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9년(명종 4) 3월 9일 박우는 처가인 해남 김씨(海南金氏)의 세장지(世葬地)가 있는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귀엽마을 야산에 묻혔다. 이무렵 임억령은 임진당(任眞堂) 채세영(蔡世英)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나갈 때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선정을 베풀 것을 당부하면서 노잣돈 대신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하늘은 자꾸만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는데
사나운 벼슬아치들은 재물 모으기 바쁘네
도둑떼는 으슥한 곳에 숨어있기 일쑤이니
파리한 백성들은 풀섶에서 탄식하고 있네
지방의 수령된 사람이라면 온화해야 하며
오로지 훌륭한 인재에 힘입어야만 하리라
10월 임억령은 거처를 해남에서 강진의 만덕산(萬德山, 408.6m) 백련사(白蓮寺) 부근 덕영촌(지금의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신평마을)으로 옮겨 은거했다. 몸은 비록 강진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창평의 송강별서(松江別墅)가 떠나지 않았다. 여기서 송강은 지금의 증암천, 송강별서는 서하당을 가리킨다. 그는 언젠가 창평의 송강별서로 돌아가 살 것을 기약하는 '억송강별서(憶松江別墅)'를 지었다.
억송강별서(憶松江別墅) - 송강별서를 생각하며
綠野多紅稻(녹야다홍도) 푸르른 들녘에는 나락이 무르익고
淸江牣白魚(청강인백어) 맑은 강에는 흰물고기 가득하구나
秋來愁疾病(추래수질병) 가을이 왔으나 병들어서 근심되고
老去戀樵漁(노거련초어) 늙으니 나무꾼과 고기잡이 그립네
松下期垂釣(송하기수조) 소나무 아래에서 낚시를 기약했고
山崖已卜居(산애이복거) 산기슭에는 이미 거처를 정했었네
歲時歸計決(세시귀계결) 세모에는 돌아갈 것을 결심했으니
童僕汝巾車(동복여건거) 아이야 너는 수레나 준비하려무나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장도
같은 갈 임억령은 완도 유람을 떠났다. 그는 완도의 작은 섬 장도(將島, 장군도)에 있는 호국신사(護國神祠)에 들렀을 때 사당에 모신 송징 장군(宋徵將軍)을 참배했다. 송징 장군은 고려 말 완도 청해진(淸海鎭)을 중심으로 삼별초항쟁(三別抄抗爭)을 이끄는 한편 고려 정부의 세곡선(稅穀船)을 털어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을 구휼하는 등 선정을 베푼 전설적 무인이었다. 백성에 대한 애민정신이 깊었던 임억령은 장편 영웅서사시 '송대장군가(宋大將軍歌)'룰 지어 송징 장군을 부활시켰다.
장도 당집
송대장군가(宋大將軍歌)
己酉十月海珍叟(기유시월해진수) 기유년 시월 해남 사는 늙은이가
遠來道康江村寓(원래도강강촌우) 멀리 강진땅 강촌에 와서 살았네
山如怒馬振鬣驟(산여노마진렵취) 산줄긴 노한 말 갈기처럼 내닫고
水作盤龍掉尾走(수작반룡도미주) 강물은 용 꿈틀거리는 듯 달리네
梗枏橘柚不足數(경남귤유부족수) 과일과 채소는 헤아릴 것 없는데
生此偉人英而武(생차위인영이무) 위인 나시매 영특하고 용감했네
力拔山兮氣摩宇(력발산혜기마우) 기력은 산을 뽑고 천지를 휩쓸며
目垂鈴兮須懸帚(목수령혜수현추) 눈은 왕방울 턱엔 빗자루 달았네
'기유(己酉)'는 1549년(명종 4)에 해당한다. '해진(海珍)'은 해남의 별칭이다. 조선 태종 9년에 해남현(海南縣)을 진도현(珍島縣)과 합쳐 해진군(海珍郡)으로 개편할 때 나온 이름이다. 임억령의 교향이 해남이었으므로 '해진수(海珍叟)'라 자칭한 것이다. '도강(康江)'은 강진의 옛이름이다. 임억령은 강진에서 잠시 우거한 적이 있었다.
上接擣藥月裏兔(상접도약월리토) 손 뻗으면 달속의 토끼를 붙잡고
生縛白額山中虎(생박백액산중호) 이마 흰 호랑이도 산채로 잡으리
腰間勁箭大如樹(요간경전대여수) 허리에 찬 화살 나무둥치와 같고
匣中雄劍遙衝斗(갑중웅검요충두) 칼집의 큰 칼은 북두성 찌르겠네
六十里射若百步(육십리사약백보) 활 쏘면 육십리를 백보처럼 날고
嵯峨石貫如弊屨(차아석관여폐구) 활촉은 벼랑에 짚신 꿰듯 박혔네
項籍縱觀彼可取(항적종관피가취) 항우는 시황 소유물 취한다 했고
韓信頗遭淮陰侮(한신파조회음모) 한신은 회음 땅에서 수모 당했네
'백액호(白額虎)'는 사나운 호랑이를 말한다. '항적(項籍)'은 자가 우(羽)다. 진시황(秦始皇)이 회계(會稽) 지방을 순시하는 광경을 목격하고서 '彼可取而代也(저 자리를 빼앗아 대신하겠다.)'고 말했다 한다. '회음모(淮陰侮)'는 한신이 불우한 시절 회음에서 남의 가랑이 아래를 기어가는 모욕을 당한 일을 가리킨다.
長鯨豈容一杯魯(장경기용일배노) 큰 고래가 한잔 술로 만족하리요
蟠龍或困草間螻(반룡혹곤초간루) 반룡은 풀섶 개미에게 곤욕당해
千尋巨海夜飛渡(천심거해야비도) 대해를 한밤중에 나는 듯 건너와
萬疊窮谷聊爲負(만첩궁곡료위부) 깊은 산골짝에 몰래 둔을 치고서
能敎野犬吠白晝(능교야견폐백주) 들개를 부려 대낮에도 짖게 하고
盡使海舶山前聚(진사해박산전취) 바다에 뜬 배들을 모여들게 하니
邊人皆稱米賊酋(변인개칭미적추) 사람들 다 그를 미적추라 불렀네
王師䝱息安能討(왕사협식안능토) 관군도 벌벌 떠는데 누가 덤비리
'노(魯)'는 노주(魯酒)를 말한다. 노나라의 술이 싱거워서 박주(薄酒)라고도 한다. '반룡(蟠龍)'은 아직 승천하지 않는 용이다. '누(螻)'는 누의(螻蟻), 개미다. '미적추(米賊酋)'는 완도 앞바다에서 세미선을 습격해서 탈취한 쌀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줬다는 전설에 나오는 쌀도적 두목이다.
那知天借女兒手(나지천차여아수) 하늘이 여자의 손을 빌릴 줄이야
一夜絃血垂如縷(일야현혈수여루) 하룻밤 새 활시위에서 피가 줄줄
壯骨雖與草木腐(장골수여초목부) 뼈는 비록 초목과 함께 삭았지만
毅魂尙含風雷怒(의혼상함풍뢰노) 의연한 혼백 풍뢰 머금어 사납네
爲鬼雄兮食此土(위귀웅혜식차토) 신령이 되어 이 땅에서 받들어져
揷雉羽兮木爲塑(삽치우혜목위소) 장대에 꿩깃 꽂고 신상도 새겼네
彼何人兮怪而笑(피하인혜괴이소) 저 어인 사람들 괴이하다 웃으며
毀而斥之江之滸(훼이척지강지호) 부수고 허물어 물 가에 버렸다네
百年蕭條一間廟(백년소조일간묘) 백년 세월에 당집 한칸 적막한데
歲時伏臘鳴村鼓(세시복랍명촌고) 철따라 복날 섣달에 북치는 소리
翩翩落日野巫禱(편편락일야무도) 해질 무렵에 무당이 굿을 하는데
颯颯西風寒鴉舞(삽삽서풍한아무) 서풍이 불자 까마귀도 춤을 추네
靈之來兮飄天雨(령지래혜표천우) 신령 강림하자 곧 천우도 날리고
神之床兮瀝白酒(신지상혜력백주) 젯상에 올린 것은 합주 한사발뿐
嗟呼此豈淫祠類(차호차기음사류) 아 어찌 음사로만 치부할 것인가
甚矣諸生識之陋(심의제생식지루) 유생들 식견 좁고도 심히 낮구나
翦紙招魂着自古(전지초혼착자고) 종이 혼령 부름은 예부터 있었고
往往下降叢林藪(왕왕하강총림수) 수풀에 내린 신 더러 보았잖은가
公之勇健是天授(공지용건시천수) 공의 용맹이야 하늘이 내리신 것
天之生也誰得究(천지생야수득구) 하늘이 점지한 뜻을 누가 알리요
閔見蒼生塗炭苦(민견창생도탄고) 도탄에 빠진 백성 고통 안타까와
故遣將軍欲一掃(고견장군욕일소) 장군 보내 쓸어버리려 한 것일세
時無駕御英雄主(시무가어영웅주) 당시 영웅을 부릴 군주가 없어서
長使奇才伏草莽(장사기재복초망) 인재를 영영 초야에 묻히게 했네
若敎生漢遇高祖(약교생한우고조) 한 나라에 태어나 유방 만났다면
不曰安得四方守(불왈안득사방수) 인재 못구한다는 말은 없었을 것
功名肯與噲等伍(공명긍여쾌등오) 공은 번쾌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灞上棘門俱乳臭(패상극문구유취) 패상극문의 장수들은 젖내 날 뿐
又使生魯見尼父(우사생노견니부) 노 나라에 태어나 공자 만났다면
不曰自吾得子路(불왈자오득자로) 자로를 얻었단 말 하지 않았으리
鏃而礪之葀而羽(촉이려지괄이우) 살촉을 뾰족이 갈아 깃털 꽂으면
升堂必在仲由右(승당필재중유우) 당에 올라 자로 윗자리 앉았으리
'안득사방수(安得四方守)'는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중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고 대풍가(大風歌)를 지어 불렀는데, 그 가사에 '安得猛士兮守四方'이라는 구절이 있다. '패상 극문(灞上棘門)'은 지금 중국의 시안(西安) 근방에 있는 지명이다. 패상은 패수(覇水)의 서쪽 백록원(白鹿原), 극문은 함양(咸陽) 근처다. 초(楚)나라와 한나라가 싸울 때 한군이 주둔한 적이 있다. 여기서는 송징 장군에 비하면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 마초(馬超), 황충(黃忠) 등 유방 휘하 촉한(蜀漢)의 오호장군(五虎將軍)들이 모두 유치하게 보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승당필재중유우(升堂必在仲由右)'는 송 대장군을 춘추시대 공자의 제자로 노나라의 정치가이자 무인인 중유(仲由)에 비견하여 말한 것이다. 중유는 자인 자로(子路)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공자가 자로에 대해 '내가 중유를 얻고 나서는 나쁜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공자는 자로를 처음 보고는 대나무로 화살을 만드는 데 비유하여 '括而羽之, 鏃而礪之, 其入之不亦深乎.(화살 한쪽에 깃을 꽂고, 다른 한쪽에 살촉을 갈아서 박는다면 더 깊이 박히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권5 <자로초견(子路初見)>에 나오는 내용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편에서 공자는 자로의 학문적 수준을 승당(升堂)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한 바 있다. 승당은 학문이나 기예가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聖朝如今帶戎虜(성조여금대융로) 요즘 같은 세상에 왜구들 날뛰어
邊隅隨處羅防戍(변우수처라방수) 변경 곳곳에 수자리 벌여 있는데
時時怯掠海島賈(시시겁략해도고) 섬 다니는 상인들 자주 빼앗기고
歲歲蕩盡司贍布(세세탕진사섬포) 매년 사섬시 면포를 탕진하는 터
明君包容每含垢(명군포용매함구) 밝은 임금 허물 덮어 포용하는데
邊將怯弱長縮首(변장겁약장축수) 변경 장수 나약해 움츠러만 들고
只是朝庭乏牙爪(지시조정핍아조) 나라 지킬 용맹한 신하는 없으니
坐令蜂蠆喧庚午(좌령봉채훤경오) 경오 왜구들 난리 앉아서 당했지
'융로(戎虜)'는 오랑캐, '봉채(蜂蠆)'는 독벌과 전갈인데, 모두 왜구를 가리킨다. '사섬포(司贍布)'는 사섬시(司贍寺)에 바치는 면포를 말한다. 사섬시는 저화(楮貨)의 주조와 외거노비(外居奴婢)의 공포(貢布)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서다. '함구(含垢)'는 임금의 자리에 있는 자는 좋지 않은 일도 포용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좌전(左傳)' 선공(宣公) 15년조에 '川澤納汚 山藪藏疾 瑾瑜匿瑕 國君含垢 天之道也.(개울이나 연못은 더러운 물도 받아들이고, 산과 숲은 독충을 감추며, 옥에도 티가 있고, 임금이 수치를 참는 것도 하늘의 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아조(牙爪)'는 용맹한 신하를 뜻한다. '경오(庚午)'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즉 1510년(경오, 중종 5)에 남해안 부산포와 내이포, 염포 등 세 곳의 포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대마도(對馬島)의 왜인들과 연합하여 일으킨 폭동을 말한다.
壯公我髮豎(장공아발수) 장하도다 공이시여 내 머리털 일어서고
貴公吾腰俯(귀공오요부) 귀하도다 공이시여 허리 절로 굽혀지네
在古時未遇(재고시미우) 옛날의 당시에 때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於今骨已朽(어금골이후) 지금쯤은 뼈까지도 이미 다 삭았겠구려
生爲海中寇(생위해중구) 살아 생전에는 해적들의 두령이 되었고
死棄海中霧(사기해중무) 죽은 뒤에는 바다의 안개속에 버려져서
靑山本無墓(청산본무묘) 청산에 본래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으니
遺民誰爾後(유민수이후) 남겨진 백성중에 그대 후예는 누구던가
問之於古老(문지어고노) 나이 많은 노인에게 자초지종을 물어서
首尾得細剖(수미득세부)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알게 되었도다
太史徵人口(태사징인구) 역사를 쓰는 사람은 구전을 증거삼아야
列傳猶不誤(열전유불오) 열전에 오히려 착오가 생기지 않는다오
莫道吾詩漏(막도오시루) 나의 시가 엉성하다고 말하지들 마시라
庶幾國史補(서기국사보) 국사를 어지간히 보완할 수가 있으니까
<송대장군가>는 영웅 송 대장군의 위대함과 신령함을 찬양하고 추모하는 한편 왜구들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상황에 비분강개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읊은 서사시다. 임억령은 백성들을 비웃으며 호국신사를 핍박하는 지역 유생들을 호되게 비판한다. 민중들이 처한 처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그의 애민정신이 없었다면 '송대장군가' 같은 영웅서사시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송징 장군의 찬양을 통해서 현실 개혁을 위한 민중의지를 표출한 '송대장군가'는 서사한시(敍事漢詩)의 백미(白眉)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송 대장군은 백성들이 신당에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낼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었는데, 이 시에서는 정작 중요한 백성을 구휼했던 구체적인 활동들이 빠져 있으며, 현실 모순에 대한 비판 의식도 약화되어 있다. 이것은 임억령이 귀로 들은 것에만 의존해서 당시의 서사적 상황에 대처했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가 조선 사회의 근본 모순이 이씨 왕조정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 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임억령을 비롯한 조선 사대부 지식인들의 정치 경제적 토대가 이씨 왕조정권이었기에 이들의 개혁 의지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사대부 지식인들의 현실 모순에 대한 인식과 개혁 의지는 조선 왕조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봉기했던 홍길동(洪吉同), 임거정(林巨正), 장길산(張吉山) 등 농민혁명군 지도자들보다도 훨씬 뒤떨어진 것이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송징이라는 인물이 보이지 않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康津縣) 사현조(射峴條)>에 그 이름이 보인다. <사현조>에 '옛날에 섬(완도) 사람으로 송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무용(武勇)이 당할 사람이 없고 활을 쏘면 60리 밖에까지 미쳤다고 한다. 활시위를 끊자 피가 나왔다고 하며 지금도 반석 위에 화살 흔적이 남아있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사현(射峴)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장도 당집의 장보고 영정
통일신라시대 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長佐里) 장도(將島, 將軍島) 호국신사에는 원래 주신(主神)인 송징 장군을 비롯해서 그 우측에 장보고(張保皐)의 동향인이자 부장이었던 정년 장군(鄭年, 鄭連將軍), 좌측에 마을 근처에 절을 짓고 포교를 했던 고려조 승려인 혜일 대사(慧日大師)를 모셨다.
진천 송씨(鎭川宋氏) 족보에 송징은 시조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의 5대손 찬성사공(贊成事公) 송지백의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송징은 고려시대 삼별초 항쟁 때 진도정부(珍島政府)의 거점 확장을 위해 완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완도를 점령한 그는 조정과 지방수령, 토호들이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것도 모자라 가혹하게 세곡을 걷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분노했다. 송징은 세미선(稅米船)을 습격하고 빼앗은 세미로 굶주림에 허덕이는 완도 주민들을 구휼했다. 그는 또 완도 주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지방수령과 토호들을 처벌했다. 그는 제 구실을 하지 못 한 나라 대신 백성들을 구휼하고 위무했던 것이다. 이에 백성들은 송징 장군을 구세주처럼 존경하고 숭앙했다.
삼별초 항쟁군은 1273년 결국 려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의해 진압됐다. 변방에서 나라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던 완도 주민들은 자신들의 구세주 송징이 죽자 그를 완도의 영웅신으로 받들어 모셨다. 완도읍 장좌리 마을의 귀목나무 서낭신, 죽청리의 엄목 당신(堂神), 정도리의 송대목 당신들은 모두 송징을 가리킨다. 장좌리에서는 해마다 정월 14일에 당산제가 열린다. 마을 사람들은 밤에 햇불을 들고 풍물을 치면서 바닷길을 걸어 장도로 들어가 송징을 모신 신당 앞에서 밤새도록 굿판을 벌인다.
1982년부터 장도 당집에는 어찌된 일인지 송징 대신 장보고(張保皐)를 모시게 되었다. 송징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장보고의 우의적(寓意的) 명칭이라는 주장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진천 송씨 대종회에서는 송징이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완도 지역의 무당이나 향토역사가들도 장도 당집의 주신은 장보고가 아니라 송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완도의 영웅은 장보고가 아니라 송징이라는 것이다. 시류에 따르거나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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