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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13

林 山 2017. 7. 20. 14:09

'사미인곡'을 불러도 선조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자 더욱 초조해진 정철 자신을 더 낮추고 반성하면서 군주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호소하는 '속미인곡'을 짓다. 정철 창평 대점의 주막집에서 고향 친구 최기를 만나다. 


정철은 또 '사미인곡'에 이어 '속미인곡'을 지었다. '속미인곡'은 제목만으로 '사미인곡'의 속편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전혀 다른 면에서 연군의 정을 노래한 가사다. 임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임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갑녀(甲女)와 을녀(乙女) 두 여인의 대화를 빌려 은유적으로 노래했다. 기본 율조는 3·4조가 우세하며 4음보 1행으로 따져 모두 48행이다.


담양 송강정의 송강정선생시비에 새긴 '사미인곡'


속미인곡(續美人曲) - 정철  


뎨 가난 뎌 각시 본 듯도 한뎌이고. 텬샹 백옥경을 엇디하야 니별하고, 해 다 뎌 져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난고.(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구나. 임금이 계시는 서울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가 다 져서 저물었는데 누구를 만나보러 가시는가?)


'백옥경'은 옥황상제가 산다는 하늘나라의 서울이다. 여기서는 임금이 사는 궁궐을 가리킨다. '백옥경'을 '이별'했다는 것은 임금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조에게 버림받은 정철이 멀리 떨어진 남도의 창평에서 살고 있는 처지를 하늘나라에서 추방된 여인의 처지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어와 네여이고 내 사셜 드러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한가마난 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세 나도 님을 미더 군뜨디 전혀 업서 이래야 교태야 어즈러이 구돗던디 반기시난 낫비치 녜와 엇디 다라신고. 누어 생각하고 니러 안자 혜여하니 내 몸의 지은 죄 뫼가티 싸혀시니 하날히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허믈하랴. 셜워 플텨 혜니 조믈의 타시로다.(아, 너로구나. 내 사정 이야기를 들어 보오. 내 생김새와 내 거동이 임께서 사랑함직한가마는 어쩐지 나를 보시고 너로구나 하고 특별히 여기시기에, 나도 임을 믿어 딴 생각이 전혀 없어 응석과 아양을 부리며 귀찮게 굴었던지 반가워하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려 보니 내 몸이 지은 죄 산같이 쌓였으니,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겠는가? 설워서 여러 가지 일을 풀어 내어 낱낱이 헤아려보니, 조물주의 탓이로다.)


임을 믿고 응석과 아양을 떨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는지 반가워하는 낯빛이 옛날과 다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지은 죄 때문이다. 임과 이별한 것은 다 내 잘못이고, 운명이라는 체념과 좌절이 담겨 있다. 


글란 생각 마오.(그렇게는 생각하지 마오.)


매친 일이 이셔이다. 님을 뫼셔 이셔 님의 일을 내 알거니 믈 가탄 얼굴이 편하실 적 몃 날일고. 츈한 고열은 엇디하야 디내시며 츄일동텬은 뉘라셔 뫼셧난고. 죽조반 죠셕 뫼 녜와 가티 셰시난가. 기나긴 밤의 잠은 엇디 자시난고.(마음 속에 맺힌 일이 있소이다. 예전에 임을 모셔서 임의 일을 내가 잘 알거니, 물과 같이 연약한 체질이 편하실 적이 몇 날일꼬? 이른 봄날의 추위와 여름철의 무더위는 어떻게 지내시며 가을날 겨울날은 누가 모셨는고? 자릿 조반과 아침 저녁 진지는 예전과 같이 잡수시는가? 기나긴 밤에 잠은 어떻게 주무시는고?)


여인은 비록 소박을 맞고 쫓겨난 독수공방 신세지만 자나깨나 연약한 임의 아침 저녁 식사와 잠자리 걱정을 하고 있다. 임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님 다히 쇼식을 아므려나 아쟈 하니 오날도 거의로다. 내일이나 사람 올가. 내 마음 둘 데 업다. 어드러로 가잔 말고. 잡거니 밀거니 놉픈 뫼해 올라가니 구롬은 카니와 안개난 므사 일고. 산쳔이 어둡거니 일월을 엇디 보며 지척을 모라거든 쳔리랄 바라보랴. 찰하리 믈가의 가 뱃길히나 보쟈 하니 바람이야 믈결이야 어둥졍 된뎌이고. 샤공은 어데 가고 븬 배만 걸렷나니. 강텬의 혼자 셔셔 디난 해랄 구버보니 님다히 쇼식이 더옥 아득한뎌이고.(임 계신 곳의 소식을 어떻게 해서라도 알려고 하니, 오늘도 거의 저물었구나. 내일이나 임의 소식 전해줄 사람이 올까? 내 마음 둘 곳이 없다. 어디로 가자는 말인고? 나무 바위 등을 잡기도 하고 밀기도 하면서 높은 산에 올라가니, 구름은 물론이거니와 안개는 또 무슨 일로 저렇게 끼어 있는고? 산천이 어두운데 해와 달을 어떻게 바라보며, 눈 앞의 가까운 곳도 모르는 데 천 리나 되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으랴? 차라리 물가에 가서 뱃길이나 보려고 하니 바람과 물결로 어수선하게 되었구나. 뱃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걸렸는고? 강가에 혼자 서서 지는 해를 굽어보니 임 계신 곳의 소식이 더욱 아득하구나.)


임의 소식을 알고 싶어 높은 산에 올라가기도 하고, 나루터에 나가보기도 한다. 하지만 구름과 안개, 바람과 물결 때문에 임의 소식을 알 수도 없고, 소식을 전해줄 사람도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모첨 찬 자리의 밤듕만 도라오니 반벽청등은 눌 위하야 발갓난고. 오라며 나리며 헤뜨며 바니니 져근덧 녁진하야 풋잠을 잠간 드니 졍셩이 지극하야 꿈의 님을 보니 옥 가탄 얼굴이 반이나마 늘거셰라. 마암의 머근 말삼 슬카장 삷쟈 하니 눈믈이 바라 나니 말인들 어이하며 졍을 못다하야 목이조차 몌여하니 오뎐된 계셩의 잠은 어이 깨돗던고.(초가집 찬 잠자리에 한밤중이 되었으니, 벽 가운데 걸린 등불은 누구를 위하여 밝았는고? 산을 오르내리며 강가를 헤매며 시름없이 오락가락하니, 잠깐 사이에 힘이 지쳐 풋잠을 잠깐 드니, 정성이 지극하여 꿈에 임을 보니, 옥 같이 곱던 얼굴이 반 넘어 늙었구나.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실컷 사뢰려고 하였더니 눈물이 잇달아 나니 말인들 어찌 하며, 정회도 못다 풀어 목마저 메니, 방정맞은 닭소리에 잠은 어찌 깨었던고?)


산과 나루터를 헤매다가 한밤중에 돌아온 여인이 피곤하여 설핏 잠이 들자 오매불망 그리던 임이 꿈에 나타난다. 그런데, 옥 같던 임의 모습이 너무 늙었다. 여인은 그동안 못다 한 말을 임에게 실컷 하려고 하는데 눈물이 쏟아지고 목이 멘다. 그때 방정맞은 닭이 울어서 하고 싶은 말도 다 못하고 잠이 깨고 만다. 꿈에서라도 임을 만나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이 드러나 있다. 


어와, 허사로다. 이 님이 어데 간고. 결의 니러 안자 창을 열고 바라보니 어엿븐 그림재 날 조찰 뿐이로다. 찰하리 싀여디여 낙월이나 되야 이셔 님 겨신 창 안해 번드시 비최리라.(아, 헛된 일이로다. 이 임이 어디 갔는고? 꿈결에 일어나 앉아 창문을 열고 바라보니 가엾은 그림자만이 나를 따라올 뿐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지는 달이나 되어 임 계신 창 안에 환하게 비치리라.)


잠이 깨어 홀로 일어나 앉아 창문을 열고 바라보니 나의 모습이 너무나 외롭고 처량하다. 차라리 지는 달이라도 되어 임 계신 창 안을 환하게 비추고 싶다. 그렇게라도 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각시님 달이야 카니와 구즌 비나 되쇼셔.(각시님, 달은 그만 두고 궂은 비나 되십시오.)


갑녀는 달은 그만두고 '궂은 비'나 되라고 한다. '궂은 비'는 날이 흐리고 침침하게 오랫동안 내리는 비다. 비는 눈물의 비유다.  그리워 흐르는 눈물이 '궂은 비'가 되어 임 계신 구중궁궐에 내리면 혹여 그 비가 여인인 줄 알아볼지도 모르고, 임이 '궂은 비'를 맞는다면 여인은 임과 함께 '촉촉하게' 젖어 지내게 되는 것이다. 달빛은 임을 비추기만 할 뿐 젖게 할 수는 없다. '궂은 비'는 그만큼 달보다 훨씬 더 애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궂은 비'를 한역하면 운우(雲雨)다. 운우지정(雲雨之情)은 남녀가 은밀하게 나누는 육체적인 사랑을 뜻한다. 운우지정이라는 말은 초나라 회왕(懷王)의 '무산지몽(巫山之夢)' 고사에서 유래했다. '궂은 비'나 되라는 것은 초 회왕이 무산지몽에서 신녀(神女)와 운우지정을 나눈 것처럼 임을 흠뻑 질펀하게 적셔 은밀하고 달콤한 사랑을 나누라는 권유일 수도 있다.     


'무산지몽' 고사는 '문선(文選)'에 실린 송옥(宋玉)의 '고당부병서(高唐賦幷序)'에 나온다. 옛날 초나라 회왕이 고당(高唐)에서 노닐다가 피곤하여 잠시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속에 한 여인이 나타나 ‘저는 무산(巫山)에 사는 여인이온데 고당에 손님으로 왔다가 왕께서 고당에서 노니신다는 말을 듣고 잠자리를 받들고자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회왕은 그녀와 황홀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눴다. 그녀는 떠나면서 ‘저는 무산 남쪽의 험준한 곳에 살고 있는데 아침에는 구름(朝雲)이 되고 저녁에는 비(暮雨)가 되어 아침저녁으로 양대(陽臺) 아래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침에 보니 과연 그녀의 말과 같았다. 그래서 그곳에 묘당을 짓고 이름을 조운(朝雲)이라고 했다.


남녀 간의 정교를 뜻하는 무산지몽, 운우지정은 무산지운(巫山之雲), 무산지우(巫山之雨), 운우지락(雲雨之樂), 운우지교(雲雨之交) 등으로도 쓰인다. 무산(巫山)은 쓰촨성(四川省)에 있다. 양대(陽臺)는 해가 잘 드는 누대를 뜻하는데, 남녀 사이에 은밀하게 정을 통하는 것을 말한다. 한 번 인연을 맺고 다시 만나지 못할 때 ‘양대불귀지운(陽臺不歸之雲)’이라고 한다.


무산의 신녀는 중국 신화시대 신농(神農)의 막내딸 요희(瑤姬)다. 요희가 어려서 죽자 천제는 그 죽음을 가엾게 여겨 무산의 비와 구름을 관장하는 신으로 봉했다. 그녀는 아침에는 산봉우리에 아름다운 구름이 되어 걸렸다가 저녁에는 비가 되어 대지를 촉촉하게 적셨다.      


'속미인곡'은 임과 이별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여인이 임을 그리워하는 애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다른 여인에게 하소연하는 대화체 형식으로 쓴 가사다. '속미인곡'도 '사미인곡'처럼 고신연주지사(孤臣戀主之詞)다. 순 우리말로 읊어서 더 진솔하고 곡진하게 다가온다.     


'속미인곡'의 구성은 서사, 본사, 결사로 되어 있다. 서사의 주제는 임과 이별하게 된 사연이다. 갑녀 백옥경을 떠난 이유를 묻자 을녀는 조물주의 탓이라면서 자책하고 체념한다. 본사의 주제는 이별 후의 사랑과 그리움이다. 갑녀가 을녀를 위로하자 을녀는 임에게 버림 받은 사연을 말한다. 결사의 주제는 임에 대한 사모의 정이다. 을녀가 임에 대한 간절한 사모의 정을 말하자 갑녀는 을녀를 위로한다. 여기서 임은 역시 선조다.


'사미인곡'을 지을 때만 해도 정철은 곧 다시 불려 올라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선조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러자 더욱 초조해진 정철은 자신을 더 낮추고 반성하면서 군주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호소한다. 그 노래가 바로 '속미인곡'이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관동별곡'을 비롯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굴원의 저 유명한 초사 '이소'에 비겨 '동방의 이소'라고 절찬했다. '사미인곡'이 화려하고 과장된 면이 있다면, '속미인곡'은 전고(典故)와 한자 어구가 훨씬 적으며, 소박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심정을 나타냈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은 한자를 빌려 꾸몄기 때문에 표현이 진솔한 '속미인곡'이 더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했다.

초사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유향(劉向)이 굴원, 송옥(宋玉) 등의 작품을 모아 책으로 편집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북송 말기의 황백사(黃伯思)는 '익소서(翼騷序)'에서 '굴원과 송옥 등의 작품이 모두 초나라 말을 썼고, 초나라 곡조를 내었으며, 초나라 땅을 기록했고, 초나라 물건 이름을 붙였으므로 이를 초사라 불렀다.'고 했다. 초사 작가에는 굴원, 송옥, 유향을 비롯해서 경차(景差), 가의(賈誼), 동방삭(東方朔), 엄기(嚴忌), 왕포(王褒) 등이 있다. 

시경(詩經)이 고대 중국의 황하(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한 북방문학의 대표적인 시가라면, 초사는 전국시대 장강(長江)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한 남방문학의 대표적인 시가다. 시경이 여러 지방에 유행하던 작자를 알 수 없는 평민들의 민요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면, 초사는 전국시대부터 한대 초기까지의 귀족들에 의해 주로 창작되었다. 시경이 대부분 민중들의 일상 생활이나 보편적인 감정을 노래했다면, 초사는 개인의 낭만적인 열정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다. 시경이 현실적이라면, 초사는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초사 '이소'는 초나라 조정의 부패로 회왕에게 버림받고 경양왕에게 쫓겨나 정치적 실의에 빠진 굴원이 임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한을 빌어서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작품이다. 자신을 버린 임에 대한 애절한 원망과 동경을 환상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한 초사의 걸작이다. 정철은 임에게서 버림받고 죽기를 작정한 '이소'에서 선조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굴원의 처지에 공감했다. '이소' 같은 초사야말로 자신이 목놓아 부르고 싶었던 그런 노래였을 것이다. 그에게 이보다 더한 절창은 없었다. 그래서 정철은 굴원의 '이소'를 벤치마킹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던 것이다. '전후미인곡'은 곧 '조선의 이소'였던 것이다.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이후 연군의 정을 그린 가사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한국의 가사문학 연구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선조에 대한 맹목적인 찬미와 무조건적인 충성을 노래한 '전후미인곡'이 한국 가사문학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의 고전문학 자료가 많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사미인곡'과 '관동별곡'은 해독불가의 고어 때문에 고등학교 학생들을 몹시 괴롭혔던 가사이기도 하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은 '성산별곡'과 함께 '송강가사(松江歌辭)'에 실려 전한다.

정철은 '사미인곡'을 지은 뒤에 창평 대점의 객주집을 찾았다. 그는 풍류객답게 술자리에서 '사미인곡'을 지은 감회를 담아 '대점주석호운(大岾酒席呼韻)'이란 시를 한 수 읊었다.   


대점주석호운(大岾酒席呼韻)-대점 술자리에서 시운을 부르다(정철)


一曲長歌思美人(일곡장가사미인) 사미인곡 한 곡조 길게 부르고 나니

 此身雖老此心新(차신수노차심신) 몸은 비록 늙었지만 마음은 새로워라

 明年梅發窓前樹(명년매발창전수) 내년에도 창 앞에 매화꽃이 피거들랑

 折寄江南第一春(절기강남제일춘) 강남 첫 봄소식을 임께 꺾어 부치리다


'사미인곡'을 한 곡조 부르고 나서 정철은 마음이 한결 정화된 것을 느낀다. 그래서 마음도 새로와져 내년에 매화가 피면 강남 제일 봄소식을 임에게 꺾어 부치겠다고 다짐한다. 매화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다. 선조에 대한 일편단심 민들레의 노래다. 


대점은 지금의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한재마을이다. 정철은 대점의 객주집에서 거문고를 타며 이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거문고를 타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 정철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철은 무슨 일로 대점에 갔을까? 어쩌면 최기(崔棄)를 만나러 대점에 갔을지도 모른다. 


대점봉최희직기(大岾逢崔希稷棄)-대점에서 최희직 기를 만나다(정철)


山村酒初熟(산촌주초숙) 산마을에는 술이 갓 익어가는데

千里故人來(천리고인래) 천리 멀리서 고향 친구 찾아왔네

寸心論未盡(촌심논미진) 속 마음을 다 말하지도 못했는데

庭樹夕陽催(정수석양최) 뜨락 나무들은 지는 해 재촉하네

久病交遊廢(구병교유폐) 오랜 지병 있어 친구도 멀리하니

柴門風雪撞(시문풍설당) 사립문엔 비 바람만 때렸었다네

山家有盛事(산가유성사) 산 속 집안에도 좋은 일 있어서

歲晩酒盈缸(세만주영항) 세모의 항아리엔 술이 그득하네


멀리서 고향 친구가 찾아왔으니 얼마나 반가왔을까?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니 술이 빠질 수 없다. 술독엔 고향 친구와 회포를 풀고도 남을 만큼 술도 그득하다. 역시 애주가다운 시다. 


최기(崔棄)는 호가 희직(希稷)으로 한양에서 살았다. 그는 1538년(중종 33)에 태어났으니 정철보다 두 살 아래였다. 정철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연배다. 최기는 1570년(선조 3)의 식년시(式年試)에서 진사 3등 60위로 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