡影)."라고 하였다. 사람이 태어날 때 그 형체는 조물주에게서 받았으니, 조물주가 사람을 희롱함이 어찌 형체가 그림자를 농락하는 것에 비하겠는가? 그림자의 천변만화는 사람 형체의 움직임 여하에 달려 있고, 사람의 천변만화도 또한 조물주의 처분에 달려 있다. 사람은 마땅히 조물주가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아침에 부자였다가 저녁에는 가난해지고, 전에는 귀한 사람이 현재는 천하게 되는 것이 다 조물주가 만들기에 달린 것이다. 내 한 몸으로 보더라도, 옛날에 높은 갓을 쓰고, 큰 띠를 두르고 조정에 출입하다가 지금은 대나무 지팡이와 짚신으로 산수 사이를 소요하고 있으며, 오정(五鼎)의 부귀를 버리고 가난한 선비의 생활을 달게 여기며, 고관대작들을 끊고 사슴과 벗을 삼았으니, 이는 모두 조물주가 중간에서 희롱함이 있었기 때문이지 나 스스로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그것을 기뻐하고 성낼 것이 있겠는가?'
강숙이 말하였다. '그림자는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은 굴신을 자유로이 할 수 있으니 세상이 버린 것은 아닙니다. 성군의 시대를 만나서도 자신의 빛을 감추고, 자취를 묻어버렸으니 이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말하기를 '흐름을 타면 나아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그치는 것이니, 가고 멈춤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임야로 들어온 것도 천명이지 한갓 그림자를 멈추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시원하게 바람을 타고, 조물주와 짝이 되어서 대황(大荒)의 들판에서 노닐 적에 그림자도 없을 것이며, 사람이 바라보고도 뭐라 가리킬 수 없을 것이니 정자 이름을 식영이라고 함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강숙이 말하기를 '지금에야 비로소 선생의 뜻을 알겠으니, 그 말을 기록하여 지(誌)로 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계해년(1563) 7월 하의도인(荷衣道人) 쓰다.]
惟我石川先祖, 勇退而終老斯亭也. 有記文及題咏, 則宜乎揭板, 而不知毁於何年代? 心常慨然, 謀欲重揭者, 因循未就. 今賤齒垂暮, 一朝溘露, 則亦恐湮沒, 故登梓而懸諸楣. 神短眼眩, 至若手工之未得精緻, 有不暇顧爾. 六癸亥後二十七年庚寅暮春 不肖後孫 泰釪 謹識[석천 선조께서 용퇴하여 이 정자에서 노년을 마쳤다. 기문과 제영이 있어 마땅히 판각을 해서 걸었는데 어느 시대에 훼손되었는지 알 수 없다. 마음으로 항상 개연하여 다시 편액할 것을 도모했는데 이러구러 시간만 보내다가 일을 성취하지 못했다. 지금 내 나이가 늘그막에 접어들었으니 하루아침에 죽어버린다면 또한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 등재하여 처마에 걸었다. 정신은 짧고 눈은 어지러워서 기술자가 정교하지 못하듯 한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경인년(1590) 늦봄 불초 후손 태우(泰釪) 삼가 쓰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에서 호방하고 걸림이 없는 임억령의 높은 경지를 읽을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사람도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기뻐할 것도 없고, 슬퍼하고 성내고 할 것도 없다! 심산유곡으로 들어온 것은 단순히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바람 타고 조화옹과 함께 어울려 끝없이 넓고 거친 대자연에서 노닐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식영정이라 이름 짓는 것이다! 임억령은 노자(老子)와 장자(壯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이 설파하는 은둔(隱遁)과 무욕(無欲), 순리(順理)와 조화(調和)를 통해서 진정한 정신의 자유(自由)와 해방(解放)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식영(息影)은 식적(息迹)과 휴영(休影)의 준말로 매우 철학적인 말이다. '그림자조차 쉬게 한다', '그림자조차 끊는다'는 말이다. 식영정신은 바로 허상을 버리고 사물의 본성을 깨닫는 성(誠)에 이르는 것이다. 식영을 구현한 사람은 곧 성인(聖人)이라고 할 수 있다. 불가의 부처, 도가의 진인(眞人)이다. '식영정기'에서 임억령은 그림자조차 쉬면서 조물주와 벗하고자 하는 뜻을 명확히 밝혔다.
이 기문은 1563년 임억령이 식영정이 완공된 뒤에 장자를 인용해서 정자 이름을 지은 연유에 대해 문답형식으로 쓴 것이다. 기문 뒤에는 후손 태우(泰釪)가 식영정기문이 시간이 오래지나 훼손되어 다시 판각한 배경에 대한 글을 써 붙여놓았다.
'강숙(剛叔)'은 김성원의 자다. '몽환포영(夢幻泡影)'은 꿈과 환상, 거품과 그림자라는 뜻으로, 인생의 헛되고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노추(爐錘)'는 화로와 도가니로, 금속을 제련하는 데 쓰는 도구다. 우주의 조화(造化)를 주재하는 조물주(造物主)를 비유하는 말이다. '장자'〈대종사(大宗師)〉에 '무장(無莊)이 그의 아름다움을 잃고, 거량(據梁)이 그의 힘을 잃고, 황제(黃帝)가 그의 앎을 잃은 것은 모두가 노추의 사이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오정(五鼎)'은 소, 양, 돼지, 물고기, 순록을 담아 제사지내는 다섯 개의 솥을 말한다. 높은 작위에 있는 사람의 미식(美食)의 뜻으로 쓰인다. 옛 제도에 사(士)는 삼정(三鼎), 대부(大夫)는 오정(五鼎)의 음식을 먹는다고 했다. '고기(皐夔)'는 중국 고대 전설상의 임금인 순(舜)의 현신(賢臣) 고요(皐陶)와 기(夔)를 말한다. 고요는 형관(刑官), 기는 악관(樂官)이었다. 훌륭한 신하를 지칭하는 말이다. '대황(大荒)'은 바다 밖 먼 곳을 말한다. '좌사(左思)'의 <오도부(吳都賦)>에 '대황 가운데로 나가 동극의 밖에 행하네.(出乎大荒之中, 行乎東極之外.)'라고 한 구절이 있다.(文選 卷5 吳都賦)
임억령의 '식영정기' 편액
식영정기(息影亭記)
嗚呼! 爾影, 爾隨吾而游行者, 今幾年? 所吾行則爾行, 吾止則爾止, 吾動則爾動, 吾靜則爾靜. 七給春秋, 行止動靜, 無所往而不從游則, 嗚呼! 爾影, 亦云困矣. 雖然, 吾榮則爾榮, 吾樂則爾樂, 何以言之? 彤庭玉階, 爾隨吾而后至, 咫尺天威, 承玉音之丁寧. 于時華筵照身, 天香惹衣, 此實不世之榮光, 難遇之異數, 苟非吾之所隨, 則爾安得此榮乎? 吾榮則爾榮者, 此之謂也. 且如風軒水閣, 爾隨吾而登陟, 携朋引盃, 樂時華之佳勝, 時或起舞樽前, 爾影裴廻, 此實一時之快樂, 眼前之勝事, 苟非吾之所游, 則爾安得此樂乎? 吾樂則爾樂者, 亦此之謂也. 嗚呼! 爾影, 吾與爾, 榮且樂者, 極矣盡矣. 此間, 雖或有爾影靡依驚頹蒼黃之日, 而使爾猶未至艱險之域, 爾亦幸矣. 吾今白頭森森, 而爾影婆娑, 疲骨稜稜, 而爾影參差, 欲趨則不趨, 而爾亦不得趨, 欲走則不走, 而爾亦不得走. 吾已休矣, 爾亦休矣. 吾已息矣, 爾亦息矣. 主人翁書.[아, 너 그림자여, 네가 나를 따라 돌아다닌 것이 지금까지 몇 년인가? 내가 가면 너도 가고, 내가 멈추면 너도 멈추고, 내가 움직이면 너도 움직이고, 내가 고요하면 너도 고요했다. 나이 칠십 동안 다니고 멈추고 움직이고 고요함에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지 않음이 없었으니, 아, 너 그림자 또한 피곤하였다고 말할 만하다.
비록 그렇지만, 내가 영화로우면 너도 영화롭고 내가 즐거우면 너도 즐거웠으니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궁궐의 붉은 정원과 계단에서 너는 나를 따라 뒤에 이르러 지척에서 임금을 뵙고 정녕한 목소리를 받들었다. 그때에 좋은 연회 자리에서 몸을 비추었고 좋은 향기가 옷깃에 배어들었으니, 이것은 실로 세상에 다시없는 영광이고 만나기 어려운 기이한 운수니 만약 나를 따르지 않았으면 네가 어찌 이러한 영광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내가 영화로우면 너도 영화롭다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또 바람 부는 정자나 물가의 누각 같은 곳에, 너는 나를 따라 올라가서 벗들과 만나 술잔을 나누며 좋은 시절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겼고, 때로는 혹 일어나 술동이 앞에서 춤출 때 너 그림자도 빙글빙글 돌았다. 이것은 실로 한때의 즐거움이요 눈앞의 좋은 일이었으니 진실로 내가 놀지 않았다면 네가 어찌 이러한 즐거움을 얻었겠는가? 내가 즐거우면 너도 즐겁다고 한 것은 또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아, 너 그림자여, 나는 너와 함께 영화롭고 즐거운 것을 끝까지 다하였다. 이 사이에 비록 너 그림자가 쓰러지고 기대고 놀라고 무너지고 허둥지둥 당황한 날도 있었지만 너에게 오히려 어렵고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으니 너도 또한 행운이다.
내가 지금은 흰 머리 무성하니 너 그림자도 힘이 없고, 피골이 앙상히 드러나니 너 그림자도 가지런하지 않구나. 달리고 싶지만 달리지 못하니 너도 역시 달릴 수 없고, 달아나고 싶지만 달아날 수 없으니 너도 역시 달아날 수 없구나. 나 이제는 쉬려니 너도 쉬려무나. 나 그만 멈추리니 너도 멈추려무나. 주인옹 쓰다.]
이 기문은 자연과 일체가 되어 유유자적 소요하고자 하는 뜻을 그림자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쓴 것이다. 뜻을 알고 나면 식영정처럼 멋진 정자 이름도 없을 것이다. 정자 주인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식영정이란 정자명은 '장자(壯子)' <잡편(雜篇) 어부(漁父)>의 '외영오적자(畏影惡迹者,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다 죽은 바보)' 우화에서 끌어온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바보가 있었다.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쓰러져 죽었다. 임억령은 '그림자와 발자취가 두렵고 밉다고 땅에 발이 닿지 않게 빨리 달린다고 되는가? 그늘에 들면 그림자도 없고, 멈추면 발자취도 사라진다.'면서 '장자'를 빌어 '식영'의 뜻을 풀이했다.
여기서 그림자는 인간의 욕망을 뜻한다. 우화는 속세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결코 욕망을 떨쳐낼 수 없음을 일깨워 준다. 이처럼 식영정이라는 정자 이름에는 헛된 욕망을 버려야 자신의 참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옛 선인들은 세속을 떠나 그림자조차도 쉬는 식영세계를 이상향으로 삼았으며, 식영정은 바로 그러한 식영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해 이량(李樑)의 당(黨) 사건이 일어났다. 이량은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沈氏)의 외숙으로, 권세를 믿고 부정축재를 일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윤원형(尹元衡), 심통원(沈通源)과 더불어 3흉(凶)이라 불렀다. 이량이 이조판서가 되면서 더욱 세도를 부리자 기대승을 비롯한 사림은 그의 비리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이량은 자신의 당과 정치공작을 벌여 기대승, 박소립(朴素立), 허엽(許曄),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이산해(李山海) 등 사림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량의 당은 정유길(鄭惟吉), 고맹영(高孟英), 이령(李翎), 김백균(金百鈞) 등이었다. 고맹영은 바로 고경명의 아버지, 김백균은 고경명의 장인이었다. 이량의 정치공작은 조카인 심의겸(沈義謙)에게 발각되고, 기대항(奇大恒)의 탄핵으로 심복들과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이량은 결국 평안도 강계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고, 고맹영도 유배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고경명도 울산군수로 좌천되었다가 바로 파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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