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김윤제의 환벽당을 찾아서 5

林 山 2017. 8. 16. 12:16

1584년 동복 현감(同福縣監)으로 부임한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는 환벽당을 방문하고 '환벽당에서 열린 작은 술자리에서 읊다'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환벽당에서 열린 작은 술자리에서 읊다-정구


隱隱蓬萊島(은은봉래도) 봉래의 섬은 은은하게 보이고

泠泠水伯宮(냉랭수백궁) 수백의 궁전은 맑고 시원하네

池寒春尙雪(지한춘상설) 못은 차고 봄눈은 남아 있는데

簷豁靜還風(첨활정환풍) 고요한 처마엔 외려 바람소리

晩席繁絃咽(만석번현인) 저녁 술자리엔 현금 타는 소리

他鄕勝友同(타향승우동) 타향에서 온 좋은 벗들 모였네

歸途荷正發(귀도하정발) 귀로엔 연꽃도 피어 있으리니

留興曲欄東(류흥곡란동) 곡란 동쪽에 머물러 흥 즐기리


타향에서 온 좋은 벗들이 환벽당에서 벌인 작은 술자리의 주흥이 무르익은 정경을 읊은 시다. '수백(水伯)'은 수신(神)이다. '산해경(山海經)'에 '조양(朝陽) 골짜기에 사는 신이 천호(天昊)인데 이를 수백이라 한다.'고 하였다.


정구는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다. 그는 오건(吳健) 밑에서 공부했으며,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특히 그는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정구는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영남 남인학파의 일가를 이루었다. 


담양 환벽당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이양구(李養久)도 환벽당 주연에 참석했다가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를 남겼다. 양구(養久)는 이시발(李時發, 1569~1626)의 자다.   


강변을 순시하러 떠나며 환벽당에서 부윤(府尹)과 이별하는 자리에서-이양구


絶域重相見(절역중상견) 먼 타향에서 서로 다시 만나

樽前意更傾(준전의갱경) 술통 앞에 놓고 마음 기울이네

離亭是客路(리정시객로) 이정에 모인 우리는 나그네 길

王事共嚴程(왕사공엄정) 나랏일 모두 기한이 엄격하네

粉堞山樓逈(분첩산루형) 흰 성가퀴 산 누각은 아득하고

春塘水檻淸(춘당수함청) 봄 못이라 물가 난간은 맑구나

男兒要事業(남아요사업) 사낸 모름지기 사업 이뤄야지

 臨別莫傷情(림별막상정) 이별 앞에 마음 아파하지 말자 


나랏일로 바쁜 와중에도 반갑게 만났다가 다시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움이 나타나 있는 시다. 이양구가 강변을 순시하러 떠난다는 것으로 보아 매우 급박한 일로 보인다.


정철의 문인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도 환벽당에 다녀간 것으로 보인다. 권필의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술을 마시며 주필(走筆)로 짓다.'란 제목의 칠언고시(七言古詩)에 '環碧堂虛成草萊(환벽당은 텅 비어 잡초만 무성하네.)'란 구절이 있다. 권필은 김윤제가 세상을 떠나고 세월이 많이 흐른 뒤 환벽당에 들렀던 것 같다. 환벽당 주인은 간 곳 없고 잡초만 무성하다.   


현종(顯宗)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기봉(麒峰) 이시성(李時省, 1598~1668)은 무등산에 오른 뒤 환벽당에 들러 시 한 수를 남겼다. 이시성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종손이다. 


春和踏靑節(춘화답청절) 봄 날씨 온화한 삼월삼짇날

獨遊環壁堂(독유환벽당) 나 홀로 환벽당에서 노니네

水流人亦去(수류인역거) 물 흐르고 사람도 떠나가니

松竹老蒼蒼(송죽노창창) 세월 가도 송죽만 푸르구나

  

세월의 무상함이 묻어나는 시다. 이시성은 시와 술을 좋아하여 벗들과 함께 전국 명승지를 찾아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다가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랐다. 답청절(踏靑節)은 삼짇날(삼월삼질)이라고도 한다. 한자어로는 상사(上巳), 원사(元巳), 중삼(重三), 또는 상제(上除)라고도 쓴다. 이날 들판에 나가 새 풀을 밟으며 꽃놀이를 한다.


담양 광주호와 무등산


동리 이은상도 환벽당에 들러 정자와 그 주변의 승경을 노래했다. 이은상은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 손자다. 


境似桃源洞(경사도원동) 산천경개가 무릉도원 같으니

川疑白石灘(천의백석탄) 냇물은 백석탄인가 의심되네

林花紅百日(림화홍백일) 숲 속 꽃은 백일을 붉게 피고

籬竹綠千竿(리죽록천간) 울타리 대 천 줄기도 푸르네

草色平如織(초색평여직) 풀빛은 푸른 천을 펼친 듯 해

 山光秀可餐(산광수가찬) 산경치 빼어나 칭찬할 만하네

 登臨撫古跡(등림무고적) 올라가서 옛 자취 어루만지며

 松下獨盤桓(송하독반환) 소나무 아래서 홀로 서성이네


이 시도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시다. 그 당시에도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모양이다. 자미화에 파묻힌 환벽당과 자미탄의 승경이 한폭의 산수화로 다가오는 듯하다. '반환(盤桓)'은 머뭇거리며 그 자리를 멀리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것을 말한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전라도 영암에 유배된 부친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을 문안하고 돌아오는 길에 환벽당에 들러 시 한 수를 남겼다. 


環碧堂中客(환벽당중객) 사방이 푸른 집에 있는 손님

安知非主人(안지비주인) 어찌 주인이 아님을 알리요

歸依因地勝(귀의인지승) 귀의한 것은 명승이기 때문

嘯詠亦天眞(소영역천진) 시를 읊으니 또한 천진하네

松竹澄潭會(송죽징담회) 송죽은 맑은 못에 모여 있고

雲嵐瑞石親(운람서석친) 구름은 서석산 위에 떠 있네

雨來添洒落(우래첨쇄락) 비가 와서 더욱 산뜻해지니

吾已岸烏巾(오이안오건) 오건 쓰고 언덕을 거닌다네


김수항은 1674년 제2차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서인이 패해 영의정이던 형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이 쫓겨나자 형 대신 좌의정을 제수받았다. 숙종 즉위 후 그는 남인의 영수 묵재(黙齋) 허적(許積, 1610~1680)과 하헌(夏軒) 윤휴(尹鑴, 1617~1680)를 논핵하고, 역모로 고변된 종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집권 남인의 탄핵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었다. 


환벽당 아래 증암천변에 서 있는 쌍송


환벽당에서 동쪽 쪽문으로 내려오면 증암천변에 김윤제가 정철을 만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는 두 그루의 소나무, 일명 쌍송이 서 있다. 하지만 나무의 굵기 등을 가늠해보면 그 당시 심은 소나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윤제는 1551년에 정철을 만났으니 그 해에 소나무를 심었다면 수령이 최소한 566년이 되어야 한다. 현재 환벽당 쌍송은 그보다 훨씬 어린 나이로 추정된다.


조대와 용소는 쌍송 바로 근처 있었다고 한다. 쌍송에서 50~100m쯤 하류에 있는 너럭바위를 조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광주댐 건설로 광주호 수위가 높아진 것을 감안하면 조대의 위치도 이곳이 아님이 확실하다. 예전의 조대는 증암천의 용소 아래 넓은 바위가 두 군데 있어 배를 타고 가서 낚시질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담양호 제방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동강조대(桐江釣臺)가 예전의 조대는 아닌지 모르겠다. 그 조대가 맞다면 용소는 바로 그 위에 있었을 것이다. 쌍송의 위치도 지금의 이 자리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 추측은 난무하지만 광주호 푸른 물은 말이 없다.  


식영정 4선(四仙)의 좌장격인 임억령의 '식영정 이십영(息影亭二十詠)' 중 7번째 '조대쌍송(釣臺雙松)'이란 오언절구가 있다. 조대와 쌍송, 용소는 환벽당만의 것이 아니라 식영정, 서하당의 것이기도 했다. 임억령의 시를 통해서 조대와 쌍송, 용소의 옛 모습을 따라가 보자. 


조대쌍송(釣臺雙松)-낚시터의 두 소나무(임억령)


雨洗石無垢(우세석무구) 빗물에 씻긴 바위는 티끌 하나 없고

霜侵松有鱗(상침송유린) 서리 맞은 소나무는 비늘 있는 듯해

此翁唯取適(차옹유취적) 이 늙은이 오로지 알맞음만 취할 뿐

不是釣周人(부시조주인) 낚시질하던 주나라 사람은 아니라네


시적 화자는 오로지 자연 속에서 한가하게 유유자적하고자 하며, 고기를 낚는 것에는 뜻이 없다. 시인이 낚고자 한 것은 세월이다. 세월을 낚는 듯이 보였던 주인(周人) 강태공(姜太公)은 사실 주나라 문왕(文王)의 마음을 낚고자 했던 것이다. 주 문왕이 자신을 만나러 올 때까지 강태공은 낚시질 시늉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강호에 은둔한 채 안빈낙도가를 불렀던 선비들도 대부분 강태공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임억령은 강태공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주인(周人)'은 주(周)나라의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 곧 강태공이다.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나라를 격파한 그는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으로 제(齊)나라의 후로 봉해졌다. 태공망이라는 이름은 문왕이 웨이수이(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 선군인 태공(太公)이 오랫동안 바라던 어진 인물이라고 여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서하당 주인 김성원, 고경명, 정철도 각각 '식영정 이십영'을 지었다. 세 사람의 '조대쌍송'은 모두 임억령의 같은 제목의 시에서 차운하여 쓴 시다. 


조대쌍송(釣臺雙松)-낚시터의 두 소나무(김성원)


 澗壑雙龍起(간학쌍룡기) 물 흐르는 골짝에 쌍룡 일어나

長身蹙巨鱗(장신축거린) 긴 몸에 큰 비늘 박혀 있구나

 何須支大廈(하수지대하) 어찌 반드시 큰 집만 떠받치리

下有把竿人(하유파간인) 그 아래 낚시하는 사람 있으니


조대쌍송(釣臺雙松)-낚시터의 두 소나무(고경명)


 鶴髮映蒼鬣(학발영창렵) 백발은 푸른 솔 사이에 아른대고

風竿抽素鱗(풍간추소린) 낚싯대 한들한들 흰 고기 낚인다

二松誰對樹(이송수대수) 쌍송은 누가 마주보게 심었을까?

煙雨摠宜人(연우총의인) 안개비가 내릴 땐 쉴 만도 하겠네


조대쌍송(釣臺雙松)-낚시터의 두 소나무(정철)


日哦二松下(일아이송하) 낮엔 쌍송 아래서 시를 읊으며

潭底見遊鱗(담저견유린) 못 밑에 노니는 고기들 보았네

終夕不登釣(종석부등조) 고기는 하루 종일 낚지도 않고

忘機惟主人(망기유주인) 주인이 잊은 건 오직 세상사 뿐

 

김성원의 시는 도연명처럼 은자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심회를 노래했. 큰 소나무가 반드시 큰 집의 대들보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낚시하는 사람의 그늘이 되어 주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소나무는 김성원을 비유한 것으로 벼슬에 큰 뜻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고경명은 조대에서 낚시하는 노인의 모습을 읊으면서 누가 쌍송을 심었는지 묻고 있다. 정철의 시는 임억령처럼 낚시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사를 잊은 채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삶을 읊었다.


동강조대


임억령의 '식영정 이십영' 중 8번째 시는 '환벽영추(環碧靈湫)'다. 환벽당 앞에 있던 용소(龍沼)를 옛날에는 영추(靈湫) 또는 용추(龍湫)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영추 맑은 못의 물에 비친 환벽당이 배처럼 보인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물 속의 교룡이 잠 못 들어 할 만큼 시인의 젓대 부는 솜씨가 일품이었던 모양이다. 김성원과 고경명, 정철도 임억령의 원운시(原韻詩)에서 차운한 시를 지었다. 


환벽영추(環碧靈湫)-환벽당의 영추(임억령)


澄湫平沙浪(징추평사랑) 용소 평평한 모래톱엔 물결 일고

飛閣望如船(비각망여선) 날아갈 듯한 정자 배처럼 보이네

明月吹長笛(명월취장적) 밝은 달빛 아래 긴 젓대를 부니

潛蛟不得眠(잠교부득면) 물속 잠긴 용 잠 못 들어 하노라


환벽영추(環碧靈湫)-환벽당의 용추(김성원)


 閣下寒潭碧(각하한담벽) 정자 아래 차가운 연못 푸르니 

 常惺泛酒船(상성범주선) 깰 때마다 술 실은 배를 띄우네

 誰知幽窟裏(수지유굴리) 그 누가 알리요 그윽한 굴 속에

龍子抱珠眠(용자포주면) 용이 여의주 안고 잔다는 것을


환벽영추(環碧靈湫)-환벽당의 용소(고경명)


 白日喧雷雨(백일훤뇌우) 환한 대낮에도 우르르 쾅 우뢰소리

  顚風簸釣船(전풍파조선) 세찬 바람에 낚싯배 마구 요동치네

  村翁傳怪事(촌옹전괴사) 시골 늙은이가 괴이한 일 전하기를

 石竇老蛟眠(석두노교면) 바위 굴에 늙은 이무기가 잠잔다나


환벽영추(環碧靈湫)-환벽당의 영추(정철)


 危亭俯凝湛(위정부응담) 아슬한 정자에서 영추를 굽어보니

 一上似登船(일상사등선) 한 번 올라가면 배 위에 오른 듯해

 未必有神物(미필유신물) 신물이야 꼭 있는 것도 아니건마는

肅然無夜眠(숙연무야면) 밤이면 벌벌 떨면서 잠 못 이루네


임억령과 정철은 배를 빌어서 환벽당을 묘사하고 있다. 임억령은 대금을 불어서 용소의 용을 잠 못 들게 하는데, 정철은 용을 무서워하고 있다. 김성원은 용이 용소의 바위굴 속에서 여의주를 안고 잔다고 생각하고, 고경명은 용에 대한 옛날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김성원은 항상 깰 때마다 술 실은 배를 띄웠다는 것으로 보아 정철만큼이나 술을 좋아했던 것 같다.


담양에 가면 산이 있고, 물이 있고, 정자가 있고, 풍류가 있다. 그리고 시와 낭만이 있다. 담양의 정자를 찾아 시대를 뛰어넘어 그 주인들과 정신적인 교류를 가져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 옛날 환벽당을 찾았던 시인들의 한시들을 떠올리면서 환벽당을 떠나다.      


2017.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