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은 대사간 이발(李潑) 등 동인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정6품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기용되다. 정여립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하다.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 동인의 강경파 이발에게 수염을 뽑히다. 정여립 박순, 이이, 성혼을 비판하면서 서인의 공격 대상으로 떠오르다. 벼슬에서 물러나 전라도 진안 죽도로 낙향한 정여립 혁명적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부르짖다. 정여립과 대동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떠오르다. 서인의 거두 박순과 정철 벼슬길에서 밀려나다.
1585년(선조 18) 정월 16일 이이의 1주기가 돌아왔다. 우연하게도 정철의 스승 김인후와 절친 이이는 기일이 같은 날이었다. 정철은 '정월십육일작(正月十六日作)'이란 시를 읊어 스승과 절친을 추모했다.
정월십육일작(正月十六日作)-정월 16일에 짓다(정철)
湛老栗翁今日逝(담노율옹금일서) 오늘은 담재 율곡 선생 돌아가신 날
從前食素老難能(종전식소노난능) 전부터 소반이니 늙어도 이겨내겠지
出處各應殊霽潦(출처각응수제료) 나온 곳 장마와 갠 날처럼 다르지만
衿懷均是一條冰(금회균시일조빙) 옷깃에 품은 건 똑같이 한 조각 얼음
이 시에는 '自註今日, 乃河西栗谷諱日(스스로 주를 달기를, 오늘은 바로 하서와 율곡의 휘일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담노(湛老)'는 담재(湛齋) 김인후, '율옹(栗翁)'은 율곡(栗谷) 이이를 가리킨다. 스승에게 '노(老)', 동갑내기에게 '옹(翁)'을 붙인 것은 존경의 뜻이다. '식소(食素)'는 고기나 생선이 섞이지 않은 반찬(尸位素餐)이다. 예전에는 제사 때 소반(素飯)을 먹었다. '제료(霽潦)'는 '제행료지(霽行潦止)'의 준말이다. '비가 개면 움직이고 비가 오면 머문다.'의 뜻으로 각기 형편에 맞게 행함을 이른다.
같은 달 선조는 성혼을 찬집청 당상으로 불렀으나 그는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3월 50살의 정철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로 옮겨 갔다. 4월 그는 동인들로부터 논핵을 당했으나 선조의 비호로 위기를 면했다. 같은 달 박순, 정철, 성혼, 이이 등 서인들에 대한 공격이 날로 거세지고 있을 때 정여립은 대사간 이발(李潑) 등 동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정6품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다시 기용되었다.
정여립이 이조 전랑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하여 무산된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본래 서인이었던 정여립은 집권 동인이 되어 서인의 영수 박순과 서인의 이이, 성혼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정여립이 동인으로 돌아선 것은 직선적이고 강직한 그의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과 잘 어울린 탓도 있었다. 이발은 심의겸, 박순, 송익필, 이항복(李恒福) 등 서인의 주요 인물들을 탄핵한 바 있는 동인의 강경파였다.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점점 치열해지던 어느 날 술자리에서 동인의 강경파 이발과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이 술에 취해 멱살을 잡고 싸움을 벌이다가 이발이 정철의 수염을 뽑아 버린 일이 일어났다. 아닌 밤중에 수염을 뽑힌 정철은 '차증이발(次贈李潑)'이란 시를 지어 가슴 속 깊이 새겼다.
차증이발(次贈李潑)-차운하여 이발에게 주다(정철)
綠楊官北馬蹄驕(녹양관북마제교) 푸른 버들 관북의 말발굽은 요란한데
客枕無人伴寂寥(객침무인반적료) 손님 방에는 사람 없어 적요만 감도네
數箇長髥君拉去(수개장염군랍거) 서너 올의 긴 수염을 그대가 뽑아가니
老夫風采便蕭條(노부풍채변소조) 늙은이의 풍채 쓸쓸하기 짝이 없어라
이발은 정철보다 나이가 8살이나 어렸다. 벼슬도 정철은 판돈령부사로 종1품, 이발은 대사간으로 정3품이었다. 나이도 어리고 벼슬도 아래인 이발에게 수염을 뽑혔으니 정철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사람 없는 방으로 대비되는 소수파의 불리한 상황이 암시되고, 수염이 뽑히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 뒤의 씁쓸한 심사를 희화화한 시다. '관북(官北)'은 관아의 북쪽, 또는 읍성의 북문이다.
정여립은 선조가 참석한 경연에서 박순은 간사한 무리들의 괴수이고, 이이는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며, 성혼은 간사한 무리들의 편을 드는 상소를 올려 임금을 기망하였다고 비판했다. 정여립은 또 박순의 고향 호남, 이이가 살던 해서 지방 유생들의 상소는 모두 두 사람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공론이라고 할 수가 없다고 상주했다.
이이를 비판한 문제로 정여립은 서인들의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경연에서 죽은 이이를 공격한 것에 대해 의주 목사 서익(徐益)은 ‘정여립이 생전에 이이를 성인으로 칭하였다가 이제 나라를 잘못 이끈 소인으로 매도하는 것은 스승을 배신한 처사’라며 상소했고, 이이와 성혼의 문도들이 주축을 이룬 서인들도 정여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했다. 서인들은 정여립을 ‘스승을 배반할 정도로 행동의 앞뒤가 의심스럽고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매도했다.
진안 죽도와 천반산
서인들의 공격에 대해 정여립은 이이와의 사제 관계를 부인하면서 '이이 생전에 이미 그와 절교하였다'고 반박했다. 이이(1537년생)와 정여립(1546년생)은 나이차가 10여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고, 이이에게 보낸 서신에도 '존형'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어 두 사람은 사제 관계라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선조는 서인의 편을 들어 정여립을 ‘송나라 형노같은 인물’이라고 비난했고, 결국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수동리 내송마을 죽도(竹島)로 돌아갔다. 이후 이발 등이 정여립을 계속 천거했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정에서 멀리 물러나 있었지만 정여립은 조정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부제학 김우옹 등 동인들과 계속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 관료들의 인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여전히 동인들 사이에 신망이 깊고 영향력이 커서 전라 감사나 진안 현감 등 지방 수령들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다. 그는 특히 전라도 일대에서 명망이 높았다. 사림에서도 정여립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그와 교류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는 어느덧 전라도 인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정여립은 노자와 장자, 주역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탕왕(湯王)이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내쫓고,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내쫓은 역성혁명이 하늘에 순응하고 백성들의 뜻에 부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오는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요, 천하의 천하다.'라는 말에 공감하고, 조선왕조 전제정권 체제에서는 감히 꿈꾸기조차 힘든 '천하는 공물(公物)'임을 주장했다. 이른바 정여립의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이었다. 정여립의 천하공물설에는 민주주의 사상의 싹이 담겨 있었다.
정여립 상상화
정여립은 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王蠋)이 한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柳下惠)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맹자(孟子)는 제선왕(齊宣王)과 양혜왕(梁惠王)에게 왕도를 하도록 권했는데 이들은 성현이 아닌가?', '인생천지간에 누구나 천자가 될 수 있다.'는 혁명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정여립의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이었다. 그는 전제왕조정권 시대에 왕권의 세습과 독점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다. 이처럼 정여립은 백성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시대를 앞서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정여립은 진안의 죽도에서 동인들과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향촌에 있는 후진세력들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정여립은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해 갔다. 이때부터 추종자들은 그를 '죽도선생(竹島先生)'이라고 불렀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정여립의 휘하로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큰 세력을 형성했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일명 변범)과 조구(趙球), 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는 학식과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운봉(雲峰)의 의연(義衍), 도잠(道潛), 설청(雪淸) 등은 승려들이었다. 정팔용(鄭八龍)과 길삼봉(吉三峯)은 무술이 출중했다. 대동계는 신분과 직위에 차별을 두지 않고 계원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당시 조선 왕조정권에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하층민으로서 신분 차별을 받던 서얼, 억불정책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많이 참여했다. 이들은 정여립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면서 그와 함께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다.
당시 조정은 동서로 분당되어 당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관료들끼리 서로 모함하고 비난하면서 국정을 소홀히 한 탓에 탐관오리들이 들끓고 국가재정도 고갈됐다. 게다가 흉년이 계속되어 굶어죽은 시체가 들녘에 널려 있었고, 곳곳에서 굶주린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민란을 일으키는 등 나라 정세가 어수선했다. 또 북쪽 변경에서는 여진족들이 자주 침범하여 소란스러웠고, 남쪽 해안 지방에는 왜구들이 출몰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탐과오리들의 학정과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새로운 인물의 출현과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꿈꾸게 되었다.
1585년 5월 성혼은 선조가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을 때도 나가지 않았다. 8월 동인들로부터 조정에 파당을 만들어 국정을 그르치려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목된 정철은 사간원과 사헌부의 논핵을 당한 뒤 마침내 그와 가까이 지내던 인물들과 함께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서인의 영수 박순도 정여립의 논핵을 받고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가 된 성혼은 동인들의 계속되는 공격을 받고 자신을 스스로 탄핵하는 자핵상소(自劾上疏)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무렵 정철은 병이 나서 한양의 서호(西湖)에 머물면서 칠언율시 '서호병중억율곡(西湖病中憶栗谷)'을 지었다. 서호는 마포(麻浦)에서 서강(西江)에 이르는 강안 지역을 말한다. '병중서회(病中書懷)'도 이 무렵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담양 송강정의 '서호병중억율곡(西湖病中憶栗谷)' 편액
서호병중억율곡(西湖病中憶栗谷)-서호의 병중에 율곡을 그리다(정철)
經旬一疾臥江干(경순일질와강간) 병이 들어 열흘이나 강가에 누었더니
天宇淸霜萬木殘(천우청상만목잔) 하늘의 찬 서리에 나무숲도 처량하네
秋月逈添江水白(추월형첨강수백) 가을 달은 유난히 강물에 밝게 비치고
暮雲高幷玉峯寒(모운고병옥봉한) 저녁 구름 높이 떠 옥녀봉도 쓸쓸하네
自然感舊頻揮涕(자연감구빈휘체) 옛 감회에 하염없이 눈물 자주 씻으며
爲是懷人獨倚闌(위시회인독의란) 그리운 사람 생각에 홀로 난간 기댔네
霞鶩未應今古異(하목미응금고이) 석양의 따오기는 예나 지금 다를까만
此來贏得客心酸(차래영득객심산) 이 몸 나그네 신세 더욱 처량만 하구나
君恩未報鬢先秋(군은미보빈선추) 임금의 은혜 갚기도 전에 머리 세서
壯志如今已謬悠(장지여금이류유) 장한 뜻 지금에는 이미 글러버렸다네
松菊每懷陶令徑(송국매회도령경) 매번 도연명의 솔국길을 생각하나니
蓴鱸欲問季鷹舟(순로욕문계응주) 장계응의 배를 타고 순로를 묻고 싶네
交遊隔世吾何托(교유격세오하탁) 사귐도 막혔으니 그 누구를 의지하리
名利驚心可以休(명리경심가이휴) 명리에 놀란 마음을 쉴 수나 있으려나
惟是槽頭看春酒(유시조두간춘주) 오직 항정살에 봄술을 맛보고 싶을 뿐
月中三峽細分流(월중삼협세분유) 달빛 속에 세 골짜기 가늘게 흐르네라
이이는 정철에게 있어 가장 절친한 벗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또,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런 이이가 1584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정철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쟁에서도 패배하여 밀려나고 병까지 얻었으니 먼저 간 백년지기 이이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이이와의 옛 추억에 눈물을 흘리면서 쓴 시다. 이 시를 집자(集字)한 정홍명(鄭弘溟)은 정철의 넷째 아들이다. 정홍명은 송익필, 성혼, 김장생의 문인으로 대제학까지 지냈다.
'도령(陶令)'은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그가 팽택령(彭澤令)을 지냈기 때문에 '도령'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순로(蓴鱸)'의 '순(蓴)'은 순채로 끓인 국, '로(鱸)'는 농어회다. 전하여 고향이 그리워 벼슬을 버리고 돌아감을 뜻한다. '계응(季鷹)'은 진(晉)나라 장한(張翰)의 자다. '계응주(季鷹舟)'는 장한이 대사마 동조연(大司馬東曹掾)으로 있다가 고향 강동(江東)의 순채나물과 농어회가 그립다는 구실로 벼슬을 그만두고 배를 타고 돌아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송익필의 동생 송한필의 자도 계응이다. '조두(槽頭)'는 '저조두육(猪槽頭肉)'의 준말로 '돼지 목덜미살(항정살)'이다. '조두'는 중국어에서 구유다. '조(槽)'는 술독이다. '춘주(春酒)'는 청명(淸明)이 든 무렵에 담근 술, 정월의 세 해일(亥日)에 담가 익힌 술이다. 중국어에서는 신년 축하주, 봄철에 담가 겨울철에 익는 술의 뜻이다.
병중서회(病中書懷)-병 중에 회포를 적다(정철)
家懷湘楚靑山遠(가회상초청산원) 집 생각에 저 남쪽 푸른 산은 멀고
身繫安危白髮長(신계안위백발장) 안위에 몸이 매여 흰 머리만 늘었네
每到五更愁未睡(매도오경수미수) 매번 새벽마다 시름으로 잠 못 들고
臥看明月下西廓(와간명월하서곽) 서쪽 행랑에 누워 밝은 달을 보나니
'상초(湘楚)'는 상남(湘南)이라고도 한다. 옛 초나라, 지금의 후난성(湖南省) 지역을 말한다. 후베이성(湖北省)은 형초(荆楚)라고 한다. 정철이 오래 머물렀던 담양 창평이 남쪽에 있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대사헌에서 물러난 정철은 경기도 고양의 신원으로 가서 머물렀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의 한양에서 자신을 비방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신원을 떠나 처가가 있는 전라도 창평으로 내려가려고 결심했다. 송강정에 걸려 있는 판액에 새겨진 '신원산거기시습재(新院山居寄示習齋)'라는 제목의 칠언율시는 이때 지은 것이다.
담양 송강정의 '신원산거기시습재(新院山居寄示習齋)' 편액
신원산거기시습재(新院山居寄示習齋)
신원 산에 있으면서 습재에게 부치다(정철)
邇來門徑謝鉏荒(이래문경사서황) 요사인 문 앞 길을 쓸지도 않았나니
爲是輪躋異洛陽(위시륜제이낙양) 거마 왕래 잦은 낙양과 다르고 말고
借問山中半日睡(차문산중반일수) 묻거니와 산 속에서의 반나절 잠이
何如陌上一生忙(하여맥상일생망) 한평생 길 위에서 바쁨과 어떠한가
墻根樹密身逃暑(장근수밀신도서) 담 밑엔 나무 우거져 더위를 피하고
石竇泉寒齒挾霜(석두천한치협상) 석간수는 차디 차서 이에 서리 낀 듯
時把桑麻話田父(시파상마화전부) 이따금 농부의 농사 짓는 이야기에
不知西嶺已頹光(불지서령이퇴광) 서산에 이미 해 진 줄도 몰랐네 그려
每憶松江舊業荒(매억송강구업황) 늘 창평 옛 집이 황폐해감을 생각하면
鍛鑪中散離山陽(단로중산리산양) 대장장이 혜강이 산양 떠났을 때 같아
消殘物外煙霞想(소잔물외연하상) 속세 떠나 은거하려는 생각 사라지고
辦得人間卯酉忙(판득인간묘유망) 여느 관원들처럼 출퇴근하느라 바빴지
一歲九遷都夢寐(일세구천도몽매) 꿈결처럼 한 해에 아홉 번이나 옮겼고
修門重入幾星霜(수문중입기성상) 대궐에 다시 들어가선 몇 해 보냈던가
舂糧更適南州遠(용량갱적남주원) 다시 남쪽 멀리 가려 양식 찧어놓으니
宣政無由覲耿光(선정무유근경광) 조정에서 성상 뵈올 길이 없구만 그려
'송강집(松江集)' 1권에는 '신원산거기시습재권공명벽(新院山居寄示習齋權公名擘)'이란 제목의 시 2수가 실려 있고, 송강정에 판각되어 있는 시는 두 번째 시다. 이 시는 정철이 신원에 머물 때 친하게 지내던 권벽(權擘)에게 보낸 시다. 권벽도 정철처럼 서인의 강경파였다.
첫 번째 시는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한가하고 여유롭게 지내는 자신의 근황을 권벽에게 알려주는 내용이다. 두 번째 시에는 동인과 사헌부, 사간원 양사의 압박을 받고 남도 창평으로 떠날 수 밖에 없는 정황이 드러나 있다. 이 시는 창평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쓴 것으로 보인다.
'낙양(洛陽)'은 중국 고대 주(周)나라로부터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수도였다. 여기서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가리킨다. '단로(鍛鑪)는 연금술사, '중산(中散)'은 위(魏)나라의 중산대부(中散大夫) 혜강(嵇康)을 가리킨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그는 허난성(河南省) 산양현(山陽縣) 그의 집 근처 대나무 숲에서 산도(山濤), 상수(向秀), 완적(阮籍), 완함(阮咸), 왕융(王戎), 유령(劉伶) 등 6명의 유명한 친구들과 어울려 바둑과 춤, 시와 술 등을 즐기면서 연금술사로 세월을 보냈다. 이들이 바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다. '산양(山陽)'은 죽림칠현이 모여서 노닐던 혜강의 우거(寓居)를 말한다. 인습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유명했던 혜강은 귀공자 종회(鍾會)를 무례하게 대함으로써 그의 분노를 사 결국 반란죄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이때 3천 명이 넘는 혜강의 제자들이 스승 대신 죽기를 자청했다고 한다.
'묘유(卯酉)'는 옛날 관리들의 출퇴근 시간을 말한다. 조선의 문무 관리들은 아침 묘시(아침 5~7시)에 출근하여 저녁 유시(오후 5~7시)에 퇴근하도록 되어 있었다. '용량(舂糧)'은 '장자(莊子)' 내편(內篇) 소요유(逍遙遊)에 '適百里者宿舂糧 適千里者三月聚糧(백 리 길을 가려는 사람은 전날 밤부터 양식을 찧고, 천 리 길을 떠나는 사람은 석 달 동안 식량을 모으는 법이다.'에 나오는 말이다. 정철이 남도 창평으로 먼 길을 떠나려고 결심했기에 '용량'이란 말을 쓴 것이다.
'신원산거기시습재(新院山居寄示習齋)'란 제목의 시가 또 한 수 있다. 이 시에는 '習齋權擘號官參議(습재는 권벽의 호, 벼슬은 참의)'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신원산거기시습재(新院山居寄示習齋)
신원 산에 있으면서 습재에게 부치다(정철)
野院蕭條草樹荒(야원소조초수황) 시골집 쓸쓸하여 초목도 황량한데
亂蛙無數叫斜陽(난와무수규사양) 저물녘 개구리떼 울음도 요란하네
臨岐更覺親朋少(임기갱각친붕소) 갈림길 이르러 벗 적음을 깼닫노니
感物偏傷節序忙(감물편상절서망) 세월의 흐름이 하도 빨라 슬프구나
身厭葛衫凉換暑(신염갈삼령환서) 갈삼이 싫어지니 더위 서늘해지고
面慙銅鏡髮垂霜(면참동경발수상) 거울 속 서리맞은 머리털 부끄럽네
龍泉尙有干霄氣(용천상유간소기) 용천검은 아직 하늘 찌를 기운있어
匣裏時時見紫光(갑리시시견자광) 갑 속에 때때로 붉은빛이 보이누나
서인의 강경파였기 때문일까? 정철에게는 벗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권벽은 서인의 강경파였으니 정철과 마음이 잘 맞았을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세상을 평정할 뜻이 있지만 그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안타까와하고 있다.
권벽은 당대 최고의 시인 권필(權韠)의 아버지였고, 권필은 정철의 문인이었다. 권벽은 지기인 안명세(安名世), 윤결(尹潔) 등 청류의 선비 두 사람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모든 교유를 끊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그는 한시에도 능했다. 권필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술과 시를 즐기며 자유분방한 일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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