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정에 올라 문미에 걸려 있는 한시 편액들을 감상하다. '송강정유허수리시서(松江亭遺墟修理詩序)'를 바라보면서 송강정을 짓게 된 과정을 알게 되다.
송강정 마루에 올라 정철의 후손 정해길(鄭海吉)과 정득원(鄭得源)이 쓴 오언절구를 감상하다. 정해길은 오한(梧翰)의 십세손(十世孫)이라고 했다. 오한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후손 정해길(鄭海吉)과 정득원(鄭得源)이 쓴 오언절구 편액(담양 송강정)
정해길(鄭海吉)의 시
我到宋江舍(아도송강사) 송강 정자에 온 우리더러
不須問主賓(불수문주빈) 주인과 객 따질 필요 있나
今來花樹會(금래화수회) 이제 화수회에 와서 보니
知是一家人(지시일가인) 모두가 한 집안일세 그려
吾祖建亭意(오조건정의) 우리 선조 정자 세우신 뜻
歸來伴白鷗(귀래반백구) 돌아와 갈매기랑 벗함인데
君恩終不許(군은종불허) 군은이 끝내 불허하였으니
辜負芰荷洲(고부기하주) 은거하는 것을 저버렸다네
癸巳 梧翰十世孫 海吉(계사 오한10세손 해길)
정득원(鄭得源)의 시
高亭出竹綠(고정출죽록) 높다란 정자 죽록에 세워지니
有主豈無賓(유주기무빈) 주인 있는데 손님이 없을소냐
湖魚相忘處(호어상망처) 물고기도 피아를 잊어버리네
應識此來人(응식차래인) 여기 오는 사람을 알만하구나
至今三百載(지금삼백재) 삼백 년이나 흐른 오늘이라
往蹟問江鷗(왕적문강구) 지난 일 물새에게 물을 밖에
江鷗如解意(강구여해의) 저 새 내 속 알기라도 한 듯
盡日在空洲(진일재공주) 텅 빈 백사장에 종일 서 있네
男得源承命幷書(남득원승명병서)
'유허수리시경차송우양선생운감이유술(遺墟修理時敬次松牛兩先生韻感而有述)'은 6세손 정재(鄭栽)가 정철과 성혼의 교유와 그들이 쓴 시들을 보고 감흥하여 쓴 시다. 송강정에는 오언절구 4수, 칠언절구 1수가 판각되어 있다.
송강정 '유허수리시경차송우양선생운감이유술(遺墟修理時敬次松牛兩先生韻感而有述)' 편액
유허수리시경차송우양선생운감이유술(遺墟修理時敬次松牛兩先生韻感而有述)-정재
廢棄何年事(폐기하년사) 이 정자 몇 해나 버려져 있었나
空山失主賓(공산실주빈) 주인과 길손 잃은 빈 산 같은데
繼今修舊址(계금수구지) 이제 와서야 옛터를 수리하노니
誰復作亭人(수부작정인) 그 누가 다시 이 정자에 노닐까
江湖昔臥病(강호석와병) 그 옛날 병처럼 강호를 좋아해서
歌醉伴閒鷗(가취반한구) 노래 술로 한가한 갈매기 벗했네
遺躅重尋處(유촉중심처) 남겨진 자취 다시 찾아 왔건마는
悄然獨立洲(초연독립주) 강가에 홀로 서서 서럽기만 하네
竹綠又亭名(죽록우정명) 죽록은 송강정의 다른 이름인데
不知而老去(부지이오거) 그것을 모르고 나이만 먹었구나
近聞馬里傳(근문마리전) 요사이 마리의 전함을 들었는데
更質鳳嵒語(갱질봉암어) 다시 또 봉암의 말도 따져보았지
荒址巋然在(황지귀연재) 높다란 곳에 황량한 터 있는데
江流空自淸(강류공자청) 흐르는 강물 뭐 저렇게 맑은지
種松兼屛穢(종송겸병예) 소나무 심은 차에 잡초도 없애
從此我心醒(종차아심성) 이제야 내 마음 후련도 하여라
竹綠松江卽一亭(죽록송강즉일정) 죽록과 송강은 하나의 정자인데
先生於此謝簪纓(선생어차사잠영) 선생께서 소일하신 곳이 여기라
可憐遺址今荒廢(가련유지금황폐) 옛터가 황폐한 지금 께름한 터라
早晩重修聽輿評(조만중수청여평) 곧 중수하여 많은 품평 들으리라
六世孫栽謹稿(6세손재근고)
'유촉(遺躅)'은 남은 자취다. '잠영(簪纓)'은 귀족이나 관리의 관(冠)을 장식하는 물건이다. 벼슬아치가 됨을 가리키기도 한다. 잠(簪)은 비녀로, 관모(冠帽)와 두발을 연결하는 데 사용하는 일종의 머리핀이다. 영(纓)은 모자 양옆에 달린 끈인데, 턱 아래에서 묶어 관을 고정시킨다
'송강정유허수리시서(松江亭遺墟修理詩序)'는 송강정을 중수하기 1년 전인 1769년 6세손 정재가 쓴 시서(詩序)다. 성혼의 '우계집'과 '송강집' 연보에 나오는 송강정에 대한 기록과 두 사람의 교유를 접하고 송강정을 중수할 것을 결심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또, 송강정을 지은 뜻을 예찬하는 한편, 송강정 근처에 죽록천이 흘러서 죽록정이라고도 불리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담양 송강정의 '송강정유허수리시서(松江亭遺墟修理詩序)' 편액
송강정유허수리시서(松江亭遺墟修理詩序)-정재
余不肖在童時, 盥讀吾先祖文淸公松江先生年譜及遺稿, 始知松江亭在於潭陽地, 而有宿亭舍詩, 旣又讀牛溪成先生遺集, 有次松江韻詩, 每於晨夕三復諷詠, 油然有感慕之心, 以爲安得一登亭上, 敬尋吾先祖遺躅云爾, 則有人從傍而曰:廢棄已久, 爲累累塚之地, 今無足觀矣. 余聞而慨然曰:是何言也, 平泉雖不得永保, 斯亭豈可等棄之如是也? 及弱冠一日, 乘興而往, 詢野老而得其處,[어리석은 내가 어릴 때 우리 선조 문청공 송강 선생 연보와 유고를 읽고, 송강정이 담양에 있으며, 정자에 시도 있음을 알았다. 또, 우계 선생의 유집에서 송강의 시에 차운한 시를 읽고 매양 아침저녁으로 두세 번 읊조림에 유연히 마음 속 깊이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이때 든 생각이 ‘어떻게 한번 정자에 올라 우리 선조의 자취를 공경히 찾아볼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폐허가 된 지 이미 오래되어 무덤도 군데군데 있기 때문에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탄식하여 '이 무슨 말이냐? 평천장(平泉莊)은 비록 보존하지 못하였으나 이 정자를 어찌 이처럼 등한시한 채 버려둘 수 있겠는가?' 하고는 내가 스무 살 되던 어느 날 흥취에 편승하여 와서 노인에게 물어 그곳을 찾았다.]
遂登其上而周覽焉, 則巋然一邱便作北邙, 而破礎頹垣, 無復餘存, 荒穢堙廢, 始不可辨識. 朱夫子所歎, 沼平臺傾, 鞠爲灌莽, 而樵兒牧子嘯歌躑躅於其上者. 正謂是爾. 俯仰疇昔, 倏爾數百年之久, 愴感興懷, 徘徊不忍去矣. 於是, 歸而掃穢重修之意, 謀于宗中, 詢謀僉同. 今年之新正, 謁于先祖祠院, 仍往亭墟, 種松若干株, 又介人詗多塚之主, 諭以事理, 使之移去, 其切近處入九塚, 有如西子蒙不潔, 而一朝洗濯於淸冷之水也, 此豈非地亦有顯晦之數而然耶?[마침내 그 위에 올라가 주위를 바라보니 높은 언덕 위에 허물어진 담과 주춧돌만 남아 있고 모두 폐허가 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옛날 주자(朱子)가 '무너진 소평대(沼平臺)에 국화만 무성한데 초동, 목수들이 그 위에서 휘파람 불고 노래하는구나.' 하고 한탄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옛날을 돌이켜보니, 어느덧 수백 년이 흐른 뒤라 서글픈 감회가 일어나 배회하며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이에 돌아가서 오물을 치우고 정자를 중수할 뜻을 종중(宗中)에 알리는 한편,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금년 봄에 선조 사우에 배알한 뒤 정자 터에 가서 몇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또한 가까이 있는 아홉 군데 무덤 주인을 설득시켜 이장케 하였으니, 마치 오물을 뒤집어쓴 서시(西施)를 하루 아침에 맑고 시원한 물로 씻은 것 같았다. 이것이 어찌 땅도 세상에 드러나거나 알려지지 않는 운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晦翁祖塋, 嘗被他人之占奪, 婺源遺居, 屢見侵削於隣幷夫, 以晦翁而猶尙如此, 則況其餘人乎? 晦翁崇土伐石而曰: 敢謝其譴夫謝譴之云, 似若爲吾宗準備也. 然則吾宗謝譴非他也, 只在重建亭舍於遺址之上, 而亦所以繼其志, 述其事也, 惟吾宗可不勉之?[회옹(晦翁)의 선조 무덤이 일찍이 타인의 소유가 되었고, 무원(婺源)의 유거도 여러 차례 인근 사람에게 침탈을 당하였으니, 회옹 같은 분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나머지 사람들이야 어떠하겠는가? 회옹께서 흙을 모으고 돌을 세우면서 이르기를 '감히 그 나무람을 사양하겠는가? 나무람에 감사할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마치 우리 종중을 위해서 준비한 말과 같다. 그런 즉 우리 종중이 나무람에 감사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정사를 유허지에다 중건하고 그 뜻을 잇고 그 일을 이루는 것이니 우리 종족들이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惟昔顔樂亭, 其距程夫子千五百年, 而夫子之言猶曰 水不忍廢, 地不忍荒. 朱夫子在南康, 未嘗不惓惓於濂溪書堂, 盖於先聖賢之居, 以寓羹墻之慕, 而恐其終於晦而不顯耳, 況此亭墟旣爲吾先祖棲息之地, 則其在後孫之心, 豈但如程朱兩夫子之於顔亭濂堂而止哉? 至若我東栗谷之於花石亭, 尤翁之於雙淸堂, 皆改構而表章之, 今日吾宗於先亭重修一事, 如能企慕栗尤兩先生而爲之豈不休哉? 且念亭墟處於大野之中, 難於禁護, 余甚病之, 亭下馬山村故老輩, 聞知松江相公遺墟, 願爲禁呵樵竪之侵敲. 昔之童兀者, 今焉蒼鬱, 是盖走卒知司馬之意, 而抑吾先旬宣之鄕, 尙有甘棠之遺愛而然歟?[옛날에 안락정(顔樂亭)은 정자(程子)와의 거리가 천오백여 년이나 되었지만 정자가 오히려 말하기를 '물도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도 차마 묵힐 수 없다.'고 하였다. 주자는 남강(南康)에 있을 때 일찍이 염계서당(濂溪書堂)에 항상 마음을 두었으니 이는 성현이 거처했던 곳을 사모하는 마음이 끝내 감춰져서 드러나지 못할까 두려워했을 뿐이다. 하물며 이 정자 터는 이미 우리 선조가 살던 곳인데 후손의 마음에 어찌 정자, 주자 두 선생의 안락정, 염계서당 정도에 그칠 뿐이겠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율곡의 화석정과 우암(尤庵)의 쌍청당(雙淸堂)이 모두 개수되어 드러났으니 오늘날 우리 종중에서 율곡과 우암 두 선생을 사모하는 것처럼 선조의 정자를 중수하는 일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또 생각컨대, 정자의 터가 큰 들 가운데 있어서 수호하기 어려움을 내가 매우 걱정하였는데 정자 밑에 있는 마산(馬山) 마을 어른들이 송강 상공의 유허(遺許)임을 알고는 초동, 목수가 침해하지 못하도록 해주었다. 옛적에 황무한 것이 이제 다시 울창해졌으니 이는 주졸(走卒)들도 사마(司馬)를 안다는 뜻인가, 아니면 우리 선조 관찰사의 고을에 오히려 감당(甘棠)의 유애(遺愛)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余以事屢至亭墟, 傍近諸村人謂亭墟曰 松江亭者僅有, 而曰竹綠亭’者多矣. 余聞初而異, 詳叩於諸人則曰: 亭墟固謂之松江, 而亦謂之竹綠者, 流來久矣. 且亭墟之下, 川名竹綠, 坪名亦竹綠也. 余又取考本縣邑誌, 亦曰‘松江亭在於縣西竹綠川上. 遂而竹綠一說書, 告于鳳岩再從氏, 則以爲畸菴公在京, 而與書於吾先高王考谷口府君, 由竹綠亭善護之, 近又得文淸先祖逸藁, 有新營竹綠之詩, 盖竹綠卽於松江亭之一名也. 凡玆事之顚末, 亦不可無記, 遂謹用松牛兩先生詩韻, 構拙以志之, 盖朱夫子屋未就而詩已成之意也.[내가 일 때문에 여러 번 이 정허(亭墟)에 들렀는데 근처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송강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적고 대부분 죽록정으로 불렀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여러 사람에게 자세하게 물어보니, 또한 죽록의 유래가 오래되었다. 정자 터 바로 앞 시내를 죽록이라 하고, 들판 또한 죽록들이라고 하였다. 내가 담양현 읍지를 찾아보니 또한 '송강정은 현의 서쪽 죽록천변에 있다.’고 하였다. 마침내 죽록이라는 하나의 설을 써서 봉암(鳳岩) 재종에게 알리니 그가 하는 말이 '기암공(畸菴公)이 한양에 있을 때 우리 선고조 곡구부군(谷口府君)에게 보낸 글을 읽어 보면 죽록정을 잘 보호하라 하였고, 또 근래에 문청선조(文淸先祖)의 일고(逸稿)를 얻었는데 '신영죽록(新營竹綠)'이라는 시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죽록정은 곧 송강정의 일명이다. 무릇 이 사실의 전말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마침내 송강, 우계 두 선생의 시를 대충 엮어서 기록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주자가 집은 완성되지 않았는데 시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吾宗及同志大雅諸君子, 倘賜酬唱, 俾作斯亭之一典故, 則亦豈無助? 是亦余有受於栗尤兩先生而然矣, 觀者恕而不譏否? 若夫江山之勝景, 物之富有不暇論云.[우리 종친과 동지, 그리고 여러 군자들이 수창(酬唱)을 하사해서 이 정자의 전고(典故)가 되게 한다면 어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 또한 율곡, 우암 두 선생에게서 본받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보는 자가 용서하고 비웃지는 않을런지. 강산의 아름다움과 사물의 넉넉함은 거론할 겨를이 없었다.]
崇禎屠維赤奮若應鐘之朏 六世孫 栽謹序[숭정 기축년(1769) 10월 3일 6세손 정재(鄭栽) 삼가 쓰다.]
'평천장(平泉莊)'은 낙성(洛城) 30리에 있는 당(唐)나라 이덕유(李德裕)의 별장이다. 섭몽득(葉夢得)의 '평천초목기발(平泉草木記跋)'에 의하면 이곳에는 온갖 기화요초와 진귀한 소나무, 괴석(怪石) 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인로(李仁老)는 '제최태위문(祭崔太尉文)'에서 '其於勇退閑居之樂 可以壓平泉之花木 綠野之酒詩[용감히 조정에서 물러나와 한가하게 보내는 즐거움은 가히 평천의 꽃나무와 배도(裵度)의 별장인 녹야의 주연시회(酒宴詩會)를 압도할 수 있겠다.]'고 말한 바 있다.
'서시(西施)'는 춘추시대 말기 월(越)나라의 절세미인으로 성(姓)이 시(施)인데, 집이 저라(苧蘿) 완사촌(浣紗村)의 서쪽에 있어 서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미인계로 서시를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쳐 그의 애첩이 되었다. '회옹(晦翁)'은 주희(朱熹)의 호다. 높여서 주자(朱子)라고 한다. '무원(婺源)은 주희의 고향으로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이라고들 한다.
'안락정(顔樂亭)'은 공자의 후손 공주한(孔周翰)이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가 살던 곳에 지은 정자이다. '정자(程子)'는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가리킨다. 그의 시 '안락정(顔樂亭)'에 '천 년의 위에는 안자가 오직 공자를 배웠고, 백세의 아래에는 안연의 거처에 공씨가 정자를 지었네.(千載之上 顔惟孔學 百世之下 顔居孔作)'라는 구절이 있다. '남강(南康)'은 주희가 부임했던 장시성(江西省)에 있는 지명이다. '염계서당(濂溪書堂)'은 주돈이(周敦頤)가 만년에 은퇴하여 장시성 노산(廬山) 기슭에 지은 서당이다.
'화석정'은 1443년(세종 25)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고려 말의 문신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에 이이의 증조부인 이명신(李明晨)이 건립한 정자다. 1478년(성종 9) 이숙함(李淑瑊)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다. '우암(尤庵)'은 송시열의 호다. '쌍청당(雙淸堂)'은 은진 송씨(恩津宋氏)의 중시조 송유(宋愉)가 1432년(세종 14년)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회덕(懷德)의 백달촌(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에 지은 건물이다. 쌍청(雙淸)은 두 가지 맑은 것, 즉 바람과 달(淸風霽月)을 뜻한다. 송시열, 송준길은 송유의 후손들이다. '주졸(走卒)'은 하인(下人), '사마(司馬)'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쓴 사마광 (司馬光 )이다. 심부름꾼들도 사마광의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했다는 말이다. 정철을 사마광에 비유한 구절이다.
'감당유애(甘棠遺愛)'는 팥배나무가 남긴 사랑, 청렴결백하거나 선정을 베푼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周)나라를 창업한 무왕(武王)은 죽으면서 동생인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에게 어린 아들 성왕(成王)을 잘 보필하도록 부탁했다. 주공과 소공은 조카 성왕을 잘 보필하여 정사를 보살폈다. 소공은 한수(漢水) 상류 일대에서 선정을 펼쳐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훗날 제12대 유왕(幽王)이 포악한 정치를 하자 백성들은 옛 소공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당(甘棠)'에는 선정을 베푼 소공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정철을 소공에 비유한 구절이다.
'봉암(鳳岩)'은 미상이다. '기암공(畸菴公)'은 정철의 4남 정홍명이다. '곡구부군(谷口府君)'은 정철의 손자 곡구(谷口) 정한(鄭漢, 1599∼1652)이다. '부군(府君)'은 벼슬에 관계없이 죽은 이에 대한 호칭이다. '수창(酬唱)'은 시가를 부르면서 주고받는 것이다.
2017.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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