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7 - 퇴게 이황과 시학 논쟁을 벌이다

林 山 2017. 12. 6. 10:40

1553년(명종 8) 3월 이황이 임억령을 찾아와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임억령이 먼저 칠언절구 6수를 짓고, 이황은 그의 시에서 차운하였다. 임억령이 먼저 '증경호퇴계(贈景浩退溪)'를 지었다. 운(韻)은 '아(峨)'와 '다(多)'였다. 


증경호퇴계(贈景浩退溪) - 경호 퇴계에게 드림


春來江漢濤瀾猛(춘래강한도란맹) 장강 한수에 봄이 오니 물결 사납고

霜後終南氣象峨(상후종남기상아) 서리 내린 뒤 종남산의 기상도 높네

中有寂寥楊子宅(중유적료양자댁) 그 가운데 양자의 집 쓸쓸히 있으니

白頭黃葉閉門多(백두항엽폐문다) 흰머리 누런 잎 문닫은 날도 많다네


一瓢寂寂顔回樂(일표적적안회락) 한 그릇 밥에도 고요하니 안회의 낙

千仞巖巖孟氏峨(천인암암맹씨아) 천 길 우뚝 솟음은 맹자의 높음일세

疎懶每蒙今世笑(소나매몽금세소) 지금 세상 사람 게으른 나 비웃지만

詩書長對故人多(시서장대고인다) 시 서만 오래 대한 사람도 많았다네


'경호(景浩)'는 이황의 자다. '강(江)'은 양쯔강(揚子江) 또는 장강(長江)을 가리킨다. '한(漢)'은 양쯔강의 최대 지류인 한수(漢水)를 말한다. '종남(終南)'은 종남산(終南山, 2,604m)으로 시안(西安) 남문에서 정남쪽으로 약 32 km 지점에 있다. '양자(楊子)'는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인 양주(楊朱)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그는 극단적 위아(爲我)의 개인주의를 주장했다. 


임억령의 '증경호퇴계(贈景浩退溪)'에 대해 이황은 이에 화답하는 시 '방임대수억령(訪林大樹億齡)'을 지었다. 이 시에서 이황은 임억령을 노자(老子) 같은 큰 은자(大隱)라고 칭송하고 있다.    


방임대수억령(訪林大樹億齡) - 임대수 억령을 방문하다(이황)  


假架低簷淨花卉(가가저첨정화훼) 대충 얽은 낮은 처마집엔 풀꽃 깨끗하고

高山當面碧嵯峨(고산당면벽차아) 높은 산을 마주하니 푸르름 우뚝 솟았네

主人市隱同壺隱(주인시은동호은) 저자에 숨은 주인 별천지에 숨은 것 같아

休罷南歸恨未多(휴파남귀한미다) 파직되어 남쪽에 돌아와도 한 많지 않네


心欣吉善如蘭稪(심흔길선여란복) 마음은 선 좋아하니 난초 같이 향기롭고

氣湧姦兇似泰峨(기용간흉사태아) 간흉 미워하는 기개는 태산 같이 높으네

莫把衰齡看古史(막파쇠령간고사) 나이 많이 들어서는 고사를 읽지 마시라

衰齡看史轉傷多(쇠령간사전상다) 나이 먹어 역사를 보면 상심만 많아지리


癸丑三月(계축삼월) 1553년 3월


이 시에는 '謂罷長興未是爲恨(장흥군수에서 파면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음을 말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대수(大樹)'는 임억령의 자다. '벽차아(碧嵯峨)'는 주자(朱子)의 '낙성사(落星寺)'라는 시 '極目靑冥茫, 回瞻碧嵯峨(눈길 다하여 아득한 푸른 하늘 바라보고, 돌아보니 푸른 산 우뚝 솟았구나.)'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시은동호은(市隱同壺隱)'은 후한(後漢) 비장방(費長房)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문선(文選)'에 실린 서진(西晉) 왕강거(王康琚)의 '반초은시(反招隱詩)'에도 '小隱隱陵藪, 大隱隱朝市. 伯夷竄首陽, 老聃伏柱史(작은 은자는 큰 언덕과 덤불 속에 숨고, 큰 은자는 조정과 저자에 숨는다네. 백이는 수양산에 숨었고, 노자는 장서관으로 엎드려 있었다네.)'라는 구절이 있다.


이황의 또 다른 화답시 '대수견화전운부화답(大樹見和前韻復和答)'도 있다. 두 사람이 시로 나누는 대화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대수견화전운부화답(大樹見和前韻復和答)-대수의 앞 시에서 차운하여 화답하다(이황)


舊營詩壘非雄壯(구영시루비웅장) 옛날 시단 경영할 땐 그리 웅장하지 않았는데

新築愁城頓嶪峨(신축수성돈업아) 새로이 쌓은 근심의 성은 갑자기 우뚝 솟았네

欲作男兒須廣業(욕작남아수광업) 사나이 되려 하면 반드시 학업 넓혀야 하는데

少年虛過恨多多(소년허과한다다) 젊은 시절 허송세월로 보냈으니 한 많고 많네


'시루(詩壘)'는 시단(詩壇)과 같은 뜻이다. '수성(愁城)'은 이황의 시 '州憑虛樓有懷州敎金質夫次樓韻留贈(원주 빙허루에서 교관 김질부를 생각하며, 현판시의 각운에 맞춰 지은 시를 남겨 보냄)'에 '頭因別久欲添雪, 愁爲秋深更築城(머리는 이별한 지 오래되었기에 눈을 더하려 하고, 근심은 가을이 깊어지기에 다시 성을 쌓으려 하네.)'란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의 주석에 북주(北周) 유신(庾信)의 '수성부(愁城賦)'가 인용되어 있다. '업아(嶪峩)'는 산 등이 높은 모양을 나타내는 의성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에 '鬼濛鴻, 嶽祇嶪峩(독귀는 넓고 크며, 악기는 높네)'라 하였고, 주자는 '山高貌(산이 높은 모양)'라고 하였다. 독귀는 수신(水神), 악기는 산신(山神)이다. '남아수광업(男兒須廣業)'은 당나라 두보(杜甫)의 '백학사모옥(柏學士茅屋)'이란 시에 '富貴必從勤苦得, 男兒須讀五車書(귀는 반드시 부지런히 힘쓰는 데서 얻어지고, 남자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하네.)'라는 구절이 있다. 학업을 넓히려면 적어도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함을 말한다. 


임억령도 이황을 방문했다. 이때 두 사람이 시에 대해 논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임억령이 먼저 자신의 시관(詩觀)이 담겨 있는 시를 읊었다. 그는 이 시에서 호탕시론(豪宕詩論)을 설파했다. 


吾詩尙豪宕(오시상호탕) 내 시는 크고 넓음을 숭상하노니

何用巧剞劂(하용교기궐) 어찌 멋지게 다듬을 필요 있을까

吾行蹈大方(오행도대방) 나의 행동은 큰 도리 실천하노니

不必拘小節(불필구소절) 작은 절차에 거리낄 필요 없으리


이황은 임억령이 찾아와 시를 논한 것에 대해 기뻐하면서 '희임대수견방논시(喜林大樹見訪論詩)'를 지었다. 영남의 대학자 이황과 호남의 사종 임억령의 시론(詩論)을 엿볼 수 있는 시다.


희임대수견방논시(喜林大樹見訪論詩) - 임대수가 찾아와 시에 대해 논함을 기뻐하며(이황)


玄冬逼歲除(현동핍세제) 겨울이 섣달 그믐 밤 재촉하는지

急景馳西沒(급영치서몰) 급박한 해 내달려 서쪽으로 지네

愁人臥窮巷(수인와궁항) 근심하는 사람 외진 골목에 누워

寂寞抱沈疾(적막포침질) 쓸쓸하게 깊은 병을 안고 있다네

舊來人不來(구래인불래) 옛적부터 찾던 이들 오지도 않아

門前雀羅設(문전작라설) 문 앞에는 참새 그물 쳐놓았다네

寧知打寒扉(녕지타한비) 썰렁한 문짝 두드릴 줄 몰랐는데

忽枉長者轍(홀왕장자철) 갑자기 높으신 분이 오실 줄이야


'현동(玄冬)'은 겨울을 말한다. 겨울은 오행(五行) 중 수(水)에 해당한다. 겨울에 해당하는 색은 검은색(玄)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쓴 것이다. 봄을 청춘(靑春)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세제(歲除)'는 세모(歲暮)와 같은 말이다. 당나라 맹호연(孟浩然)의 '歲暮歸南山(세모에 남산으로 돌아가다)'란 시 '白髮催年去, 青陽逼歲除(백발은 세월 감을 재촉하고, 봄은 한 해 끝에 다가오네)' 구절에 나온다. '급영(急景)'에서 '景'은 '그림자 영'이다. '그림자 영(影)'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문전작라설(門前雀羅設)'은 한(漢)나라 적공(翟公)의 고사에 나오는 말이다.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 찾아오는 빈객이 많았으나, 벼슬에서 물러나자 참새 그물을 칠 정도로 발길이 끊어졌다. 이후 다시 정위가 되었는데, 빈객이 몰려들자 적공은 문 앞에 '一生一死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能, 一貴一賤 交情乃見(한 번 죽고 사니 사귐의 정을 알겠고, 한 번 가난하고 부유하니 사귐의 모양새를 알겠으며, 한 번 존귀하고 비천해지니 사귐의 정이 보이는구나.)'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이황이 1553년에 쓴 시 '차운답임대수(次韻答林大樹)'에 '閒思雀網門前設(한가로우니 참새 그물이나 문 앞에 설치할까 생각해보네)'란 구절이 있다. 


'타(打)'는 '청(窓)'으로 된 판본도 있다. '한비(寒扉)'는 주자의 시 '宿雲際寺許順之將別以詩求敎次韻(운제사에 묵으면서 허순지가 헤어지려 할 때 시로 가르침을 구하여 차운하여 짓다)'에 '長林生缺月, 永夜照寒扉(긴 숲에는 이지러진 달 떠오르고, 긴 밤 차가운 사립문 비추네.)'란 구절에 나온다. '장자철(長者轍)'은 고관대작이나 귀인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한나라 진평(陳平)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황의 시 '次韻趙松岡見寄(조송강이 부쳐준 시에서 차운하여 짓다)'에 '長者無來轍(귀인의 수레는 오지 않네)'란 구절이 있다. 


推枕起迎笑(추침기영소) 베개 밀치고 일어나 웃으며 맞아

坐對墻陰雪(좌대장음설) 담그늘 쌓인 눈 마주하고 앉았네

寒暄未及他(한훤미급타) 인사가 다른 데에 미치기도 전에

說病乃第一(설병내제일) 병에 관한 이야기가 첫 번째라네

雖云異肥瘦(수운이비수) 비록 살찜과 야윔은 다르다 하나

不大殊健劣(부대수건렬) 건강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하네

百年舊朱顔(백년구주안) 붉은 얼굴 오래 전과 다름없는데

千丈新素髮(천장신소발) 길고 흰 머리카락 새로 났더라네


'추침(推枕)'은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 '攬衣推枕起徘徊, 珠箔銀屛邐迤開(옷 잡고 베개 밀치며 일어나 서성이더니, 구슬발과 은병풍 차례차례 열렸네.)'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한훤(寒暄)'은 한온(寒溫)과 같은 말이다. 서로 만나 날씨 이야기로 시작하여 인사를 주고받는다는 말로 안부라는 뜻으로 쓰였다. '진서(晉書)' <왕헌지전(王獻之傳)>에 '嘗與兄徽之、操之俱詣謝安, 二兄多言俗事, 獻之寒溫而已. 旣出, 客問安王氏兄弟優劣, 安曰, 小者佳. 客問其故, 安曰, 吉人之辭寡, 以其少言, 故知之(일찍이 형인 휘지, 조지와 함께 사안을 찾아뵈었는데, 두 형은 세속의 일을 많이 말하였지만 왕헌지는 날씨 이야기로 안부만 물을 뿐이었다. 조금 후 그들이 나가자 객이 사안에게 왕씨 형제의 우열을 물었다. 사안이 말하기를 ʻ막내가 낫소.ʼ라고 했다. 객이 그 까닭을 묻자 사인이 말했다. ʻ훌륭한 사람은 말이 적은데 그가 말을 적게 하는 것을 보고 알았소.)'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안(朱顔)'은 홍안(紅顔), 곧 젊은 사람의 고운 얼굴이라는 뜻과 술이 취해 붉어진 얼굴이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는 뒷 구절의 소발(素髮)과 댓구를 이루기에 전자의 뜻으로 쓰였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시 '餞校書叔雲(교서랑 이운 아저씨를 전별하다)'의 '少年費白日, 歌笑矜朱顔(젊어서 한창 날릴 때, 붉은 얼굴 자랑하며 노래하고 웃었다네.)' 구절에 나온다.  


開懷聽其言(개회청기언) 마음을 열고서 석천의 말 듣자니

矍鑠何恢豁(확삭하회활) 원기 그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네

學詩追甫白(학시추보백) 시 배움에 두보와 이백 추종하고

學道慕莊列(학도모장열) 도 배움에 장자 열자 흠모한다네

往往誦傑句(왕왕송걸구) 종종 빼어난 구절을 외기도 하고

掀簸困造物(흔파곤조물) 키 까불듯 조물주 가지고 논다네

壯氣隘宇宙(장기애우주) 장한 기운 우주조차 좁게 여기고

六鼇可手掣(육오가수체) 여섯 자라를 손으로 끈다고 하네


'개회청기언(開懷聽其言)'은 당나라 한유(韓愈)의 시 '此日足可惜贈張籍(슬퍼할 만한 이날 장적에게 드림)'에 '開懷聴其說, 往往副所望(가슴을 열고 그의 말 들으니, 종종 바라던 바에 부합하네.)'란 구절이 있다. '확삭(矍鑠)'은 노인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고 정신력이 왕성한 모양, 기력이 정정하며 몸이 재빠른 모양을 말한다. '보백(甫白)'은 이두(李杜)와 같은 말로 이백과 두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송(宋)나라 매요신(梅堯臣)의 '還吳長文舍人詩卷(중서사인 오장문의 시책을 돌려주다)'이란 시의 '有唐文最盛, 韓伏甫與白. 甫白無不包, 甄陶咸所索(당나라 문장 가장 성하였으니, 한유도 두보와 이백에게 굴복하였다네. 두보와 이백이 담지 않은 것 없으니, 천지조화를 모두 탐색하였다네.)' 구절에 나온다. 


'장렬(莊列)'은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장주(莊周)와 열어구(列御寇), 곧 장자와 열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흔파곤(掀簸困)'은 송나라 소식(蘇軾)의 '送蔣潁叔帥熙河(장영숙이 희하의 장수로 감에 송별하다)'란 시 '新詩岀談笑, 僚友困掀簸(이야기하고 웃는 사이에 새 시 나오는데, 동료와 벗들 까불어가면서 입에 올려 비평하기 어려워하네.)' 구절에 나온다. '애우주(隘宇宙)'는 송나라 육유(陸游)의 시 '讀杜詩(두보의 시를 읽다)'의 '看渠胷次隘宇宙, 惜哉千萬不一施(그의 시를 보니 가슴은 우주를 좁게 여겼으나, 천만 가지에 하나도 시행하지 못하였음이 안타깝도다)' 구절에 나온다. 


'육오가수체(六鼇可手掣)'에서 '체(掣)'는 끌어당긴다는 뜻이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其中有五山焉. 一曰岱輿, 二曰員嶠, 三曰方壺, 四曰瀛洲, 五曰蓬萊..... 山之根, 無所連著. 帝乃命禺疆, 使巨鼇十五, 擧首而戴之..... 龍伯之國, 有大人, 擧足不盈數步, 而曁五山之所, 一釣而連六鼇..... 岱輿員嶠二山. 流於北極. 沈於大海(그 가운데 다섯 개의 산이 있는데 첫째는 대여, 둘째는 원교, 셋째는 방호, 넷째는 영주, 다섯째는 봉래다..... 다섯 산의 뿌리는 연결되어 붙은 곳이 없었다..... 상제는 우강에게 명하여 큰 자라 열 다섯 마리로 하여금 머리를 들고 그것을 이게 하였다. 용백이란 나라에 거인이 있는데 발을 들어 몇 발자국 옮기지 않아도 이미 다섯 산이 있는 곳에 다다라 한번 낚시를 하여 연이어 여섯 마리의 자라를 끌어올렸다..... 이에 대여와 원교 두 산은 북극으로 흘러내려가 대해 속에 가라앉았다.)'라고 하였다. 주자의 시 '自上封登祝融峰絶頂次敬夫韻(상봉사에서 축융봉 꼭대기에 올라 경부가 지은 시에서 차운하다)'에도 '一掣了六鼇, 所恨無十犗(불 깐 소 열 마리가 없어, 한꺼번에 여섯 자라 끌어당기지 못해 한스럽네)'란 구절이 있다. 


雷電助狂怪(뇌전조광괴) 천둥 번개는 괴이함 돕는 듯하고

鬼神懾怳惚(귀신섭황홀) 귀신 또한 두려움에 멍한 듯하네

平生悲老洫(평생비노혁) 살아 가며 늙고 시듦 슬퍼하는데

膏火錐刀末(고화추도말) 기름이 송곳 끝에서 타는 듯하네

意欲奪天弢(의욕탈천도) 뜻은 죽음의 속박 벗어나고 싶어

去入無窮闥(거입무궁달) 이 곳 떠나 무궁문에 들어간다네

汗漫九垓外(한만구해외) 아득히 먼 땅 끝으로 돌아다니니

浮游樂未畢(부유락미필) 떠도는 그 즐거움은 끝이 없다네


'뇌전조광괴(雷電助狂怪)'는 한유의 시 '赴江陵途中寄贈王二十補闕李十一拾遺李二十六員外翰林三學士(강릉으로 가는 도중에 왕보궐, 이습유, 이원외 한림 세 학사에게 부치다)'의 '雷霆助光怪, 氣象難比侔(천둥 번개는 괴이함 도우니 기상 견주어 짝하기 힘드네.)' 구절에 나온다. '노혁(老洫)'은 '장자' <제물론(齊物論)>의 '其厭也緘, 以言其老洫(그 억눌린 모습이 봉하여 막힌 것 같음은 늙어서도 욕심에 빠진 것 같음을 말한다.) 구절에 나온다. 송나라 임희일(林希逸)의 '장자구의(莊子口義)'에도 '其為物慾所厭没, 如被緘縢然, 至老而不可救拔, 故曰老洫. 洫者, 謂其如墜於溝壑也(물욕에 눌리고 빠진 것이 봉하여 묶인 것 같은 것이 늙어서도 구하여 뺄 수 없으므로 늙어서 도랑에 빠진 것이라고 하였다.)'란 구절이 있다. '혁(洫)'은 도랑과 골짜기에 빠진 것 같다는 말이다. 


'고화(膏火)'는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의 '積善在身, 猶長日加益, 而人不知也. 積惡在身, 猶火之銷膏, 而人不見也(선을 쌓은 것이 몸에 있으면 자라는 것이 날로 더하여져도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악을 쌓은 것이 몸에 있으면 불이 기름을 태워도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에서 인용한 것이다. '추도말(錐刀末)'은 송곳의 뾰족한 끝을 말한다. '좌전(左傳)' <소공(昭公) 6년>의 '民知爭端矣, 將棄禮而徵於書, 錐刀之末, 將盡爭之(백성들이 윗사람들과 다툴 꼬투리를 알게 되면 장차 예의는 버리고 책에 쓰인 것만 요구하여 송곳 끝만한 일까지 다투게 될 것이다.)'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탈천도(奪天弢)'는 '장자(莊子)' <지북유(知北游)>의 '已化而生, 又化而死, 生物哀之, 人類悲之. 解其天弢, 墮其天袟, 紛乎宛乎, 魂魄將往, 乃身從之, 乃大歸乎(자연의 변화에 의하여 생겨나기도 하고, 또 그 변화에 의하여 죽기도 한다. 이것을 생물들이 슬퍼하고 이것을 사람들이 비통하게 생각한다. 활집을 풀고 옷주머니를 끌러놓듯이 하늘에서 받은 형체를 떠나 육체가 산산이 흩어지고 정신이 이 형체를 떠나려 할 때 곧 몸도 그것을 따르게 될 것인데 이것이 곧 큰 복귀인 것이다.)' 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문맥상 '빼앗을 탈(奪)'자는 '벗을 탈(脫)'자로 바꿔야 한다. '거입무궁달(去入無窮闥)'에서 '달(闥)'은 문(門)과 같은 말이다. 이백의 시 '古風(옛 시체로 짓다)' 제25수 '歸來廣成子, 去入無窮門(광성자 돌아오더니, 끝없는 문으로 들어간다네.)'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만구해(汗漫九垓)'에서 '한만(汗漫)'은 마음껏 노니는 것. '구해(九垓)'는 구천(九天), 즉 하늘을 말한다. '회남자(淮南子)' <응도훈(應道訓)>에 '若士謂盧敖曰..... 吾與汗漫游於九垓之外(약사가 노오에게 말했다..... 나와 더불어 저 멀리 구천의 바깥까지 노닙시다.)'에서 인용했다. 이백의 시 '廬山謠 寄盧侍御虛舟(여산의 노래, 노시어 허주에게 부치다)'의 '先期汗漫九垓上, 願接盧敖遊太清(먼저 구천의 위 마음껏 노니는 것 기약하였는데, 원컨대 노오와 함께 우주에서 놀았으면 하네.)' 구절과 이황의 시 '次季任密陽嶺南樓和朴昌世詩二十二韻(계임이 밀양 영남루에서 박창세의 시에서 22운을 차운해서 화답시를 짓다)의 '游汗漫出六合, 臥閱蓬萊淸淺流(세상 바깥 떠다니며, 천지사방 넘나들며 노니는데, 누워서 봉래산 차례로 살펴보니 맑은 물 얕게 흐르네.) 구절에도 나온다. 


吾詩尙豪宕(오시상호탕) 내 시는 크고 넓음을 숭상하노니

何用巧剞劂(하용교기궐) 어찌 멋지게 다듬을 필요 있을까

吾行蹈大方(오행도대방) 나의 행동은 큰 도리 실천하노니

不必拘小節(불필구소절) 작은 절차에 거리낄 필요 없으리

詞氣甚激昻(사기심격앙) 그의 어조 매우 격하게 높아지니

河漢瀉頰(하한사협설) 은하수 입에서 쏟아지는 것 같네

我初驚且嘆(아초경차탄) 내 처음에는 놀라고 한숨 짓다가

中頗疑以詰(중파의이힐) 중간에 자못 의혹 있어 따졌다네


'吾詩尙豪宕 何用巧劂剞 行踏大方 不必拘小節'은 임억령의 시창작론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 그가 격식과 규범, 절차 등 이른바 법도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는 호탕한 시관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학문과 덕행을 착실히 닦고 경세제민을 위한 수기치신(修己治身)의 공부가 높은 경지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문예(文藝)의 능력이 나오기 때문에 억지로 꾸미거나 지나치게 격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임억령의 시창작론이었다. 


임억령은 일생 동안 많은 독서를 하였다. 특히 중국 당나라의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초나라의 굴원(屈原)동진(東晉) 말기~남조(南朝) 송(宋)대의 도연명(陶淵明) 등을 통해서 그의 시세계를 확장하는 한편 장자(莊子)를 통해서 도가적 정신세계로 그의 철학적 외연을 넓혀 나갔다. 이런 노력은 그의 칼 같은 기질처럼 그의 시가 강렬하고 예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섬세하고 낭만적인 면을 동시에 지닐 수 있게 한 바탕이 되었다. 임억령의 호탕한 시관은 그의 방외적 기질과 낭만적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용교기궐(何用巧剞劂)'에서 '기궐(剞劂)'은 '(楚辭)' <애시명(哀時命)>의 '握剞劂而不用兮, 操規榘而無所施(조각칼 쥐고서도 쓰지 않음이여, 규구잡고서도 베풀 곳 없다네.)'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기궐(剞劂)'은 원래 조각칼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동사형 '다듬다, 조각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이야순(李野淳)이 편찬한 이황의 '퇴계집(退溪集)' 주석서 '요존록(要存錄)'에는 '猶言雕刻(조각이라는 말과 같다.)'고 되어 있고, 주자는 '欹劂, 刻鏤刀也(궐은 아로새기는 칼이다.)'라고 하였다. '도대방(蹈大方)'은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의 '懲咎賦(허물을 징계함)'에 나오는 '蹈乎大方兮, 物莫能嬰(큰 법도 따름이여 사물 얽힐 수 없다네.)'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장자'의 <秋水(가을 강)>에 '吾長見笑於大方之家(내 오래도록 큰 도를 가진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아왔소.)'라는 구절이 있고, 송나라 임희일은 '大方, 大道也(대방은 대도이다.)'라고 하였다. '하한사협설(河漢瀉頰舌)'에서 '하한(河漢)'은 '장자' <逍遙遊(자유롭게 노님)>의 '吾驚怖其言, 猶河漢而無極也(내 그 말이 은하수처럼 끝이 없는 것 같아 놀라 자빠졌다네.)' 구절에 나온다. 


自非聖於詩(자비성어시) 스스로 시의 성인 아니라 여기면

法度安可輟(법도안가철) 어찌 법도를 버릴 수가 있겠는가

寧聞大賢人(녕문대현인) 어찌 들었을까 크게 현명한 사람

不用規矩密(불용규구밀) 조밀한 법도 필요없다고 한 말을

曷不少低頭(갈불소저두) 어찌 조금도 고개 숙이지 않는가

加工鍊與律(가공련여률) 더욱 다듬어 법도에 맞춰 보려고

比如撞洪鐘(비여당홍종) 비유하건대 큰 종을 친다고 하면

寸筳豈能發(촌정기능발) 한치 짜리 대나무로 소리가 날까


'自非聖於詩 法度安可輟 寧聞大賢人 不用規矩密'은 이황의 시론이다. 이황은 법도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큰 종을 칠 때 작은 대나무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큰 종을 쳐서 소리를 내려면 그에 걸맞는 큰 나무 기둥으로 쳐야 한다는 것이다. 곧 시를 짓는 데 있어서 법도에 맞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어시(聖於詩)'는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를 말한다. '가공연여율(加工鍊與律)'은 송나라 위경지(魏慶之)가 쓴 '시인옥설(詩人玉屑)'의 '作詩在於煉字. 葛常之..... 煉句不如煉字, 煉字不如煉意, 煉意不如煉格. 金針格..... 唐人雖小詩, 必極工而後巳. 所謂旬鍛月煉, 信非虛言..... 皮日休, 百煉為字, 千煉成句(갈상지는 시를 짓는 것은 글자를 단련하는데 있다고 했다...... 금침격에는 구절을 정련하는 것은 글자를 정련함만 못하고, 글자를 정련하는 것은 뜻을 정련함만 못하며, 뜻을 정련하는 것은 격을 정련함만 못하다고 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비록 짧은 시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아주 정밀하게 한 후라야 그만둔다. 이른바 열흘 간 불리고 한달 동안 담금질한다는 것이 실로 빈말이 아니다..... 피일휴는 시를 짓는데 백 번 단련하여야 한 글자가 되고, 천 번 단련하여야 한 구절이 된다고 하였다.)'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비여~기능발(比如~豈能發)'은 한나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권11 <선설(善說)>의 '子路曰, 建天下之鳴鐘, 而撞之以挺, 豈能發其聲乎哉?(자로는 '천하를 울리는 종을 만들어놓고 막대를 가지고 친다면 어찌 그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구절에서 인용했다.


長者若不聞(장자약불문) 연장자께선 이 말 들리지 않는가

意象更超越(의상갱초월) 생각과 모습 더욱 더 초월하였네

陳遵詫酒箴(진준탁주잠) 진준 같은 분 주잠을 자랑했지만

張竦亦未失(장송역미실) 장송같은 나도 자신 잃지 않았네

談論縱參差(담론종참치) 선생과 내 담론 들쑥날쑥 달라서

許與略瑣屑(허여략쇄설) 잘고 좀스런 말도 호락치 않았네

當知曠士懷(당지광사회) 당연히 알겠네 넓은 선비의 마음

坦坦非諛悅(탄탄비유열) 탄탄하여 아첨의 말 기쁘지 않아


'장자(長者)'는 연장자의 뜻이다. 임억령은 이황보다 5살 연장자였다. '진준~미실(陳遵~未失)'은 '한서' <유협전(游俠傳)>의 '陳遵字孟公, 杜陵人也..... 與張竦伯松俱爲京兆史. 竦博學通達, 以廉儉自守, 而遵放縱不拘, 操行雖異, 然相親友..... 遵耆酒, 每大飮..... 竦居貧, 無賓客, 時時好事者, 從之質疑, 問事論道經書而已. 而遵晝夜呼號, 車騎滿門, 酒肉相屬..... 先是, 黃門郞揚雄, 作酒箴, 以諷諫成帝, 其文爲酒客難法度士, 譬之於物, 曰, 子猶甁矣. 觀甁之居, 居井之眉, 處高臨深, 動常近危..... 不如鴟夷. 鴟夷滑稽, 腹如大壺, 盡日盛酒, 人復借酤. 常爲國器, 託於屬車, 出入兩宮, 經營公家. 繇是言之, 酒何過乎! 遵大喜之, 常謂張竦, 吾與爾猶是矣(진준은 자가 맹공으로 두릉 사람이다..... 장송과 함께 모두 경조내사를 역임하였다. 장송은 박학하고 두루 통달하였으며, 청렴과 검소함으로 스스로를 잘 건사하였으나, 진준은 방종하고 얽매임이 없어, 두 사람의 지조와 행실은 비록 달랐으나 서로 매우 친했다..... 진준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매번 크게 마셨는데..... 장송은 집이 가난하여 찾아오는 손님이라고는 없고, 때때로 호사가들이 그를 찾아 의심나는 것을 물으면 바로잡아주고, 경서를 통해서만 논의할 뿐이었다. 그러나 진준은 밤낮으로 큰소리치며 일에 관하여 묻거나 도를 논하는데 수레와 말이 대문 가득 넘쳤으며 술과 고기가 연이어 나왔다..... 이에 앞서 황문랑 양웅이 '주잠'이라는 글을 지어 성제에게 풍간하였는데, 그 글은 주객이 법도를 지키는 선비를 나무라는 내용을 사물에 비유하여 '그대는 물병과 같다. 물병의 거처를 살펴보면 우물의 어귀에 놓여 있다가 높이 올라왔다가 깊은 데로 내려갔다가 하면서 움직일 때마다 항상 위태로움에 직면하게 된다..... 큰 가죽주머니만 못하다. 큰 가죽주머니는 원활하고 배는 큰 항아리 같으며 종일 술을 채워 사람들이 다시 사들인다. 항상 국가의 기물이 되어 수레에 실려서 두 궁전을 드나들고, 관가의 일을 경영한다. 이로써 말하건대 술이 어찌 잘못이 있다고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진준이 이 글을 매우 기뻐하여 항상 장송에게 말하기를 '나와 그대가 바로 이러하도다!'라고 하였다.)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광사회(曠士懷)'는 남송(南宋) 포조(鮑照)의 '代放歌行(마음껏 노래함 시체를 본떠서 짓다)'란 시 '小人自齷齪, 安知曠士懷(소인배들은 절로 악착 같으니, 어찌 큰 선비의 마음을 알리요?)' 구절과 주자의 '再賦解嘲(다시 지어 조롱하는 것을 해명하다)' 란 시 '豈悟曠士懷, 泛若不繫舟(도량 큰 선비의 마음 어찌 깨닫겠는가? 배 매어두지 않은 듯 둥둥 떠다니네.)' 구절에서 인용했다. 


向來積憂煩(향래적우번) 지금까지 시름 번뇌 쌓아 왔지만

今夕痛湔祓(금석통전불) 오늘 저녁 통쾌히 씻어 버렸다네

大匠遇血指(대장우혈지) 훌륭한 목수 어쩌다 풋내기 만나

不以工掩拙(불이공엄졸) 좋은 솜씨로도 내 서투름 봐주네

發揮黃家堂(발휘황가당) 황 진사댁에서 실력 발휘하신 뒤

容我妄自述(용아망자술) 내게 망령되이 시 짓게 허락했네

敢不樂從之(감불락종지) 어찌 감히 기꺼이 따르지 않으리

斐然呈八絶(비연정팔절) 멋부려 여덟 절구 지어 바쳤다네


'금석통전불(今夕痛湔祓)'에서 '전불(湔祓)'은 '더러움·악습 따위를 씻어 버리다, 죄명(罪名)을 씻다'의 뜻이다. 육유의 '乞祠久未報(사당에 오래도록 알리지 않음을 빌다)'란 시에 '七百日来塵滿抱, 今朝湔祓有新詩(7백여 일이나 먼지 가득 안고 있다가, 오늘 아침 깨끗이 씻어내고 나니 새 시가 나온다네.)' 구절이 있다. '대장우혈지(大匠遇血指)'의 '혈지(血指)'는 한유의 '祭柳子厚文(유종원에게 바치는 제문)'이란 시 '不善爲斵, 血指汗顔, 巧匠旁觀, 縮手袖閒(서투른 목수는 손가락에 피가 철철 흐르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는데, 솜씨 좋은 장인은 곁에서 구경하며 손을 소매 사이에다 넣고 있네.)'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희임대수견방논시(喜林大樹見訪論詩)'에는 '黃上舍堂詠八絶本爲林公勸予同作(황 진사댁에서 여덟 수의 절구를 지은 것은 본래 임공이 내게 함께 짓자고 권하였기 때문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시는 조선 최고의 도학자 이황이 조선 최고의 시인 임억령과 시론에 대해 논쟁한 내용을 바탕으로 지은 것이다. 임억령의 시재(詩才)는 이황도 감탄할 만큼 천재적이었다. 


임억령은 주정론에 입각한 호탕시론을 주장한 반면에 이황은 '自非聖於詩(자비성어시) 스스로 시의 성인 아니라 여기면, 法度安可輟(법도안가철) 어찌 법도를 버릴 수가 있겠는가, 寧聞大賢人(녕문대현인) 어찌 들었을까 크게 현명한 사람, 不用規矩密(불용규구밀) 조밀한 법도 필요없다고 한 말을'에서 보듯이 주리론(主理論)에 입각한 법도시론(法度詩論)을 주장했다. 호남의 문학을 대표하는 임억령과 영남의 도학을 대표하는 두 거장의 시론에 대한 논쟁은 자못 치열했던 것 같다. 이황의 감정이 격앙되어 있음을 시에서 느낄 수 있다. 이황은 자신을 박학하고 두루 통달하였으며, 청렴하고 검소한 장송(張竦), 임억령을 대범하고 얽매임이 없는 호주가 진준(陳遵)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이황은 시에 있어서 자신보다 임억령이 뛰어남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있다.


임억령의 시론은 '조량수재(調梁秀才)'라는 시 '吾觀古之人 爲詩險語不 周詩三百篇 平淡自中律 何嘗有來歷 皆自性情出(내가 옛 사람들을 보건대 시에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았더라. 시경 삼백 편의 시는 평범하고 담담하면서도 스스로 법도에 맞더라. 따지고 보면 다 내력이 있으니 성품과 정서에서 나오는 것이라.)'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호탕하면서도 평담한 시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황의 시를 통해서 본 임억령은 시에 있어서는 두보와 이백을 추종했고, 철학에 있어서는 도가(道家)의 장자와 열자를 흠모했다. '우제(偶題)'에서 보듯이 그는 현실에서 자신이 처한 문제를 장자의 도가철학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우제(偶題) - 우연히 짓다


眼因思道合(안인사도합) 눈은 도를 생각하느라 감기고

頭爲厭時底(두위염시저) 머리는 시절 사나워 떨구노라

自得莊周學(자득장주학) 장주의 학문을 얻은 이후부터

榮枯一指齊(영고일지제) 영락이 하나로 고르게 보이네


장주(莊周)의 학문을 체득하면서 현실의 영화와 쇠락이 가지런히 보이는 등 세상을 달관했다는 내용의 시다. 현실적 갈등을 장주의 철학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은 임억령이 담양부사로 오면서부터 더욱 뚜렷해진다.


'장주'는 전국(戰國)시대 사상가이다. 도교에서는 장주가 북육화단(北育火丹)을 먹고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었다고 믿었다. 당(唐)나라 황제 현종(玄宗)은 그를 남화진인(南華眞人)으로 봉했다. 장자의 사상은 중국의 불교, 산수화, 시가(詩歌)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장자는 '말로 설명하거나 배울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다. 도는 시작도 끝도 없고 한계나 경계도 없다. 인생은 도의 영원한 변형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며, 도 안에서는 좋은 것, 나쁜 것, 선한 것, 악한 것이 없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환경, 개인적인 애착, 인습, 세상을 낫게 만들려는 욕망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자는 이러한 도가적 입장에서 봉건적 윤리를 중시한 유가(儒家)와 겸애설(謙愛說)을 주장한 묵가(墨家)의 가르침을 반박했다. 


세속의 구애를 거부하고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려는 임억령의 철학은 시 '추성우죽재(秋城雨竹齋)'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임억령은 유가철학의 한계를 노장철학을 통해서 극복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추성우죽재(秋城雨竹齋) - 담양 우죽재


此老生涯世共咍(차노생애세공해) 세인들은 이 늙은이 생애 비웃나니

一張琴又一甁梅(일장금우일병매) 거문고 하나에 매화도 한 가지로다

江南江北身無絆(강남강북신무반) 강남 강북이든 매인 몸이 아니라서

天外浮雲任去來(천외부운임거래) 하늘 밖 구름처럼 마음대로 오가네


권세에 아부하거나 세속에 타협하지 않고 깨끗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시다. '추성(秋城)'은 담양의 옛 이름이다. 담양은 통일신라 경덕왕(757년) 때부터 고려 성종(995년) 대까지 250년간 추성현(秋城縣)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이 무렵 임억령은 사옹원계축(司饔院契軸)을 만들었다. 1528년 춘방계(春坊契) 모임에서 계축을 만든 이래 두 번째다. 그는 또 인왕산(仁王山) 세심대(洗心臺)에 오른 뒤 시 한 수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