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여론에 밀려 네 번째 전라도 담양 창평으로 쫓기듯 내려가다. 정철 지금의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쌍교 증암천변의 동산에 죽록정을 중수하고 송강정이라 명하다.
1585년 정철은 한양에서 날아드는 비방을 피해 전라도 창평으로 낙향했다. 그의 네 번째 낙향이었다. 조선시대 창평현은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과 고서면, 대덕면, 남면, 수북면 일대에 있던 행정구역이었다. 정철은 창평의 죽록천변 동산 위에 있던 죽록정(竹綠亭)을 고쳐 짓고 우거했다. 죽록정은 선조 때 도문(道文)이라는 승려가 지은 아담한 정자였는데, 정철이 이를 인수하여 중수하고 송강정이라 명명했다.
도연명(陶淵明, 陶潛)이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와 술과 국화를 벗하며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던 것처럼 창평으로 내려온 정철은 '귀래(歸來)'를 읊었다.
귀래(歸來) - 돌아오다(정철)
歸來不必世相違(귀래불필세상위) 꼭 세상을 등지자고 돌아온 것이 아니어라
偶似陶公悟昨非(우사도공오작비) 도잠처럼 지난날의 잘못 깨달았기 때문이라
采采黃花聊取醉(채채황화료취취) 황국화를 실컷 따다가는 취하도록 즐기거늘
倒巾高詠鴈南歸(도건고영안남귀) 두건 벗고 남으로 온 기러기 소리 높여 읊네
'작비(昨非)'는 '귀거래사'의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에 나오는 말이다. 벼슬을 하겠다고 한 지난날의 결심은 잘못이고(昨非), 벼슬을 안 하겠다고 깨달은 지금은 옳다(今是)는 것이다. '황화(黃花)'는 황국화를 말한다. 국화와 술은 도연명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세상을 등지자고 창평에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도연명처럼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다. 이제라도 황국화주에 취해 두건도 벗은 채 남쪽으로 내려온 기러기를 소리 높여 시로 읊으며 귀거래 은자 도연명처럼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위자연을 즐기면서 살아가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귀양 가는 사람처럼 쫓기듯 내려온 창평에서 정철은 4년여 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정치적 재기를 꿈꿨다. 송강정에 걸려 있는 '숙송강정사(宿松江亭舍)', '망송강(望松江)', '증도문사(贈道文師)', '차사암운(次思菴韻)' 등의 시들은 이 무렵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담양 송강정의 '숙송강정사', '망송강', '증도문사', '차사암운' 편액
숙송강정사(宿松江亭舍)-송강정사에서 묵으며(정철)
借名三十載(차명삼십재) 이름만 빌려 준 지도 어언 서른 해
非主亦非賓(비주역비빈) 주인도 아니요 또한 손님도 아니네
茅茨纔蓋屋(모자재개옥) 띠풀 이어 겨우 지붕 덮어 씌워서
復作北歸人(부작북귀인) 다시 짓고 북쪽으로 가는 사람일 뿐
主人客共到(주인객공도) 주인과 손님 함께 정자에 이르니
暮角驚沙鷗(모각경사구) 석양 모래톱에 갈매기도 놀라더니
沙鷗送主客(사구송주객) 지금은 갈매기 주인과 객 배웅하러
還下水中洲(환하수중주) 물 가운데 모래톱 아래로 돌아오네
明月在空庭(명월재공정) 환한 달빛은 텅빈 뜰에 가득한데
主人何處去(주인하처거) 주인은 그 어느 곳으로 가셨을까?
落葉掩柴門(낙엽엄시문) 낙엽은 떨어져 사립문에 쌓이는데
風松夜深語(풍송야심어) 솔과 바람만 밤 깊도록 얘기하네
30년 동안 이름만 빌려줬으니 주인도 아니고 객도 아니다. 죽록정을 다시 고치고 잠시 머물다가 북으로 가는, 다시 말하면 한양으로 올라갈 사람일 뿐이다. 주인이자 객인 정철이 내려올 때는 갈매기도 놀라더니만 이젠 가라는 듯이 배웅하러 돌아온다. 갈매기도 시적 화자가 창평에 오래 머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혼자 있으니 빈 뜰에 달빛만 가득하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으니 사립문에 낙엽만 쌓이고, 솔과 바람만 이야기 상대가 되어 준다.
대사헌까지 지내다가 양사의 탄핵을 받고 쫓겨난 처지였기에 정철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정철의 처지가 외롭고 처량하기가 그지없다. 하지만 곧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할 것이기에 정철은 창평에 아예 머무를 생각이 없음이 은연 중에 드러난 시다.
망송강(望松江)-송강을 바라보며(정철)
歇馬坐松根(헐마좌송근) 말 세워놓고 솔뿌리에 앉으니
松江在眼底(송강재안저) 죽록천이 바로 눈 아래에 있네
幽樓計己定(유루계기정) 숨어서 살 계책은 내 정했으니
歲晩吾將去(세만오장거) 올해 안에는 내 꼭 떠나가리라
常願化爲魚(상원화위어) 강물의 물고기 되고 싶은 것은
潛於深水底(잠어심수저) 깊은 물에 헤엄치고 싶어서네
秋來夢澤間(추래몽택간) 가을이 오면 못에서 꿈을 꾸고
圉圉洋洋去(어어양양거) 어릿대다 천천히 생기 찾아가리
정철은 동인들에게 당쟁에서 밀려 창평에 내려와 잠시 은자로 살게 되었다. 죽록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숨어 사는 계책도 세워 놓았다. 잠시 창평에 숨어서 살고 있다 보면 선조가 곧 부를 것이기에 연말에는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리라는 의기양양한 확신에 차 있다.
정철은 자신의 심정을 처음에는 어릿어릿하다가 점차 생기를 찾아가는 물고기에 비유하고 있다. '어어양양(圉圉洋洋)'은 맹자(孟子)가 제자 만장(萬章)에게 '圉圉,困而未紓之貌. 洋洋,則稍縱矣. 攸然而逝者,自得而遠去也.'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시어다. '어어(圉圉)'는 물고기가 몸이 괴로워서 어릿어릿하는 모양을 말한다. 생기가 없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양양(洋洋)'은 물고기가 천천히 생기를 띠고 힘차게 꼬리를 흔드는 모양을 말한다.
정철은 '득기소(得其所)' 고사를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춘추시대 강대국인 초(楚)와 진(晉) 사이의 소국 정(鄭)나라에 자산(子産)이라는 뛰어난 재상이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자산에게 살아있는 물고기 한 마리를 선물로 보내왔다. 자산은 연못을 관리하는 하인에게 물고기를 건네주면서 연못에 놓아 기르도록 했다. 그러나 하인은 자산의 명을 어기고 그 물고기를 끓여먹고 와서는 '물고기를 놓아주니까 처음에는 어릿거리고 비실대더니 차츰 기운을 차리고는 꼬리를 치면서 연못 한가운데로 들어가 버렸습니다.'라고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 말을 곧이들은 자산은 흐믓한 표정을 지으며 '제자리로 갔구나, 제자리로 갔어(得其所哉 得其所哉)'라고 말했다. 자산을 속였다고 생각한 하인은 '자산이 지혜롭다고? 그도 별 수 없더군. 내가 물고기를 끓여 먹은 줄도 모르고 좋아하니 말이야.' 하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산에서 유래한 '득기소(得其所)'는 물고기가 물에서 놀아야 하듯이 인재도 능력과 적성에 꼭 맞는 자리에 앉혀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정철은 물을 만나지 못하고 삶아진 채 먹힌 물고기를 자신의 처지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증도문사(贈道文師)-도문선생에게 주다(정철)
小築新營竹綠亭(소축신영죽록정) 죽록정 정자를 자그맣게 새로 짓고서
松江水潔濯吾纓(송강수결탁오영) 송강 맑은 물에 내 갓 끈을 씻는다네
世間車馬都揮絶(세간거마도휘절) 세간의 거마일랑 모두 다 물리치고서
山月江風與爾評(산월강풍여이평) 강산의 풍월을 그대와 더불어 논하리
'도문사(道文師)'는 승려 '도문(道文)'을 가리킨다. 백광훈의 '옥봉집(玉峯集)' 상(上)에 실려 있는 시 '송도문상인(送道文上人)'에 등장하는 '도문'도 같은 사람인 듯하다. 백광훈은 정철과 함께 양응정의 문인이다.
새로 지은 죽록정에서 잠시 속세를 벗어나 도문과 함께 자연을 논하며 강산풍월을 벗삼아 유유자적 살아가겠다면서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입신양명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난 시다. 입신양명에의 의지는 '濯吾纓(탁오영)' 곧 '내 갓끈을 씻으리'에서 읽을 수 있다.
'濯吾纓(탁오영)'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초사(楚辭) '어부사(漁父詞)'에 나오는 구절이다. 초나라 좌도(左徒, 좌상) 벼슬에 있던 굴원은 뛰어난 기억력과 넓은 견문으로 역대의 치란(治亂)에 밝아 회왕(懷王)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상관대부(上官大夫) 늑상(勒尙)의 참소로 현명하지 못한 회왕은 굴원을 멀리하였다. 굴원은 회왕의 듣고 보는 것이 총명하지 않고, 참소와 아첨이 임금의 밝음을 가로막는 것을 근심하고 비통해하면서 장편의 시를 지어 그의 울분을 토로했다. 이 시가 저 유명한 굴원의 초사 '이소(離騷)'다.
'이소(離騷)'에 대해 후한(後漢)의 반고(班固)는 '이(離)'는 '이(罹)'와 같은 뜻으로 병이나 재앙에 걸린다는 뜻이고, '소(騷)'는 근심을 뜻하는 것이므로 '근심을 만난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후한의 왕일(王逸)은 '이(離)'는 이별의 뜻이므로 '이별을 근심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반고의 설이 유력한 설로 인정되고 있다.
장의(張儀)의 연횡책(連衡策)에 속아 진(秦)나라에 들어갔던 초 회왕이 객사한 뒤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 자란(子蘭)이 영윤(令尹, 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회왕을 죽게 한 장본인이었다. 자란을 비난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쓴 굴원은 기원전 292년 강남으로 유배되어 동정호(洞庭湖)에 이르렀다. 이때 쓴 것이 '어부사(漁父詞)'다.
동정호로 흘러드는 강변에서 어부가 초췌한 굴원에게 '초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지낸 사람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굴원은 '온 세상이 더러운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술에 취했는데 나 홀로 취하지 않아 이렇게 쫓겨났소.(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라며 탄식했다. 다시 어부가 '성인이란 자기 주장만 펴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변해 가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세상이 더럽다면 왜 함께 더러워지지 않고, 온 세상 사람이 취했다면 왜 함께 취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굴원은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의 먼지를 털어 쓰고,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털고 입는다 했소. 그러니 어느 누가 청결한 몸에 더러운 먼지를 그대로 받들고 있겠소. 차라리 장강에 몸을 던져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더러운 세상에 몸을 더럽히지는 않겠소.(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安能以身之察察 愛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라고 결연히 죽을 결심으로 대답했다.
어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는 노래를 부르면서 돛대를 올리고 떠나갔다. 세상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고 속세에서 벼슬을 해도 좋지만,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발을 닦고 속세를 떠나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라는 충고였다.
기원전 278년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초나라 수도 영(郢)을 함락시키고, 경양왕이 진(陳)으로 천도하자 크게 상심한 굴원은 자신의 울분과 백성들에 대한 동정심을 담아 '애영(哀郢)'이라는 시를 지었다. 이후 초나라가 끝없는 쇠락의 길로 빠져들자 절망한 굴원은 절명시(絶命詩) '회사(懷沙)'를 남기고, 음력으로 5월 5일경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 있는 상강(湘江)의 지류인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한국에서 음력 5월 5일은 4대 명절 중 하나인 단오절(端午節)이다. 옛날에는 이날 약초를 캐고 창포를 문에 꽂아두거나 창포물에 머리를 감기도 하며, 창포주나 약주를 마셔 재액을 예방했다. 쑥으로 인형이나 호랑이를 만들어 문에 거는 풍습도 있었고, 수리취를 넣어 둥근 절편도 만들어 먹었다. 그네뛰기나 씨름, 탈춤 등 다양한 민속놀이도 행해졌다.
중국에서는 이 날 찹쌀속에 대추를 넣어 푸른 식물잎에 싼 뒤 쪄서 만든 종자(粽子, Zongzi)를 나눠 먹고, 댓잎이나 갈잎에 싼 종자를 강과 바다에 던지면서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초나라 충신 굴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용선(龍船) 축제를 한다. 용선 축제는 초나라 사람들이 죽통(竹筒)에 쌀을 담아 강물에 던져서 교룡(蛟龍)이 그것을 대신 먹고 굴원의 시신은 해치지 말아 달라고 기원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날 때마다 선조가 다시 불러 조정에 나아갔던 정철은 이번에도 권력 투쟁에 밀려 창평으로 귀양 아닌 귀양을 온 것이라 잠시 속세를 떠나 자연과 벗하면서 지내고 있다 보면 금방 다시 불려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松江水潔濯吾纓(송강수결탁오영)'이라고 한 것이다. 갓끈을 씻고 선조가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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