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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14

林 山 2017. 7. 21. 11:18

서인의 영수 박순이 죽어 경기도 영평에 묻히다. 서인의 모사꾼 송익필이 기획한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촉발된 기축옥사에서 위관을 맡은 우의정 정철 이조 판서 성혼과 함께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하다. 송익필 환천에서 풀려나다. 기축옥사로 대동계 지도자 정여립, 동인의 강경파 행동대장 이발 멸문지화를 당하다.  


1589년(선조 22) 7월 서인의 영수 박순은 영평에서 죽어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묻혔다. 박순의 부음을 듣고 정철은 그의 죽음에 곡하며 애도시 '사암부지기축칠월(思菴訃至己丑七月)' 두 수를 지었다.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박순 부부 묘소 


사암부지기축칠월(思菴訃至己丑七月)-기축년 칠월 사암의 부고가 오다(정철)


我似失羣鴻(아사실군홍) 나는 무리 잃은 기러기 같은데

依依何處托(의의하처탁) 이 몸을 어느 곳에나 의지할꼬

參商蘆葦間(참상로위간) 외로운 몸 갈대 사이에 있나니

影與寒雲落(영여한운락) 그림자 찬 구름과 사라지도다


 伯淳無福故(백순무복고) 명도 선생이 복이 업는 까닭은

天下也無福(천하야무복) 천하가 복이 없기 때문이라네

 命矣奈如何(명의내여하) 타고 난 운명 마침내 어찌하랴

 西風一痛哭(서풍일통곡) 가을 바람에 한바탕 통곡하네 

 

박순이 죽자 정철은 자신이 처량한 외기러기 신세가 되었음을 절감하고 이를 슬퍼하고 있다. 정철은 박순을 북송대 도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호(程顥)에 비유하고 있다. 정호, 정이(程頤) 형제를 아울러 정자(程子)라 칭한다. 박순의 죽음은 천하가 복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순에 대한 애절한 애도시다.


'사암(思菴)은 박순의 호다. '참상(參商)'은 참성(參星)과 상성(商星) 두 별을 말한다. 참성은 동쪽, 상성은 서쪽에 있어서 한 별이 뜰 때 다른 별은 져서 서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서로 만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백순(伯淳)은 정호의 자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명도선생(明道先生)이라고 불렀다. 그는 우주의 본성과 사람의 성이 본래 같은 것이라 주장하였다.  


박순은 선조로부터 송균(松筠)과 같은 절조(節操)와 수월(水月)과 같은 정신을 가졌다는 칭찬을 받았다. 박순은 천지의 생성을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 태허설(太虛說)을 주장했다. 그는 원나라의 서예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체인 송설체(松雪體)에 능했으며, 시는 당시풍(唐詩風)을 따랐다. 그의 저서 '사암집(思菴集)'은 동서붕당이 싹트던 선조 당시의 실정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박순은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광주 월봉서원(月峰書院),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포천 옥병서원(玉屛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순의 초상


그해 8월 54세의 정철은 맏아들 기명(起溟)의 죽음으로 경기도 고양에 올라와 있었다. 한편, 환천으로 양반에서 졸지에 천민 신분으로 전락한 송익필, 한필 형제를 비롯한 감정의 자손 70여 명은 형관들의 추적을 피해 정철, 성혼, 김장생 등 서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송익필, 한필 형제는 이름을 바꾸고 해서지방으로 도망해 숨어살면서 자신을 천민으로 만든 동인들에 대한 원한을 가슴 깊이 품었다. 이들은 점술가로 행세하면서 황해도 지방의 향반들을 현혹하여 관상과 사주를 봐주거나 조상의 묘자리 등을 알려주면서 환심을 샀다. 


이 무렵 해서지방에는 '호남의 전주 땅에 성인이 일어나 조선 백성을 구제할 것이다. 땅과 바다에서 노역을 하거나 잘못하여 쫓기는 자들도 사면 받고, 공사노비나 천민 등의 신분차별도 모두 혁파되어 이로부터 나라가 태평하고 무사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송익필은 소문의 주인공이 정여립이라는 것을 알았다. 송익필은 정여립의 박식하면서도 강직하고 과격한 성품을 이용하여 조정에서 동인들을 몰아내고, 송씨 가문의 처지를 일거에 반전시킬 더없이 좋은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송익필 형제는 정여립의 대동계 활동을 역모로 꾸며서 자신들을 공격한 이발 등 동인들을 한꺼번에 사지로 몰아넣을 음모를 꾸몄다. 정여립을 중심으로 동인들을 한꺼번에 역모 혐의자들로 엮으면 자신들의 원한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생원으로 이름을 바꾼 송한필은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황해도 이곳저곳의 주막으로 다니면서 ‘전주에 성인이 났으니 즉 정수찬(수찬은 정여립의 벼슬)이다. 길삼봉과 서로 친하게 왕래하였는데 삼봉은 하루 삼백 리 길을 걸을 수 있고, 지혜와 용맹이 비할 데 없으며, 신인(神人)이어서 사람들이 만일 그를 보게 되면 벼슬이 저절로 오게 될 것이다.'라는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송익필 형제는 황해도의 부유한 토호들을 꾀어 호남의 정여립을 찾게 만들었다. 


황해도에는 서인 계열의 지방 수령들이 많았고, 황해도 백천은 송익필 형제의 고향이라 이들이 활동하기에 매우 유리했다. 송익필은 황해도 안악에서 활동하는 대동계원 중에서 정여립의 제자를 자처한 조구와 승려 의암(義菴)을 주목했다. 특히 조구는 입이 가벼워 가는 곳마다 곧 새 세상이 도래할 것처럼 떠들고 다녔다. 


송익필은 안악 군수 이축(李軸)에게 조구를 조사하라고 일렀다. 이축이 의암을 붙잡아 문초하고, 조구의 집을 조사하니 정여립과 교류한 편지가 나왔다.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도 재령에서 대동계원 이수(李綏)를 붙잡아 문초하자 조구, 의암과 함께 거사를 모의했다고 자백했다. 이축은 박충간,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과 함께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에게 보고했다. 송익필은 조구와 의암, 이수 등 대동계원들을 조정에 역모로 고변토록 했다.


한편 송익필은 안악의 변숭복을 찾아가서 대동계 활동이 역모로 고변되었음을 슬며시 알려주면서 역도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정여립의 체포에 협조하라고 설득했다. 송익필의 꾐에 넘어간 변숭복은 그의 지시대로 성혼의 문인 진안 현감 민인백(閔仁伯)을 찾아가 정여립을 포살할 계책을 세웠다.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재령 군수 박충간, 안악 군수 이축, 신천 군수 한응인 등은 선조에게 정여립의 역모 혐의를 고변하는 비밀장계를 올렸다. 장계에는 '전직 수찬인 정여립이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역적들이 장차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 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한 뒤 궁궐을 범할 계책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선조는 장계를 받아보자마자 편전(便殿)에 나아가 영의정과 좌우의정 등 삼공, 육승지(六承旨), 의금부(義禁府) 당상관, 숙직 총관(摠管), 옥당(玉堂) 상하번(上下番)들을 모두 급히 들어오게 하여 긴급 어전회의를 열었다.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은 어전회의에서 제외되었다. 


선조는 대신들의 주청으로 전라도와 황해도에 선전관(宣傳官)과 금부도사(禁府都事)를 급히 파견하라는 명을 내렸다. 금부도사 유담(柳湛)이 전주부에 이르러 정여립의 집을 찾아갔지만 그는 마침 출타하고 집에 없었다. 정여립의 행방을 찾지 못한 유담은 그가 도주했다는 급보를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 10월 7일 유담의 급보를 받은 조정은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황해도 관찰사 한준의 고변이 있은 직후 10월 11일 고양에 있던 정철은 송익필의 권유에 따라 비밀보고서를 작성하여 입궐을 서둘렀다. 친구 한 사람이 극구 만류했지만 정철은 '적이 군부를 모해하려 하는데, 중신이라는 자가 가까운 궐문 밖에 있으면서 망설이고 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길을 나섰다. 정철은 선조를 면담하고 정여립 역모사건의 전말에 대한 비밀보고서를 올렸다. 비밀보고서를 접한 선조는 정철을 충절로 일컬으며 가상히 여겼다. 10월 14일 독포어사(督捕御史) 정윤우(丁允祐), 이대해(李大海), 정숙남(鄭叔南)을 급히 삼남지방으로 파견했다. 15일에는 황해도에서 잡혀온 대동계원 이기(李箕)와 이광수(李光秀), 17일에는 안악의 수군인 황언륜(黃彦倫)과 방의신(方義臣)을 고문하여 자복받은 후 처형했다.


진안 죽도


10월 17일 선전관 이용준(李用濬), 내관(內官) 김양보(金良輔)는 전주로 달려갔다. 정려립은 역모로 고변된 사실도 모른 채 금구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변숭복은 정여립을 유인하여 민인백과 약속한 죽도의 한적한 장소로 유인했다. 아들 옥남, 수행원 박춘룡(朴春龍)과 함께 변숭복을 따라 죽도에 도착한 정여립은 뒤늦게 200여명의 관군들이 자신의 일행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신의 운이 다했음을 깨달은 정여립은 자신을 배신한 변숭복을 칼로 쳐서 죽였다. 옥남과 박춘룡도 칼로 쳤으나 죽지는 않고 땅에 쓰러졌다. 정여립은 석양에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우러러 황소처럼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칼자루를 땅에 꽂아 놓고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했다.  


그러나 1740년(영조 16)대 남하정(南夏正)이 저술한 붕당(朋黨)에 관한 책인 '동소만록(桐巢漫錄)'에는 정여립이 죽도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서 그를 박살낸 뒤 조정에 자결했다고 허위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정철의 수제자 김장생이 엮은 '송강행록(松江行錄)'에도 역모 고변이 있자 다른 사람들은 정여립의 상경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철만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 처리를 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안 이유는 정철이 그를 유인하고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음모의 최고위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인백은 정여립과 변숭복의 시신을 수습하고, 옥남과 박춘룡을 붙잡아 전주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했다. 10월 19일 선조는 옥남과 박춘룡을 직접 국문했다. 17세의 옥남은 모진 고문 끝에 '모주(謀主)는 길삼봉이고, 고부(古阜)에 사는 한경(韓憬), 태인(泰仁)에 사는 송간(宋侃), 남원(南原)에 사는 조유직(趙惟直), 신여성(辛汝成), 황해도에 사는 김세겸(金世謙), 박연령(朴延齡), 이기, 이광수, 박익(朴杙), 박문장(朴文長), 변숭복 등 10여 명이 항상 찾아 왔으며, 지함두와 중 의연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나 함두는 항상 집안에 있었고, 중 의연은 밤낮으로 같이 거처했으며, 연령은 서울 소식을 탐정하려고 황해도에 갔다.'고 자복하였다.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자복한 뒤에 처형되었다. 정여복(鄭汝復), 정여회(鄭汝會), 정여흥(鄭汝興) 등 정여립의 형제와 이진길, 한경, 송간, 조유직, 신여성 등은 끝까지 불복했지만 결국 장형을 받고 죽었다. 


10월 27일 정여립과 변숭복의 시체는 저자에서 백관들이 둘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한 시대의 혁명가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정여립의 부모와 아내, 자식들도 모두 체포되어 교살됐고, 첩과 노비들은 정여립 일행의 체포에 공이 많은 진안 현감 민인백 등에게 하사되었다. 선조의 명으로 정여립이 살던 집은 파서 연못으로 만들었다. 또, 전주는 이씨 왕조의 시조인 조경묘(肇慶廟)가 있다고 해서 정여립의 조부 이상의 분묘는 낱낱이 파내어 이장토록 했다.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인척이 되는 집안은 모두 전주에서 쫓겨나 먼 지방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11월 정여립 역모사건을 뒤에서 기획하고 조종한 송익필은 정철의 집에 머물면서 기회를 엿보며 성혼 등 서인들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선조는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을 위관(委官)으로 임명하여 역모 가담자들을 심문하게 했다. 이에 송익필은 정철에게 빨리 입궐해서 위관을 맡으라고 다그쳤다. 정철은 차자를 올려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위관으로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조는 결국 정언신 대신 정철을 우의정으로 제수하고 위관으로 삼았다. 정철은 낙향한 지 4년만에 우의정이 되어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가 그토록 애타게 부르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의 목적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서인이 집권하자 서인당의 거두 성혼도 이조 판서로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송익필은 역모 고변으로 환천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서인의 중심 인물 정철이 정여립 역모사건 수사를 총지휘하는 위관을 맡으면서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참혹한 기축옥사가 벌어졌다. 


선조는 정철의 손에 생살여탈(生殺與奪)의 도끼자루를 쥐어 주었다. 기축옥사의 도끼자루를 잡게 된 정철은 서인의 모주 송익필, 성혼과 긴밀히 상의하면서 정여립 역모사건을 기회로 이발 등 동인들을 한꺼번에 말살시키고자 했다. 정철, 성혼, 송익필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원한이 있는 동인들을 정여립 역모사건 관련자로 엮어 줄줄이 죽음으로 몰아갔다. 


정철은 문인이나 학자에 어울리는 사람이지 관용이 요구되는 정치에 걸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성격이 직선적이고 다혈질이었던 정철은 매사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내 편 아니면 적으로 간주했다. 정철은 이전부터 독선적으로 행동하고 여자와 술을 좋아했다. 이이와 성혼의 제자 김장생도 '송강행록'에서 정철이 '술과 여자에서 때로 벗어나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술자리에서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던 정철은 한양 태생이었지만 사실상 호남 출신이나 마찬가지였으면서도 호남의 유생들로부터 옹졸한 소인배라는 비난을 받고 있던 것에 대해 항상 이를 원통하게 여기고 있었다. 위관으로서 정철은 기축옥사를 자신의 개인 감정을 푸는 데도 이용하였다. 그는 겉으로 관대한 척 하면서 뒤로는 살육을 교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인의 모사꾼 송익필은 호남 유생 양천회(梁千會)를 사주하여 이 사건에 중립적이었던 우의정 정언신을 비롯해서 상당수의 동인들이 정여립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송익필의 사주를 받은 양천회는 11월 3일 이발과 이길, 김우옹, 백유양, 정언신, 최영경(崔永慶) 등이 정여립과 친분을 맺고 반란을 모의했다는 상소를 올렸다. 양천회 등의 상소와 정철의 주청으로 인해 정여립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동인 계열의 선비들이 줄줄이 붙잡혀 왔고, 심한 고문을 받은 후 참혹한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했다.  


12월 3일 참봉 한백겸(韓百謙)은 정여립의 시신을 정성스레 염을 해주었다가 장형을 받고 유배를 당했다. 우의정 정언신도 정여립과 19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남해로 유배당했다가 투옥되었고, 다시 갑산으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 정률(鄭慄)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식음을 전폐한 채 굶어죽었다. 기축옥사 처리 과정에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어 조정에서는 관료들끼리도 서로 의심하여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림에서도 글 한 줄 올바르게 쓰기가 두려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2월 8일 동인 유성룡(柳成龍)은 '정여립을 중용하면 사림 전체의 수치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전랑(銓郞)의 망(望)에 올리려 하는 것을 막다가 탄핵당한 이경중(李敬中)의 특별 증직(贈職)을 선조에게 주청했다. 제천 출신으로 이황의 문인이었던 이경중은 정철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 당시 이경중을 탄핵한 대간은 동인 정인홍(鄭仁弘)과 박광옥(朴光玉)이었다. 선조는 정인홍과 박광옥의 벼슬을 삭탈했고, 이 일로 인해 정인홍과 유성룡의 틈이 벌어졌다. 정철이 정여립과 단순히 알고 지낸 사람들까지 논핵하여 죽임으로써 조야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선조는 12월 10일 동인의 영수 우의정 이산해에게 전교하여 기축옥사의 후유증을 진정시킬 방도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12월 12일 낙안향교(樂安鄕校) 유생 선홍복(宣弘福)의 초사(招辭)에서 이발과 이길, 백유양 등을 정여립 역모사건 관련자로 끌어대면서 이진길이 선산 부사(善山府使) 유덕수(柳德粹)에게서 참서(讖書)를 얻었다고 고발했다. 이발, 이길, 백유양은 다시 끌려와 온몸에 살이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을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이발의 동생 이호(李浩)와 이급(李汲)도 고문을 받은 후 유배당했다가 다시 잡혀 와서 장형을 받고 죽었다. 이진길과 유덕수도 곤장을 맞고 죽었다. 정철은 정여립과 이발의 편지를 근거로 동인의 영수 이발의 가문을 멸문시켰다. 


이조민(李肇敏)의 '괘일록(掛一錄)'에는 "선홍복이 형을 받을 때에 말하기를, '내 죄는 마땅히 죽어야 옳은 것이다. 조영선(趙永宣)의 말을 듣고 죄없는 사람을 모함하였으니, 부끄럽고 한스리워 어찌하랴.' 하였으니, 그것은 대개 정철이 몰래 의원 조영선을 시켜서 홍복을 사주한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도 정철과 송익필이 선홍복을 회유하여 편지 등의 증거들을 조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실록에는 또 '정철이 기축년에 많은 그물과 함정을 만들었다.'면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일망타진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라남도 함평 출신의 이발 후손들은 정철을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발의 후손들은 그의 제사를 지낼 때도 고기를 칼로 다지면서 '정철! 정철!'이라고 외친다고 한다. 지금도 함평에 가면 이발의 기일에 정철을 저주하는 주문을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나주 지방의 광산 이씨(光山李氏) 이발의 후손들은 정철의 후손과는 한방에서 같이 앉지도 않을 정도로 원수 간이라고 한다. 정철에 대한 사무친 원한이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12월 15일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던 조헌과 호남 유생 양산숙(梁山璹), 김광운(金光運) 등은 정철 등 두어 사람만을 칭찬하고 당시 재상들을 비롯해서 조정의 모든 신하를 배척하는 소(疏)를 올렸다. 선조는 조헌이 송익필 형제의 사주를 받아 소를 올렸다는 죄로 형조에 명하여 잡아 가두게 하고, 남의 종 신분으로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친 송익필의 죄를 추궁하게 하였다.


 유성룡 초상


12월 16일 정철은 동인의 거두 이산해와 유성룡도 제거하고자 했다. 정철의 사주를 받은 전남 화순 출신의 유생 정암수(丁巖壽)는 박천정(朴天挺), 박대붕(朴大鵬), 임윤성(任尹聖), 김승서(金承緖), 양산룡(梁山龍), 이경남(李慶男), 김응회(金應會), 유사경(柳思敬), 유영(柳瑛) 등과 연명으로 이산해와 정언신, 정인홍, 유성룡 등을 나라를 병들게 하는 간인(姦人)이자 역당이므로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선조에게 올렸다. 선조는 오히려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위로한 다음 정암수를 비롯한 10여 명을 엄벌에 처했다. 유성룡은 이조 판서, 권극례(權克禮)는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