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김윤제의 환벽당을 찾아서 1

林 山 2017. 8. 10. 18:43

전라남도(全羅南道) 담양군(潭陽郡) 봉산면(鳳山面) 제월리(齊月里) 제월봉(霽月峰, 제봉산)에 있는 기촌(企村) 송순(宋純, 1493∼1582)의 면앙정(俛仰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과 담양군 고서면(古西面) 원강리(院江里) 쌍교(雙橋)에 있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송강정(松江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에 이어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북구(北區) 충효동(忠孝洞)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의 환벽당(環碧堂, 대한민국 명승 제107호)을 찾았다.    


증암천 충효교에서 바라본 담양군 남면 지곡리 성산(별뫼)와 지실마을


환벽당은 송강정 앞으로 흐르는 증암천(甑巖川) 상류를 따라 약 14~15km 올라가면 된다. 담양군 고서면(古西面) 소재지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광주호(光州湖)를 만난다. 증암천이 광주호로 흘러드는 곳에 놓인 충효교(忠孝橋)를 건너면 얕으막한 동산 위에 환벽당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충효교에서 바라본 증암천


증암천은 무등산 북사면 꼬막재를 사이에 두고 원효계곡(元曉溪谷)과 절골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흘러 광주호로 들어간다. 광주호에서 고서면의 북쪽으로 흐르던 증암천은 주산리(舟山里)에서 석곡천(石谷川)과 창평천(昌平川)을 합친 다음 봉산면 와우리(臥牛里)에서 영산강(榮山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길이는 15.64km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증암천이 '무등산에서 나와 용담대(龍潭臺) 아래를 지나 북쪽으로 흘러 고산천(高山川)과 합하여 담양부의 원율천(原栗川)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증암천을 창계천(蒼溪川), 자미탄(紫薇灘), 죽록천(竹綠川), 송강(松江)이라고도 한다. 자미탄은 증암천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紫薇花) 꽃이 장관을 이룬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무등산 북봉능선과 증암천은 광주와 담양의 경계가 된다. 


김윤제(金允悌)는 1501년(연산군 7)에 광주 충효리 지금의 충효동 돌밑마을(石底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공노(恭老), 호는 사촌(沙村)이다. 증조부는 김자침(金自沈), 조부는 김문손(金文孫), 부친은 김후(金詡, 金珝)다. 모친은 여산 김씨(礪山金氏)다.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7∼1596)과 김덕보(金德普) 형제는 김윤제의 종손(從孫)이다. 


김윤제는 1528년(중종 23) 식년시(式年試)에서 진사(進士) 2등 7위에 합격하고, 1531년(중종 26) 식년시에서 병과(丙科) 23위로 급제했다. 직강(直講), 홍문관 교리(弘文館敎理), 전중어사 겸 춘추관 편수관(殿中御使兼春秋館編修官)을 역임하였고, 전주진영 병마절도사(全州鎭營兵馬節度使), 부안 군수(扶安郡守),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도 지냈다. 나주 목사로 있을 때,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엮은 '주자문록(朱子文錄)' 4책을 간행하였다. 


김윤제는 부안 군수로 있을 때 조선 최고의 문장가이자 로맨티스트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에게 생선과 새우젓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이에 소세양은 '사부안수김윤제혜하해급어(謝扶安守金允悌惠蝦醢及魚)'이란 시를 지어 김윤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사부안수김윤제혜하해급어(謝扶安守金允悌惠蝦醢及魚)

부안 군수 김윤제의 새우젓과 생선 선물에 감사하며-소세양


 秋雨經旬土蝕花(추우경순토식화) 가을비가 열흘 넘겨 땅에 꽃들 썩어가네

 盤饌久厭飣瓜茄(반찬구염정과가) 반찬 올린 오이 가지 오래도록 물렸는데

筠籠遠惠莘莘尾(균롱원혜신신미) 멀리서 대소쿠리 한가득 생선 보내주니

 却對妻孥獨自誇(각대처노독자과) 처자식 바라보며 나 홀로 자랑하고 싶네


소세양이 김윤제로부터 새우젓과 생선 선물을 받고 매우 기뻐하는 심경을 읊은 시다. 조선시대 전기에도 오이와 가지를 반찬으로 먹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부안은 예로부터 새우젓의 명산지였다. 이 시는 소세양의 '양곡집(陽谷集)' 권4에 실려 전한다.


김윤제가 부안 군수로 재직 중에 환벽당에 와서 머문다는 소식을 들은 송순은 '문부안쉬김공공노래우환벽정 희증4수(聞扶安倅金公恭老來寓環碧亭 戲贈四首)'란 제목의 칠언절구 4수를 희증했다. 김윤제의 나이는 송순보다 8년 아래였지만 두 사람은 꽤 절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문부안쉬김공공노래우환벽정 희증4수(聞扶安倅金公恭老來寓環碧亭 戲贈四首)

부안 군수 김공 공노가 환벽정에 머문다는 소식 듣고 시 4수를 희증하다- 송순 


松下澄潭巖上亭(송하징담암상정) 소나무 아래 맑은 못 바위 위의 정자는

 十分淸境是家庭(십분청경시가정) 참으로 청정한 곳 신선이 노는 뜰이로다

 一來猿鶴爭嘲笑(일래원학쟁조소) 원숭이 두루미들 날아와 나를 비웃는 듯

 其奈人間夢未醒(기내인간몽미성) 어찌 인간 속세의 꿈을 깨지 못하느냐고


山容水態一時新(산용수태일시신) 산의 모습 물의 자태 일시에 새로운데

賴是今朝得主人(뢰시금조득주인) 참으로 오늘 아침 제 주인을 얻었으니

惆悵未成携酒過(추장미성휴주과) 아쉽지만 덜 익은 술통 끼고 찾아가서

臨風終夕岸烏巾(임풍종석안오건) 밤새 바람 맞으며 갓 비뚤도록 취하네


删樹新安屋數間(산수신안옥수간) 나무를 깎아서 새 집 여러 칸 지어내니

江山到此轉生顏(강산도차전생안) 강도 산도 비로소 새로운 모습이로세 

挽回天地繩床外(만회천지승상외) 천지자연을 내 앉은 자리로 가져왔으니

無盡藏誰爲我慳(무진장수위아간) 무진장함이여 그 누가 나를 나무랄까나


 手移松竹卅經秋(수이송죽삽경추) 소나무와 대나무 옮겨 30년 세월이 지나

顚倒生涯笑白頭(전도생애소백두) 생애가 고단하니 흰 머리털만 생겼구나

 縱向林泉尋舊約(종향림천심구약) 자연에서 그 옛날의 언약을 찾으려 하니

見欺魚鳥肯相收(견기어조긍상수) 물고기와 새에게 속임을 당한들 어떠리


환벽당의 승경을 묘사한 뒤 김윤제를 신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으로 칭송하는 한편 송순은 아직도 속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으로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고 있다. 원숭이와 학이 비웃는다고 느낀 것은 벼슬을 내던지고 낙향한 김윤제와는 달리 아직 벼슬을 내려놓지 못 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김윤제처럼 자연에서 유유자적하고자 한다. 송순의 시가 환벽당에 한 수쯤 걸려 있을 법도 한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담양 환벽당


1545년(인종 1, 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정치에 환멸을 느낀 김윤제는 나주 목사를 끝으로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죽리청강 호남지경승(竹裏聽江 湖南之景勝) 환벽당을 세우고 노년에 자연을 벗삼아 낚시와 술,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냈다. 역사적 사실들을 고려하면 환벽당은 1545년~1550년 경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때는 유가철학을 따르고 실천했지만, 은퇴해서는 노장철학에 귀의해서 계류가 흐르는 명승지에 정자를 짓고 음풍농월하면서 은둔과 무위자연의 도를 즐겼던 것이다.  


2017. 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