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벽당의 초기 모습은 소세양의 시 '환벽당'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남유일기(南遊日記)'를 통해서 당시 원림의 수종과 식물상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세양의 시 '환벽당'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못 찾겠다. 김성원의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는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가 남아 있어 조선시대 선비들의 여름나기를 엿볼 수도 있다.
담양 가사문학관 소장 김성원의 성산계류탁열도
정면에 걸려 있는 '環碧堂' 제액(題額)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글씨다. 행서(行書)로 흘려 쓴 글씨가 다소 강건한 느낌을 준다. 행서는 한자 정자인 해서(楷書)를 조금 흘려서 빠르게 쓴 것이다.
송시열이 쓴 '環碧堂(환벽당)' 편액
환벽당 안 동쪽 벽에는 임억령과 자이(子以) 조상건(趙尙健, 1672∼1721)의 시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정철도 환벽당을 소재로 지은 시 두 수가 있는데, 송강속집(松江續集)과 광주목지(光州牧誌)에 실려 있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인 기대승, 송순, 김인후, 소세양, 백광훈, 고경명, 조상건, 김창흡도 환벽당을 소재로 하여 시문을 지었다. 이들 외에도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1582∼1650), 동리(東里) 이은상(李殷相, 1617∼1678) 등이 환벽당을 소재로 한 시를 남겼다. 정홍명은 정철의 4남이다.
식영정의 주인 임억령의 시는 '환벽당'이라는 제하에 오언절구 한 수, 오언율시 두 수가 판각되어 있다. '호남기록문화유산' 홈페이지에서는 이 판액에 대해 "임억령이 쓴 오언절구 1수, 오언율시 2수가 함께 판각되어 있다. 이 판액은 1950년 후손 김태병(金泰炳)이 판각하여 만든 현판이다. 임억령의 시 중 오언율시 2수는 문집 '석천집(石川集)' 3권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후손은 김윤제의 후손 김태병이 아니라 정철의 후손 정태병(鄭泰炳)이다.
임억령의 '환벽당(環碧堂)' 편액
환벽당(環碧堂) - 임억령
烟氣兼雲氣(연기겸운기) 연기는 저 구름기운에 합쳐지고
琴聲雜水聲(금성잡수성) 거문고 소리 물소리와 섞이누나
斜陽乘醉返(사양승취반) 저물녘 술에 취한 채 돌아오는데
沙路竹輿鳴(사로죽여명) 모랫길 대가마 소리만 날 뿐이네
微雨洗林壑(미우세림학) 보슬비가 숲 골짜기 씻어 주니
竹輿聊出遊(죽여료출유) 대가마 타고 놀러 나갈 만하네
天開雲去盡(천개운거진) 하늘이 열리고 구름도 흩어지니
峽坼水橫流(협탁수횡류) 넓은 골엔 물이 넘쳐 흘러가네
白髮千莖雪(백발천경설) 백발엔 천 가닥 눈빛이 서리고
蒼松五月秋(창송오월추) 푸른 솔은 오월에도 가을이네
飄然蛻蟻穴(표연태의혈) 개미굴 같은 이곳 훌쩍 벗어나
笙鶴戲瀛洲(생학희영주) 신선 학 타고 영주에 노니리라
自得顏瓢樂(자득안표락) 안회의 안빈낙도 스스로 얻으니
無心羿彀遊(무심예구유) 마음 비우고 예의 경지에 노니네
夢涼松月上(몽량송월상) 소나무에 걸린 달 꿈속처럼 찬데
窓濕水雲流(창습수운류) 촉촉한 창가엔 물과 구름 흐르네
村酒寧嫌薄(촌주녕혐박) 시골 술이라 한들 어찌 싫어할까
山田敢望秋(산전감망추) 산밭에서 감히 풍년까지 바라리
騎牛細雨裏(기우세우리) 저 가랑비 속에 소를 타고 다니며
吾道付滄洲(오도부창주) 나의 도를 창랑주에 부쳐 보리라
환벽당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벼슬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하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다. 이 시에는 '石川 林億齡 檀紀四千二百八十三年庚寅暮春 不肖後孫泰炳謹稿(석천 임억령 단기 4283년 경인 음력 3월에 불초 후손 태병이 삼가 쓰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죽여(竹輿)'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가마다. '태의혈(蛻蟻穴)'은 '개미굴'로 당(唐) 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의 남가일몽(南柯一夢)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순우분은 자신의 집 남쪽에 있는 홰나무 밑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꿈에 괴안국(槐安國)에 가서 부마가 되어 남가군(南柯郡)의 태수로 20년 동안 부귀를 누렸다. 꿈에서 깨어 홰나무 밑의 구멍을 파 보니 큰 개미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개미가 곧 괴안국의 왕이었다. 또 남쪽 가지로 뚫린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자신이 태수가 되어 다스리던 남가군이었다. 남가일몽은 부귀공명의 허무함을 비유한 말이다. '개미굴'에서 벗어남은 곧 현세의 부귀공명을 벗어남을 말한다. '생학(笙鶴)'은 신선이 학을 타고 생황을 연주하는 것이다. 신선이 타는 선학(仙鶴)을 뜻한다.
'안표(顏瓢)'는 공자(孔子)의 제자 안회(顔回)의 단표누항(簞瓢陋巷) 고사를 말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공자는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안연(顔淵)을 보고 '어질구나!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골목에서 사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런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아니하니, 어질구나! 안회여!'라고 칭찬하였다. 부귀공명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은일자적하며 분수에 맞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말한다.
'예구(羿彀)'는 ‘후예(后羿)의 화살(彀)'을 말한다. 후예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하(夏)나라 때 유궁씨(有窮氏) 부락의 수령인 후예는 활솜씨가 뛰어나고 용감했다. 해 열 개가 나란히 뜨자, 그는 활을 당겨 그중 아홉 개를 맞혀 떨어뜨렸다. 후에 그는 하왕(夏王) 태강(太康)의 통치를 뒤엎고 왕이 되었지만, 사냥만 좋아하고 백성들을 돌보지 않다가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전설이다. '장자' 〈덕충부(德充符)〉에 '명사수인 예(羿)의 사정거리 안에서 노니는 자 가운데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자는 적중되기에 꼭 알맞다.(遊於羿之彀中 中央者中地也)'는 말이 있다. 여기서 유래한 '예구'는 '예의 화살이 미치는 범위'란 뜻으로 형법(刑法)을 비유하는데 여기서는 관직을 말한다. 임억령이 관직 따위에 마음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수운(水雲)'은 수운향(水雲鄕)의 준말로, 은자(隱者)가 사는 청유(淸幽)한 곳을 가리킨다. '창주(滄洲)'는 滄浪洲(창랑주)의 준말로 동해(東海)의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이다. 물가의 수려한 경치를 뜻하는 말이다. 남조 제(南朝齊)의 시인 사조(謝朓)가 선성 태수(宣城太守)로 나가서 창주의 정취를 마음껏 누렸다는 고사가 유명하다. 두보(杜甫)의 오언율시 '강창(江漲)'의 강물이 불어난 정경을 읊은 것 가운데 '가벼운 돛은 가기에 편하고, 나의 도는 창주에 부치네.(輕帆好去便, 吾道付滄洲.)'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杜少陵詩集 卷十)
환벽당에서 바라본 서하당과 식영정
임억령은 '환벽당(環碧堂)'이란 제목의 칠언율시 한 수도 남겼다. '쇠노(衰老)'란 시어로 보아 임억령이 말년에 쓴 시로 보인다.
환벽당(環碧堂) -임억령
萬山圍處一川橫(만산위처일천횡) 만산이 두른 곳에 시내 한 줄기 흐르는 곳
醉後憑軒鶴背明(취후빙헌학배명) 취하여 난간에 기대니 학이 내려다 보이네
鍾鼎山林元有分(종정산림원유분) 벼슬아치 산림거사는 원래 분수가 다르니
眼前樽酒未宜輕(안전준주미의경) 눈앞의 한잔 술도 가벼이 여기지 말지어다
夕陽沙際小船橫(석양사제소선횡) 해질녘 모랫가에 작은 배 한척 비스듬한데
布傘如蓮水底明(포산여련수저명) 연잎 같은 일산이 물 아래까지 비추는구나
衰老縱無兼濟力(쇠노종무겸제력) 늙어 쇠약한 이 몸 세상을 구할 힘이 없어
斜風細雨往來輕(사풍세우왕래경) 비낀 바람 가랑비 맞으며 홀가분히 지내네
'종정(鍾鼎)'은 조정의 벼슬길에 올라 부귀를 누림을 뜻한다. '산림(山林)은 산림거사, 자연에 숨어살면서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를 말한다. 두보의 당시(唐詩) '청명(淸明)' 첫째 수에 '鍾鼎山林各天性 濁醪麤飯任吾年(벼슬아치와 산림거사는 각각 천성이 다르니, 탁주와 거친 밥 먹으며 살아도 아랑곳하지 않노라.)'에 나오는 말이다.
임억령의 시 바로 옆에는 조자이(趙子以)의 한시 '과송강선생구거유감지회잉증정달부(過松江先生舊居有感志懷仍贈鄭達夫)' 판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조자이의 '과송강선생구옥유감지회잉증정달부(過松江先生舊屋有感志懷仍贈鄭達夫)' 편액
과송강선생구옥유감지회잉증정달부(過松江先生舊屋有感志懷仍贈鄭達夫)
송강 선생의 옛집을 지나면서 감회가 있어 정달부에게 주다 - 조자이
丞相故墟何處尋(승상고허하처심) 승상의 옛터는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있나
鳴陽縣郭瑞湖潯(명양현곽서호심) 명양 고을 성 외곽 서호 물가가 그곳이니
淸名直節賢孫繼(청명직절현손계) 맑은 이름 곧은 절개 어진 자손 이어가고
餘韻遺風過客欽(여운유풍과객흠) 남긴 여운 맑은 유풍 지나던 객 흠모하네
環碧亭空新易主(환벽정공신역주) 환벽정은 텅 빈 채 주인 새로 바뀌었건만
棲霞堂在古猶今(서하당재고유금) 저 서하당 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해
通家小子悲吟地(통가소자비음지) 한 집안 사람인 내가 슬피 읊조리는 지금
老木寒波無限心(노목한파무한심) 노거수 찬 물결에 내 마음 가눌 길 없어라
정철의 옛집을 찾은 조자이가 정철과 그 후손들을 칭송하는 한편 주인이 바뀐 환벽당과 죽은 정철에 대한 서글픈 감정을 읊은 시다. 달부(達夫)는 환벽당을 인수한 수환(守環) 정흡(鄭潝, 1648~1709)의 양자 정민하의 자다. 이 시에는 '崇禎後乙未仲冬趙子以謹稿(숭정 후 을미 한겨울에 조자이 삼가 쓰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숭정 후 을미 중동'이면 1655년(효종 6)이나 1715년(숙종 41) 음력 11월이다. 조자이는 1672년에 태어나서 1721년에 죽었으니 1715년 음력 11월이 맞다. 그런데, '호남기록문화유산' 홈페이지에는 이 시를 '1655년 조자이(趙子以)가 옛날 환벽당 주인인 김윤제(金允悌)에게 14살 때 수학했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에 감흥이 일어 쓴 칠언율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호남기록문화유산'의 설명은 명백한 오류다. 김윤제 생존시에 조자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가 있었겠는가!
조상건의 본관은 풍양(豊壤), 증조부는 공조참판 조흡(趙潝), 할아버지는 조백운(趙伯耘), 아버지는 조광보(趙光輔), 어머니는 정태구(鄭泰耉)의 딸이다.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회인(懷仁, 지금의 충북 보은 회북면과 회남면) 현감을 지내다가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4년 지평(持平)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정언(正言)으로 재직시 인사의 불만으로 이조 판서 송상기(宋相琦)를 헐뜯은 성천 부사(成川府使) 한영휘(韓永徽)를 논핵하였다. 1716년에는 '가례원류(家禮源流)' 사건에 얽힌 문제로 서인(西人)에서 갈라진 소론(少論)의 영수 윤증(尹拯)을 배척하고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옹호하는 소를 올려 체차(遞差, 보직해임)되었다가 이어 관작을 삭탈당하고 문외출송(門外送出)되었다. 그 뒤 조상건은 울산부(蔚山府)로 귀양갔다가 그 해 7월에 방면되었다. 이듬해 지평으로 복직되었고, 이어 홍문관의 제학(提學)이나 교리(校理)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인 홍문록(弘文錄)에도 선발되었다.
1719년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된 조상건은 단종복위와 김종서(金宗瑞), 황보인(黃甫仁) 등의 신원(伸寃)에도 앞장섰으나 부교리(副校理) 김운택(金雲澤)과 패초(牌招)를 어겨 잠시 파직되었다가 곧 부교리에 제수되었고, 이어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겼다. 경종 즉위 후에도 부응교(副應敎), 교리 등을 역임했다. 송시열을 옹호한 것으로 보아 조상건은 노론 계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승상(丞相)'은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낸 정철을 말한다. '고허(故墟)'는 정철이 살았던 옛집을 가리킨다. '명양(鳴陽)'은 창평(昌平)의 옛 이름이고, '서호(瑞湖)'는 환벽당 아래를 흐르는 창계천(蒼溪川)을 가리킨다.
'環碧亭空新易主(환벽정공신역주)'는 정철의 고손(4대손) 정흡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환벽당을 인수한 것을 말한다. 1572년 김윤제가 세상을 떠나고, 1592년 제1차 조일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 정철은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후 병을 얻어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1597년 제2차 조일전쟁(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김성원은 모후산(母后山, 919m)에서 어머니와 함께 왜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의병장 김덕령마저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되자 광산 김씨 가문은 극심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환벽당을 유지 관리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담양 환벽당
이에 환벽당을 인수한 정흡은 수환(守環)이라 자호하고 여기서 거처하였다. 호 '수환'에서 환벽당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정흡은 정철의 3남 운붕(雲鵬) 정진명(鄭振溟, 1567~1614)의 증손자다. 정진명의 부인은 조일전쟁 때 전라도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던 나주 출신 의병장 문열공(文烈公) 건재(健齎)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의 딸이다. 정진명의 세계는 곡구(谷口) 정한(鄭漢, 1599∼1652)→용지(龍池) 정광연(鄭光演, 1624∼1677)→정흡→정민하로 이어진다. 정민하는 정광연의 5남1녀 중 차남 정즙(鄭濈, 1646~1697)의 2남이다. 정광연의 3남 정흡에게 후사가 없어 정민하를 양자로 들인 것이다. 정민하는 1721년에 식영정을 인수했다.
담양 식영정
정민하는 서울 동리(東里)에서 자랐으며, 19세인 1689년에 중부인 정흡의 양자가 되면서 지실마을 계당(溪堂)터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11형제를 낳았다. 그래서 계당을 일명 십일용동(十一龍洞)이라고도 한다. 환벽당에서 기거하던 정민하는 정철에게 문청공(文淸公) 시호가 내려질 때 전북 진안으로 잠시 옮겨 가서 살던 양부 정흡을 계당으로 모셔왔다. 계당은 원래 정철이 즐겨 찾아 술잔을 기울이던 만수동 이웃집(萬壽洞隣家)을 4남 정홍명이 인수하여 지은 집이다. 정민하는 만년에 식영정에 머물면서 술과 시, 피리로 세월을 보냈다. 1842년(헌종 8)에 중수한 계당은 1902년(고종 39)에 화재가 났으나 그 해 바로 옛 건물대로 복원했다. 1986년에는 지붕만 번와했다. 정민하로부터 장손으로만 이어져 온 계당의 주인은 지금 13대손 정문영(鄭文永)에 이르기까지 종가로 지켜오고 있다.
진사 예창(藝窓) 조근하(曺根夏)의 기록에 의하면 '1685년 6월 화재를 만나 용지촌(환벽당이 있는 마을) 남의 집에서 친상(親喪)을 만났고, 겹쳐 처상(妻喪)을 만나 수환공(정흡)의 부속건물에 붙여 살게 되었는데, 1687년(丁卯) 2월에 순지(정흡의 자)형이 전북 진안으로 이사하며 나더러 내 집에 들어 살라 하였다.'고 했다. 정흡이 진안으로 이사를 하면서 조근하가 환벽당에 들어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정흡이 진안으로 이사한 것은 관헌과 안당 후손들의 추포를 피해 운장산으로 도망하여 숨어살던 송익필과 무슨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조근하에 이어 환벽당에는 정흡의 손자 계당(溪堂) 정근(鄭根)의 5제인 정백(鄭栢)이 살았다. 그 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가 1851년(철종 2)에 정흡의 7대손 수산(壽山) 정조원(鄭祚源, 1815~1886)이 환벽당 소유주인 송(宋)씨에게 구입하여 성산사(星山祠)를 옮겨 지었다. 1868년(고종 5)에 성산사는 훼철되고 환벽당만 남았다. 1935년(대한민국 임시정부 17년)에 중건한 현 건물은 최근 영일 정씨 용지공 종중(迎日鄭氏龍池公宗中) 소유가 되었으며, 1972년에 전라남도지정문화재가 되었다.
'통가(通家)'는 선조(先祖) 때부터 대대로 친하게 사귀어 오는 집, 사우(師友) 간의 세의(世誼), 인친(姻親)을 말한다. 조자이의 모친이 정태구(鄭泰耉)의 딸이라고 했다. 조자이와 외가가 정철의 직계 후손의 가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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