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무옥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고 숨어살던 안당의 증손자며느리 윤씨가 올린 상소로 안당과 세 아들, 손자 모두 신원 복권되다. 신사무옥 주동자 송사련 관작 삭탈되고, 서인의 모사꾼 송익필 4형제와 일가 70여 명 안당 가문 노비로 환천되다. 정여립의 대동계 진안의 천반산에 모여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하다. 조선 왕조의 무능과 관료들의 당쟁, 탐관오리들의 학정, 가뭄과 병충해로 인해 백성들 도탄에 빠지고,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이 널리 퍼지다. 정여립의 대동군 관군과 연합작전으로 남해 손죽도, 선산도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이이가 죽고 박순과 정철마저 벼슬에서 물러나자 서인들 위기의식을 느끼다. 성혼 혼미한 정국에 대비해 자지문(自誌文)을 짓다.
1586년(선조 19) 박순은 휴가를 받아 경기도 영평현(永平縣, 포천의 옛 지명)의 초정(椒井)에 목욕하러 갔다가 백운계(白雲溪)에 은거할 배견와(拜鵑窩)와 이양정(二養亭)을 지었다. 이때 그는 백운계, 청령담(淸泠潭), 토운상(吐雲床), 창옥병(蒼玉屛), 산금대(散衿臺), 청학대(靑鶴臺), 백학대(白鶴臺) 등의 이름을 지어 붙였다. 박순은 이듬해 사직 상소를 올리고 영평의 창옥병이 있는 영평천변의 마을(지금의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집을 짓고 은거하였다. 10월 조헌은 박순, 이이, 성혼과 함께 정철을 복권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박순 묘소, 옥병서원, 창옥병이 있는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마을
같은 해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멸문지화를 입고 숨어살던 안당의 증손자며느리 윤씨가 신원상소(伸寃上疏)를 올렸다. 안당의 후손들은 신원상소에서 '송익필의 진외증조모(할머니의 어머니) 중금은 속양(贖良)되지 않은 천인(賤人)이고, 할머니 감정은 안감정이 아니며, 안씨의 핏줄이 아닌 노비 중금의 전남편 소생'이라면서 '그 자손들은 당연히 안씨의 노비'라고 주장했다.
안당 집안의 문적 중 안당이 송사련과 그의 어머니 감정, 조모 중금을 속양시킨 문서로 4대에 걸쳐 내려온 송사련 가문의 양적(良籍)이 존재한다는 설도 있있다. 양적은 양인임을 나타내는 문서였다. 안당의 후손들은 은혜를 저버리고 안처겸 형제를 역모로 모함하여 신사무옥을 일으킴으로써 멸문지화를 입게 한 송사련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송씨 집안의 속양문서까지 모두 없애, 2대 이상 양역(良役)하면 노비를 면할 수 있다는 법 규정을 적용받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송익필 등 송사련의 후손도 맞상소하였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이와 성혼은 아비 송사련의 잘못을 아들 송익필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변호하였으나 동인들은 이를 계속해서 문제삼았다. 윤씨의 신원상소로 죽은 안당과 세 아들, 손자들이 모두 복권되었고, 안당에게는 정민(貞愍)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송사련은 안당 일가를 모함하여 멸문지화를 당하도록 몰고 갔다는 비난을 받았다. 송사련의 관작은 삭탈되었고, 송익필의 4형제와 일가 70여 명은 안씨네 노비로 환천(還賤)되었다. 송사련의 무덤은 안당의 후손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시신마저 크게 훼손당했다. 원한에 사무친 안씨 후손들의 피맺힌 복수를 피해 송사련의 후손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조헌은 송익필의 현명함을 들어 벼슬을 내려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선조는 들어주지 않았다.
송익필은 동인의 영수 이산해로부터 이이의 과오를 비판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송익필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산해가 시세와 결탁하여 음모를 꾸민다고 풍자하는 시를 지음으로써 이산해의 분노를 샀다. 조헌은 송익필을 옹호하면서 이산해의 비열함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문에 송익필은 이산해를 비난하는 상소의 배후 조종 인물로 지목을 받아 왕명으로 동생 송한필과 함께 구속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산해의 초상(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같은 해 정여립은 매달 보름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연평리와 진안군 동향면 성산리에 걸쳐 있는 천반산(天盤山, 647m)으로 대동계원들을 소집해서 무술과 군사훈련을 시켰다. 대동계원들은 평상시에 농사를 짓다가 매달 보름이 되면 천반산 정상에 '대동(大同)'이라고 쓴 깃발을 꽂아놓고 정여립의 지휘 아래 검술과 창술, 궁술 등을 단련했다.
진안 천반산
정여립은 주역으로 나라의 운세를 풀이해 본 결과 경인년(1590년)과 임진년(1592년)에 큰 난리가 일어나며, 이때 자신에게 대운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정여립의 아들 옥남(玉男)은 태어날 때부터 등에 '왕(王)'자 무늬를 띠고 있었고, 두 어깨에는 사마귀가 해와 달 형상으로 박혀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하고 담력이 커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여립은 아들 옥남이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 갈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고 굳게 믿었다. 옥남은 아버지로부터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들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1586년에 전라도와 황해도에 극심한 가뭄과 병충해로 인해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은 집을 떠나 거리를 떠돌며 걸식을 하거나 도적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북쪽 변경에는 여진족, 남쪽 해안에는 왜적이 침입하여 백성들은 도탄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무능한 선조와 당쟁에 혈안이 된 조정의 관료들, 학정과 착취를 일삼는 탐관오리들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정여립은 정보를 얻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광범위한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지함두와 의연, 도잠, 설청 등 참모들과 함께 황해도로 가 구월산(九月山) 등 여러 산들을 돌아보면서 민심을 살폈다. 조선 왕조에 대한 민심이 이반되면서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로 쓴 야사(野史)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정여립이 지었다는 오언율시 한 수가 실려 있다. 황해도에서 돌아오던 정여립이 충청도에 들러 계룡산(鷄龍山)을 구경하고 어느 폐암(廢庵)에서 지어 벽에 붙였다는 시다.
客行南國遍(객행남국편) 남쪽 나라 두루 돌아다녔더니
鷄岳眼初明(계악안초명) 계룡산에서 눈이 처음 밝도다
躍馬驚鞭勢(약마경편세) 뛰는 말이 채찍에 놀란 형세요
回龍顧祖形(회룡고조형) 용이 조산 돌아보는 형국일세
蔥蔥佳氣合(총총가기합) 아름다운 기운 다 모여 있고
藹藹瑞雲生(애애서운생) 상서로운 구름 피어나는도다
戊己開亨運(무기개형운) 무기년에 좋은 운수 열리리니
何難致太平(하난치태평) 태평세 이루기 뭐가 어려울꼬
'무(戊)'는 무자년(戊子年, 1588년), '기(己)'는 기축년(己丑年, 1589년)을 말한다. '何難致太平(하난치태평)'에서 난세를 평정하고 태평성세를 이루겠다는 포부를 읽을 수 있다.
같은 해 백인걸의 사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조감(趙堪)이 죽었다. 백인걸은 이이와 성혼의 스승이었다. 조감은 덕이 높아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의리를 중히 여겨 이이도 마음 속으로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정철은 '만조주부감자극기호옥천자(挽趙主簿堪字克己號玉川子)'를 지어 조감의 죽음을 애도했다.
만조주부감자극기호옥천자(挽趙主簿堪字克己號玉川子)
조주부 감 자 극기 호 옥천자를 위한 만시(정철)
白老溪翁故(백노계옹고) 휴암 선생과 우계옹 연고 있어
因之托契深(인지탁계심) 그 인연따라 깊이 사귀었다네
晩來情更厚(만래정갱후) 뒤늦게 정 더욱 두터워졌나니
吾過子能箴(오과자능잠) 내 허물 그대 능히 깨우쳤다네
聞說千年宅(문설천년택) 이야기 들으니 천년 유택이라
山重水復奇(산중수부기) 산 첩첩하고 물 더욱 기이하네
猶勝葬嬴博(유승장영박) 영박에 장사지냄보다 나으리니
况與栗翁隨(황여율옹수) 하물며 율곡 선생 함께 함에랴
조감의 자는 극기(克己), 호는 옥천자(玉川子), 벼슬은 주부(主簿)였다. '백노(白老)'는 조감의 장인 백인걸, '계옹(溪翁)' 우계 성혼을 가리킨다. '영박(嬴博)'은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지명이다. '예기(禮記)'에 연릉(延陵, 현 江苏省 武進縣)에 봉해진 계자(季子)가 제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큰 아들이 죽어 영박의 사이에다 장사지냈다고 한다. '율옹(栗翁)'은 율곡 이이를 가리킨다.
1587년(선조 20) 2월 왜구가 18척의 배를 이끌고 와서 전라도의 손죽도(損竹島, 지금의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와 선산도(仙山島, 지금의 완도군 청산면 청산도) 일대를 노략질하는 이른바 정해왜변(丁亥倭變)이 일어났다. 대규모로 침입한 왜구는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해안 지방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였으며, 수백 명의 백성들을 살육하거나 포로로 잡아갔다.
위기에 처한 각 지방의 수령들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남언경(南彦經)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남언경은 관군만으로는 왜구를 물리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정여립은 대동군을 이끌고 참전해서 관군과 연합작전으로 왜구를 물리쳤다. 이 전투로 인해 정여립의 대동계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손죽도와 선산도 전투로 미루어 볼 때 대동군의 군사력은 관군을 능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를 격퇴하고 돌아온 대동계원들은 일이 생길 때 다시 모일 것을 기약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 '정감록(鄭鑑錄)'의 참설(讖說)을 이용한 '목자는 망하고[木子(李)亡] 전읍은 흥한다.[奠邑(鄭)興]'는 동요가 세상에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곧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일어난다'는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이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정여립이 이 동요를 옥판(玉板)에 새겨 중 의연을 시켜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춰 두게 한 뒤, 우연히 이 산에 구경 갔다가 이것을 얻은 것처럼 꾸몄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여립은 대동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변숭복, 지함두, 의연 등을 각지로 보내 능력 있는 인물들을 포섭토록 하였다. 정여립도 정팔용과 길삼봉을 데리고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의 흐름을 살폈다.
1587년 3월 이귀는 정철을 복권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정철의 나이 52세였다. 서인의 중진 이이가 죽고, 서인의 영수 박순과 정철이 벼슬에서 물러나자 서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서인의 모사꾼 송익필마저 노비로 환천되자 서인들의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7월 성혼은 자신이 죽은 뒤에 성명이나 행적 등을 밝히는 자지문(自誌文)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성혼의 초상
자지문(自誌文) - 성혼
'성(成)은 성이고, 혼(渾)은 이름이며, 호원(浩原)은 자이고, 창녕(昌寧)은 본관이다. 아버지는 청송(聽松) 선생 휘 수침(守琛)이고,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며, 조고는 사숙공(思肅公) 휘 세순(世純)이고, 증조는 판서에 추증된 휘 충달(忠達)이며, 외조는 판관 휘 사원(士元)이다.
혼(渾)은 약관 시절에 병을 앓아 몸이 허약하고 정신이 어두웠는데, 이렇게 일생을 마쳤다. 어려서 가정에서 수학하였는데 언제나 옛사람들이 몸을 닦고 학문한 내용을 들으면 개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은미한 뜻을 깊이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끝내 얻지 못하였으며, 마음을 잡아 지키고 함양하여 허물과 죄악을 면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끝내 잡아 지키지 못한 채 병 때문에 스스로 폐하여 조금도 뜻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슬프다.
타고난 성품은 경박하여 착실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침착하고 굳세며 독실히 행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으나 또한 이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였으며, 기질(氣質)이 혼탁한 것이나 외물(外物)에 어지럽혀진 것에 이르러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또 남의 과실을 자주 지적하여 이 때문에 사람들이 대부분 꺼리고 싫어하였다.
30여 세에 천거로 참봉에 제수되고, 다음 해에 또다시 천거로 6품직에 올랐으며, 또 몇 년만에 천거로 대관(臺官)이 되었으나 모두 병 때문에 출사하지 않았다. 만력(萬曆) 경진년(1580, 선조13) 겨울에 특별히 소명(召命)을 내리셨는데, 말씀한 뜻이 융숭하고 간절하였다. 황공하여 사양하다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스스로 수레를 타고 서울에 왔다. 그리하여 신사년(1581, 선조14)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하였는데, 상이 대도(大道)의 요점을 물었다. 물러나와 만언(萬言)의 봉사(封事)를 올리니, 성상이 경연에 출입하라고 명하였는바, 이때 조정에서 대우하는 것이 매우 융숭하였다.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현자를 우대하는 예를 베풀 것을 많이 건의하여 예우가 특별하니, 혼(渾)은 더욱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사람들도 또한 속으로 비웃었다.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돌아왔다.
계미년(1583, 선조16) 여름 병조 참지로 부름을 받았는데, 다섯 번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혼은 다시 서울에 이르러, 군직(軍職)에 제수되고 또다시 이조 참의로 옮겼으며, 서반직(西班職)으로 보내진 것이 모두 다섯 차례였는데,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제수하는 명을 받든 지 며칠 만에 삼사(三司)에서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국정을 제멋대로 전횡하고 교만 방자하여 성상을 무시한다."고 논핵하였다. 이에 혼은 글을 올려 "이이가 충성을 다하는데 삼사에서 붕당을 일으켜 참소하는 말을 한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삼사에서는 혼이 사림(士林)을 일망타진한다고 탄핵하였으므로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이해 가을 다시 이조 참의로 불렀는데,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고, 다시 대궐에 나아가 네 번 사양하였으나 또다시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득이 봉직한 지 반달 만에 이조 참판으로 승진하였다. 또 다섯 번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병을 무릅쓰고 사은숙배하니, 마침내 부모에게 자신과 같은 관직이 추증되었다. 재직한 지 한 달 뒤에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 동지중추부사로 옮겼다가 갑신년(1584, 선조17) 7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조정에서 "혼이 외척의 간당(奸黨)으로 조정을 혼란하게 하고 나라를 그르친다."고 논핵하니, 조야(朝野)에서 소인(小人)이라고 지목하였는데 혹 소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이것이 벼슬을 얻어 나아가고 물러난 대략의 내용이다.
혼은 어려서부터 병을 앓았는데 신병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과거를 일삼지 않는다."고 말하고, 몸이 쇠약하여 벼슬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영화로운 벼슬을 사모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파산(坡山)에서 선영(先塋)의 여막을 지키고 있으면 사람들은 "은거하며 지조를 지킨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 있는 자들이 번갈아 천거하여 점점 올라가 우연으로 무릅쓰게 되어 높은 관직에 이르렀으나 사실은 한 번도 관직을 소유한 적이 없었고 한 가지도 제대로 직임을 맡은 적이 없었으니, 모두 타인에 의해 억지로 이름이 붙여져 마침내 이 때문에 세상의 화를 취하였다.
혼은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평생 동안 이름을 도둑질하여 국가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예로부터 신하가 은혜를 저버림이 누가 나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나의 죄가 크니,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너는 마땅히 나의 유지(遺旨)를 따라 국가에서 내리는 부의(賻儀)와 은수(恩數)를 사양하고 묘 앞에 ‘창녕 성혼묘(昌寧成渾墓)’라는 다섯 글자만을 써서 자손들로 하여금 묻힌 곳을 알게 하면 충분하다. 옛사람 중에 또한 묘 앞에 관직을 쓰지 말도록 명한 자가 있는데, 그는 깊은 뜻이 있어서였지만 나로 말하면 죄가 있으므로 스스로 폄하해서 성명만 쓰는 것이다. 일은 같으나 그 실제는 다르니, 옛사람에 견주어 함께 논할 수가 없다. 삼베옷을 입히고 종이 이불로 염습하여 소달구지에 싣고 돌아가 장례하여 나의 뜻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혼은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30)에 태어나 아무 해에 죽으니 향년이 약간인데, 청송(聽松) 선생의 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 혼은 스스로 이 글을 써서 광중(壙中)에 넣어 묘지(墓誌)로 삼게 하였다.
묘 앞에 작은 돌을 세워 ‘창녕 성혼묘’ 다섯 글자만을 새기고 돌의 후면에는 향리(鄕里)와 세계(世系), 사망한 날짜와 장례한 날짜 및 자손의 이름만을 간략히 써서 새기도록 하라.'
당시 조정은 동서당쟁으로 인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에 성혼은 미리 적은 자신의 유언을 광중(壙中)에 넣어 묘지(墓誌)로 삼게 했던 것이다.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13 (0) | 2017.07.20 |
---|---|
[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12 (0) | 2017.07.19 |
[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10 (0) | 2017.07.17 |
[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9 (0) | 2017.07.15 |
[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8 (0) | 2017.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